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52화 (252/401)

미녀와 로미오. 야수와 줄리엣 (1)

"일부러 진 거 아냐? 아니고서야 어떻게 동민이가 니네를 다 이겨?"

"이 새낀 경기도 안 보고 뭔 헛소리야."

"아니 그런 이변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냐고."

"그러니까 누가 혼자 가래? 친구들 경기도 안 보고."

"빡치잖아..."

선발 전 이튿날.

중거리 선수 진운이를 만나 매점을 다녀오고 있었다.

진운이는 동민이의 파란에 대해서 자꾸 음모론을 펼치고 있다.

내가 일부러 졌다. 애들이 다 봐줬다. 지성이가 시합을 앞두고 너무 몸이 굳었다 등등.

"왜? 그냥 동민이가 돈을 줬다고 그러지."

"어! 그것도 괜찮다."

"새끼가 진짜... 그럼 왜 너만 못 받았냐."

"난 종목이 다르니까."

"제발 진운아. 제발! 착실하고 소심하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면 안 되냐?"

말을 그렇게 하지만, 축하 인사는 제대로 전해 주고 왔단다.

다만, 어제저녁 스포츠 뉴스에서 애가 너무 크게 부각되는 바람에 질투심이 생겼단다.

"선발전을 단거리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이슈를 다 가져가면 어떡해. 중장거리 선수들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하여간 너도 참."

"아무튼간. 100m 한 자리는 동민이가 확보됐고."

"그런 말 하지 마."

"왜? 이긴 건 맞잖아."

"이긴 건 맞는데. 대표 팀에 들어간 건 아니잖아."

"이기는 사람 뽑는다고 했다면서?"

"그러긴 했는데... 박문기잖아."

설마. 지 입으로 그래 놓고 말 바꿀까 싶지만. 몰라. 모르는 거야.

이 큰 잠실 운동장 빌려서 한 사람만 데려간다는 인간이 무슨 짓을 할 줄 알아.

실력대로 뽑는다고 한 건 인정. 그건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본 실력은 진짜 실력이지만, 박문기가 말하는 실력은 운동 능력이 아닌 '메달 가능성'이란 부가 조건이 붙는다.

불안함이 있다. 그래서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경기에만 집중하고 싶다.

"아무튼, 너 너무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오늘 시합 잘해. 알겠지?"

"마하야. 근데, 너한테 선수 선발 권한이 있는 거야?"

"몰라. 없어."

"왜 없어? 대표 팀 감독이 된다고 하는데?"

"아직 오피셜로 발표된 것도 아니잖아."

"그것도 어제 뉴스에 나오던데?"

"아. 몰라. 그리고 됐다 한들, 내가 뭐라고 선수를 뽑네 마네 하고 자빠졌어. 나야말로 진짜 트레이닝 코치만 하는 거지."

난 모든 훈련에 메달 가능성을 따지지 않는다.

그냥 이 선수가 어떻게 하면 발전할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야 좋을까. 그런 코칭만 하고 싶다.

메달이 내 맘대로 목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승부가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런 걸 목표로 세워.

"흠. 난 어제 동민이 이겼다길래 그런 생각 했는데."

"뭐?"

"동민이가 100m 나가고, 200은 진수가 하고 넌 400 새로 도전하니까 그거로 하고."

"지성이는?"

"지성이야 알아서 하겠지. 걜 누가 걱정해."

"가. 가서 운동해. 몸 풀어. 시합 준비하고."

"하하. 알았어.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가면 좋잖아."

가면야 좋지.

다 같이 좋은 추억도 만들고 멋진 성과도 내고... 운 좋으면 메달도 따고... 나도 그러고 싶지.

어제 시합을 마치고 교수님과 이두희 감독님을 만났다.

어른들은 경기 결과에 만족하고 계셨다.

무엇보다 실력으로 나를 넘어선 선수가 둘이나 나왔다는 점에서 지도자로서도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렇게 모든 게 다 좋은 흐름으로 가면 더 없이 기쁘련만.

아니야. 이런 생각도 하지 마.

믿자. 믿는 거야. 순리대로 간다고 하잖아.

고민한다고 답 나오는 문제도 아니고. 칼자루는 저쪽이 쥐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집중해야지. 집중하자. 나도 이겨야지."

진운이와 헤어지고 나도 다시 연세대 팀원들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떤 익숙한 목소리가 큰 소리로 선수들 가운데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아하하하! 정말요? 그때 같이 오지 그러셨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학기 중이라. 아무튼, 마하가 같이하자고 했을 때 전주 갔으면 동민 씨랑도 친해졌을 건데."

"아~ 아쉽네요. 저도 형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뭐야. 저 새끼가 여기 왜 있어?

진운이 말대로 어제 하루 스포츠 뉴스고 어디고 명성을 떨친 동민이가 우리 학교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민구 형을 비롯해서 나도 잘 모르는 후배들과 친하게 어울리고 있는데, 누가 보면 우리 학교 사람인 줄?

"너 여기서 뭐 하냐?"

"어. 왔냐. 시합 있는 새끼가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뭔데? 형. 얘 여기 왜 있어요?"

"아. 전주 시청은 따로 팀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다고 그래서. 지나가는 길에 내가 불러왔어."

"그럼 그냥 지나가라고 하지 왜 여길?"

"새끼 서운하게 왜 이래? 시합 앞두고 긴장했냐?"

"하하하! 미친놈."

동민이가 후배들 보란 듯이 어깨에 손을 턱 하니 올리는데. 누가 보면 세상 둘도 없는 친구 같다.

"괜찮아. 괜찮아. 편하게 해. 시합이라는 게 이길 수도 있고 질수도 있지."

"하하. 크하하하! 아 씨... 존나 빡치네."

"열심히 했어. 알지 그럼. 결과는 받아들이는 거야. 안 그러냐?"

"와 이 새끼... 너 지금 설마...?"

"개새끼.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르지? 잘근잘근 밟아 주마. 넌 앞으로 뒤졌어."

"야 너 나와. 씨발 밖에 연습 경기장에서 100미터 다시 붙어."

"꺼져. 안 해. 나 이제 너랑 시합 안 뛸 거야."

"크하하하!!"

"하하하. 그럼 둘이 얘기하고. 난 애들이랑 경기 준비하러 가봐야겠다."

"민구 형! 아. 얘 좀 가라고 그래요!"

"이야~ 연세대 좋네. 선수단 규모가 대한 체대에 밀리지 않아. 역시 명문대."

"아 저리 가라고 친한 척하지 말고."

"으하하!"

역시 스포츠는 뛰는 것보다 관중이 최고지.

아주 그냥 경기 없다고 태평하구만.

그래도 짜증 나는 놈이 옆에서 까불어 그런가, 심심하진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야. 아까 진운이 보고 왔는데. 너 약 한 거 아니냐고 그러던데?"

"진운이 언제 경기하지? 확 자빠져라. 망할 놈의 새끼."

"크하하하. 부모님은 뭐라시냐?"

"그냥 좋아하지 뭐. 우승 축하한다고 그러고."

"정석이 전화 받았어? 어제 나한테 너 연락 안 된다고 존나 물어보던데."

"어. 너 밟았다고 하니까 잘했다고. 고기 사 준다고 내려오라더라."

"정석이도 이제 떠날 때가 됐네. 형한테 얘기해서 자르라고 해야겠다."

"하하~ 컨디션은 좀 어때?"

"괜찮아. 잘 잤어."

동민이가 시합하러 나가는 선수들을 멀뚱히 지켜보며 말했다.

"대표 팀이라..."

"..."

"막상 뭔가 이렇게 되고 나니 어감이 좀 무겁네."

"쫄지 마 병신아. 태릉 안 가 본 것도 아니고."

"야 근데, 확실히 잠실에서 시상대 오르니까 기분이 다르긴 하더라."

"올림픽 스타디움인데. 간지가 있지. 나도 여기서 메달은 안 받아 봤다."

"이주영 감독님 전화 오셨는데. 축하한다고. 감독님이랑 오랜만에 통화했네."

"맞다. 여기 한주고도 왔어. 아까 지나가는데 애들 몇 명 인사하던데?"

"지금 한주고 애들이면 나 3학년 때 1학년인가?"

"그렇지. 우리 3학년 때 신입생들."

"걔들 맨날 너만 쫓아다녔지. 한 다리 넘어가니까 큰 정이 없네."

"하하하! 아 새끼 소심하게."

한참을 둘이 티격태격 장난을 치고 있는데, 표정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인다.

"근데 진짜 왜 왔어. 푹 쉬지."

"그냥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대표 팀이지 뭐..."

결과를 낸 놈이라 진운이와는 같은 주제여도 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무슨 말이 나올지 가만히 기다려 주고 있으니 동민이도 시선을 피하며 묻는다.

"마하야. 나 진짜 된 거 맞냐?"

"몰라. 아직 정해진 건 없어."

"역시..."

"신경 쓰지 마. 어른들이 알아서 하겠지."

"정말로 다 같이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야?"

"모른다고. 나도 진짜 아무것도 몰라. 그래서 답답하고."

"대표 팀 감독인데?"

"뭐 씨발. 정해진 거 있냐. 나도 오늘 시합 뛰는 선수구만."

말이 나온 김에 진운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하나씩 우승을 해서 대표 팀을 들어가자? 그런 방법도 괜찮겠네."

"그러냐? 난 오히려 절대 그런 일은 벌어지면 안 되겠다 싶었는데."

"왜?"

"...만약 그렇게 되면 난 대표 팀 감독도 안 할 거야. 선수도 안해. 육상 은퇴할 거야."

"미친놈 뭔 개소리를."

"들어 봐. 개소리가 아니니까."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우리만 보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선수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단거리 경기는 100, 200, 그리고 400 세 종목이 전부다.

운 좋게 하나씩 우승을 하더라도 결국 한 사람이 빈다.

계주는 넷이 필요한데.

"다른 사람이 이길 수도 있지. 꼭 우리가 다 해낸다고 볼 수도 없고."

"그렇지. 그런 변수도 나오지. 어제같이."

"어제는 실력이고 새끼야."

"아 이 자랑을 언제까지 들어야 되는지..."

"평생. 쭉! 평생!"

내가 진짜 감독을 맡아야 한다면, 친분으로 맺어지는 모든 의혹은 일부러라도 거릴 두어야 한다.

오직 실력이 모든 평가 기준이 되어야지만, 나도. 그리고 친구들도. 다른 대표 팀에 승선한 사람들도 구설에 휘말리지 않는다.

"니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생각해야지. 그게 생각도 못 하다 인터넷에 이름 올라가는 것보다 나으니까."

"설마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뭐라고 할까?"

"어제 서울 시청 형이 경기 전에 짧게 뭐라는지 아냐? 친구들이랑 결승전 나가니까 어떠냐더라."

"좋지 뭐 씨발."

"그 형도 좋은 뜻으로 한 말인 거 아는데. 악의는 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근데 동민아. 만약에 그런 이야기를 다른 쪽에서 하고 있다고 생각해 봐. 와 씨발... 존나 난 소름이 돋는다..."

작년 수빈이 만날 때. 말도 안 되는 도핑 파문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거쳐 갈 해프닝이라 할 수도 있지만, 내가 운동에 전념하고 있어 그러지. 지금도 인터넷에 내 연관검색어에 도핑이 꼭 들어간다.

심지어 이번 스키에서도 잘했다는 칭찬이 커질수록 그런 목소리들의 수위도 높아지고 있었다.

"그거야 유명해지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그 유명세. 그게 좆같다는 거야."

"흠."

"나도 너네랑 아시안 게임 가면 좋아. 가고 싶고. 근데, 내가 진짜로 대표 팀 지도부에 속하게 된다면, 더 조심해야 해. 안 그러면 너희까지 다쳐."

"안 그런다니까. 사람들 그렇게 우리한테 관심 없어."

"몰라. 진짜로 난 겪어 봤잖아. 인간들 별소리 다 해."

그래서도 난 대표 팀이니 선발 여부니 아무것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알아서들 할 것이고, 팀을 맡기면 그때 열심히 하면 그만이다.

지금은 내 경기가 우선. 오늘 200m와 400m을 우승하는 것.

그걸 마치고 다시 이야기를 해 보자고 했다.

"후우. 뭔가 깔끔하지가 않네."

"괜찮아. 걱정 내려놓고 있어. 이겼는데 뭘 걱정하고 지랄이야."

"...먼저 유진 볼트 세계 신기록 냈을 때. 오스트라바. 체코."

"어."

"그때 나 예선전에서 일본 애들이랑 뛰었었는데. 와 존나 빠르더만."

동민이는 놀라운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다. 다만, 기록만 놓고 보면 아직 일본과 중국 베스트와 나란히 순위를 겨루는 건 아니다.

내가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을 우승한 거지. 한국 육상이 세계를 이긴 게 아니었다.

쇼트 트랙이나 양궁 같은 종목은 한국 최고가 세계 최고란 자부 심이 있지만, 아직 우리가 그렇게 자부심을 가지기엔 무리가 있다.

"만약에. 니네 다 떨어지고 나 혼자 가면..."

"..."

"와 그건 싫은데..."

"설마. 정말로 딱 한 사람만 데리고 가겠냐. 마라톤도 있는데."

박문기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야망도 크고 보여 줘야 하는 것들도 많다.

박문기가 판단하는 이길 수 있는 놈이란 게 선발전을 말하는 건지, 세계 대회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생각해."

"그래. 시합 앞둔 애한테 나도 할 말은 아닌 거 같다."

"새끼. 다 떠들어 놓고..."

"야 근데 지금 하는 경기는 뭐냐? 은근 왔다 갔다 보였던 사람들이 계속 움직이는 거 같은데? 경기 끝난 거 아냐?"

"어. 저분들? 아마 복합 경기일걸."

"복합. 10종 경기지?"

아까 달리기 하던 선수가 지금은 다시 높이뛰기를 하려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 우리와도 100미터 예선전을 치렀던 분이라 지나가는 길에 눈인사를 건네 드렸다.

"우리나라에 10종 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적어. 워낙 힘든 종목이니까. 연맹에서도 크게 관심 없는 거 같고."

"없겠지. 저 어려운 걸 누가 하겠냐고."

"일본이랑 중국은 제법 될 건데."

우리가 이번에 목표로 삼은 일본과 중국.

두 나라 다 세상이 아는 것보다 육상 강국이었다.

일본은 고교 체육을 바탕으로 재능 있는 선수들을 육성해 왔고, 중국은 넘쳐 나는 쪽수에서 언제 어느 때고 천재들이 튀어나온다.

그런 나라들을 이기고 싶었는데...

애초에 승리가 아닌, 팀 꾸릴 걱정부터 하고 있어야 한다니.

"어? 마하야. 200m 선수들 준비하란다."

"내 차례네. 있어라."

"잘해."

예전에 천병욱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일본은 2000년 초부터 계주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국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중국은 2008 베이징 올림픽을 놓고 대규모 선수단을 꾸려 훈련을 하고 있다.

도하 아시안 게임은 그런 면에 있어 세계적인 수준을 맛볼 수 있는 기회인데...

이런 좋은 기회를...

그것도 연맹 회장이란 인간의 개짓거리로 날려야 한다니...

아니다. 아니야. 시합부터 챙기자.

모든 건 내 앞에 놓인 과제를 차곡차곡 이뤄 나가는 거야.

예선전을 마치고 다시 동민이를 만났다.

둘이 점심을 먹고 나른해지는 기분으로 관중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너 오늘 안 갈 거지?"

"어. 야 근데 너 왕따냐? 왜 니네 학교 사람들 아무도 너랑 밥먹자고 안 해? 아까 그 형도 그렇고?"

"올해 들어온 신입생은 잘 몰라. 그리고 씨발놈아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다 니 때문이잖아!"

"나 왜?"

"내가 너랑 전주에서 훈련했으니까!!"

"아~ 덥다. 좀 선선해질 때 안 됐나? 왜 이렇게 후덥지근하지."

"말 돌리기는..."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떠들다 운동장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중거리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하하하! 아 씨 알았다고. 내가 오라 그랬어?"

"어이구. 실력 좀 컸다고 기고만장해져 가지고..."

"에이 왜 그래요. 감독님. 좆같은 소리 그만하고 경기나 봐요."

"야. 근데 중거리를 또 해?"

"이것도 그건가 보지. 복합 경기. 진운이 아까 경기 했잖아."

어제와 다르게 오늘 복합 경기가 같이 진행되고 있구나.

진짜 육상 운동장에서 뭐 이것저것 참 많이 해.

"여자는 7종이지? 남자가 10종이고."

"7종. 3개 빼."

"뭐 뭐냐?"

"허들, 높이뛰기, 포환, 200m. 멀리뛰기랑 창던지기. 그리고 저거. 800."

"와 이름만 들어도 토 쏠린다..."

정말 그렇다. 그 많은 운동을 다 하라면, 아무리 세상 여자와 운동으로 살아가는 나도 부담된다.

달리기만 육상이 아니다.

달리고 던지고 넘고 뛰고.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진 의식에 맞춰 모든 걸 포함한 것을 육상(Athletics)이라고 부른다.

그런 육상에 10종(Decathlon)과 7종(Heptathlon) 경기가 있는데. 각기 남녀로 구분되는 이 복합 경기는, 순발력도 좋아야 하고 지구력도 좋아야 하고. 어깨도 강해야 하고 점프도 잘하고 힘도 좋고 균형 감각까지 좋아야지만 할 수 있는 게임으로. 스키 탄다고 허벅지 두꺼워져 중거리를 포기한 나 같은 놈은 나갈 수도 없다.

특정한 한 종목이 아닌, 모든 종목에서 우수하고 골고루 피지컬을 가진다는 건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이야기로, 복합 경기야말로 진짜 천재들의 잔치인 것이다.

"동민아. 10종에서 우승하면 뭐라고 부르는지 아냐?"

"메달리스트 아냐?"

"아니. 위대한 선수. IOC 공식적으로."

"좆까 새끼야.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

"진짜야 새끼야."

"꺼지라고. 선수는 다 위대하지."

"아니. 진짜로 그런 게 있다니까!!"

나도 월드 챔피언 소리는 들어 봤다.

그런데 진짜로 복합 경기 메달리스트는 챔피언이 아닌 위대한 선수라는 공식 호칭이 따라온다.

"뭐? 월드 뭐?"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world's greatest athlete) 옛날에 어떤 왕이 선수한테 메달 주면서 그랬는데, 그 말이 지금까지 쭉 이 어지고 있어."

"구마하도 좆밥이구만."

"아 이 씨발 진짜..."

아무튼, 매번 시합 때문에 대기실에 있든가, 감독님이랑 구석에서 쉬느라 운동장을 본 적 없는데. 오늘은 이놈 덕분에 많은 걸 보게 되는구나.

그런 가운데서도 또 200미터 준준결승이 시작된다.

아이고 바쁘다 바뻐.

"파이팅!"

"코너 돌 때 큰 소리로 응원해라."

"당연하지. 김진수 파이팅! 권지성 파이팅!!"

사람 빡치게 하는 놈과 헤어지고 선수 대기실로 가는 길이었다.

방금 막 7종 경기를 마친 여자 선수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해 그냥 무심히 내 갈 길 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멈춰 나를 딱 보면서 말한다.

"야. 구마하."

어? 뭐지? 누구?

당당하게 이름을 부르는 여성분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 다빈아...?"

정말로 다빈이였다. 진짜 너무 놀라서 처음엔 반갑다기보단 놀란 게 사실이었다.

작고 귀여운 다람쥐 같은 얼굴은 여전한데, 머리를 바꿨구나.

단발도 잘 어울린다. 역시 예쁜 애들이 뭘 해도 잘 어울려.

"너 뭐 하는 거야?"

"어...? 나 지금 너 머리 바뀐 거 보고 있는데."

"뭐래. 뭐 하고 다니는 거냐고."

"나 지금 시합하러..."

"어떻게 이동민한테 져?"

"..."

내가 아는 그 친구가 맞는데.

꼭 한번 보고 싶고 갑자기 사라져서 너무 걱정이 되었던 그 귀여운 애가 맞는 거 같은데.

그 얼굴이. 머리만 짧은 단발로 바뀌었는데.

"어제 시합 봤어?"

"당연히 봤지. 지성이는 그렇다 쳐. 이동민은 뭐냐?"

왜 이렇게 짜증 났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기는 거지?

왜 이렇게 말투가 싸가지 없게 들리는 거냐고?

내가 좋아했던 그 다빈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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