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손잡고 (6)
도하에 온 지도 어느덧 3주가 지나고 있었다.
대회는 5일 차. 아시안 게임의 흥분된 분위기나 중동의 황톳빛 공기에 더 이상 낯섦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초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종목도 있고 말도 안 되게 조기 탈락 하여 일찌감치 귀국길을 택한 팀도 보았다.
후발 주자로 시합을 기다리는 입장에선 겸허하게 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었다.
아시안 게임이라고 만만한 대회 아니고, 올림픽이라고 열심히 해야 하는 것 없다.
뭐가 됐든 태극기를 가슴에 붙였는데, 나라와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 아닌가.
다른 팀이나 선수들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하루하루를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마하야."
"기자님 오셨어요."
"좀 어때? 낼모레 출격이잖아?"
"괜찮아요. 컨디션 좋습니다."
"권지성 선수는 안 좋다는 말이 있던데?"
"별거 아니에요. 애 몸 괜찮아요. 근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하. 내가 괜히 기잔가."
시합 개막 이틀 전. 최종 컨디션을 조율하는 자리였는데, 임한기 기자님이 찾아오셨다.
겪으면 겪을수록 좋은 분이신 거 같다.
우리 한상률 감독님 표현을 빌리자면 개새끼들 떠도는 쓰레기장에서 그나마 독자들의 눈을 집중시키는 몇 안 되는 저널리스트가 이분이시다.
"중국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이던데"
"지들이 불편해 봤자죠."
"후후후. 너한테도 견제 많이 들어오지?"
"중국보단 전 일본. 저기도 보세요. 저기 아까 일본 방송이라고 찾아오셨는데. 시합은 별로 물어보지도 않고 막 여자 친구 없냐 이런 것만 묻는데."
"으음. 아마 그건 너가 사쿠라 아야를 만나서 그랬던 거 아닐까?"
"와... 기자님... 와..."
"하하하. 나도 궁금한데. 진짜 둘이 만났었어?"
"우와..."
임한기 기자님은 스포츠는 언제 어느 때고 각본 없는 드라마가 펼쳐지기에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신다.
절대적 강자가 존재하지도 않으며 예측한 대로 승부가 펼쳐지더라도 최선을 다한 패자의 모습이 있기에 박수를 쳐 주고 싶다고 하셨다.
이래서 언론이라면 치를 떠는 감독님이 이분을 대할 땐 한결 마음을 내려놓고 의지를 하시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임한기 기자님이 굳이 인터뷰도 아닌, 신변잡기 이야기로 다가오신 이유가 따로 있었으니.
"네? 박문기가 뭘 어쨌다고요?"
"최 감독님 통해서 확인해 봐. 오늘 밤 기사 나갈 거니까."
"후우... 아 미치겠네..."
"그러니까 내가 미리 예방 주사 놔 주러 왔잖아."
나중에 가서 뒤통수 맞지 말고 미리 대비하라고 오셨는가 보다.
정말 이런 와중에 선수들 생각해 주시는 몇 안 되는 기자님이 아닐까 싶다.
* * *
"...메달 몇 개요?"
"자넨 그걸 또 어디서 들은 거야?"
"감독님. 아니. 진짜로 그런 말씀을 하셨대요...? 기자들 만나서 본인이 직접...??"
"목표만 그렇게 잡는다고 하신 거고. 자. 자 일단 진정하고."
최일묵 감독님과 겨우겨우 깨진 틈을 메우며 팀을 하나로 뭉쳤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고 괜히 나나 감독님 눈치를 보던 친구들도 지금은 대표 팀과 태극기 아래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좋은 분위기였다. 이대로만 가면 좋은 결과가 알아서 따라올 거라 믿었다.
그런데 결국 이번에도 박문기가 일을 치고 만다.
"수영이 이슈를 받으니까."
"아 좀 받으면 어때요! 같은 대표 팀끼리 서로서로 응원도 해 주고 하면 좋지."
"직장에서도 늘 경쟁하던 양반이라 그런 게 용납이 안 되는가 봐."
수영 선수 김태주가 활약하며 매스컴이 한국 수영으로 몰리는 게 배알이 꼴린 박문기가 언론을 만나 말했다.
수영에서 금메달 세 개가 나왔으니 우리는 여섯 개를 따 가겠다고 자신을 했단다.
심지어 금메달만 여섯이 아니다.
"은메달이 셋에... 거기에 동메달도 하나 추가한다고 했다고요?"
"하하하. 그냥 숫자를 맞추려다 보니까. 회장님이 원래 직장 생활 할 때도 그렇게 뱃심 있게 일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고 하시고"
"허허허 육상에서만 메달이 열 개네요? 감독님. 저 그냥 기권하겠습니다..."
"에헤이! 구 감독이 어딜 간다고.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나?"
"아니 메달 열 개가 말이 되냐고요!!"
이 와중에 최일묵 감독님은 금메달만 열 개가 아니잖아. 은메달도 있고 동메달도 있다면서 마음을 놓으라고 하신다.
아니. 은메달 동메달은 쉬운 줄 아냐고?
애초에 왜 그런 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말을 아끼는데 연맹 회장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떠들고 있는지...
감독님은 우리는 참가하는 종목도 많고 파이팅하자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니까 너무 담아 두지 말라고 하시는데.
나라고 메달이 싫은 게 아니다.
이기거나 포디움에 서는 걸 혐오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뜩이나 견제할 사람 없어 독불장군 지 꼴리는 대로 연맹을 이끄는 박문긴데, 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목표를 세워 버림 일선은 어떻게 하라고...
이러니까 잘해 줘도 이쁘게 봐 줄 수가 없는 거야. 선수들 마음은 생각을 안 하잖아.
젤 좆같은 건 그거다.
이 인간이 보는 메달에 당연히 나도 포함된다는 거.
그 사람 나 싫어하는 거 아녔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 아니었냐고?
근데 왜 씨발...
"너무 귀담아듣지 마. 그냥 기자들이 옆에서 부추기는 거 대꾸하다 보니까 나오신 말씀 같기도 하니까."
"저는요 어차피 떠날 거니까 상관이 없어요. 근데 남은 사람들은 이걸로 또 얼마나 뭐라고 하겠냐고요."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선수들 무시하면서...
막상 자기가 원하는 수치는 달성해 놔야 한다 이 말인가?
언제 어느 때고 선수나 사람들을 자기 주머니에 들어 있는 라이터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게 젤 싫다.
왜 이런 인간이 단순 무식한 체육인들의 머리에 앉아 있는지...
"진짜 이 새낄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미치겠다..."
"뭘 미쳐 병신아. 회장님 그러시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야. 아니 씨발 애초에 돈 나간다고 선수들도 많이 안 보내려고 했던 대회 아니었어? 근데 무슨 자격으로 메달 열 개를 자신하는데."
"그냥 큰소리 한번 쳐 보고 싶었나 보지. 뭘 그걸 가지고 씩씩거려."
"아니. 난 마하 열 내는 거 이해할 수 있어."
"그치 진수야? 그치!! 넌 내 맘 뭔지 알겠지?"
"야. 편들어 주지 마. 이 새끼 회장님 싫어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굳이 시합 앞둔 이 시점에 지금까지 안 하던 인터뷰 잡고 그런 말씀 하는 건 아니지. 막상 경기 뛰기 전에 작은 거 하나도 다들 얼마나 신경을 쓰는데."
"근데 그런 건 이 새끼 그때 팀 복귀하면서도 했었잖아."
"미친놈아! 누굴 누구랑 비교해! 난 뛰는 입장이고!! 난 자신감 넘치게 말을 하는 게 맞아도."
동민이는 집중 안 된다고 멀찌감치 떨어지고, 편들어 주는 놈들만 붙들고 분노를 쏟아 내는 중이다.
"진운이 형. 회장님이 구상한 금메달 여섯 개는 어떤 종목이었을까?"
"100, 200, 400, 계주에. 나도 끼는 걸까?"
"야. 김진운. 하지 마 새끼야. 우리라고 반드시 금메달 딴다는 보장은 없어."
"하긴 그렇지. 너도 400m 처음이고..."
"회장님은 그렇다 치고, 넌 원래 메달 몇 개 생각하고 있었냐?"
"없어. 애초에 하나든 열이든 그런 걸 따지지도 않고. 나한테 그런 걸 왜 물어."
"그래도 잠깐이나마 감독 맡으려고 했던 입장이 있는데. 이 종목은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 하는 건 있었을 거 아냐."
"난 그냥 계주만 너네랑 잘 마무리하고 싶었고, 나머지는 솔직히 큰 감흥이 없어."
그러자 800m 진운이가 자기는 안 된다는 거냐며 버럭거리는데.
이러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작은 부담감이, 정말 사소한 감정 하나에 영향을 받는 게 선수들인데.
"후우... 진수야 진운이 괜찮겠지?"
"괜찮아. 저 새끼 그런 거로 무너질 정도로 유리 멘탈 아니야."
"난 그냥 이런 얘기 자체가 마음이 무겁다."
"왜요?"
"...아 그냥 너네도 당장은 내 말에 공감한다지만, 뒤에선 이미 금메달을 땄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할 거 아냐."
"하하하~ 이 새끼. 누가 그러는데?"
"맞아요 누가 그래요. 형 왜 이렇게 쫄아 있어요."
"몰라 새끼들아..."
부담 가지지 마라. 금메달 안 따도 돼. 그냥 열심히만 하자. 진수와 지성이를 붙잡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었다.
애들은 그래도 왔으면 금메달 가져가야지. 회장님이 뭐라든 우리는 우리 목표가 있다고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데."
"가만 보면 너도 은근히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야."
"맞아. 안 받아도 될 스트레스 형이 그냥 끌어안는 거 같아."
"그게 내 매력이지."
"아 나도 가서 운동이나 해야지. 더이상 니 매력에 빠지기 싫으니까."
"하하하. 왜 마하 형이 한마디 씩 꺼낼 때마다 다들 자리를 피해요?"
한바탕 불길을 쏟아 내는데 저 멀리 다빈이가 슬쩍 쳐다보고 지나갔다.
"무슨 뜻이에요?"
"뭐가?"
"누나. 지금 형 보면서 신호 준 거 아니에요?"
"뭔 신호를 줘 새끼야. 이 새끼도 진짜 성격 이상하게 변했어."
날카로운 새끼. 그 와중에 그 시그널을 지가 읽어?
지성이가 본 대로 다빈이랑 나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고 눈빛만 마주쳐도 오늘 몇 시 언제 만남을 가질지 마음이 통하고 있었다.
"형. 누나랑 사겨요?"
"그런 건 아니야."
"근데 이렇게 계속 둘이 같이 있는 이유가 뭐예요?"
"있어 달라잖아."
"누나가 형한테?"
"쟤도 부담이 많으니까 그러겠지."
* * *
"순수한 목표를... 땀과 열정의 잔치를... 아니 왜 그렇게 보냐고."
"저기... 우리 안 해?"
저녁엔 다빈이를 만났다.
보자 마자 아까는 왜 그렇게 혼자 흥분하고 있었냐고 묻길래 이러저러 박 회장 욕을 하다 보니까 섹스할 기분까지 싹 날아가는 것 같다.
"정말 메달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볼 수는 없는 걸까? 아닌 대로 메달 싫어서 안 따는 거 아니잖아. 안 되는 거잖아."
"야. 그냥 스포츠가 가지는 한계를 그냥 받아들여. 뭘 그걸 따지고 있어."
"...후우 진짜 사람이 주는 스트레스가 상상을 초월한다. 왜 이렇게 주는 거 없이 싫지?"
"너 자꾸 이러면 나도 너 싫어질 거 같아."
"야. 어차피 떠날 대표 팀 박문기 좆돼 보라고 그냥 시합 다 기권하고 한국 가 버려? 진짜 그럴까?"
자꾸 팬티 위를 문질거리며 채근하던 다빈이도 이제는 손을 놓고 옆으로 누워 말했다.
"그래. 얘기해라 너도 이것저것 쌓이는 거 많겠지..."
얘가 나한테 성욕을 푼다면 나는 얘한테 감정을 푼다.
뭔가 반대가 된 거 같지만, 우리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남녀 역전 현상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다.
"축구나 야구를 봐도 그렇잖아. 다들 오기 전부터 조금 들뜬 모습들이 보였어. 결과 뭐야. 반대로 수영은 어땠는데. 태주 진짜 죽어라고 훈련했어. 우리는 걔 훈련하다 익사하는 줄 알았다고."
"하하하! 국가 대표가 왜 익사를 해. 그것도 태릉에서."
"할 수도 있지! 최후의 기력을 짜내고 꼬르륵 했는데 아무도 없으면 선수라고 별수 있어?"
몸을 기대고 누워 있던 다빈이가 조심히 물어본다.
"나는 어때?"
"어?"
"회장님이 말한 여섯 개의 금메달에 나도 있을까?"
"..."
"응? 니가 봤을 땐 어때? 내가 메달 딸 거 같아?"
"야. 그건 진짜 아무도 모르는 거야."
"왜? 아무도 몰라? 신은 알 거 아냐."
"아니. 신도 그럴 걸. 야 이 씨발 인간 놈들아. 이 새끼 저 새끼 다 우승하게 해 달라면 나더러 뭐 어쩌라고? 몰라 젠장. 니들이 알아서 해!"
"하하하하! 신이 왜 욕을 해."
"신도 답답하니까. 1등은 하난데, 너도나도 1등 하게 해 달라면 좆같지 않을까?"
다빈이는 그렇게 농담으로 때우려 하지 말고 진지하게 말을 해 달란다.
"너도 메달 보면서 운동하냐?"
"넌 아니냐!! 이게 지는 금메달 몇 개 땄다고."
이봐 이봐. 누가 그러냐는데 당장 살 비비고 고추에 기대 누운 애부터 그러잖아.
"불안해?"
"긴장되지. 솔직히 메달은 따고 싶고 결과는 가늠이 안 되는 거고."
"난 한 번도 시합 나가면서 내가 메달을 딸 수 있을까 없을까 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잘났다. 실제라서 더 할 말은 없지만."
"..."
"왜? 그냥 농담 삼아서 하는 말이지."
"그게 아니라.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해지는데."
"뭐?"
나는 금메달이 아닌, 선수촌 입촌(?)이 목표인 놈이었고, 그를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수도 없이 가진 끝에 꿈을 이뤘지만.
보통 선수들이 금메달을 원하는 건 대체 뭘까?
"그거야..."
"이기는 거? 아니면. 그냥 그래야 하니까?"
다빈이도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나 애가 눈을 껌벅껌벅거리며 돌아본다.
"어. 말해 봐. 넌 금메달 따면 뭐 할 거야?"
"흠."
"실업 팀? 아니면. 대학?"
"몰라."
이런 얼빠진 대화를 들어 봤나.
금메달은 가지고 싶은데 그 이유를 모르겠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