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로미오. 야수와 줄리엣 (8)
"근데 마하 형. 미국에 뭐 있어요? 왜 유명한 사람들은 다 떠나면 미국으로 가?"
"야 이 새끼야. 날 무슨 3류 정치인이랑 비교하냐? 감독님이 그리로 오라잖아."
"가서 뭐 할 건데?"
"뭐 그냥..."
"뭐? 왜 내가 묻는 말엔 대답 안 해?"
애들과 공항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 갔다.
지성이 이야기에 대답해 주자 다빈이가 묻는다.
난 그냥 얘가 눈앞에 있는 게 영 어색하다.
"그러는 넌 미국 가서 뭐 했냐?"
"운동했지. 하긴 뭘 해."
"7종은 왜 시작한 거야?"
"야. 내가 먼저 물었어."
그리고 지난번 잠실에서도 그랬지만 애가 성격이 조금 바뀐 거 같다.
까칠하고, 짜증이 많고. 뭔가 화가 많이 들어찬 거 같은.
"니네 오늘 왜 나왔냐?"
"그냥 형 간다니까."
"나 영영 떠나는 거 아닌데. 한 두 달 쉬고 거기서 일 보고 그러고 올 건데. 뭘 송별까지."
"그러니까. 니가 미국에서 할 일이 뭐가 있냐고? 이런 중요한 시점에."
"아 진짜... 광고도 있고. 뭐 행사도 있다 그러고. 늘 똑같지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게."
"연예인 다 되셨네..."
"하 나 진짜. 야 최다빈이. 넌 왜 아까부터 나한테 까칠하게 구냐?"
애들이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간, 최다빈. 머리가 짧아져도 예쁜 애들은 뭘 해도 잘 어울리는구나.
뭔가 예전엔 귀여웠다면 지금은 보이시한 매력이.
"뭘 쳐다봐 짜증 나게."
"머리. 짧은 것도 잘 어울린다."
"장난하니?"
"지성아. 얘 왜 이래?"
"몰라요. 왜 나한테 그래요?"
"니네 오면서 뭐 있었어?"
그러자 다빈이가 한숨을 훅훅 내쉬면서 말한다.
"삼촌한테 얘기 들었어."
"..."
"참고로 우리 삼촌은."
"알아. 최일묵 코치님. 먼저도 잠깐 통화 했었어."
"...너 대신 지금 대표 팀 감독 맡으셨어."
"잘됐네. 축하드린다고 전해드려라."
"야. 삼촌이 너한테 얼마나 기대가 컸는지 알아?"
"글쎄. 난 모르지. 말을 안 했는데."
지성이가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형. 근데 내가 볼 때 지금 형이 누나를 화나게 하고 있어요."
"내가? 아닌데. 내 시간 방해하는 건 얘잖아."
"뭐...?"
"넌 그렇다 치자. 최근까지도 가까이 지내고 있었으니까. 근데 얘는 뭐야?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지금 지 성질만 부리고 있잖아.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 줘야 하는데?"
"에이. 사람 앞에 놓고 뭘 그렇게까지 말해요..."
"팩트잖아!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고. 말도 없이 나타나고. 한마디 인사도 없이 짜증 내고 화내고 지 성질부리고 있고. 지네 삼촌이 이렇다 저렇다 자기 입장만 고집하는데. 내가 얠어떻게 좋게 봐야 돼?"
다빈이도 꽤 충격적인 반응인지 눈이 똥그래지면서 입이 다물어진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으면 감정 빼고 말해. 뭐야? 왜 왔어?"
"...내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아니냐? 올림픽 끝나고 애가 종적을 감췄더만. 맞지 지성아?"
"그건 형이 맞아. 누나 갑자기 사라져서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데."
"..."
"뭐야 너? 아니 대체 7종은 왜 시작한 거야? 그게 너한테 맞는 운동이라고 생각해?"
가까이서 만나니 다빈이의 내공이 보인다.
뒤틀려 있다. 틀어져 있어.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에 온갖 악재를 안고 있다.
지금이니까 버티지, 만에 하나 부상이라도 터졌다가 선수 생명이 위험하다.
복합 경기는 나도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분야였다.
남자는 열 종목. 여자는 일곱 종목. 한 사람의 몸에 그 많은 능력을 집어넣어야 된다.
그것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세계 최정상을 가리는 무대에서 성과를 보여야 하는 경기였다.
그냥 뛰기만 하는 것도 힘들고 지치는데,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복합이거늘... 왜 그런 걸...
"니가 무슨 상관인데."
"그래. 그렇다고 하자. 보자. 난 슬슬 들어가서 면세점 쇼핑이나 돌까? 지성아 만나서 반가웠다. 잘 가."
"형...?"
"뭐. 용건 끝났잖아."
능청스레 시계를 보면서도 신경은 최다빈한테 몰려 있었다.
나도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다. 좋아했던 애라고. 내 첫 여자 친구야. 관계는 끊어졌어도 소중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
나도 속상한 마음에 더 화가 나고 있었다.
지한테 맞지도 않는 힘든 운동을 하는 것도 그렇고, 박문기나 최일묵 코치 같은 사람들한테 휘둘리는 것도 그랬다.
존재만으로 만인에게 예쁘고 사랑받을 애가 왜 굳이 고통스러운 길을 가는지...
"야. 구마하."
"후우. 뭐. 왜?"
"...돌아와. 자존심 그만 부리고 삼촌한텐 내가 말해 줄게."
"말할 거 없어. 내가 선수단 나가고 은퇴 결정 한 건 자존심 문제도 아니고."
"..."
"너 방금 나한테 니가 무슨 상관인데 라고 그랬지? 마찬가지야.
내 문제 너가 상관할 거 없어."
"이 씨!"
다빈이가 눈앞에 있는 음료수 잔을 들어 나한테 뿌린다.
"아 누나!! 뭐 하는 거야!"
"하하하. 와... 지성아... 하하하. 우와~~!"
공항에서 주스 싸대기라. 이야~ 빡치면서도 뭔가 그림 같네.
"진짜 지성이 너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러면 또 이거 사람들 엄청 헛소문 돌 거 생각하면... 어우야..."
"후우... 형. 내가 볼 땐 형이 누나를 더 열받게 하고 있어요."
"야 인마. 지금 맞은 사람은 나야 넌 누굴 편들고 있는 거야."
성질을 못 이겨 씩씩거리던 다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끝까지 니 잘난 맛에 살아라."
"하하하! 다빈아. 뭔데 지금? 너 아직 나 좋아해?"
"..."
"저기. 그런 얘기 할 거면 나 빼고 둘이서 나중에..."
"미친 새끼."
다빈이는 시원하게 육두문자를 내뱉고 혼자 카페를 나갔다.
"진짜 다행이다."
"왜요? 뭐가?"
"너 있어서. 안 그러면 내가 여자 울리는 이상한 놈 될 거 아냐."
"그렇게 주위 평판 신경 쓰는 사람이 연맹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요...?"
"에이 씨 끈쩍거려. 가서 세수 좀 하고 가야지."
"진짜 이 형은..."
자리를 옮겨 게이트 앞에 가서 앉았다.
물론 세수도 했고 그럭저럭 옷에 묻은 주스도 닦아 냈다.
"아 씨..."
"또 왜요?"
"아까 얼음이 같이 튀어서 그러냐? 은근 얼굴이 아파."
"...그 덩치에 뭐가 아프다고."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젠장. 왜 와서 지랄인데?"
"누나 형 보러 오기까지 되게 아슬아슬한 표정이었어요."
"흠."
"난 다른 형들이 농담으로 그러는 줄 알았는데, 형 여자 그렇게 대하는구나?"
"안 그래. 쟤니까 그런 거야."
"왜요? 둘이 안 좋게 헤어졌어요?"
"그런 거 없어. 둘이 사귄 것도 예전 일이고."
"근데 왜 그렇게 사람 빡치게 만들어요?"
"야. 나는 감정 없냐? 나도 쟤 보면 속상해. 사람 걱정이나 끼치고. 찌그만한 게 성질만 괴팍해 가지고."
"저 누나 원래 그랬는데 뭐."
"아니야. 쟤도 둘이 있으면 안 저래. 애 착해. 지금 뭔가 있어.
엄청 꼬여 있다고."
"모르겠다. 두 사람 이야기는 두 사람이 알아서 하시고."
지성이가 출국장을 보면서 말했다.
"얼마나 있다 와요?"
"몰라. 조금 있을 거야. 잠잠해질 때까지는 사람들 보고 싶지도 않고."
"여름에 형들이랑 외국 갈 때 재밌었는데."
"추억같이 말하지 마라. 뭐 얼마나 지났다고."
"그래도 난 그런 게 처음이니까."
"뭐가 처음이야? 작년에도 세계 선수권 갔으면서."
"재밌게 운동한 거요."
언제나 최고였고, 늘 1등만 해 왔던 엘리트 선수. 지성이에게도 말 못 할 그늘이 있었다.
"형은 운동 재밌죠?"
"재밌지. 좋아 나는."
"난 솔직히 운동 그냥 하던 거니까 했지. 뭔가를 이룬다거나 해내고 싶다거나 하는 게 없었거든요."
지성이는 나를 만나고 패배를 경험하면서 목표가 생겼다고 했다.
"너도 나 이기고 싶었냐?"
"난 그런 건 없어. 뭔가 형은 좀 차원이 다른 존재 같다랄까...
아테네 끝나고부턴 더 그런 느낌이 강했고."
"새끼. 고맙다. 칭찬받는 기분이네."
"오히려 계주에서. 이번에 형들이 그랬잖아요. 일본이랑 중국꺾고 아시아 최정상이 되자고. 난 그게 좋았어."
"..."
"세계는 무리야. 근데 이건 현실 가능한 느낌이 드니까. 어렵지만 딱 뭔가 해낼 거 같은 레벨이랄까."
"너도 세계적인 선수야. 지레 자신의 가치를 낮추지 말아. 9초가 아무나 뛰는 게 아니야."
"그래서. 나도 그런 자부심이 있었는데. 처음에 대표 팀 안 됐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그땐 좀 충격이긴 했어요."
"씨발 미친 인간들. 뺄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지..."
"그러니까. 동민이 형을 빼야지. 왜 나를."
"야 인마. 동민이도 가야지. 선발전을 우승했는데."
"후후후. 내가 그 형한테 질 줄이야."
"다빈이가 그 얘기 안 하냐? 동민이한테 지냐고?"
"안 하던데. 그냥 아무 소리 안 했어요. 형한테 집중하고 싶었나 봐."
"나한테는 막 뭐라고 했으면서..."
"그만큼 기대치가 있는 거겠죠."
"어휴 다빈이 얘긴 그만하자. 없는 애 얘기해서 뭐 하냐."
"그래요 그럼."
지성이가 나를 보며 묻는다.
"형이 볼 때 나는 간절함이 없어 보여요?"
"다른 애들에 비해 승부욕이 덜하다는 느낌은 있어."
"그런가? 난 내가 되게 치열하다고 느껴 왔는데."
"그렇다고 안정적인 게 나쁜 건 아니야. 실제로 너는 느려도 꾸준하게 기록을 내고 있잖아. 그렇게 9초대에 들어왔고."
"한계지 뭐.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니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래요?"
"동민이가 지금은 나랑 똑같이 먹고 똑같이 운동량을 소화하잖아. 걔도 처음엔 울면서 밥 먹었어."
"울어요?"
"울었지. 새끼 땀이라고 하는데 눈이 시뻘게져 가지고."
다들 하도 내가 많이 먹는다고 하길래, 어느 날 한번 체크를 해보니 대충 만천 칼로리를 먹고 있었다.
그만큼 먹고 그만큼 운동을 하다 보면 누구든 실력이 는다.
물론, 애초에 그만큼 먹을 수 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몸을 키울 땐 우리를 사람이 아니라 갑각류라고 생각하고 해내는 것이다.
"생살을 찢고 근육을 단련하고. 그 과정에서 뼈를 더 단단하게 하는 거야. 그러면 누구든 나만큼 실력 낼 수 있어."
"하하하. 진짜 너무 쉽게 말하네."
"쉽다곤 안 했어. 어려운 거야. 그러니까 선수들이 그 단계를 가지 못하고."
"아무나 메달을 딸 수 없는 거겠죠."
"그래 맞아..."
"금메달이라..."
지성이가 슥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형은 원래 올림픽이 꿈이었었죠?"
"난 처음부터 올림픽 나가고 싶어서 운동했지."
"난 어려서부터 이두희 선생님이 목표였어요."
"아시안 게임이었냐."
"현실적으로 봐야지. 한국에서 올림픽 메달은 무리잖아."
"후후후. 아우 재미없는 새끼."
"100미터. 그리고 계주. 딱 그렇게 2개 받고 싶었는데. 그래서 군대 면제받고 선생님 하고. 애들 가르치면서 살고 싶었어."
"그럴 수 있어. 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능력이 있고."
"대표 팀도 못 들어갔는데 뭘."
"다음이 있잖아."
"형은요?"
"난 그만두고."
"그러지 마요. 아마 그렇게 쉽게 관두기 어려울 거야."
"나 은퇴는 연맹에서 흘린 기사야. 그쪽이 안 받아 줄걸."
"후후후. 과연 그럴까요?"
자기가 어려서부터 쭉 나름 이쪽 세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살아봤기 때문에 잘 안단다.
사람들 절대 안 그런다. 막상 중요한 순간 오고 결정적일 때 필요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 바꾸고, 다시 불러서 시합 내세우고 다 그런단다.
"100, 200, 400. 금메달 세 개. 아니 계주까지 네 개지. 그걸 놓친다고? 구마하를 뺀다고? 웃기지 말라 그래요. 헛소리들이야."
"너도 은근 냉소적인 게 있구나."
"경험이지 뭐. 그러니까 알겠죠? 너무 오래 있지 마요. 무엇보다 몸 관리 잘하고 있고. 분명 대회 가까이 오면 형 다시 부를 거야. 애초에 후보도 없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그러니까. 근데 계주는 나 혼자가 아니다. 니가 있어야 돼."
"모르지. 형은 그래도 선수단에 들어갔지만, 난 애초에 명단에도 없었다는데."
게이트가 열렸다. 가야 할 시간이 된 만큼 짐을 챙겨 일어났다.
"와 줘서 고맙다. 덕분에 재밌었네."
"나야말로 고마워요."
"뭘 인마."
"천하의 구마하가 나 하나 때문에 선수단을 빠졌잖아."
"하하! 애들은 미련하다고 하던데?"
"미련하지. 무식하고. 그래도 고마운 건 사실이니까."
지성이가 슥 다가와 안아 준다.
"먼저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진짜 고마워요."
"놔 새끼야 뭐 하는 거야 씨발 오글거리게..."
"하하하. 더 꽉 안아 줄까?"
"뒤질래? 미쳤냐? 죽고 싶어? 어디 남자 새끼가 내 몸에 손을대."
애를 떨구고 가방을 들쳐 메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야."
"응?"
"이번은 그렇다 치고, 먼저는 뭐냐? 뭘 얘기하는 거야?"
"2등도 잘한 거라고 해 준 거."
"..."
"그 말이 날 구원해 줬어."
"새끼. 지랄은... 간다."
"감독님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어."
한 손에 여권을 들고 줄을 서고 있었다.
주변이 다 외국인들이라 편하게 말했다.
"지성아. 난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알아요."
"9초를 뛰고도 1등이 아니라고 배제 받는 사회는 뭔가 이상해."
"안다고. 그러니까. 나도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 들고."
"너도 몸 준비하고 있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오케이. 여행 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