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70화 (270/401)

손에 손잡고 (5)

"그냥 뭐... 애가 지방이 너무 빠진 거 같아서, 급하게 치킨 같은 거 사 주고. 약은 저도 먹는 약 지어서 걱정 없었고요."

"그 단순한 방법을 왜 우리는 몰랐지?"

"저... 감독님. 지금 저한테 뭐라고 하시는 거 아니시죠?"

"아니야. 오히려 나도 자네를 보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

이렇게 쉽고 단순하게 접근할 수 있는 걸 자신과 연맹은 바로 옆에서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진심으로 의아스러우신 것 같다.

이런 말 해도 되는 걸까...? 어른 상대하는 건 너무 어려운데. 하지만 이 말 말고 달리 없으니까.

"여유가 없으셔서 그러셨을 겁니다."

"여유라... 여유... 여유가 없었지."

"죄송해요. 제가 어른한테 이런 말 하는 게..."

"괜찮아. 말해도 돼. 난 이미 자네를 어린 선수가 아닌 한 사람의 지도자로 보고 있으니까."

다빈이도 선수 생명을 걸고 있다는 각오가 너무 강했고, 감독님이나 주변 분들은 박문기의 닦달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마음이 조급하면 시야가 가려지는 때가 있다.

운전도 그렇고 그냥 살다 보면 다 그러는 거 같다.

특히나 올 육상 연맹과 우리 선수들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길을 걸어와야 했기에 개인적인 면면이 더 간과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말 별거 아니었어요. 그냥 작은 관심과 애정이라고 할까요..."

"우리 다빈이 좋아하나?"

"싫어하진 않죠. 그래도 어쨌든 서로 연애를 했는데."

"하하하! 자네랑 이런 이야기 하니까 또 색다르구만."

대한 체대의 감독으로서 육상계의 대선배로서. 이렇게까지 젊은 청년과 스스럼없는 대화는 처음이시라는 최일묵 감독님이셨다.

덕분에 나도 긴장감이 많이 사라진 한결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전 오히려 알면서도 쉬쉬하시니까, 괜히 또 뭔가 약점 잡고 계시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어요."

"자네는 나도 회장님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아니요. 그렇게까지는..."

"조카 딸 앞세워 성공을 노리는 인물. 내 사람들만 챙기고 내 주변을 우선시하고. 내 학연 지연이 먼저여야 하고."

"..."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그것이 애를 위하는 길이었다는 점도 이해를 해 주게."

벌집을 쑤신 기분이네. 아저씨 입에서 민감한 이야기가 막 줄줄 터져 나온다.

근데 이게 자연스러운 거 아닐까?

우리 한상률 감독님을 봐도 나이 든다고 감정이 사그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나도 불편한 마음이 있는데 이분은 오죽하셨겠냐.

이 자리는 그런 감정을 털자고 있는 자리기도 하니까.

"대한 체대를 우선시할 때는 조금 실망감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연맹 간부 어른들 다 모인 회의장에서 자리 박차고 나가는 자네는 오죽했겠나."

"하하하... 죄송합니다."

"다빈이가 열정이 많지. 승부욕도 강하고. 많은 조카들 가운데서도 유독 어릴 때부터 날 믿고 따라온 아이야. 노력도 많이 했고. 그 꿈을 이루어 주고 싶었어."

"욕심 많은 애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한 감독이 부러운 것도 있고."

"우리 감독님이요? 왜요?"

"하하. 자네 모르나? 지금 지도자들 가운데선 자네보다 한상률이 더 시기의 대상인 거?"

와우 좋은 소스를 얻었는데. 돌아가면 꼭 말씀드려야지.

"감독님은 저한테 소중한 분이시죠."

"감독. 구 감독. 정말이지 자네를 그렇게 부르고 싶었어."

오해는 풀렸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서로를 알기 위해 다가가고 있다.

최일묵 코치님도 친구네 삼촌같이 다가오신다.

"왜요?"

"그냥. 옆에서 보고 싶어서."

"지금도 보고 계시잖아요."

"이렇게 말고. 진짜 감독을 모시는 수석 코치로서 그 모습을 배우고 싶었거든."

"저. 감독님... 아까부터 저를 너무 거창하게 보시는 거 같은데요..."

"우리나라에 자네 같은 선수가 나왔어. 그럴 수 있지. 한 사람의 천재는 얼마든지 하늘이 내려 주니까. 하지만 이동민이 올 초 10초의 벽을 깨고 권지성의 발전은 계속되고 있다. 김진수나 진운이 같은 아이들도 말할 것도 없지."

"..."

"자네의 주변에서 벌어진 일이야. 먼저는 스키에서도 동메달이 나왔고."

한 번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복되면 그것은 실력이다.

그리고 그 실력의 원천은 나라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최 감독님의 시선이었다.

감독님은 내가 선수들을 강하게 만드는 비법을 알고 싶다고 하셨다.

"비법이요..."

"말해 줄 수 없겠나? 천 전무님이나 두희. 이 교수도 다들 자네는 뭔가 특별함이 있다고 했었어."

"우리 감독님껜 안 여쭤보셨어요?"

"아쉽게도 난 한 감독과 현역 때도 마주친 적이 없어서.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아우라를 풍기기도 하고. 잘 알잖아. 연맹이라면 그 친구 입장에서 시선이 달라진다는 거."

하하하! 감독님.

흠 흠 아무튼 감독님 놀리는 건 나중으로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진짜 뭔가 있는 거야?"

"네. 저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비법을 말씀드릴게요."

가슴 깊이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숨길 이야기도 아니니까.

"내공입니다."

"내공? 기(氣) 이런 걸 말하는 건가?"

"네. 맞습니다."

조용히 이게 장난인지 진짠지 가늠하는 감독님을 돌아본다.

"감독님. 내공은 특별한 게 아니에요. 우리 몸속에 있는 잠재력을 깨우는 힘입니다."

"잠깐만... 잠재력을 의지로 깨울 수 있다는 건가?"

"물론이죠. 그러자고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조용히 주변 외국인 선수와 관계자들로 시선을 옮겼다.

"감독님은 우승을 보시죠?"

"선수와 지도자라면 누구나 그렇지."

"저는 좀 달라요."

"자네가 운동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들었네."

"와 저에 대해 뭐 많이 알고 계시는데요?"

"당연하지. 자네한테 관심 많았다니까? 다빈이가 말 안 해 주던가?"

"해 줬죠. 그래서도 많이 화냈었고요... 죄송합니다. 전 진심으로 그러시는 게 아니라 그것도 회장님 저 대하는 그런 모습인 줄 알고."

"자네가 회장님한테 많이 데였구만."

"좋은 것도 있는데요. 아무래도 많은 것들이 좀..."

"우리 이야기로 돌아오지. 없는 사람 언급은 그만하고."

다시 주제에 집중했다.

이제는 사람들도 내가 운동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지만, 운동을 향한 나의 감정은 단순한 호감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라..."

"네.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난 운동을 사랑한다.

아직 평생을 함께할 완벽한 사랑은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죽음까지 이어 갈 무언가는 찾은 것 같다.

인생을 바꿔 주고 사람을 멋지게 만들어 준 운동을 떠올리면 나는 감사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면서 또한 울컥하는 감정이 느껴진다.

사랑이 그런 거 같다.

좋기도 하면서 가슴이 조이기도 하고. 가졌다 싶으면서도 완전한 내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누군가 그것에 나쁜 짓이라도 하면 분노하고 화내고 그래서 더 아껴 주고 싶고.

"저도 이기고 싶죠. 아무한테도 지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매번 훈련하고 시합을 나가면서 가장 지고 싶지 않은 상대가 누구냐 묻는다면 그건 저 자신이었던 거 같아요."

"음."

"훈련하지 않은 선수가 시합을 잘 뛸 리가 없으니까요. 져 놓고 변명하기보다는, 뒤늦게 컨디션 핑계를 대기보다는. 늘 부끄럽지 않게 자신을 목표로 달리자. 그런 과정 속에서 한계를 넘게 되고"

그렇게 내 안에 존재하는 힘의 실체에 도달하게 되면서 성과를 얻고 메달을 가져오게 됐다.

나도 시작은 올림픽 금메달이 목표였다.

하지만 나의 메달은 보통 사람들의 메달과는 조금 다르다.

다른 선수들의 메달은 그것이 선수 인생의 종착역일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는 그것이 종착역이 아닌 지나가는 거점.

나의 목표는 메달이 아닌 선수촌 입촌과 메달이라도 얻어야 누릴 수 있는 인기와 주변의 관심. 늘씬하고 아름다운 연인들과의.

"의지로... 잠재력을 깨운다라... 꽤 복잡한 이야기 같은데."

"복잡하죠. 저도 쉽지 않았어요. 주변에 도움 많이 받았고요. 어렵게 어렵게 알게 됐습니다."

"그럼 이동민이나 이 친구들도 그런 힘을 깨우친 건가?"

"모르겠습니다. 애들이 어떻게 이해했을지. 다만 전 그렇게 되라고 죽어라고 운동시키고 먹이긴 했습니다."

"후후. 그렇다라... 자네가 그대로 대표 팀을 맡아서 이어 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벌어지지 않은 일을 상상해 보았다.

잘됐을 수도 있지만, 수많은 욕망과 열정 앞에 나라는 사람이 그대로 타 죽을 수도 있었을 거 같다.

"단순하게 생각할수록 외적인 것들을 멀리하는 법이야. 자네가 연맹이나 회장님을 멀리하는 이유를 조금 알 거 같군."

"네..."

"커다란 성과 뒤에 그런 깨달음이 있었구나. 특별한 환경에서 성장한 특별한 선수라고만 보고 있었는데... 자네도 많은 게 있었겠어."

최일묵 감독님은 말을 곱씹으시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하긴. 뭘 기대하겠어. 성과를 빼고 보면 자네는 스물한 살 청년인데."

"그러니까요... 다들 너무 절 거창하게 보는 거라니까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따라오는 법. 그렇지. 건강한 몸과 정신이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지."

그리고도 한참을 고민하시더니 말씀하신다.

"나도 그렇게 믿던 때가 있었는데..."

* * *

"그래서?"

"그래서. 길게 한숨을 푹푹~~ 쉬시면서 그러시더라고."

생각보다 길어진 대화에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지성이나 친구들. 다른 대표 팀 선수들도 다들 김태주의 금메달을 보기 위해 숙소나 경기장으로 몰려간 시간.

졸지에 빈틈이 생겨 다빈이와 오붓한 저녁을 들 수 있었다.

"오늘 영광스럽고 특별한 성과들에 가리워진 구마하를. 나라는 존재를 알게 되셨다. 그러시더라고."

"무슨 삼촌이 그런 말을 했다고?"

"진짜라니까."

"삼촌이 너를 영광스럽고 특별한 존재라고 했다고?"

"아 얘가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최 감독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때는 내가 주변 선수들에게 했다는 말들이나 운동법 같은 걸 믿지 못하셨단다.

노력하는 자를 기만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도 있으셨다고 했다.

그렇게 운동해서 잘될 수 있다면 지금까지 자신들이 해 온 일들은 뭐란 말인가. 그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것 같으셨다고 하셨다.

"지금은 운동은 단순하게 하는 게 제일이라고 하셨어."

"..."

"진짜라니까!"

"알아. 나도 그렇게 믿고 있고."

"아니. 넌 왜 사람 말을."

"믿는다니까? 믿어. 믿는다고. 삼촌이랑 이야기 잘했네."

오히려 다빈이는 왜 갑자기 최 감독님이랑 그렇게 마주 볼 용기를 냈는지가 궁금하단다.

"너 때문이지."

"난 왜?"

"아 진짜... 넌 지금까지 내 말 뭐로 들은 거냐. 혹시나 무슨 일이 터지면 내가 널 가지고 논 게 아니라고 그런 건 안심시켜 드려야."

"그러니까 왜?"

"그거야..."

"응? 응??"

"일이 잘 못 되면 니가 상처를 받으니까..."

그러자 다빈이가 가만히 책상에 기댄 채로 나를 보며 묻는다.

"너 나 좋아해?"

"싫진 않아."

"그게 뭐야. 솔직하게 말해 봐."

"싫진 않아. 진짜로."

"너 좋아하는 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대회 끝나면 사귀기로 했다는 사람 있다고."

"임자 있는 사람 막 꼬신 건 누구면서?"

그러자 이제야 다빈이 머릿속에 우리의 관계가 인식되기 시작하는가 보다.

"너 나 왜 만나?"

"하하하... 질문 봐라..."

"아니 진짜로. 좋아하는 애 있는데 날 왜??"

"너가 힘들어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걔는? 그 파트너는 너 나 이렇게 보는 거 알고 있어?"

"흠. 크흠! 이게 양고긴가? 냄새가 특이하네. 인도 음식 같기도 하고..."

"야. 말해 봐. 걔는 뭐고 너는 뭐고. 그리고 나는 너한테 뭐고."

아 진짜. 되게 따지네...

"말은 안 했지. 그치만 넌지시 알고는 있을 거야."

"뭘? 너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거?"

"뭘 내가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 나 요즘 너 말고 만나는 사람 없어."

"그걸 믿으라고?"

"진짜로. 지금은 너만 보고 있는 거야."

"...모르겠다. 너도 그렇고 걔도 그렇고."

"나중에 물어보긴 해. 신경이 쓰이긴 하는가 봐."

"걔는 너 좋대?"

"싫지는 않대."

"..."

"왜? 밥 먹어. 음식 남기지 마. 이제 지 몸 돌아왔다고 은근 밥 남기고 있어. 내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귀엽게 생긴 얼굴로 흠... 거리는 다빈이를 향해 포크를 겨눴다.

"나도 좀 물어보자. 넌 나 왜 만나냐?"

"난 그냥..."

"그냥 뭐? 섹스가 고파서?"

"미쳤나 봐... 사람들 있는데..."

"섹스란 단어는 성을 의미하기도 하지. 비행기에서도 입국 표 쓸 때 SEX 공식 문서로 기재되어 있고."

하는 게 좋았단다.

싫으면 잠을 자거나 하진 않는단다.

다만.

"너랑 연애하라면 그건 솔직히 말해서 조금 싫어..."

"와...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사람 마음에 비수를..."

"그렇잖아. 나만 보는 것도 아니고. 나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그 첫사랑이라는 파트너는 늘 가슴에 담아 두고 있을 것이고."

"너도 그런 존재는 있을 거 아냐."

"난 그게 넌데?"

"...밥 먹자. 쓸데없는 논쟁은 그만하고."

"무엇보다 난 아직 메달이 없어. 바라만 보는 연애는 싫어."

"승부욕 어디 가겠냐."

"왜 콧방귀를 뀌지? 비웃는 거야 지금?"

"아니야. 빨리 먹고 일어나자."

"왜?"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태주 경기를 보러 가야 하니까 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다빈이가 깜빡깜빡 도토리 손에 쥔 다람쥐 같은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안 해?"

"오늘 해?"

"해야지 그럼."

"아하하. 야 너 삼촌한테 나 뭐 지켜 준다 그런 얘기 했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뭘 따지고 있어.

"배 안 고프면 그거 이리 줘. 또 귀찮게 가서 줄 서고 뭐 할 거 없이 언능 먹고 움직이게."

"아. 나 오늘 그냥 일찍 자려고 했는데..."

"웃기신다. 니가?"

방금 나 차인 거 맞지? 그치?

얘도 그런 면에 있어선 명확하게 선 딱 그었고.

동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기 전까지는 섹스는 해도 연애는 싫다.

"으으응..."

"왜 이렇게 앓는 소리를 내냐?"

"근데 너랑 오랜만에 만나면 처음엔 늘 좀 아퍼..."

"엉덩이에 지금 괜히 끼웠나?"

"빼게?"

"빼야지 아프다면서."

"그냥 해. 어렵게 넣는데..."

콘돔을 씌운 립스틱을 엉덩이에 꽃아 넣고.

둔부가 빨갛게 달아오르게 삽입을 한 상태에서 우리는 합의점을 찾았다.

"웃기신다. 니가?"

"다빈아 이렇게 할까?"

"하아 하아~! 이번엔 뭐?"

"너도 나 아닌 다른 사람들 만나 보고 싶은 거지? 그치?"

"뭐라는 거야..."

"지금은 우리가 스쳐 가는 만남이지만, 언젠가 너도 아무도 없고 그리고 또 나도 아무도 없으면 그때는 진짜 다시는 헤어지지 않게."

"야! 이 씨. 너 누워. 내가 올라갈 거야!"

딴에는 굉장히 로맨틱한 말이다 생각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그녀는 엉덩이랑 거기 두 군데 조이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며 콘돔을 슥 잡아 뽑았다.

"쓸데없는 이야기 하고 있어... 집중 안 되게."

난 다빈이가 일부러 대답을 피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자고 약속이라도 하면 괜히 입장 난처해질까 내가 다시 자기한테 묶일까 물러서는 것 같았다.

물론, 물러서는 게 아니라, 진짜로 시합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뭐가 됐든 그녀는 그 자체로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학 학!"

"돌아 봐."

"어? 지금?"

"어 빨리."

"...아 그건 또 왜? 기껏 뺐는데?"

"몰라. 이제는 없는 게 더 허전해."

"아 씨. 이렇게 돌면 돼?"

어떤 모습이더라도 어떤 상황이더라도 다빈이는 모든 걸 받아 준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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