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58화 (258/401)

미녀와 로미오. 야수와 줄리엣 (7)

"이래서 사람들이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놓는구나. 미쳤네."

은퇴 기사가 나오고, 과장 조금 보태서 핸드폰에 불이 나는 거 같았다.

문자와 전화가 빗발친다.

가까운 정수부터, 친구들. 대학 사람들. 운동하는 애들. K일보임 기자님. 심지어 이유이 디자이너 선생님도 오랜만에 [마하야.

잘 지내? 무슨 일 있니?] 하며 연락이 들어오는데.

"허허. 다들 나한테 엄청 관심 많구나."

이혜정은 지금 고등학생 때부터 기대하던 배낭여행 중이라 연락이 없고. 대신 혜정이 어머니한테서 문자를 받았다.

아무튼, 번거롭고 귀찮은 일은 피하고 있었다.

연맹이 흘린 뉴스 기사가 과장도 아니고, 막상 소속 팀 감독님이란 분도 "야. 그럼 빨리 미국이나 와. 돈이나 벌게." 하시는 마당에 내가 부담 가질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모든 전화를 다 피한 건 아니었다.

한 분의 연락은 받아야만 했다.

"네. 아버지."

"살아는 있었구나. 다행이다."

"...조금 피할 뿐이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하하. 현석이는 잠적했다고 그러던데?"

"교수님 많이 화나셨어요?"

"그렇진 않아. 걱정이 많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표현을 못 할 뿐이다라는 걸 애둘러 표현하시는 것 같은데요..."

"어차피 연세대 학생은 너 말고 선발 명단에 없었다며? 무슨 상관이냐."

"하하하... 아버진 좀 어떠세요?"

"지금은 퇴원했다. 다시 집에서 치료 중이고."

"항암치료 뭐 이런 거 하시는 거예요?"

"이놈아.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방금도 슬쩍 언급하셨다시피, 이미 아버지는 주변을 통해 그날의 상황을 전달받으신 것 같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널 질타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황에 맞는 처신이라는 게 있다 마하야."

"죄송해요. 그래도 원칙이 모호한 대표 팀을 맡고 싶진 않았어요. 결국 구설수에 휘말리는 건 저니까요."

"그래. 그런 것도 있지..."

"기껏 선발전까지 열어 놓고 뭔 짓들인지... 전 제 행동 후회하지 않아요."

"후후. 자식. 강건하기는."

"아버지 계실 때가 좋았는데. 아버진 굳이 사람들 편애하고 그런 거 없으셨잖아요."

"아주 없다고 할 순 없지. 나도 사람인데. 팔이 밖으로 굽을 순없는 거 아니냐."

"...그래도 전 골고루 기회를 주신다고 봤었어요."

후회하지 않으시냐고 물으셨다.

생각보다 후회 같은 감정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오히려 속이 후련한 게 여러모로 상황에 지쳤던 거 같다고 전해 드리니, 그럼 됐다고 하셨다.

"정말 된 건가요?"

"그럼. 나도 아파 보니까 사람이 스트레스받을 일은 피하고 사는 게 맞더라."

"하하하. 아버지..."

"그리고. 누가 널 뭐라고 하겠니? 니가 한국 육상에 해 준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저 솔직히 아버지니까 말씀드리는데요. 감독님이랑 고민 상담 했더니, 그럼 그냥 하지 마라고 부추긴 것도 없지 않아 있어요."

"상률이 이 녀석... 지도자라는 놈이..."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요. 감독님도 끝까지 맞서 보고 아니면 돌아서라고 하시긴 했지만요."

"그래. 너희가 알아서 했겠지."

감독님 이야기가 나오자 아버지가 부연 설명을 해 주셨다.

연맹과 간판선수의 갈등은 우리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오늘내일 일도 아니었다.

82, 86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이두희 감독님도 한때는 연맹과 틀어질 대로 틀어져 육상계를 떠나 방송인이 되셨다.

옆 씨름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데. 한국 씨름의 상징과도 같은 이만기 교수님이 최근 씨름계에서 제명을 당하셨단다.

"왜 그러는 걸까요...?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다들 애정이 깊어서 그렇다고 봐야지 뭐."

"애정일까요...? 욕심 아니고요?"

"결국 같은 거 아니냐."

아픈 데만 없다면, 다행이라시면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시겠단다.

"400m 아쉽다."

"전 계주 못 나간 게 젤 아쉬워요."

"그것도 있지..."

"지난 일이죠 뭐. 더는 신경 안 쓰려고요."

"그래. 잘 지내고 있거라."

"저... 아버지. 제가 가끔 연락드려도 되죠?"

"하하하! 이놈아 아비한테 연락도 안 하는 자식이 어디 있냐?"

감독님 말씀대로구나. 집단에서 빠져나왔다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끊기는 건 아니었다.

인연이라는 게 무섭구나.

한번 맺어진 관계라는 건 쉽게 끝나는 게 아니야.

좋은 사람들만 보고 살고 싶은데, 악연도 그렇게 이어지는 걸까?

그렇게. 형네 집에서 요양 같은 잠적을 하기도 며칠. 슬슬 몸이 근질근질해지고, 한국에 있어 봐야 시간만 버릴 거. 진짜 감독님 말씀대로 미국 가서 돈이나 벌려고 움직일 준비를 하는데.

"아 이 새낀 또 왜..."

정석이한테 문자가 왔다. 미친놈답게 내용도 아주 파격적이다.

[씨발년아. 내 연락 한 번만 더 씹으면 나 그냥 너 어디 있는지 여의도 찾아가서 신문사에 다 제보한다.]

새끼 하여간 그냥 좀 넘어가는 일이 없어요...

"아 왜?"

"미쳤냐? 돌았어? 내 연락을 씹어?"

"뭘 씹어 병신아. 형 통해서 내 소식 다 듣고 있으면서."

"좆 까고. 야 어떻게 해? 나 오늘 여의도 가?"

"그리고 신문사는 여의도보다 종로에 있거든. 여의도는 방송국이지."

"어어~ 그래. 고맙다. 종로로 가야겠구나."

"아 왜? 왜 지랄인데?"

"씨발 오늘 나오라고."

"어디로? 애들 모이냐?"

"가게로 오면 돼. 7시까지 와라."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잘됐다.

별생각 없이 룰루랄라 오랜만에 병신들이나 보고 웃고 떠들고 싶어 형네 가게로 약속 시간을 지켜 나갔다.

그런데.

"아. 진짜... 널 믿은 내가 병신이지..."

"봤지. 이 새끼 내가 부르면 나온다니까."

정석이의 함정에 빠졌다.

태윤이 남수가 아니라, 동민이와 진수, 진운이가 형네 가게에 자리하고 있었다.

"빨리 들어와. 뭐 해?"

"그래. 와서 우리랑 이야기해."

"쩝..."

"뭔 쩝이야 미친놈아! 빨리 들어가!"

"씨발 너는 얘들 있으면 있다고 하든가..."

"야. 니네 술도 마실 거지?"

"어. 맥주 좀 갖다 줘."

"오케이. 야 구마 맥주 가져가라."

"니가 갖다 줘 내가 여기 직원이냐!?"

"사장님! 마하가 저한테 갑질해요!!"

형도 주방에서 나와 이야기해 준다.

"친구들도 이번 일 당사잔데 그냥 넘기지 말고 명쾌하게 말을 해 줘. 너 한 사람의 일이 아니잖아."

"아니 형. 그게 내가 쟤네를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서로 잘 이야기해 보라고. 다들 너 걱정돼서 찾아온 거니까."

그래서 애들을 만났다.

"잘 있었냐?"

"정신없었지... 누구 덕분에."

"나도 와... 우리 회사 사람들 장난 아니었어... 일반 사무직까지 지나가다 보면 다 물어보고"

"우리 학교는... 우리 학교는 어떤데."

다들 생각보다 큰 홍역을 치른 거 같다.

동민이가 왜 우리 연락까지 피하냐고 한마디 던진다.

"왜 쌩까냐? 우리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아 씨발. 잘못했다고 피하는 게 아니라."

"아님 뭐? 연맹에 불이익이라도 받을까 봐?"

"...아니 다행이다."

"그럼 그런 짓을 하지 말든가. 왜 성질인데."

"뭐 들었어?"

"들리지. 다 알아."

진운이가 말해 주길, 자기네 학교부터 시작해서 육상계 전반에 소문이 쫙 퍼졌단다.

"선수 선발 내용이 다 퍼졌다고?"

"어. 니가 지성이 안 뽑아 주면 관둔다고 그랬다고..."

"허허허... 앞뒤 다 자르고 그렇게만 소문이 돌면 야 씨발. 내가 봐도 내가 미친놈이지."

"그러니까 마하야. 너가 이야기해야 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성이는?"

"지성이도 지금은 그냥 집에 있어. 학교도 안 나와."

"흐음."

진실이 듣고 싶다면 진실을 알려 줘야지.

"일단, 너네는 선발전 우승자로 명단에 있었어."

"어. 그리고?"

"넌?"

"나도. 400m 우승으로 있었고. 우승자 선발은 맞았는데, 빠진 종목들이 있더라고."

"종목이 빠져?"

"창 던지기랑 세단뛰기. 원반 이런 좀 비인기 종목을 완전히 배제했더라고."

그런 가운데 여자 7종은 있었다.

다빈이와 최 코치의 관계는 다들 알고 있을 테고, 말로는 태릉형편상 뺐다고 하는데, 어차피 7종을 한다면 원반이나 창던지기 훈련이 안 된다는 것도 이상하다.

"일단 거기서 뭔가 걸렸고... 그리고 지성이 빠진 거. 맞아. 거기서 강하게 이야기했어."

"왜? 너 뭐 친분은 다 뺀다고 그랬잖아."

"친분 빼고 본 거야. 실력만 놓고 봐도 지성이가 계주 선수에서 빠진다는 게 말이 안 돼. 아니 애초에 진짜로 후보나 상비군을 빼고 선수 명단을 작성해 놓고 나한테 이렇게 받아들여라 하는데.

그게 무슨 감독이냐? 그냥 유명세만 가져가겠다 이거지."

너희들이랑 운동할 때도 그랬지만, 난 선수에게 진심을 가지고 있다.

진짜 이 선수들이 더 강해지면 좋겠고, 더 잘되면 좋겠고. 어떻게든 발전된 방향으로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누가 봐도 아니었다.

그런 이상한 흐름에 내가 끌려가고 싶진 않았다.

"하여간 자존심 존나..."

"자존심 존나가 왜 나와 여기서."

"동민아."

"그래. 왜 그래. 안 그러기로 했잖아."

"어이. 구마하."

"어. 말해."

"너 나한테 단거리로 옮기라면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나냐?"

"..."

"좀 참고 가자. 어? 사람이 그렇게 매번 올곧고 바라야만 하는 거냐고. 그렇다고 연맹이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

"너네도 있는데. 다빈이도 있어."

"...최다빈은 왜?"

"말했잖아. 7종이 될 정도면, 다른 종목도 훈련이 가능하다고.

그런데 그런 거 다 배제하고 다빈이 떡하니 올려져 봐. 걔랑 내가 사귀었던 거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고. 아니 이미 많이들 알고 있겠지. 우리 고등학교 때 선수들 시니어 있으니까. 그럼 무슨 말이 돌겠냐? 나를 떠나서 걔는 여자애가 뭔 욕을 먹겠냐고."

오늘에 와서야 세상이 주목하고 부와 명예를 누리는 나지. 오랜 시간 비루하게 살며 세상을 미워하던 날이 적지 않다.

난 인간들의 삐뚤어지고 그릇된 시기와 질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도 그랬고, 나도 그렇게 잘나가던 애들 미워하고 부러워하면서 뒤에서 별말 다 떠들고 다녔으니까.

당장 가까운 혜정이만 하더라도. 걔는 날 몰라도 난 걔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던가.

사람 이야기서도 그럴진대. 승부. 운동. 스포츠.

허우... 빠지는 게 낫다.

"그래서 우리 피한 거냐?"

"그래. 근데 씨발 지성이 이야기가 그렇게 돌 줄은 몰랐네."

"아니, 야 근데 그건 좀 이상하다. 지성이는 9초를 뛰는데, 왜 걔가 대표 팀에 못 들어가?"

"그 형은 선발전에서도 큰 성과 없었잖아."

"그러니까. 진수야 기억나지? 우리 그때 호텔에서 자기 전에 얘기했던 거."

"...정말 딱 그런 일이 벌어졌네."

"관두는 게 맞았어. 난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니네도 나랑 거리 두고. 어쨌든 너희는 정당하게 누구 욕먹을 거 없이 자기 실력으로 그 자리 차지한 거야."

진운이와 진수를 돌아보고 옆에 앉은 동민이의 허벅지를 철썩두드렸다.

"잘해라 새끼들아. 알겠지?"

"후우..."

"금메달이다. 니네 셋이 딱 메달 따는 거야. 원래 우리나라 육상은 아시안 게임이 주 무대였다고."

"새끼. 지는 올림픽 선수다 이거지?"

"니네도 올림픽까지 나가면 되지. 2년 뒨데. 지금을 발판으로 해내는 거야. 난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어."

친구들이 다들 조용해진다.

그러다 동민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진짜 은퇴하려고?"

"응."

"...니가 트랙을 떠난다고?"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

"하아 씨발 이 새끼..."

진수도 묻는다.

"너. 화 풀리면 돌아올 거 아녔어?"

"내가 화나서 이러는 게 아니야. 따져 보면 나한테 잘못한 건 없잖아. 그런데 내가 왜 화를 내."

"야... 넌 나 은퇴한다고 했을 땐 말리고 잡았으면서 너는 왜."

"니네는 아직 갈 길이 남았잖아."

마직막으로 진운이까지 물었다.

"그럼 넌 다 했다는 거야?"

"이번에 토리노에서 스테판이랑 만나고 그런 생각이 조금 들긴 했었어."

금메달은 멋진 피날레다.

아니 어떤 메달이든 선수가 단상에 올라 칭찬을 받았다는 건, 인생의 방점을 찍었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메달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운동을 그만둔 선수의 다음은 어떤 인생이 펼쳐지는가?

내가 생활 체육이나 엘리트 체육에 관한 고민에 깊게 빠졌던건, 그런 부분도 담고 있었던 거 같다.

"니네랑 운동해서 좋았어. 잘돼서 너무 좋고."

"죽여 버린다. 그만해라..."

"아 왜 울어 이동민 병신아. 쪽팔리게."

"닥치라고 씨발놈아..."

진수와 진운이도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려고 모인 건 아닌데, 졸지에 마하 송별 파티가 됐네..."

"그러니까..."

"뭐 어때. 빠르든 늦든 언제든 은퇴란 오는 건데."

"너 나가면 메달이 몇 개가 빠지는 거냐."

"니네가 채우면 되지. 100, 200, 800. 딱 맞네."

* * *

며칠 뒤.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 됐다.

아는 사람들만 알고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는 자리였다.

일부러 대중교통을 이용해 공항을 나갔고, 가끔 쳐다보는 사람들은 있지만 대부분 모르는 척 시선을 피해 주셨다.

그런데. 공항에 나가자 두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냐?"

"형들한테 물어봤죠."

"...넌 어떻게 왔어?"

"얘한테 물어봤다."

지성이와 다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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