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68화 (268/401)

손에 손잡고 (3)

"아이고. 한 대표. 결혼하고 망명했다는 말이 돌던데 어떻게 또 이렇게 만나네?"

"이제는 망명까지 갑니까?"

"이 사람아. 신혼여행을 그렇게 오래 나가 있는 사람이 어딨어. 그것도 대표라는 양반이."

"아니 다들 언제부터 그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았다고..."

아시안 게임 개막 하루 전. 한상률은 임한기 기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가기 전에 마하는 봤어?"

"전화만 했어요. 서로 바빠서."

"그걸로 끝이야?"

"끝이죠 뭐. 마하나 저나 지금은 각자 할 임무가 있는데요."

"안 가 볼거야?"

"제가 가서 뭐 합니까. 코치진 다 있고, 마하도 이제는 제 앞가림 잘하고 있는데."

"걱정 많을 줄 알았더니 은근 태연한걸?"

"기자님. 녀석은 이미 어른이 됐어요. 걱정은 들어도 제가 나설 건 별로 없다고 봐요."

"자유 방임이 한 대표의 스타일이다 이건가?"

"전 선생 할 때도 그랬어요. 애들은 누가 옆에서 자꾸 뭐라고 해봐야 어긋나기만 하지. 놔두는 게 젤 좋아요."

"그럼 오늘 시간 많겠네. 나 이따가 천병욱 전무님 만나러 가는데 거기 같이 가."

"천병욱 선생님이요?"

"응. 한 대표랑 가깝지 않아? 같이 가서 이야기 좀 듣고 오자고."

"은퇴한 양반은 만나 뭐 하시려고요?"

"마하 은퇴 관련 이야기 정리하는데. 연맹 쪽 이야기가 살이 없는 거 같아서."

"선생님 마하 편이었는데?"

"글쎄? 내가 취재하면서 느낀 건, 천 전무님도 결국 연맹 입장이 아니었을까 싶었어."

"에이 비약이죠. 선생님이 마하 얼마나 아끼셨는데."

"그러니까 궁금하면 같이 가서 들어 보라고. 주례 선생님이셨잖아.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 거 아냐?"

"주례 뭐... 그냥 부탁할 사람 없어서 부탁한 거지."

결국 한상률은 임한기에게 붙잡혀 천병욱을 찾아갔다.

핼쑥한 병자가 두 사람을 맞이해 준다.

"선생님 아니 얼굴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변하셨어요...?"

"이놈아. 나보다 너 이민 갔다는 소문이나 해명해 봐라."

"허허... 선생님은 이민이라고 들으셨어요?"

"전무님.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요즘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들어오시죠."

세 사람은 편안한 사담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눴다.

임 기자도 준비한 질문을 하나씩 묻고, 천병욱도 굳이 민감한 대답을 피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럼 전무님은 처음부터 박문기 회장의 방침에 반대하신 건 아니셨던 거네요?"

"그렇죠."

"왜 그러셨어요?"

"뭘 말이냐?"

"아니. 선생님만 안 그러셨어도.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일이 되진 않았을 거 잖아요."

"인생 기분으로만 살 수 있나. 박 회장은 박 회장의 입장이 있고 선수들은 선수들의 입장이 있었으니."

"선수들이라기보다는 구마하 선수 하나의 반발이었죠."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매번 그렇게 마하 우리 마하 하시던 분이, 왜 연맹 입장을 더..."

"넌 한국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다 끝난 이야기 왜 지금 와서 관심이냐?"

"질문도 못 합니까..."

"후후. 잠깐만 한 대표. 전무님. 그럼 제가 질문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기자님이라면 뭐든 답해 드려야죠."

"차별을..."

천병욱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는 어느 정도 이런 사태가 벌어지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일선의 반발은 있겠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믿을지 모르지만, 마하를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선생님 판단이 마하를 더 힘들게 했잖아요."

"그래도 이 녀석은 한국 스포츠의 보물 같은 존재니까. 난 아직 우리 체육계가 구마하 같은 선수를 품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마하 하나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현재 한국 스포츠의 역량은 벅차다.

그것이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켜본 연맹 전무의 입장이었다.

"특혜를 용인할 수밖에 없는 선수였다 이 말씀이시네요."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동하계 메달부터 시작해서 스키나 육상. 첫 메달이 벌써 몇 개입니까?"

"그래도 선수 본인은 그런 걸 싫어했던 거 같은데요."

"보통 선수들은 특혜를 싫어하지 않죠. 전 마하가 그렇게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던 건 다 이 녀석 때문이라고 봅니다."

천병욱이 든든하다는 듯 한상률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런 선수가 스스로를 특별하지 않게 여길 수 있는 건 다 한 감독의 지도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 왜 갑자기 저를 끌어들이세요..."

"좋은 사제지간이네요."

한상률도 난처하다는 듯 스승을 향해 물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두희한테도 늘 말했다. 너도 상률이같이 선수들 편하게 대해 주라고."

천병욱은 한상률이 구마하에게 하는 모습을 그가 선수들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보았다고 말해 준다.

"가끔 마하가 운동하는 걸 지켜보러 간 적이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들의 땀과 노력에서 비범한 결과가 탄생하고 있었지."

"열심히 했다고 하더라고요. 과정 속에서 감정도 많이 상했고..."

"그래도 해냈지. 솔직한 말로 마하는 결과를 통해서 보여 줬어. 우리의 시각이 짧았다는 것을..."

"그럼 전무님은 이동민 선수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달라지셨다고 봐도 될까요?"

"그렇죠. 더는 구마하만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더 넓은 세계가 열렸구나 라는 믿음이 생겼던 거죠."

그때부터는 연맹의 편에 서지 않았다.

마지막 모든 것을 내걸고 선발전을 열었고, 기대해 마지않던 9초대 선수 세 사람을 만들어 냈다.

"마하의 대표 팀 은퇴에 대해서도 이제는 크게 관여하지 않습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선수나 연맹 서로에게 서로가 독이 되고 있으니까요."

"확실히. 몸에 좋은 약도 과하면 사약이 되는 법이죠."

"기자님이 저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으셨는지는 몰라도, 전 이제 다 내려놓은 마당에, 그냥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육상계를 응원해 줄 마음만 가지고 있습니다."

천병욱을 만나고 나온 두 사람은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

"뭔가. 떠나기 전 모든 걸 정리하는 사람 같았어."

"술도 잘 안 마시던 양반이 간이 왜 그렇게..."

"걱정돼? 한때 미워했던 만큼 이제는 애증이 깊어진 건가?"

"모르겠어요. 그냥 사람 관계라는 게 쉽게 끊어 내기가 어려울 뿐이죠."

"한 대표가 대표 팀 나간 게 방콕 전이었지?"

"네. 그쯤이었죠. 97년 겨울..."

"그때도 아시안 게임이었네. 한 대표가 계속 운동했다면 황영조 선수 이후로 끊어진 육상의 명맥이 이어졌을까?"

"말도 안 되죠. 날 어디에 비교해요..."

"한상률의 은퇴나 구마하의 항명. 결국 모든 건 발전의 토대가 되는구나, 난 오늘 천 전무님 뵈면서 그런 생각을 가졌어."

세상 모든 것이 당장은 돌이킬 수 없을 듯 갈라서고 멀어져도, 지나고 보면 진통이 있는 만큼 발전이 따라온다.

구마하와 연맹의 갈등도 마찬가지였다.

그 속에서 9초대 선수가 둘이나 더 탄생했고 실력 있는 이들에게 세간의 관심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육상은 양궁에 이어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가장 국민들의 기대를 받는 종목이 되었다.

"천병욱 전무님이 안심하고 물러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어."

"선생님은 선생님의 입장이 있겠죠. 은퇴한 사람 뭐 자꾸 이야기합니까. 있는 사람들 이야기해요."

"그래. 지켜보자고. 어쨌든 내일부턴 시작이니까."

"기자님은 언제 넘어가세요?"

"모레. 개막식 끝나고. 육상 전까지는 수영 취재해야 해서."

"수영이면 김태주?"

"어. 한 대표 바로 아네."

"아테네 때 봤거든요. 그 녀석도 사고 칠 놈이죠."

"마하가 빠지면 육상의 관심도 시들해질 거야."

"하하. 우리는 상관 안 해요. 마하 만나면 응원 전해 주세요."

"그러자고."

다음 날. 임한기는 정리된 기사를 들고 도하로 출국했다.

2006년 12월 1일. 1974년 테헤란에 이어 중동에서 열리는 두 번째 아시안 게임이 개막을 맞이했다.

규모에 있어 올림픽에 뒤지지 않는 45개국 12,0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였다.

그들 가운데 구마하는 세간의 집중을 받고 있었다.

임한기 기자도 육상 경기가 열리는 칼리파 국제 경기장을 찾아가 구마하를 만났다.

"역시 한국 사회는 학연 지연 인연이라고."

"어우. 기자님... 영어 토 나와요."

"하하하! 올해 한국 대표 팀이 워낙 센세이셔널했으니까. 이동민이나 권지성 선수도 지금 엄청 시달리고 있지?"

"애들은 별 신경 안 쓰는 거 같더라고요. 제 옆에 있으면서 언론의 무서움을 알아서 그런 건지..."

"김진운 선수는 좀 다른 거 같던데."

"진운이는 스타병이 있어서."

"하하하~ 분위기 좋네. 걱정했던 것치고는 그래도 컨디션들이 좋아 보여."

"많은 일 있었잖아요. 그만큼 다들 심지가 단단해졌죠."

"어르신들이 잘 뛰고 오라고 하시더라."

"어르신요?"

"오기 전에 천 전무님 만났어."

"아... 아버지는 좀 어떠세요?"

"괜찮아 보이셨어. 그래도 알던 사람들 입장에선 지금 모습에 다들 충격이 큰 거 같더라고."

"메달 많이 가져간다고 꼭 만나서 전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그랬어. 안 그래도 너 응원 많이 해 주고 계시던데."

"그냥 바빠서."

"최 선수 만나느라 시간이 없었나?"

최다빈 이야기에 구마하는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임한기 기자는 툭 치면서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기자들 사이에서 소문 쫙 돌았어. 알어?"

"아니... 전 그냥 애 몸 아프다고 하길래... 그거 챙겨 준 게 전분데요?"

"하하하! 무슨 관계야? 둘이 사귀는 거야?"

"이제 기자님도 그런 거 물어보세요?"

"팬으로서 관심은 있지. 내 이름으로 기사가 나가진 않겠지만."

"그냥 친군데요. 특별한 관계 아니고요. 호기심 가질 그럴 일도 없어요."

"라고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두자고."

"진짜라니까요?"

"나도 큰 대회 앞둔 사람한테 부담 주고 싶진 않고. 겸사겸사 묻자면 최 선수 컨디션은 어때?"

"뭐... 나쁘진 않겠죠. 잘 몰라요."

"하하하! 멀리서 보니까 사람 혈색이 바뀌었던데. 대체 둘이 뭘 한 거야?"

"아 기자님!! 왜 이러세요?"

뻘쭘하게 대답을 피하던 구마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기자님이 아실 정도면... 당연히 지금 최일묵 감독님도 알고 계시겠죠?"

"그렇다고 봐야지."

"근데 왜 저 보면서 한마디 말씀을..."

"당사자가 아니니 함부로 말할 건 아니지만, 그냥 그런 거 아닐까?"

"뭐 어떤 거요?"

"자네는 뭐가 됐든 늘 기적을 써 왔으니까. 그런 작은 힘이라도 최다빈 선수를 위해서 쓸 수 있으면 쓰겠다라는 거."

"...결국 승리를 위해서인가요."

임한기는 한상률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주영이랑 처음 마하를 보면서 그런 각오를 했습니다. 우리는 절대 이 녀석을 이기는 게 전부인 선수로 키우지 말자고.)

"마하야."

"네. 기자님."

"이기는 게 나쁜 게 아니야."

"알아요... 저도 지고 싶진 않고요."

"그래. 좋게좋게 생각해. 난 이번에 전무님이나 한 대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봤어."

한국 육상을 향한 천병욱의 열정과 연맹을 향한 한상률의 분노가 뒤섞여 구마하의 감정을 만들었다.

"어른들 이야기를 너무 끌어안지 마. 넌 너의 시간이 있어."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그치만 전 제 싸움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 알지. 아무튼 부담 가지지 말고. 지금은 다들 시합 결과가 우선이지 감정이 우선은 아닌 상황이니까."

바로 그랬다.

과거가 어쨌든 지금 구마하는 한국 국가 대표로 400m와 100m 4인 계주에 출전해 있었다.

"후우. 떨리긴 하네요. 둘 다 처음 하는 종목이라..."

"세계 챔피언이 뭘 이런 거로 떨고 있어?"

"어? 기자님 지금 그 발언 아시안 게임 무시하시는 거 맞죠?"

"하하! 아니. 내 말은."

"와 기자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대회 규모별로 차등 대우 하시는 거 아니세요?"

"너 자꾸 이러면 나 그냥 연예부에 두 사람 이야기 흘려 버린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구마하 선수의 최대 관심은 메달 획득보다 스캔들 여부인가?"

"아니. 오늘 진짜 왜 오신 거세요... 일부러 기자님 따로 만나려고 자리까지 마련했는데."

"원래는 은퇴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묻고 싶었는데. 그냥 안 물어보려고."

"왜요...?"

"그냥 자네는 계속 옆에서 지켜보는 게 맞는 거 같아.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선수를 그만둘 거 같진 않아서."

구마하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요. 육상... 지금이니까 잠깐 피하는 거지. 떠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실제로 트랙을 봐도 아쉽거나 하는 기분이 없고요."

"그래. 다음은 다음에 생각하고. 일단은 대회 열심히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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