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로미오. 야수와 줄리엣 (4)
선발전 마지막 아침.
늘 그렇듯 진수와 새벽 일찍 일어나 몸 풀고 국밥 한 그릇 때리고 있는데, 아침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구마하 선수. 잘 주무셨나요? 육상 연맹인데요."
"아. 네. 무슨 일로 전화를...?"
"오늘 시합 마치시면, 사무실로 와 주셔야겠습니다."
"...뭔가 결정된 상황이 있나요?"
"대표 팀 감독 맡기로 하셨잖아요. 선수 선발 관련해서도 이야기 나눠야 하고요."
올 것이 왔구나.
지금까지는 시합이 있어서 봐주고 있던 거야.
연맹이라고 해도, 박문기 혼자 운영하는 게 아니라 사무국이나 기타 여러 부분들이 있으니까.
"네. 저 근데. 진짜 제가 해도 되는 건가요?"
"아우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구마하 선수가 아닌 감독에 우리 모두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는데요."
동민이는 자기 기록을 1초나 줄였고, 눈앞의 진수도 지난 내 올림픽 기록을 넘어섰다.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연맹에서도 가능하다면, 달리기만 맡을 게 아니라 다른 종목까지 다 부탁하고 싶을 정도란다.
"그건... 저도 시합이 있어서."
"네. 응원하겠습니다! 400m 파이팅입니다!!"
통화를 마치자 진수가 멀뚱히 쳐다본다.
"뭐래? 목소리 엄청 밝은 거 같던데."
"끝나고 이야기해."
"우리 된 거 맞다고 그래?"
"와서 이야기하래. 일단 내가 감독 맡는 건 결정 된 거 같아."
"축하한다. 스물한 살에 국대 감독이라니. 미친놈."
"밥이나 먹어 새끼야."
뭐가 됐든, 실력을 우선으로 할 것이다. 인맥은 아무 의미 없다.
아무쪼록 대표 팀 선발을 떠나서도 나에게도 오늘은 여러 과제가 놓여 있었으니, 공식 400m 경기에 처음으로 참가하는 날이었다.
오늘의 기록과 성적을 놓고,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서 결정해야 했다.
단거리 전문 선수로 나아갈 것인가. 근력을 좀 빼더라도 다시 중거리로 돌아갈 것인가.
그런 의미를 기자님들도 미리 알고, 오전 일찍 잠실 운동장에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스키 타면서 근력이 변한 건 사실이죠. 대신 파워가 붙어서 이번에 처음으로 400m에 도전해 봤습니다."
"그런 이야기 안 들어봤나요? 스키를 했던 게 육상을 방해했다?"
"전혀요. 오히려 도움이 되면 됐지, 동계 운동을 한 게 결코 방해가 된 건 없습니다."
"결과에 대해서 아쉽지 않으세요? 100m, 200m. 다 처음으로 국내 대회에서 우승을 놓쳤는데."
"최선을 다했고요. 저보단 다른 선수들이 더 잘했다고 봅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항간에선 그런 말이 나오는데. 100m 우승자 이동민 선수나 200m 김진수 선수. 다 친구들이라 일부러 승리를 양보했다는 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꾸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네요. 노력한 선수들의 결과를 폄하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연세대 사람들을 만났다.
민구 형이 아침부터 왜 이렇게 죽을상이냐고 하는데, 대충 이런 저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 드렸다.
"기자들도 웃기네. 그런 걸 굳이 너한테 와서 말할 건 뭐냐?"
"기자니까 그렇겠죠... 하 참. 어이가 없어서."
"됐어. 지나가. 일일이 신경 쓰냐. 시합 앞두고."
"역시... 애들 이겼을 때 그러지 않을까 했는데... 후우. 앞으론 별 개소리 다 튀어나오겠죠."
"그렇겠지. 보이지 않는 곳에선 원래 별말 다 떠드는 법이니까."
"선수들일 거예요. 아니고서야 우리 친한 거 어떻게 알고."
"질투심도 있고, 너희한테 졌다는 분함도 있고. 그 마음을 어떻게 다 이해하겠어. 잊어라. 시합 집중하고."
주변 상황이 꼬일수록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른단 마음으로 400m를 뛰었다.
그런 만큼 결과는 아주 만족스럽게 나왔다.
"후우. 아 역시 빡시다..."
"46.48... 미친놈 같으니라고..."
"왜요? 문제 있어요?"
"있지. 너무 잘해서 문제지."
400m 준결승에서 나는 한국 신기록을 달성했다.
민구 형은 전광판을 보면서 한참을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뭔가, 경기장에서 널 보니까 사람들이 욕을 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아."
"왜요? 제가 뭘 어쨌다고요??"
"미친 재능이다 진짜... 나도 현역이면 아마 상택이 못지않게 너 질투하고 있었을 거야."
"..."
"칭찬이야 인마. 기분 좋게 받아들여. 가자. 가서 좀 쉬고 결승뛰어야지!"
"진심 아니시죠?"
"하하하! 장난이야. 아무튼, 마지막 400에서 우리 학교도 금메달 하나 받아 가겠구나!"
민구 형은 애둘러 표현했지만, 최선을 다해도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조금 아프다.
왜 그러는 걸까? 그리고 선수는 왜 욕을 먹어야 되는 걸까?
나랏돈으로 운동하니까 그러나?
씨발 난 이번에 나랏돈 안 썼는데.
오히려 내 돈 써서 애들 운동시켜 주고 그러고 있었는데.
"아니. 대체 어떻게 운동하는 거야? 우리 학교 애들도 그렇게 될 수 있어?"
"고생하면 뭐. 누구나 다들 조금씩은."
"너. 선발전 끝나면 다시 전주 내려갈 거야? 아니지? 학교로 와라. 와서 애들 좀 지도해 줘."
"형. 저 근데, 미국이랑 우리랑 시차 얼만지 아세요?"
"음?"
모든 결정에 앞서 감독님과 통화를 하고 싶었다.
마침 한국과 미국은 13시간 시차가 나는 만큼 그쪽도 지금은 한창 활동 시간이겠구나.
"어. 그래 마하야."
"감독님. 아니, 선발전 전에는 오신다면서요...?"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갑자기 중요한 미팅이 잡힌 걸 어떡해.
우리도 비행기 표 다 취소하고 그러고 있어."
"사모님은 뭐라고 안 하세요?"
"당신. 우리 한국 안 가서 싫어?"
그러자 옆에서 "아니. 그런 거 없어 마하야. 나 괜찮아" 소리가 바로 들려온다.
"어. 어떻게 이렇게 바로...??"
"운전 중이거든. 스피커폰이야. 그냥 얘기해도 돼."
"아 감독님. 그걸 먼저 말씀해 주셔야죠."
"뭐 어때. 우리는 파트넌데. 이 사람도 너라면 새벽에 전화해도 상관없다고 그랬어."
"맞아. 편할 때 아무 때나 전화해. 나 괜찮아."
"하하하... 사모님. 거, 건강하시죠?"
"응. 넌 잘 지내고 있니?"
"그게 그러니까..."
"괜찮아 얘기해. 지금 이동 중이라서 따로 통화가 어려워."
"감독님. 민감한 주젠데 괜찮으세요?"
"민감할 것도 많다. 우리 사이에."
좋아 그러면 다 털어 드리지.
진짜 다 말씀드렸다.
선발전이란 큰 이벤트를 놓고 박문기가 무슨 개짓을 저질렀는 지부터, 우승을 하고도 대표 팀이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친구들.
연맹의 기대. 육상 팀에 대한 체대 라인을 공고히 하려는 최 코치님과 7종 선수가 된 다빈이 등등 전부 다.
"야. 숨 좀 쉬고 말해라."
"죄송해요. 요즘 일이 많다 보니 흥분이 돼서..."
"너 지금 나 없다고 일부러 오버하는 거 아니지? 진짜로 박 회장이 한 사람만 데려간다고 그랬어?"
"네!! 후보도 안 뽑는데요! 메달 딸 놈들만 데려간다고 대놓고 그랬다니까요. 이두희 감독님한테 전화해 보세요. 같이 들었으니까."
"허허. 황당하구만. 선발 선수가 어떻게 될지 알고."
"운동이 무슨 수학인 줄 알아요. 동민이 이겼을 때도 시상식 하는데 얼마나 표정이 썩어 있는지..."
"여보. 그냥 저기 카페에 세워. 통화 끝내고 가."
"음. 그래야 될 거 같지?"
"사모님 죄송해요. 우울한 이야기만 들려 드려서..."
"아니야 괜찮아. 그래도 힘내. 우린 니 편이니까."
이럴 때 내 편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그러니까 제발 좀 한국 오시라니까...
감독님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진지하게 전화를 받아 주신다.
"지금은 스피커폰 아니시죠?"
"어. 카페 들어왔어. 와이프 화장실 갔고. 더 욕해도 돼."
"제가 감독님한테 욕을 왜 해요... 결혼하더니 성격 이상해지셨어...?"
"하하하! 미국이잖아. 자유의 나라 아니냐."
"허우... 감독님. 그렇게 미국 가고 싶으셔서 지금까지 어떻게 참으셨어요?"
"여긴 진짜 능력만 있으면 상상도 못 할 기회가 펼쳐지는 땅이야. 그리고 지금 우린 그런 기회를 잡고 있고. 놓칠 순 없지."
"오늘은 어디세요?"
"캘리포니아. 할리웃."
"거긴 또 왜 가셨어요...?"
"크하하! 온 김에 영화판도 한번 둘러볼까?"
NFL에서 나랑 이벤트를 하고 싶어 하길래 한번 만나고 가려고 하신단다.
NFL이라... 세계에서 가장 어마무시한 자금력으로 유명한 곳 아닌가.
"자본주의 국가답게. 미국에선 운동 젤 잘하는 애들이 미식축구 선수가 되거든. 걔들이랑 너랑 이벤트 경기로, 달리기 시합도 하고 그런 걸 기획하고 있어."
"하하하. 재밌긴 하겠네요."
"그럼. 동 하계 금메달 보유자라는 건 요즘 세상에 쉽게 보기 어려운 능력이니까."
"그렇게 운동 좋아하시는 분이 어떻게 선생님을 하고 계셨어요..."
"하하하! 그러니까 체육 선생을 하고 있었지. 아무튼, 난 그렇고. 너 이야기 더해 봐."
"지금은 아까 말씀드린 게 전부고요. 저녁에 연맹 가서 또 이야기하면 뭐가 나올 건데. 후우..."
"최 코치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네. 근데 지금 제가 이분이랑 같이 일을 해야 하는데..."
"내키지가 않아?"
"...대한 체대만 편애한다는 평가를 받는 분인데, 무슨 일을 어떻게 하라고요."
"그럼 그만둬."
"네?"
"관두라고. 400 경기 마치고 짐 챙겨서 이리 와라. 돈이나 벌자. 여기 사람들이 너 엄청 보고 싶어 하거든."
"아 감독님..."
"왜? 이런 소리 듣기 싫어?"
"진짜 결혼하고 성격 바뀌신 거 아니세요?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관두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으세요."
국제 전화 너머 감독님의 훗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니가 듣고 싶은 말이 그거잖아.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거."
"아니... 전 그냥..."
"알아. 무슨 상황인지. 연맹부터 시작해서 박문기 회장. 친구들. 서로들 자기 입장만 앞세우는데, 넌 그 가운데 모두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빠개지고 있겠지."
"맞습니다."
"우리 와이프랑 같아. 난 세상 누가 뭐래도 니 편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서로가 자기주장만 하는 세상에서 모두가 만족하는 답이란 없단다.
그럴 바엔 다 때려치우고 내 입장만 챙기는 게 맞다고 하신다.
"그렇게 쉽게 끊어 낼 관계가 아니니까 그러죠..."
"누굴 걱정하는 건데? 동민이? 아니면 니네 학교 사람들?"
"음..."
"같이 땀 흘린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멀어지지 않아. 우리 봐.
현석이 형이나 주영이나. 지지고 볶고 싸우고 해도 결국 나이 들어 연락하고 다 잘 지내잖아."
가만히 감독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감독님이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다.
"왜 힘들게 운동하냐. 왜 어렵게 공부해. 모든 건 행복해지려고 하는 거야. 그런데. 그걸 해서 불행하면. 굳이 이어 갈 필요가 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넌 이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해 줬어. 니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따 온 메달이 몇 개야. 거기다 이제는 선수들 능력까지 키워 줬어. 너무 큰 부담 떠안지 마.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그래도 지금 관두는 건 뭔가 아닌 거 같아요."
"왜?"
"...그냥 지는 거 같아요. 그건 싫어요."
"후후후. 하여간 성격 하고는."
"감독님. 진짜로 관두라고 그런 말씀 하신 거 아니죠?"
"아니. 맞는데. 야 지금 너 여기 오면 평생이 뭐야? 3대가 먹고 놀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어."
"아 자꾸 돈 돈..."
"돈이 어때서? 너 돈 싫어해?"
"하하하... 언제는 저한테 돈 아껴 쓰라면서요? 돈 무서운 줄 알아야 된다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무섭지. 무서우니까 많이 가지고 있자는 거지. 단위가 다르다 단위가."
다시 시합하러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여쭤보았다.
"감독님. 제 입장에서 한 번만 생각해 주세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말했잖아. 니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중요하다고."
"저는..."
"친구들 대표 팀에 뽑고 싶어?"
"친분을 떠나서, 애들은 정정당당하게 절 이겼어요... 진운이도 800에서 좋은 기록 냈고. 아 맞다. 진운이 1,500까지 종목 확장했어요."
"지성이는?"
"지성이는... 계주든 한국 육상의 미래든 절대 빠져선 안 되는 인재죠."
동민이나 진수는 지금이 정점을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성이는 아직 그 힘에 여력이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 지성이가 꾸준히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를 넘어설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가서 그렇게 얘기해. 이 선수들이 있어야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근데, 박문기가 하나만 데리고 간다고..."
"그럼 관두는 거지."
"아 뭐예요 그게. 결국 똑같은 이야기 하고 계시잖아요."
"배수진을 치라는 거야. 물러설 수 없는 너의 입장을 고집하라는 거고."
"...친구들인데요?"
"그래서 뭐? 결국 박문기가 원하는 건 메달이잖아. 그 선수들 없으면 메달 못 따는데 무슨 상관인데?"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
적어도 승부의 세계라는 스포츠계에선, 능력을 가진 만큼 당당하게 주장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주장이 강한 놈이 어필이 되는 거야. 더 뻔뻔해져도 돼."
"이야... 인터넷 불나겠네요."
"뭐 어때. 어차피 욕먹고 있는 거. 여기서 유명한 선수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쓰더라. 그것이 미국 스포츠의 힘인 거 같아."
"하하하~ 아 진짜 미국 얼마나 계셨다고."
"힘내. 정말로 이번 미팅만 마치고 돌아갈 거야. 그때 더 이야기하자."
"네."
"400 기록은 얼마 나왔냐?"
"46.48요. 한국 신기록 냈어요."
"오케이. 그것도 에이전시에 이야기해야겠다."
"아. 감독님!"
그래도 감독님과 통화를 하고서 답답한 속이 조금 뻥 뚫리는 것 같다.
더 뻔뻔해져도 된다라...
잘해도 욕먹고 열심히 해도 욕먹는다.
못하면 얼씨구나 하고 참았던 사람들도 욕하겠지?
"그러고도 남을 거야."
여기 눈치 보고 저기 눈치 보고. 말 아끼고 조심하고. 그러면서도 수작질하는 사람들에게 휘둘릴 바에는, 진짜 자기주장을 하는 게 낫긴 하겠구나.
"뭐든, 일단 시합을 마치고 봐야겠지."
딱히 이따가 저녁에 목소리에 힘을 더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400m 결승을 뛰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달려 기록을 더 단축해.
공식 기록 45.99를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