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50화 (250/401)

라스트 댄스 (4)

"다음 100m 준준결승 참가자들 준비해 주세요."

"마하야. 아무튼, 일단은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시합에 집중 해라. 알았지?"

"네. 교수님. 걱정 마세요."

대기 줄에 서 있었다.

처음 뵙는 분들도 있고 간혹 대회에서 마주쳤던 얼굴도 있다.

다들 반기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고 악수를 부탁하며, 스키 잘봤다는 축하도 받았다.

"예. 고맙습니다..."

인기와 명예. 그런 것들에 부끄럽지 않게 내 나름 책임감을 가지고 움직여 왔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돌아오니 가슴에 상처가 남는 것 같다.

[3번 레인. 연세 대학교. 구마하]

이름이 호명되자 많지 않은 관중들이 박수를 쳐 줬다.

필드나 트랙 한쪽에서 다른 경기를 하던 선수들도 시합을 멈추고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세상의 주목을 받는 놈이다.

이제 선발전을 마치고 결과가 나오면 호감 어린 시선은 비난으로 바뀌겠지...

혼자 꿩 먹고 알 처먹고. 지가 대표 팀 감독하고 지가 선수하고...

구마하는 지 잘난 맛에 혼자 다 하는 놈이라는 구설수가 돌 게 뻔하다.

인터넷은 원래 별소리를 다 떠드는 세상이니까.

빌어먹을 박문기... 이렇게 엿을 먹이냐...

웬만해선 경기를 앞두고 마음 심란해질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 정도 빅엿을 먹으니 아무리 나래도 제 실력이 발휘되지 않았다.

10.02.

준준결승은 통과하는 기록이지만... 허우...

"헉. 헉. 마하 씨? 설마 일부러 살살 뛴 거 아니죠?"

"네? 아니요. 제가 왜..."

"그래도 구마하 선수치고는 조금 늦은 거 같아서."

"...저라고 늘 베스트 기록 낼 수 있나요."

처음으로 이기는 게 부담스럽다고 느껴졌다.

아시아 사람들만 참가하는 대회라곤 하지만, 아시안 게임은 세계적인 무대다.

모두가 큰 무대에서 경험을 쌓고 싶을 것이다.

나의 승리가 사람들의 꿈을 짓밟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트랙이 무서워지고 있었다...

* * *

"지성아. 구마하 선수 컨디션 안 좋아?"

"무슨 소리세요 선배님. 10.02가 적은 기록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난 저 사람 예선 아니고 10초 뛰는 거 처음 봐서."

"맞어. 심지어 2차 예선 때는 9.8이었어."

"잠깐 뭐가 꼬였나 보죠. 마하 형도 사람인데."

일찌감치 시합을 마친 권지성이 팀 동료들과 구마하의 시합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한체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이 많아 보인다.

"어떤 성격이야?"

"누구요? 마하 형이요?"

"어. 들리는 말론 사람 재밌다고 하던데."

"하하~! 직접 가서 물어보세요. 선배님도 모르는 얼굴 아니잖아요."

"에이. 작년 체전 때 한번 뛰어 본 걸로 아는 척하기는..."

"저 말고 진운이 형한테 물어보시든가요. 거기는 친구니까. 전 뭐 그냥 형들이랑 같이 운동한 게 다죠."

사람들은 구마하가 10.02를 냈다고 컨디션이 떨어진 거 아니냐 호들갑이다.

그 외 다양한 것들을 알고자 주변을 귀찮게 하고 있다.

무슨 운동 하느냐. 차는 뭐 타냐. 성격은 어떻냐. 옷은 어떻게 입고 다니냐.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말 말 그대로 육상계의 대스타가 아닐까 싶다.

"그냥 많이 먹고 많이 뛰고. 사람은 평범해요."

"정말? 식단 관리 안 해?"

"먹은 만큼 운동을 하죠."

"역시 운동은 단순 무식해야 돼..."

"하하하~! 그게 진리죠."

권지성은 선발전의 흐름을 돌이켜 본다.

아마도 마하 형이 100m, 200m. 최근 시작한 400까진 무난하게 우승을 차지하겠지. 클래스는 무시할 수 없으니까.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선수 앞에 시합은 긴장감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쪽에서 1년 선배 김진운이 나타나 그를 부른다.

"선배님 잠시만요. 저 잠깐."

"어. 다녀와."

권지성이 김진운에게 다가가 묻는다.

"형 왜 내려왔어. 오늘 시합 없잖아?"

"어. 야. 마하가 다들 좀 모이라는데?"

"마하 형이? 왜?"

"몰라. 애들끼리 경기 보고 있는데, 문자가 와서. 다들 시간 되면 모이라고."

"흠. 뭐 할 얘기 있나?"

이동민만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고, 김진수나 권지성 그리고 김진운은 시간이 비어 구마하를 찾아갔다.

세 사람은 약속된 장소에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그를 보았다.

"야... 너 왜 그래?"

"...왔냐."

"형. 뭐야. 진짜 어디 안 좋아요...?"

구마하는 친구들을 힘 없이 돌아보며 말했다.

"얘들아... 나 그냥 기권할까?"

"갑자기 왜? 뭔데? 어디 아퍼?"

"너 진짜 어디 다쳤어?"

"하아... 씨발..."

"마하 형. 천천히 얘기해 봐요. 갑자기 왜 그래요?"

다들 선발전의 이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여기서 좋은 실력을 보여도 아시안 게임에 가는 TO가 적다는 걸 알게 된다.

"정말로... 한 명만 뽑는데?"

"야. 그런 게 어딨어!? 후보도 있고. 셋 넷은 늘 종목별로 갔는데."

"그러니까요. 올림픽도 아니고. 아시안 게임에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구마하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 때문이겠지..."

"왜? 니가 뭘 어쨌는데?"

"설마. 그런 개인적인 이유로 이런 짓을 한다고? 이 많은 선수들을 불러 놓고?"

"...나도 존나 유치하다곤 생각하는데."

평상시 조용하던 김진운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며 분개했다.

"웃기지 말라 그래! 여기 잠실이야! 잠실에 이 많은 사람들 불러 놓고 뭔 한 사람만 데리고 간다 만다 그런 게 어딨어!!!"

"나도 돌겠다... 노력한 사람들은 뭐가 되라고..."

모두가 승자를 꿈꾸는 사회. 하지만 누군간 메달이나 대회가 아닌 태릉을 들어가는 것이 목표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보통은 태릉까진 다수를 선별하고, 거기서 다시 한번 더 집중하여 최종 선발을 거치는 식으로 대표 팀을 운영한다.

박문기는 그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고 메달을 가져올 단 한 사람만 뽑겠단다.

연맹의 방침을 비난할 순 없다.

그것은 가장 합리적인 사고 끝에 나온 결론이고, 이 나라 체육계는 늘 그런 배경으로 운영되어 왔으니까.

"그래서?"

"마하는 지금 멘탈 나갔고."

"진운이 형도 화 내면서 집에 갔어요."

"진운이야 어차피 내일 경기니까 가도 그만이지만..."

시합을 마친 이동민도 김진수와 권지성에게 상황을 전달받았다.

"한 사람이라고?"

"응..."

"씨발 존나 황당하네..."

"난 마하 형 이야기 듣는데, 그럼 계주는 어떻게 한다는 거지 싶었어요."

계주 한 팀을 만들기 위해선 단거리 베스트 네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네 사람도 혹시나 모를 부상과 컨디션 저하를 생각해 일곱에서 여덟 명은 뽑아 경쟁을 시켜 왔다.

"안 한다는 뜻이겠지..."

"지금까지 메달을 못 땄으니까...? 그런 건가요?"

"그렇지 뭐."

"...우리가 가져올 수 있었는데."

김진수와 권지성도 착잡한 마음에 고개를 떨궜다.

두 사람을 보면서 막 시합을 마친 이동민이 묻는다.

"너네 시간 있냐?"

"어. 조금. 왜?"

"형. 설마 연맹 가서 물어보려고요?"

"아니. 나 몸 푸는 것 좀 도와 달라고."

이동민은 수건을 들어 온몸의 땀을 벅벅 닦아 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방금 시합 마친 놈이 몸을 또 풀어?"

"어. 난 계속 쉬지 않고 열을 내줘야 돼. 한가하면 나 스트레칭좀 도와주라."

권지성이 이동민을 보며 묻는다.

"형. 계속하려고요...?"

"당연하지. 야 씨발 이런 기회가 어딨어."

"동민아. 이게 무슨 기회가 돼?"

"구마하 멘탈 나갔다며. 개새끼 오늘 뒤졌어."

"야."

"하늘이 나에게 찬스를 주시는구나. 새끼 처음 전주 왔을 때 어찌나 깐족대던지. 두고 봐라. 오늘 내가 구마하 잡는다."

권지성은 이동민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다.

누가 봐도 젤 친한 사람이라고 봤는데, 알고 보니 뒤통수를 노리고 있었다니...

하지만, 김진수는 이동민의 말속에 담긴 진의를 알아챈다.

"그래. 오늘이 기회구나."

"...진수 형?"

"그렇지. 오늘이지."

"야. 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가서 몸 식지 않게 계속 풀어야 겠다."

"아이 씨. 도와준다며?"

"웃기지 마. 니만 이기고 싶냐? TO는 하나라고."

김진수도 서둘러 팀으로 돌아간다.

권지성은 형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짜로 이기려고요?"

"그럼! 이겨야지."

"..."

"너도 이겨야 돼."

"마하 형을 어떻게 이겨요... 기록이 다른데."

"우리가 이겨 줘야 돼. 그래야 된다 지성아. 훅!! 후욱!!"

"동민이 형.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죠?"

"진심. 완전 개진심!! 존나 씨빨! 내 생에 이보다 더한 진심은 없다! 훅 후욱!"

"형. 난 잘 이해가 안 돼요..."

이동민이 제자리 점프를 시작하며 말했다.

"훅. 훅! 지성아. 하나만 뽑으면 당연히 그건 마하가 되겠지? 적어도 단거리에서만큼은?"

"그렇겠죠. 중거리는 진운이 형이 가고."

"그래. 그럼 마하 혼자 모든 비난을 받는다."

"..."

"이겨 줘야 돼. 그 새끼 혼자만 모든 짐을 짊어질 순 없어. 선발전이 어떻게 열렸는데."

권지성도 형들의 마음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뜻으로."

"그래. 이기자. 반드시. 할 수 있다!"

"쉽지 않은 경기가 되겠네요."

"씨발 언제는 쉬웠냐?"

"하긴. 그 말도 맞네요."

"야. 훅! 후욱! 너 나 안 도와줄 거면 가서 마하한테 얘기나 좀 전해라."

"뭐라고요?"

"만에 하나 봐준다거나. 기권하거나. 그런 좆같은 생각하고 있으면 존나 맞을 줄 알라고."

"후후. 오케이."

권지성은 연세대를 찾아가 구마하를 만났다.

이동민과 김진수의 상황을 전달해 주자 구마하도 벙찐듯 고개를 들어 올린다.

"...애들이 그래?"

"네. 봐주거나 기권하면 형 팬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오늘 반드시 형 잡는다고 그러고."

"미친놈. 누가 누구한테 맞는다고..."

"동민이 형은 진심으로 보였어요. 몸이 막 후끈후끈하던데?"

이야기를 마친 권지성도 씩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시합을 준비하러 돌아가는데, 구마하가 그를 불러 세운다.

"지성아."

"네."

"진심으로 달릴게. 이겨라. 꼭."

"물론이죠. 생각해 보면 이런 기회가 잘 없긴 해."

"이 새끼들..."

"형도 지고 변명하지 마요."

함께 싸워 주는 동료들 덕분에 구마하는 겨우 마음을 붙잡을 수 있었다.

선발전이 어떻든 티켓이 한 장만 주어지든. 당장은 시합이 우선이었다.

잠시의 휴식 시간이 흐르고, 준결승이 시작된다.

1조에 이동민과 권지성. 2조에 김진수와 구마하가 배치되었다.

"마하한테 얘기했냐?"

"네. 지고 변명하지 말라고."

"하하! 새끼. 잘했다."

앞뒤 조로 나뉘어 대기 중. 이동민이 다음 출전 선수들과 모여있는 구마하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인다.

"야! 어이! 너!"

난데없는 부름에 구마하를 비롯 주변 선수들이 다들 이동민을 주목한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오늘 뒤졌어 새끼야. 알아?"

"하하하! 아 이 형들 진짜."

누가 봐도 구마하를 겨냥한 외침에 주변에서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진수도 한마디를 더한다.

"야! 이 새끼 오늘 컨디션 쉣인데?"

"그러니까. 씨발 선수가 몸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데?"

그러자 구마하도 질세라 목소리를 높인다.

"실력도 없는 놈들이 말은..."

"동민아 이 새끼가 우리 좆밥이라는데?"

"꺼지라 그래! 좆밥은 지지."

한바탕 장난스러운 소동을 빚은 끝에 선수들이 줄지어 운동장으로 나선다.

권지성이 이동민에게 물었다.

"일부러 그런 거죠?"

"아니. 진짜로 죽여 줄 건데."

"동민이 형."

"응?"

"나부터 이기고 얘기해요."

"너도 뒤졌어. 오늘 잠실의 주인이 바뀐다."

다들 이동민을 구마하의 친구. 최근 들어 상승세를 보이는 실업팀 선수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 결과가 나오자, 이동민은 큰소리를 칠 만한 실력을 보유한 인물이 됐다.

1조 결과.

1위. 전주 시청 이동민(20) 9.95

2위. 대한체대 권지성(19) 9.97

세 번째 9초 선수가 탄생한 놀라움을 느낄 새도 없이 2조 경기가 진행되었고. 그리고 또 한 번 사람들을 들썩이게 만드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1위. 연세대 구마하(20) 9.89

2위. S생명 김진수(20) 10.00

경기를 지켜보는 모두에게 이제는 더 이상 10초의 벽이 그리 높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 육상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구마하는 전광판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팀 구마하가 거둔 기념적인 성적을 보는데 형 구마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문파를 만드는 거야. 믿고 가고자 하는 길을 위해서라도 혼자가 아닌 뜻을 함께해 주는 사람을 만들어야 돼.'

나이는 괜히 먹는 게 아니구나... 서울대 나온 감독님이 괜히 형을 존경하는 게 아니었어.

든든한 형제가 있고. 위기의 순간에 주눅 들지 않고 도전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구마하는 주변을 통해, 더 이상 번민하거나 갈등하지 않았다.

결승전을 앞둔 시점. 그에게 더 이상 선발전이니 대회니 같은 건 의미가 없다.

오늘의 시합이 가장 위대하고 값진 시합이다.

지금에 충실하자.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은 내용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가는 스포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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