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로미오. 야수와 줄리엣 (13)
"이 씨..."
"병원부터 가자고 했잖아."
"에이 씨..."
"내려. 괜찮아. 믿을 만한 병원이야."
아무리 내공이 발달하고 외공이 강건해도.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 몸이 쑤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무리하게 참지 않고 바로 성남에 잘 가는 정형외과를 찾아가 약도 처방받고 물리치료도 받는다.
선수들은 병원을 잘 선택해야 한다. 단순 감기약 하나도 도핑이 걸릴 수 있어 진짜 약 처방에 민감하게 반응을 해야 하니까.
여긴 믿을 만한 곳이었다. 믿을만한 선생님이고.
그런 분이 다빈이 엑스레이를 보시며 안타깝다는 말씀을 하셨다.
"더 정확한 건 정밀검사를 해 봐야겠지만..."
"어떤데요?"
"몸이 많이 상했네요. 당장 대학병원을 가서 검사 받으라고 소견서 써 주고 싶은데."
"죄송해요. 지금 시기가..."
"그러니까요. 최다빈 선수 맞죠?"
"저... 아세요?"
"하하. 내가 마하 이 친구 어릴 때부터 봐서. 관련된 기사는 자주 찾아보거든요."
"내 팬이셔. 저기 뒤에 책장 봐 봐. 내 사진 걸려 있잖아."
"뭐야 저게... 너 저런 거 하고 다녀...?"
"왜? 이 동네에서 내 사진 안 걸린 상점 병원이 없어!"
"맞어. 저쪽 아래 부동산 사장님도 가지고 계시지 아마?"
"거긴 친구네 부모님이 하시는 데라서..."
약을 처방받고 남수네 아파트 앞에 있는 단골 치킨집으로 차를 몰았다.
시가지를 지나가는데 다빈이가 창밖을 보고 있다.
"..."
"뭘 그렇게 봐?"
"그냥. 이 동네 오니까 기분이 좀..."
"지금 가면 노래방도 퇴짜 안 맞을 건데."
"맞다. 너랑 그런 일도 있었지."
짧아도 할 건 다 했던 우리였었다.
추억이 아주 없는 게 아니다. 대부분 지방 경기장이거나 숙소로 잡은 모텔 그런 데라 그렇지. 찬찬히 따져보면 우리도 이런저런 작고 소소한 기억들이 있었다.
다빈이가 성남 놈들과 같이 갔던 패스트푸드점을 손으로 가리킨다.
"저기도 니 사진 걸려 있어?"
"없어. 대기업은 광고비 받아야 사진 줘."
"그게 뭐야... 돈에 미친 사람 같아."
"뭐가? 당연한 거야. 너도 잘 알아 둬. 선수도 초상권 있고, 몸값은 매니지먼트랑 상의해서 결정해야 하는 거고."
"내가 그런 게 어딨냐..."
"없으면 물어봐. 연맹이 시킨다고 마냥 끌려다니지 말고."
"..."
"모르면 당하는 거야. 감독님이랑 나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저기 다 끌려다니고 얼굴마담 하고 그랬는데, 그것도 원래 다 돈 받고 가야 되는 자리였어."
"이 나라에서 그렇게 했다간 매장당하지."
"차라리 매장당하는 게 나. 누구 인형같이 휘둘릴 바에는."
치킨집에 도착했는데 다빈이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아니야. 경험에 의해서 해 준 말이야."
"..."
"가자. 배고프다며. 너 아까 엑스레이 찍고 있을 때 사장님한테 전화했어."
사장님이 마련해주신 가게 구석에 자리를 잡자, 기름이 줄줄 흐르는 치킨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사장님. 몇 마리 더 튀겨 주세요."
"그래야지. 근데 애들도 와?"
"아니요. 둘이 먹을 거예요."
"으음. 여긴 누구셔?"
"아. 이번 대표팀 선수예요. 친구요."
"하하! 이러고 있다 또 스캔들 나는 거 아냐?"
"하하하... 치킨 맛있게 부탁드려요."
사장님이 주방으로 돌아가자 다빈이가 샐쭉하게 쳐다보며 말한다.
"왜 저러셔?"
"친해서 그러지. 자주 와. 맛있어 여기."
"...그 스튜어디스 말하는 건가?"
"무슨 스튜어디스?"
"너. 작년에 비행기. 인터넷에 올라왔던 거 있잖아."
"허기진가? 애가 헛소리를 하네. 먹어라. 어? 먹어. 빨리."
포크로 닭다리 하나를 푹 찍어 다빈이 얼굴에 들이밀었다.
애가 막 짜증 났다는 듯 휘적휘적거리면서 거부하더니 잠시 주저하고 있다.
"..."
"먹어. 괜찮아."
"꿀꺽. 나도 먹고는 싶은데."
"다빈아. 이 치킨 먹어서 지금 너 몸 무너질 거 없어. 오히려 먹어야 힘이 날 거야."
"...왜?"
"아까 그 선생님도 그렇고. 내가 그래도 몸에 관해선 책도 많이 보고 나름 공부도 하거든."
"니가? 너 맨날 여성잡지만 읽지 않았어?"
"아. 진짜... 언제 적 이야기를..."
"섹스칼럼만 골라 읽고 그랬으면서..."
학생 때 사귀다 헤어진 전 여친을 만나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뭔가 쪽팔리고 숨기고 싶은 많은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걸 굉장히 어렵지 않고 스스럼없이 꺼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즉, 성남 머저리들과 다를 게 없는 존재라는 것.
가깝지가 또 먼 그런 관계.
나도 그래서 얘를 쉽게 마음에서 떨치거나 지우지 못한 거겠지.
아무튼간 일단은 식사다.
"지방을 먹어야 근육이 힘을 써. 지금 너 몸 아프고 힘 안 나는 것도 무리한 식단관리가 원인이 됐을 거야."
"...삼촌은 그런 말 안 하던데."
"다빈아. 니가 먹고 싶다며."
"그랬는데, 막상 보니까 좀..."
"먹는 게 무서워?"
"워낙 오래되다 보니까."
후우. 그러시다라. 그렇다면.
"오케이. 좀 재수 없게 말할게. 난 이렇게 해서 올림픽이랑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땄고, 대한 체대 육상은 아직 메달이 없어."
"..."
"누가 맞을까?"
그러자 다빈이도 주저함 없이 포크를 받아 닭 다리 한 점을 뜯는다.
"하아~ 허어~"
"하하하. 이야~ 리액션 봐라."
"와~ 우와... 하하!"
난 따로 다이어트를 하거나 식단관리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운동 초기 막 내공이 꿈틀대며 온몸의 생체에너지를 뽑아먹던 그때. 허기짐이 지나쳐 기절할 정도의 단계에서 먹던 음식 맛을 떠올리자면, 치킨은 가히, 내가 기억하는 모든 칼로리 폭탄류 음식들 중에서 최정상의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빵가루와 전분으로 이루어진 탄수화물 튀김 옷에, 기름을 머금은 연한 단백질.
그것을 한 입 베어먹을 때 입안에서 터지는 맛과 열량의 조화는 거의 파괴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빈이도 마구잡이로 양손에 치킨을 들고 먹고 있었다.
얼마나 참았겠냐. 여자들은 생리나 호르몬 작용이 있어서 더 이런 칼로리 음식이 몸에 당기는데, 그걸 지금까지 참고 있었다니.
조금 울먹이는 거 같기도 하다.
그만큼 행복하면서도 슬퍼 보이기도 했다.
"천천히 먹어. 더 있어. 더 나올 거고."
"헉. 욱. 웁! 우웁!!"
"어이구. 그것 봐. 사장님! 저희 맥주랑 콜라 좀 갖다 주세요!!"
다빈이 혼자 치킨 세 마리를 먹었다.
배가 고프다기보다 몸이 고파서 먹는 것 같았다.
"허어 후우. 아 배불러."
"진짜로? 순살로 더 달라고 했는데."
"더 먹으라고...?"
"먹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어. 근데 괜찮을까?"
"하하하. 지금 니가 먹는 치킨은 분식이 아니야. 약이지."
순살 한 마리를 더 먹고 난 다음에야 다빈이의 포크질이 멈췄다.
애가 뒤늦게 얼굴에 번들거리는 기름을 닦아내며 새초롬하게 군다.
"흠. 배고팠을 뿐이야."
"얼굴 들어 봐. 여기 아직 안 닦였다."
"..."
가게 티슈를 꺼내 다빈이 얼굴을 슥슥 닦아 주는데 애 눈빛이 그렁그렁해진다.
"뭐?"
"...왜 잘해 줘?"
"뭘 잘해 줘. 그냥 매너지."
"...너 왜 나 모르는 척 안 했어?"
"언제? 잠실에서? 내가 널 왜 모르는 척해야 돼?"
"그냥. 우리 헤어졌으니까."
"무슨 논리냐? 헤어졌으면 끝이야? 그리고 헤어진 것도 뭐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내가 싫으니까 끝내자고..."
"야. 아니야. 얘가 기억이 완전 뒤틀려 있네."
사람이 싫은 게 아니었다. 그냥 서로 간에 밸런스가 맞지 않았을 뿐.
"나 너 좋아했어."
"..."
"개인적으론 속도를 나한테 맞추지 못한 게 아쉽지. 넌 그냥 뭐랄까... 아무튼, 그랬다면 끝날 때 끝났더라도 그렇게 끝내진 않았을 거야."
"너랑 하는 게 좋았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준다.
다빈이도 아직 테이블에 남은 치킨 한 조각을 포크로 쿡 찍으며 말했다.
"지금 1년 만에 먹는 이 치킨 맛 못지않게, 너랑 있는 게 좋았었어."
"그래서 치킨은 섹스다 라는 말이 있는 건가..."
"뭔 소리야?"
"김태윤이 언제 그러더라고."
남수 군대 가기 전, 잠깐 친구들과 통화를 했었다.
하필 내가 미국에 가 있는지라 따로 송별회를 못 해 주고 그냥 돈만 부쳐 줬는데, 그때 남수랑 인사하는 가운데 김태윤이 술에 취해 핸드폰을 뺏어 들며 말했다.
"니네만 섹스 해 봤냐? 나도 해 봤다. 치킨이 섹스다 라고."
"무슨 소리야...? 나 진짜 이해가 안 돼..."
"있어. 애가 대학생 되더니만 여자에 미쳤어."
"후후. 친구들 잘 지내?"
하나하나 근황을 알려주며 주제를 확장시키는 가운데 다빈이가 물었다.
"그 파트너라는 애는? 걘 어떻게 지내?"
"다빈아 너... 너 미국 가서 내 생각만 하고 지낸 거야?"
"후후후. 어. 맞아."
"아니. 농담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해?"
"야. 2년밖에 안 됐어. 뭐 얼마나 오래됐다고."
"7종은 나 때문에 한 거지."
앞뒤 맥락 없이 툭 질문을 던져보았다.
다빈이의 동공이 흔들린다.
빙고. 역시 그랬구나.
"왜?"
"..."
"말해 봐. 왜 그랬어? 내가 너한테 뭘 어쨌다고?"
"흐음..."
"우리 헤어진 거 때문에 그랬던 거야?"
"후후후. 하하하. 아하하하~"
그녀가 목을 절레절레 흔든다.
무슨 뜻일까? 싫다? 밉다? 못 당해내겠다?
뭐가 됐든 단단하게 감춰져 있던 그녀의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너 진짜 많이 변했다?"
"2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지."
"...뭔가 기사로 보던 거랑 다른 느낌인데?"
"내 기사 많이 봤어?"
"봤지. 안 볼 수 있나. 어딜 가나 나오는데. 신발을 사러 가도 나오고 운동하러 가도 사람들 니 얘기 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주저하는 다빈이에게 맥주잔을 내밀며 건배를 해줬다.
"얘기해 봐. 진짜로."
"...넌 내가 이 운동 하는 게 그렇게 싫어?"
"다른 종목이라면 뭐라고 안 했을 거야.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각 운동엔 그에 맞는 체형이라는 게 있어."
"키 작은 사람도 NBA 선수 하는 사람들 있어."
"대신, 그 선수는 다른 선수들 곱절 이상의 고생을 해야지."
여리고 귀여운 외모에선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미친 승부욕과 근성을 가진 최다빈.
말린다고 들을 애가 아니다. 그런다고 시작한 걸 멈출 성격도 아니고.
끝까지 가겠지. 아마 불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무너지겠지.
이기심일지도 모르지만 뻔히 보이는 미래가 있기에, 다빈이를 걱정하는 내 마음을 덜어내고 싶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게 가장 컸었다.
"너 지금 위험해. 아까 선생님도 그러시잖아. 넌 지금 뭔가 생명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운동을 하고 있다고."
"..."
"운동이라는 게 그래. 당장은 모르겠지만, 나도 그랬던 적이 있어 시합 중이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까매지면서 그대로 쓰러지는데."
"알아. 봤어."
"진짜 기절하고 그다음에 기억이 없어."
"안다고."
"...어?"
내 얘기에 치중하다 보니 잠깐 다빈이가 건네준 추임새를 못 들었다.
"너 방금 뭐라고?"
"봤었다고."
"뭘?"
"너 기절하는 거."
"..."
뭐라는 거지? 나 기절한 건 아테네 100m 준결승 때 이야긴데.
"그거 중계 안 했는데?"
"..."
"나 금메달 따고, 부랴부랴 결승전 영상만 녹화로 나간 걸 니가 어떻게?"
기사로 봤다는 걸 말하는 건가? 그런 거겠지?
기사로는 나갔다.
준결승에서 컨디션 저하로 쓰러진 상태에서도, 역경을 딛고 일어나 기적을 달성한 구마하 선수.
관심도 없던 상황에서 뒤늦게 있는 설레발 없는 설레발 치며 언론이 기사를 작성했지만, 아무도 그 시합을 본 사람이 없기에 기절한 내용은 짧게 다뤘었는데.
"직접 봤었어. 경기장에서."
이게 무슨 소리냐...
경기장에서라고?
"어느 경기장?"
"아테네지 어디야."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눈을 따라가 마주 본다.
"니가 거기 왔었다고??"
"..."
"너 아테네 왔었어? 진짜로?"
손을 들어 차분하게 눈물을 닦아 내는 다빈이의 표정은 내가 그동안 봐 왔던 그 어떤 여자들의 표정보다 더 분하고 슬픈 느낌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를 향한 마음이 아니었다.
"그래 갔었다. 너 시합 봤고."
"...왜 말을 안 했냐."
"착각하지 마. 분명히 말하는데, 내가 힘든 운동을 택한 건 너 때문은 절대 아니야."
"그럼?"
"...그냥 내가 싫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