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69화 (269/401)

손에 손잡고 (4)

임한기 기자님에게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변에서 다빈이와의 관계를 다 아는데도 묵인하고 있다는 건데.

대체 왜지? 알면 당연히 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성욕에 미친 애들인 건 우리 문제지, 주변은 그냥 놔두면 안 되는 거잖아.

"하긴... 생각해 보면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돼. 얘네 집이 빈 건물도 아니고 대한 체대 애들도 몇 명 자취한다고 하는데... 매일같이 쉬지 않고 드나들었으니... 아우 쪽팔려... 허허허..."

자. 쪽팔린 건 쪽팔린 거고. 이해 안 되는 건 최 감독님이다.

박문기 사람 아니셨나? 나한테도 악감정 많은 거로 알고 있는데. 그걸 그냥 봐준다고? 조카라 사생활은 노터치라는 건가? 아님 기자님 말씀대로 작은 것 하나도 승리를 위한 부적 같은 느낌으로 보시는 건가?

"어. 다빈아."

"뭐 해? 어딨어?"

"그냥 방에 있어."

"너 혼자?"

"지성이는 의무실 갔고, 동민이랑 애들은 PC방. 훈련 끝났나 보네. 전화하는 거 보니까."

"응. 사람 많아서 그냥 몸만 풀고 왔어. 야 이거 로밍이니까 니가 걸어. 너 돈 많잖아."

도하에 와서도 곁에 있어 주기로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주변 상황이 이렇다면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

남들 모르게 몰래 만나는 것과 다들 아는 상황에서 개념 없이 움직이는 건 아무래도 뭔가 걸쩍지근하니까.

다빈이한테도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당연히 실망감 가득한 목소리로 감정을 쏘아 댄다.

"기자들? 그런 걸 왜 신경 써?"

"당연히 써야지! 야. 스캔들 터지면 나보다 니가 더 문제야."

"내가 문제냐. 니 팬들이 극성인 게 문제지!!"

"아무튼, 일단 상황을 좀 보고 움직이자..."

"흐음..."

"끙끙거리지 말고. 내가 너 싫어서 안 만난다는 게 아니잖아. 나도 너 보고 싶어."

"삼촌이 안다고? 아닌데. 모르시는 거 같던데. 나한텐 그런 말씀 하나도 없었어."

"아무렴 대놓고 물어보겠냐. 민망해서 어떻게 그래."

"우리 삼촌은 물어보고도 남을 사람이야."

"그럼 더 이상하지. 더 몸 사려야 되는 상황인 거고."

"흐음... 그냥 신경 안 쓰시는 거 같던데..."

"일단, 오늘은 안 되는 걸로."

"우리 못 한 지 일주일 넘었는데..."

"하하하! 야. 보통 그 정도는 신혼부부들도 건너뛰고 살지 않을까?"

"기자들... 에이 씨..."

"연락할게. 친구들 사귀고 있어."

"말도 안 통하는데 친구 누굴 사귀라고."

"너 영어 할 줄 몰라?"

"내가 할 줄 안다고 남들도 영어 하냐!"

하여간 성깔은...

너무 그러지 마라. 신혼부부니 뭐니 했지만 나도 달아오른다.

큰 시합을 앞둔 상황이었다. 앉아만 있어도 양기가 차오르고 대회의 열띤 분위기는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킨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게 더 힘든 지경이라고.

나도 다빈이가 있어 주는 게 고마운 상황이야.

올림픽이랑 달라. 빌어먹을 아시안 게임...

열린 가슴(?)으로 반겨 주는 올림픽과 다르게, 여긴 뭔가 동양 문화권이 주류를 이루는지라 자유로운 만남이 어렵다.

거기다 배경이 중동이라 더 엄숙한 그런 게 있어. 위대한 알라후 아크바르 같으니라고...

대표 팀도 대규모로 편성된 상황이라 개인으로 움직이기보단 팀으로 움직이고 사교의 장도 같은 문화권이나 언어가 통하는 애들끼리 어울리고 있다.

사람을 사귀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이나 일본은 대놓고 라이벌 기운을 풍기니 여자들한테 다가갔다간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

아 나도 다빈이랑 있고 싶다...

하고 싶어.

얘랑은 뭔가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발전성(?)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다 같이 어울리라니까."

가뜩이나 사교성 떨어지는 애가 종목까지 복합이다보니 사람들 사귀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일단, 다빈이는 다빈이고 뭐라도 좀 먹어야지. 성욕이 채워지질 않으니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

"어. 지성아 어디냐? 그럼 식당 쪽으로 와. 밥 먹자."

숙소를 나와 챔피언의 길 앞에서 지성이를 만났다.

챔피언의 길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리스트들 사진을 걸어 주는 곳이었는데, 우리들 가운데 누구보다 지성이가 하루에 두세 번씩 꼭 찾아오는 곳이었다.

"그만 좀 봐라. 니 사진도 걸려."

"됐어요. 그냥 무슨 무슨 종목이 있나 궁금해서 그러지."

"이제 삼 일 찬데 난 우리 할 때까지 자리가 남을까 모르겠다."

"형들은요?"

"PC방 들렀다 온대. 이메일 체크 해야 한다고."

"이메일은 무슨 줄 서기 귀찮아서 그러지..."

"게임하고 오겠지. 놔두자. 넌 몸 어떻다냐?

"별거 아니래요. 갑자기 기온이 바뀌니까 적응이 안 됐을 거라고."

"영하에서 운동하다 영상으로 올라오면 그럴 수 있지. 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

"그러게요."

둘이 선수촌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눴다.

지성이는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 그리고 아시안 게임을 다 겪어 본 입장에서 뭐가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다.

뭐가 다르냐라. 당연히 섹ㅅ.

"별거 없고 여기서 흑인 백인 더 많아지면 그게 올림픽이야."

"하하하! 형은 어떻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요?"

"야. 단순하니까 운동하지. 복잡하면 내가 왜 운동을 해. 예술을 하지."

그런 단순한 놈의 시각에서도 중동은 뭔가 색다른 맛이 있는 곳이긴 했었다.

인류 문화 발상지가 몰려 있는 곳. 같은 아시아로 묶이면서도 인종적으론 우리보다 서양에 더 가까운 사람들.

아니지. 따지고 보면 서양인들 원류가 여기야. 여기 사람들이 쭉 퍼져 나가는 거니까.

"두바이가 바로 여기 옆이더라."

"저도 이번에 알았어요. 바다 따라가면 나온다고.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국경 있는 거 존나 신기하지 않냐? 우리는 국경이 휴전선이라 체감이 어려운데."

"전 솔직히 여기 오기 전에 중동은 다 그냥 터번 쓰고, 낙타 타고 석유 뽑고 그러는 곳인 줄 알았어요."

"그런 데 맞아. 실제로 저기도 보이네."

"어? 형. 저 사람들도 형 알아본다."

"어우 씨발. 괜히 쳐다봤다고 시비 거는 거 아니겠지...?"

"시비를 왜 걸어요. 보니까 형 팬들 같은데."

"확실히 사람들이 인상이 강렬하긴 해. 수염도 많고 눈빛도 뭔가 좀 부리부리해 가지고."

"형도 만만치 않아요. 저쪽에서 보면 오히려 형이 더 야수같이 느껴질걸?"

돈이 최고고 석유가 갑이고. 페르시아의 왕자가 여긴가? 그런 쓰잘데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우릴 불러 세웠다.

"식사들 가나?"

"음? 어. 감독님..."

"교수님..."

"왜 둘이 있어? 다른 친구들은?"

최일묵 감독님과 연맹 사무국 사람들이 다가왔다.

임 기자님한테 다빈이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가, 처음으로 이분 대하는 데 주저함이 느껴진다.

"지성이 몸 어때? 아까 의무실 갔었다며?"

"괜찮습니다. 온도가 바뀌면서 오는 문제라고 금방 적응될 거라고 했어요."

"다행이다. 그래도 여기 선생님들 계시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여쭤보고."

감독님 지시에 연맹분들이 지성이한테 다가와 말씀을 거시고, 최 감독님이 혼자 뻘쭘히 서 있는 나를 보며 물으셨다.

"구 감독은 아픈 데 없지?"

"네? 왜 아직도 저를 그렇게..."

"그렇게 불러 주는 게 맞을 거 같아서. 실질적으로 태릉 팀을 움직이는 건 자네니까."

"전 건강합니다. 그리고 편하게 대해 주세요."

"이게 편해서 그러네."

비꼬는 건가? 아니면 그냥 별생각 없이 하는 말씀?

이래서 사람이 죄짓고 살면 안 된다고... 다빈이 문제만 없으면 내가 이분 앞에서 꿀릴 게 없는데...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해? 따지고 보면 먹히고 있는 건 나야.

내가 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걔가 나를 불러 지 몸보신을 하고 있는데.

"챔피언의 길이라. 곧 자네 사진도 저기 걸리겠구만."

"다 같이 걸려야죠. 개인적으로 400보단 팀 계주를 우선하고 있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하지만 국민들은 자네의 새로운 금메달 수성을 기대하고 있을 걸세."

"괜찮습니다. 태주가 있으니까요."

"하하! 지금 언론도 육상보단 다들 수영을 먼저 기대하고 있긴 하지."

"김태주. 해내겠죠. 저도 이길 거라 봅니다. 강한 놈이니까요."

"아는 사인가?"

"네. 아테네 때 둘만 학생이라 그때 친해졌어요."

"그럼 응원 가 줘야겠군."

"아니죠. 아직 저희 시합도 안 했는데요. 그냥 방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태주랑도 그렇게 하기로 이미 이야기 끝냈고요. 어차피 우리 시합 땐 수영 팀 다 귀국할 건데요."

"너무 계산적으로 구는 거 아닌가?"

"...저 감독님."

"음?"

그래. 정면 돌파다.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 나눌 때가 아니야.

이번 연맹과의 모든 일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어.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아니. 일 마치고 우리도 지금 식사하러 왔는데 사람이 많아서 조금 피해서 갈까 하고."

"그럼.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최일묵 감독님도 미소를 지으시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좋지."

* * *

지성이는 연맹분들과 같이 가라 해 주고, 감독님과 따로 자리를 옮겨 카페를 찾았다.

감독님은 커피를 주문하시고 나는 과일주스를 받았다.

"아시안 게임은 처음인데, 뭔가 다른가?"

"뭐 그냥. 올림픽이랑 별다를 건 없는 거 같습니다."

"으음. 역시 향이 좋아. 자네 커피 원산지가 이슬람인 거 알고 있나?"

"아니요. 처음 듣는데요."

"십자군 원정을 통해 유럽에 퍼졌지. 자넨 커피 별로 안 좋아하는가 봐?"

"마시긴 하는데 즐기진 않습니다. 전 카페인이 안 맞는 거 같아서요."

"이렇게 보면 우리도 서로를 잘 모르고 있군."

"그러게요..."

지도받은 건 없지만, 일단은 대표 팀 감독과 선수였다.

억지로라도 가까워야 하는 사이다. 감정을 가지고 갈 관계가 아니었다.

반대로 보더라도 내가 감독직을 맡았다면 이분은 수석 코치를 맡아 주셨을 분이신데, 누구보다 친밀해야 할 분과 왜 이런 거리감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후후후. 요즘 선수들 사이에 그런 말이 돌던데. 잘 먹고 잘 뛰는 게 구마하의 운동법이라고."

"과대평가세요. 저 그렇게 특별한 사람 아닙니다..."

"왜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자네는 특별함을 넘어서는 존재지."

최일묵 감독님이 느긋이 커피 한 모금 머금으며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렇게 회장님께 맞설 수 있었지."

"..."

"그래. 왜 보자고 했나?"

고맙습니다.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신 덕분에 주저하던 마음이 사라졌어요.

나쁜 의미가 아니라 진심으로요.

"일전의 일도 사과드리고 싶었고요."

"됐어. 지난 일이야. 어른으로선 화가 나도, 지도자로서는 자네와 천 전무님께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도 많아."

"그리고 다빈이 일도 상의드리고 싶었어요."

"후후후.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친구지."

"또 한 번 시건방지다고 하실 수 있지만, 불편한 게 싫어서 뵙고 싶었습니다."

잠시의 침묵 속에 감독님이나 나나 한결 편안해진 미소가 지어졌다.

"임 기자님 통해 들었습니다. 알고 계셨다면서요?"

"당연히 알고 있지."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둘이 만나지 말라고? 아니면 박 회장 말대로 구마하가 여자 선수 건드린다고 기자들한테 내 입으로 터트려? 내 조카딸을? 자네 우리 애 끝까지 책임질 건가?"

역시 박문기... 하여간 개수작질은 진짜...

"후우... 그분은 연세도 있으신 분이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욕심과 자만. 거기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자네의 고집. 문제는 그렇게 생기는 거지."

"감독님. 저는 고집이 아니라... 후우. 아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이 신경 써 주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

"다빈이 체면도 있지만, 한편으론 신기해서 그냥 놔둔 것도 있어."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 고개를 돌리니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물어보신다.

"애 몸이 안 좋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그거야... 훈련하는 걸 보면 누구라도..."

"그래도. 그렇게 병원이니 음식이니 어떻게 그렇게 과감하게 움직일 생각을 했어? 그것도 선수를. 잘못되면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모든 걸 떠나서 다빈이의 건강이 돌아오는 과정에 아무런 터치도 할 수 없었다고 하신다.

둘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몰라도, 일단 애가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건 눈에 보였으니까.

"하루하루 자네가 왔다 가면 애 혈색이 달라지더군."

"..."

"대체 또 무슨 챔피언의 마법이 펼쳐지는 건가 그냥 두고 봤었어."

아우 뜨끔해라...

챔피언의 요술봉과 마술 주머니가 움찔거리고 오그라드는 기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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