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로미오. 야수와 줄리엣 (12)
"대체 지도감독이 누구길래... 애들을 그렇게 내모냐."
"너랑 동민이가 특별한 거지. 모든 체고 시스템이 다 그래."
"대학도 마찬가지야. 뭐 대학은 안 그러냐."
"우리 학교는 좀 덜한데..."
"마하야. 쟤 원래 저래?"
"다빈이 뭐?"
"집중력 장난 아니다. 우리 온 것도 모르는 거 같은데?"
"그러게. 얼마나 멀리 떨어졌다고. 아까 우리 쪽 보지 않았나?"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닐까?"
"그럴 리가. 너도 있는데."
"...뭐 하나 빠지면 몰입하는 스타일이긴 했었지."
멀찌감치 떨어져 한참을 지켜보았다.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 건가? 아니면 오늘 해야만 하는 과제가 있는 건가? 진운이 말대로 다빈이는 우리 쪽을 보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학교를 대표할 입장은 아니지만, 조금 부끄럽네."
"왜?"
"그냥. 학생들은 다들 종강이다 뭐다 술 마시러 갔는데. 외부인은 쉬지 않고 운동하고 있고..."
"마하야. 쟤 성운 나왔지?"
"어. 근데 왜?"
"저 학교 출신들이 원래 저래. 우리 회사에도 성운 나온 누나 한 분 계시는데 젤 열심히 해."
"오~ 그 학교가 뭐가 있나?"
"나쁘게 보면 안 좋고, 좋게 보면 좋은 거지."
기연정이라고 있다. 예전 혜정이랑도 잠깐 인연이 있었던 키 큰 여자 단거리 선수다.
진수네 학교에서 스카웃 받아 성운으로 넘어갔던 친군데 지금은 은퇴하고 일반 체대로 진학해 선수를 그만뒀단다.
다빈이가 나온 학교는 대한 체고 못지않게 선수들의 승부욕을 자극하기로 유명하단다.
어쩐지. 귀엽게 생긴 애가 왜 그렇게 승리에 목이 마른가 했더니, 환경에 영향이 있었구나. 이유가 있었어.
"대학도 마찬가지야. 뭐 대학은 안 그러냐."
"우리 학교는 좀 덜한데..."
"니네는 체육대학이 아니잖아. 체육학과지."
그러고 보면 난 다빈이에 대해서 아는 게 많이 없구나.
만난 시간도 짧고, 그 짧은 시간도 서로에 대해 알거나 추억을 만들기보단, 어떻게든 한 번 하자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시간만 버렸으니까.
그것도 나보다 쟤가 더 열정적이었다.
생각해보면 여자친구라고 먼저 찾아온 것도 다빈이였어.
"욕심이 많아."
"누구? 다빈이?"
"어... 가만 보면 늘 나보다 더 열정적이었던 거 같아."
"그러니까 7종 같은 운동을 하겠지."
"단거리론 만족이 안 됐던 건가?"
"모르지. 가서 물어보자."
한발 한발 스탠드를 내려가는데 애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붙잡는다.
"야. 새끼야 너 어디 가?"
"뭐?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그냥 가? 나 오늘 쟤 보러 온 거야."
"가지 마. 애 집중하는데."
"그래. 진운이 말 들어. 쟤 지금 너 보면 좋은 말 안 나와."
"니네 모르냐? 쟤가 먼저 나 미국 갈 때 공항 찾아오고 그랬어."
"그건 그때지. 너 미국 가 있을 때 쟨 너 때문에 얼마나 욕을 먹었는데."
"몰라. 나 없을 때 일이야. 관심 없고."
"마하야. 다빈이 최일묵 조카라는 건 알고 그러는 거지?"
"야 씨발 그거야말로 무슨 상관이냐. 같은 대표팀 아냐? 응원해 줄 수 있는 거 아녔어? 나 북한 사람들이랑 동시 입장도 해 본 놈이야."
"그게 지금 왜 나와."
"주적도 한반도란 카테고리에 묶이는데, 같은 대표팀끼리 뭘..."
"최일묵이 근처에 있다가 너 보면 뭐라고 하려고?"
"인사드리면 되지. 다빈이 만나러 왔다. 식사하셨냐? 같이 저녁 드시겠습니까?"
"난 안 가. 가뜩이나 지금도 여러 가지로 복잡한데..."
"진수 너는?"
"나도. 인사나 전해 줘. 난 뭐 원래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알았어. 니네 여기 있어."
친구들을 뒤로하고 운동장 가운데로 느긋하게 걸었다.
그러자, 멀리선 못 알아보던 다빈이도 인기척을 느끼며 돌아본다.
"너 뭐야...?"
"나 온 거 진짜 몰랐어? 아까 저기 있었는데."
"..."
"후우~ 안 춥냐? 오늘 밤 영하로 내려간다던데."
다빈이 앞에 멈춘다.
이 추운 날씨에 이마, 목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니가 여기 왜 있어...?"
"너 보러 왔지."
운동을 멈춘 다빈이를 차분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숨을 뱉을 때마다 전신에 붉은 기운이 피었다 가라앉는다.
열정과구나. 동민이랑 같은 기운이야.
승부욕을 누르지 않고 계속해서 발달시키면 이렇게 되는구나.
"...무슨 일 있어?"
"없어. 그냥 너 보러 온 거라니까."
"너 혼자?"
"애들이랑. 저기. 진운이가 이 학교 다니고 있잖아."
다빈이가 멀리 친구들을 한번 돌아보며 고개를 돌린다.
"가. 나 훈련 중이니까."
"오~ 이게 원반이구나. 생각보단 무게가 있네. 1kg 정도 되나?"
"야 내려놔라."
경고하듯 말하는 다빈이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원반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뭐 하는데 지금? 내려놔."
"야. 나 한 번만 던져 봐도 돼?"
"..."
"어떻게 하더라? 대회 때 선수들 하는 거 봤는데. 이렇게 하는 거 맞지? 나 자세 괜찮냐?"
"내려놓으라고. 내 운동기구 니 장난감 아니야."
애가 씩씩거리며 다가와 손을 뻗는데, 장난스레 휙 뒤로 팔과 원반을 피했다.
그러자 다빈이 얼굴에 황당, 분노, 놀라움, 어이없음 등등 온갖 부정적인 기색이 피어오른다.
"야."
"뺏어 봐."
"미쳤어? 너 지금 나랑 장난해?"
"한 번만 던져 보자. 어? 나도 필드 종목 관심 있었단 말이야."
"후우... 아 짜증 나..."
좋아. 적당한 병신짓으로 어색함은 떨쳐냈고. 슬슬 본론을 꺼내 볼까.
목소리를 바꾸고 자세도 바꿨다.
다빈이도 갑자기 왜 나타나서 사람 미치게 하냐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애한테 다가가 원반을 건네주며 물었다.
"너 왜 혼자 있어."
"...그거 묻는데 왜 이렇게 목소리를 까는데?"
"대답해 봐. 이런 날씨에 왜 혼자 운동하고 있냐고. 다른 선수들은? 여자 원반도 있고, 남자 창 던지기도 있는데."
"훈련하는 날짜가 다르니까지."
"그럼 최 코치님은?"
"..."
"오늘 이 학교 애들 종강파티 한다던데, 설마 거기 가셨냐?"
"몰라. 내가 삼촌 매니저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그럼 내가 전화해서 물어볼게."
핸드폰을 꺼내자 다빈이가 성질을 부리며 말린다.
"왜 이래! 뭘 물어본다는 건데!!"
"왜 이런 날씨에 선수만 따로 굴리고 있는 거냐. 대표팀 관리 어떻게 하시는 거냐"
"너 지금 여기 싸우려고 온 거야?"
"아니. 대표팀 감독님한테 선수 자격으로 묻는 거야."
"하아... 미치겠다..."
"대답 안 하면 내가 전화해서 묻는다."
얘 입장에선 난감하겠지. 갑자기 나타나서 꼬장 부리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
하지만, 가까이서 애 몸을 보니 걱정이 아니라 분노가 피어오른다.
"너 병원은 가냐?"
"아 상관하지 말고 좀 가라고..."
"옷은 왜 벗었어. 운동복 입어. 날도 추운데."
"신경 쓰지 말고 가!! 좀!!"
진수와 진운이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달리기 선수 아니랄까 봐 두 녀석 목소리가 순식간에 뒤통수에서 울린다.
"야. 너 뭐 해!!"
"그래. 인사만 하고 간다며??"
애들이 다가와 말렸다.
일단 잠바부터 벗으며 다빈이한테 건네주었다.
"운동 그만하고 병원부터 가자."
"야. 김진운. 너 얘 왜 데리고 왔어?"
"나 아냐. 마하가 먼저 오자고 한 거야."
"후우. 그럼 좀 데려가라. 나 진짜 집중해야 돼. 오늘 할 거 많아."
다빈이가 돌아서며 운동기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한 발 먼저 가 기구도 챙기고 한쪽에 내려놓은 가방과 옷도 다 챙겨 들었다.
"가자. 나 여기 근처 예전에 감독님이랑 갔던 병원 알아. 거기 진료 잘해."
"..."
"마하야. 너 왜 그래?"
"그래. 너 오늘 여기 왜 온 거야."
"니네는 지금 얘 몸이 정상으로 보이냐?"
160 언저리의 키. 50여 킬로의 몸무게.
원래는 운동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근육이 잘 안 보이는 매끈한 몸을 가진 다빈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여성 보디빌더를 보는 것 같다.
다양한 운동 능력을 작은 몸에 집어넣다 보니 어깨니 복근이니 근육이 발달해 있는데, 그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너무 위태롭게 보였다.
끊어지기 직전의 실과 같은 느낌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사람의 내공을 보는 눈이 있기에 그 위험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야!! 쟤 좀 말려 봐. 쟤 왜 저래."
"마하야. 진짜 너 왜 그래. 지금 너무 일방적으로 이러고 있잖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쟤 안 멈춰."
"그걸 왜 니가 결정해. 교수님이나 다빈이가 알아서 하겠지."
"후우..."
몇 걸음 걷다가 멈춰 돌아보았다.
"야. 최다빈. 설마 싶은데. 니네 삼촌이 너한테 7종 하라고 한 건 아니지?"
"..."
"진짜 진심으로 말해 줄게. 잘 들어라. 너 지금 이 상태로 아시안게임 나간다고? 그랑프리도 어렵고, 전국체전 나가도 시합 소화할 수 있을까 없을까"
"그래 나 아프다!!"
다빈이도 욱하는 성질에 치여 목소리를 높였다.
"아파. 됐냐!!"
"어디가 아픈데."
"새끼야 좀 그만하고 미안하다고 그래..."
"그래. 사과하고 그냥 가자... 아 씨... 누가 볼까 무섭네."
안절부절못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다시 다빈이 앞에 가서 마주 보았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는데 무섭거나 불편하진 않다.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그래. 아프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끊어질 거 같고! 팔도 들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고! 생리도 멈추고 다 아파!"
"병원은 왜 안 가는 거야? 도핑 안 걸리는 진통제 많아. 그런 거 먹으면서 운동하면 되잖아."
"그럴 시간이 있으면 진작 갔겠지!"
엉엉 울면서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는 다빈이.
일단 잠바를 벗어 몸이 식기 전에 추위를 막아 주며 안아 주었다.
"엉 어엉~~ 운동할 시간도 없어... 대회는 다가오고 준비된 건 아무것도 없고..."
"그러니까 왜 안 하던 걸 시작했어. 복합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선수들도 어려워서 피하는 걸."
그 순간 다빈이가 빨개진 눈으로 슥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이라는 게 느껴졌다.
"...왜?"
"왜 돌아왔어... 간다며?"
"...니가 오라고 했잖아."
"너가 언제 그렇게 내 말을 잘 들었는데...?"
나구나. 얘가 7종을 시작한 건 잘은 몰라도 내가 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다빈이를 진정시키며 옷도 챙겨 입히고 운동기구도 챙겨 스탠드로 빠져나왔다.
"마하야. 이럴 목적으로 오자고 한 거야?"
"어. 그때 그 형님들이랑 치킨 먹으면서 얘기 듣는데, 애가 좀 위태로운 거 같더라고. 걱정돼서 한번 보고 가야겠다 싶었어."
"새끼야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을 하든가. 나도 오늘 쉬는 날인데..."
"미안. 차마 혼자선 애 보러 올 용기가 안 나 가지고."
"됐어. 야. 이야기 잘 하고 오고. 우리 먼저 선수촌 돌아갈 테니까. 가자 진운아."
"어. 마하야. 잘 달래 줘."
"그래. 다음에 내가 맛있는 거 살게."
"비싼 거로."
"한 번 말고 여러 번."
"알았다고. 새끼들아. 씨발 생각해 보면 밥은 맨날 내가 사는데..."
택시비까지 쥐어서 친구들을 보내고 다빈이에게 찾아왔다.
애가 통곡을 하고 난 다음이라 그런가, 얼굴이 멍하면서도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병원 가자. 늦긴 했지만 뭐 부탁해 보면 될 거야."
"...나도 맛있는 거 사 줘."
"병원부터 갔다가."
"배가 더 고파... 진짜로... 뭐라도 좀 먹고 싶어..."
"좋아. 사 줄게. 뭐 먹을래?"
"치킨."
"맛있는 거 먹자며? 닭가슴살 많이 먹을 거 아냐."
"그냥 치킨이 너무 먹고 싶어. 치킨 안 먹은 지 1년이 넘었어..."
"알았어 가자."
차에 태워 움직이니 어디 가는 거냐고 묻는다.
"성남."
"...서울에 차고 넘치는 게 치킨집인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얼굴이 좀 팔린 인물이라. 그리고 너도 지금은 아는 사람들은 좀 알고. 너랑 내가 치킨집 가면 그게 더 문제 아닐까?"
"..."
"친구들이랑 가는 가게 있어. 믿을 수 있는 곳이야. 송파에서 성남 뭐 얼마나 멀다고. 좀 자."
"차 좋다."
"그냥 차야. 애물단지고. 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