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로미오. 야수와 줄리엣 (14)
외로움에 미쳐 사랑을 갈구하던 나는 운 좋게 가문의 비밀을 전수받으며 스포츠 선수가 될 수 있었다.
강해진 몸과 단단해진 마인드를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혜정이를 시작으로 참으로 많은 여자를 안고, 그리고 또 알며 지내 왔다.
그래서 지금은 예전과 다르게 여자를 좀 안다고 자신할 수 있는 단계는 올라왔다고 자부한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감히 여자의 특성에 대해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는데.
여자는 절대 그 진실된 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하아..."
"왜 말을 안 했어. 아니 거기까지 왔으면 이야길 해야지."
"너 시합 중이었잖아."
"시합이 뭐? 내 친구들 다 시합 때 얼굴 보고 응원하고 생색 다 내고 다녔는데."
특히나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약점이 되거나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여자들은 입을 잠든다.
몰라. 같은 여자들끼리는 서로서로 얘기할지 몰라도. 적어도 내 앞에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어.
자존심인지 뭔지. 남자 앞에선 그렇게 하지 말라는 조상님의 유언이 있었는지.
한국 외국 장소와 시간을 막론하고 여자들이 진실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란 정말 드문 일로서.
그렇게 수빈이를 잃고, 혜정이와의 관계도 지지부진 진도가 이어지질 않고 있었다.
그나마 이혜정이고 나니까, 끝까지 물고 늘어져, 애걸복걸 물고 빨고 어르고 달래 화상채팅 하며 들은 게.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게 무섭고, 가까운 관계가 멀어지면 어떻게 될까, 상대방에 비해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한 게 싫다. 관계에 두려움이 있다. 이 정도지.
얼굴도 예쁘고, 학벌도 나쁘지 않고. 세상 부러울 거 없는 애가 왜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아직도 영 알 수 없는 영역에 놓여 있었다.
다빈이가 갑자기 바뀌게 된 계기.
그건 나 때문은 아니란다.
하지만 거기까지 왔으면서도 말을 안 했던 건, 내가 아주 영향이 없다곤 할 수 없을 거 같다.
화가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얘가 왜 나한테 그런 걸 말도 안 하고, 자기 인생을 바꿔 버렸는지.
그것도 좋은 쪽도 아닌 나쁜 쪽으로 바꾸게 된 건지.
왜 건강한 몸을 파괴적으로 내몰고 있는지.
오늘 얼마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진실을 듣고 싶었다.
"뭐야. 아니 너..."
"삼촌이랑 갔었어."
"..."
"후후. 그래. 얘기 안 했어. 꼭 해야 돼? 너 원래 시합 전에는 집중한다고 잘 만나려고도 안 하고. 나 피하고 그랬잖아."
내가 아닌, 다빈이의 입장에서 이야기였다.
그 시합은 올림픽이었고, 나는 원래 시합에 앞서 나 자신에게 더 몰입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지금보다 내공이 안정된 때도 아니었고, 명경지수에 돌입하려면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야 했을 때니까.
아무튼, 다빈이는 최일묵 코치님과 함께 우리 나이 고등학교 3학년. 그것도 선수에게 있어선 그 언제보다 중요한 가을 시즌에 아테네를 찾아왔다.
"그땐 삼촌. 너랑 내가 사겼다는 거 몰랐었어."
"...아니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오히려 너가 올림픽 나갔다는 것도 난 삼촌 통해서 들었어."
연맹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던 일이지만, 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다빈이는 내가 초청선수가 됐다는 사실을 듣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헤어졌든 뭐든. 엄청난 기대감을 안고 아테네로 갔단다.
올림픽이란 환경. 전 세계에서 몰린 인종과 관중들.
그들 가운데, 예선부터 승승장구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너무 신나고 즐겁고, 놀라면서 기쁘고.
한국 선수가 올림픽에서 이렇게 잘하는 모습에 감동을 느끼는 가운데.
"니가 내 남자친구가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
"..."
"알지? 나 그런 거 있는 거..."
"뒤처지는 걸 싫어했었지."
"...맞아."
우리가 처음 만난 고3 춘계대회에서도. 다빈이는 부상으로 또래 선수들에게 따라잡히고 뒤처지는 것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선수가 되고 나서, 승부욕이 강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왔었다.
상택이 형이나, 최근 동민이나.
해외 선수들. 유진 볼트도 그렇고.
나 역시 승부욕이 있다.
물론, 다빈이도 그런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준준결승 때부터 너 시합 보는데, 그런 마음이 들었어."
"뭐... 어떤 마음?"
"이기길 바라면서도 졌으면 좋겠다... 아니 여기서 지고 내가 가서 위로해 주고 싶다."
"..."
승부욕이 강한 아이니까 이해는 한다만.
우리의 관계나 추억에선 하지 말아야 하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끔찍하지?"
"뭐. 사람 마음은 사람 나름이니까. 나라고 매번 좋은 인간인 것도 아니고."
"난 되게 끔찍했는데..."
"...니가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거에?"
"응..."
응.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뱉은 짧은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겼는지... 그냥 묵묵히 들어주고, 휴지나 뽑아서 건네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넌...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지 몰라도..."
울먹울먹. 한 마디 꺼내고 울고. 눈물 닦고 다시 말하고.
다빈이는 그렇게 힘겹게 자기 고백을 이어 갔다.
"난 너 진짜 엄청 좋아했었거든?"
"..."
"정말로. 진짜야. 넌 내가 너무 달려들었다고 하지만. 난 그냥 그런 게 다 너무 좋고. 진짜 너랑 있으면 행복하고. 하고 난 다음에는 세상 아무 근심걱정도 안 느껴지고."
그랬던 상대를 보면서 느껴야 하는 승부근성.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안절부절 초조한 마음으로 남은 시합을 보는 가운데, 내가 준결승에 나왔다.
나도 주화입마에 빠지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시작부터 얼굴이 창백했었다. 달리기 전에 심장이 너무 아팠다.
관중의 시각에서도 그런 내 컨디션은 생생하게 전해졌단다.
"다행이다 싶었어."
"뭐가? 나 쓰러진 거 보면서..."
"미안. 근데... 그땐 정말 그랬어."
"후우... 나 그때 재수 없으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흑-!"
"울라고 하는 말은 아니고. 그냥 내 상황은 그랬다고..."
운 좋게 형을 통해 미쳐 날뛰는 내공을 겨우내 안정화시키고. 다음은 모두가 아는 대로 국가대표 구마하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진짜 세상이 변했더라."
"뭐 어떻게?"
"그냥. 나만 알던 애가. 불과 몇 달 전까지 나랑만 있던 애가 갑자기 모두가 알아. 학교 애들도 다 알아. 세상이 다 알아. 동네 주민들도 지나가던 아이들도."
민서가. 채민서가 그랬다.
세상이 내 이름을 크게 외칠 때마다 가슴이 저미는 것 같다고.
과거에 나한테 했던 잘못을 크게 꾸짖는 것 같았다고.
다빈이에겐 그게 다른 의미로 전달이 됐구나.
"미안."
"됐어. 니가 뭐가 미안해."
"어쨌든 그 일의 주체는 나니까..."
그렇게 떠나게 된 미국이었다.
스포츠의 나라로 간 다빈이는 그곳에서도 '구마하'라는 그림자를 떨쳐 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오히려 나를 보면서 자신이 느낀 그 끔찍한 승부욕에 잠식이 되어 갔단다.
"처음엔 그냥 운동 다 관두고 조용히 공부하고 그러려고 했었어."
"미국에선 어렵지. 나도 이번에 가 보니까. 거긴 운동 잘하는 게 벼슬이더만."
"재능을 커다란 가치로 여겨 주는 사회지..."
그곳에서 복합경기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시합에서 우승했을 때 World's Greatest Athlete 라는 칭호가 메아리를 치기 시작했단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코치를 찾아다녔고, 여자 7종 지역대회 우승자와 계약을 맺으면서 훈련을 시작했단다.
* * *
"잘 먹었어."
"우느라 먹은 기억이나 날까 모르겠다."
"당연히 나지. 오히려 소화도 다 됐는데?"
치킨집을 나와서 다시 돌아가는 길.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하니 집이 아니라 지금 혼자 지내고 있단다.
"왜? 대한 체고 너 살던 데서 가까울 거 아냐."
"그렇긴 한데, 부모님 있고 이러면 아무래도 운동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최 코치님이랑은 왜 그렇게 가까운 거야?"
"그냥 어릴 때부터 삼촌이랑 제일 친했어. 나 육상 시작하게 한 것도 삼촌이고. 친척들 가운데, 작은아빠라고 안 부르고 삼촌이라고 하는 것도 나 하나야."
"그렇구나."
예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걸, 오늘에 와서야 하나하나 알아 간다.
다빈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고, 그만큼 승부의 세계에 내몰려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들었다.
"다빈아. 엘리트 체육이라는 말 어떻게 생각해?"
"...넌 운동이 재밌어?"
"야. 내가 먼저 물었잖아."
"그러니까. 넌 운동이 재밌냐고. 엘리트 선수로서."
"아니. 그리고 내가 어떻게 엘리트 선수야."
"넌 지금 누구보다 엘리트 체육을 하고 있잖아. 연맹 대표팀. 다 넘나드는 너만의 영역을 구축하면서."
"내가 무슨. 그냥 개념 없다고 욕을 해."
승부. 시합. 우승. 그리고 메달.
다빈이 못지않게 엘리트 선수로 성장한 지성이도 매번 날 볼 때마다 형은 운동 재밌냐고 물어보곤 한다.
아니 그냥 어릴 때부터 운동했던 애들은 다들 그런다.
그리고 난 재밌다. 이만한 게 없다는 말을 해 준다.
앞으론 조금 겸양을 떨 필요가 있겠구나 싶었다.
이 친구들도 다들 좋고 재능이 보여 시작한 운동인데, 어느 한순간 이렇게 애증이 존재가 되진 않았겠지.
감정이 쌓이듯, 몰리다 보면 사람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냐.
"결국 나 때문이었네..."
"아니야. 달라. 너보단 내 안에 있는 이 마음을 없애 버리고 싶었어."
"승부를 하고 있는 거구나."
"응."
"그래서 빡신 운동을 한다라... 다빈아. 이러니까 운동하는 사람들이 무식하단 소리를 듣는 거야."
"야. 시끄러."
"뭐 어쨌든 책임감을 느끼고, 다시는 7종 하지 말라느니 그런 말은 안 할게."
"니가 상관할 문제 아니라니까."
"나 때문에 니가 고생길을 택한 건 맞잖아."
"아니라고! 너 아니야! 나야!!"
어이고 이 와중에도 결국 끝끝내 문제를 타자화하지 않고 자신이 끌어안는 건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고 해야 하는지...
"뭐든, 내 시합이 계기를 준 건 맞지 않어?"
"그럼 내가 널 계속 그런 마음으로 보고 있을까?"
"..."
"싫어. 내 감정은 운동과 별개로... 그렇게... 그렇게 운동이 내 감정까지..."
또 운다. 또 울어.
아이고 이렇게 여린 애가 왜 승부욕은 박상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커 가지고 괴로워하는지...
"감정까지 망치게 두고 싶진 않다고?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응. 내가 이겨 낼 거야."
여기 또 한 명. 어려서부터 주변의 기대를 모으며 천재라 칭송받던 선수가 있다.
미모와 재능을 갖춘 만큼 그녀는 자기와의 승부를 이겨 냈을 때 분명 스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위로와 응원이나 건네주는 수밖에.
"몸 관리 잘해."
"약 먹어서 그런가 지금은 아까보다 좀 안 아픈 거 같애."
"따뜻하게 해 주고. 봤을 때 시합이라고 불타는 건 잘 없어. 알잖아. 연습대로 나온다는 거."
"늦게 시작한 만큼 부족한 걸 많이 느껴."
"초조해 하지 말고. 잘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따듯하게 그래?"
"하하! 더 따뜻하게 해 주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지."
어느새 다빈이네 집에 도착.
혼자 대한 체대 근처 원룸에 지내고 있었다.
"집 이쁘다. 연맹이 해 준 거야?"
"아냐. 부모님이 해 주셨어."
"그래? 새끼들 내가 돈도 많이 줬는데. 이왕지사 간판 선수로 키울 거면 집 좀 좋은 걸로 해 주지."
"..."
"농담이야. 나 연맹에 준 거 없어."
"마하야."
"그냥 상금조로 주면서 기부금으로 알아서 빼 가는 얼마가 있지. 근데, 그런 건 원래 다 주고받는 거라고 감독님도 말씀하시고."
"나 추워."
음?
뭔가 뉘앙스가...
"춥다고?"
"응.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어?"
"..."
"더 따뜻하게 해 주지 못해 안타깝다며."
"...하하."
"요즘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
보자. 보소. 흠. 엄밀히 말하면...
"아직은 없어."
"누구 있긴 있구나."
"아니 근데, 걔도 뭐 요즘 연락 잘 없고... 뭐 원래 나 운동할 땐 연락 잘 안 하는 애긴 한데."
"그 파트너?"
"하하. 야 너 왜 자꾸..."
"아무튼 지금은 없다는 거네."
보자. 애들이 외박신청 해 줬겠지?
"오줌 좀 마렵긴 하다. 차 그냥 여기 세우면 되나?"
"저기 아래. 방문증 써 놓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