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73화 (273/401)

손에 손잡고 (8)

2006년 12월 8일. 남자 100m, 400m 예선. 그리고 여자 헤파트론 첫날 경기가 시작되었다.

태주를 취재하려고 모인 한국 기자들은 그대로 수영장에서 칼리파 국제 경기장으로 모여들었고. 나에겐 한국 기자들 말고도 외신들도 더러 달라붙어 오랜만에 영어를 쓰느라 머리가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아쉽다니요. 실력으로 저를 이기고 올라온 선수들입니다. 친구라고 하더라도 승부에 양보는 없었고요. 저도 400m란 첫 종목에 도전하는 만큼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계주가 마지막 날이죠? 컨디션 조절이 어렵지 않으시겠어요?"

"중국 대표 팀 선수들 가운데 누가 라이벌이라고 보십니까?"

"계주에서 일본을 넘어설 한국 팀만의 전략은 뭐가 있을까요?"

이렇게 보면 내가 뭔가 의미가 있긴 있는 인간인 거 같다.

"전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말을 해 주겠어? 하여간 저 나라도 언론 수준 참..."

까도 내 새끼 내가 깐다고.

한국에선 그렇게 물어뜯던 한국 기자분들이 중국과 일본 기자들한테 시달리고 있으니 어쩐 일로 내 앞에서 위로의 말씀을 건네 주신다.

"구마하 선수. 다 져도 돼요. 계주만 이겨 줘."

"아니. 난 그냥 일본만 이겨 주면 돼."

"맞아. 일본은 꼭 이겨야 돼."

"다 이겨야죠. 뭘 굳이 일본만 콕 집어서 그러세요. 저도 일본 선수들 중에 친한 사람들 많은데."

"한일 감정을 떠나서. 쟤들도 지금 우리 육상 팀에 벼르고 있다니까?"

축구 야구 배구. 어느 종목이든 한일전은 무조건 반칙을 써서라도 이겨야 하는 경기지만.

육상 계주에 있어선, 오히려 우리보다 일본이 더 부글부글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 일화가 한 가지 있으니. 94 히로시마 기적의 금메달이 바로 그 주역들 되시겠다.

"지들이 실수한 걸 왜 아직까지 난리들이야."

"하하. 기자님들 저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힘내. 알지! 파이팅!!"

"네. 고맙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있는 지금이 한국 육상의 르네상스라 하지만, 내가 봤을 때 한국 육상의 진정한 르네상스는 92 바르셀로나부터 98 방콕까지의 선배님들이다.

한상률 감독님도 대표 팀 생활을 했던 시절로 이두희 감독님이 최고참에 천병욱 아버지가 대표 팀 감독으로 있던 때였다.

그때의 한국 육상은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루두루 단거리부터 중거리 마라톤까지 모든 종목에서 강하고 우수한 선수들이 많이 계셨다.

드라마는 94 히로시마에서 펼쳐졌다.

한국 체육의 긍지이자 자부심 손기정 어르신이 살아 계셨던 시절로 선생님이 직접 찾아가 응원을 해 주셨고 황영조 선생님이 바르셀로나에 이어 일본에서 마라톤 경기로 금메달 스타트를 끊으며 금빛 레이스의 시작을 알렸다.

원래 마라톤은 늘 경기 마지막 날 열리는데 이때는 마라톤이 육상 경기의 스타트를 끊은 것만도 일본의 졸렬함이 엿보이는 구석이다.

왜냐면 지들이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었거든.

그렇게 선택된 종목이 바로 남자 4x400 계주였고 일본은 이 종목에서 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기에 메달에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아무도 한국의 우승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선배님들도 시합에 있어, 메달을 따도 동메달이거나 하겠지 금메달까지는 기대하지 않으셨다고 들었다.

그러나 경기 중간. 일본 선수가 추격해 오던 한국 선수와 부딪혀 배턴을 떨어뜨리고. 그렇게 1위로 달리던 일본 팀이 자멸하며 한국의 우승.

일본의 육상계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그때의 악감정을 품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봐라. 저 은근히 인사하고 지나가면서 슥 깔아 보는 시선들 봐.

세상 만만한 경기가 어딨겠냐만 아시안 게임이라고 쉬운 경기가 될 거라고 생각할 순 없다.

"역시. 육상판에 오니까 흑인들이 보이는구나."

연습 땐 시간이 어긋나 자주 보지 못했는데, 시합이 시작되니 사우니다 경기가 열리는 카타르 본국 등 흑인 선수들도 보인다.

아무튼 일단 시합을 뛰어 봐야지.

결과가 말을 해 주겠지. 지금은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다른 뭐 할 게 없다.

* * *

"순탄하구만. 역시 구마하지."

"뭐가 순탄해? 뒤지는 줄 알았는데."

역시 나는 400과 잘 안 맞아.

난 성격부터 오락가락하는 놈이라 그런가, 파워도 있고 지구력도 좋아야 하는 밸런스 게임이 어렵다.

앗싸리 빨리 달리든가, 아니면 중거리를 뛰든가. 어후 힘들어라.

"와 이래서 결승 가겠냐."

"삼 일 뒨가? 진운이랑 같은 날 시합이네."

어쨌든 예선은 통과했다.

일정을 마친 이상, 남은 건 친구들 응원밖에 없었다.

"보자 여자 7종 하고서 남자 단거리 마지막이지?"

"어. 다빈이 나온다. 야 마하야 다빈이."

"알아 새끼들아 나도 보고 있어."

100미터 예선이 남은 동민이와 지성이를 빼고 진수 진운이 진진돌이들과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최다빈이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이런 말 하면 또 변태니 뭐니 하겠지만, 어젯밤 미간을 찡그리며 좋아하던 그녀의 모습과 지금의 승부욕 가득한 진지한 표정이 겹쳐지며 묘한 흥분이 느껴진다.

"복합 경기는 순위가 어떻게 되는 거냐?"

"글쎄다. 그냥 1등 하면 되는 거 아닐까?"

"아니야. 점수표가 있어. 그래서 일정 기록 안에 들어가면 그 점수를 따는 거고."

"그래? 그럼 모든 종목 점수표가 다 같아?"

"다르지. 남자는 원반 여자는 멀리뛰기가 점수가 높아. 그래서 생각보다 전략적으로 잘하는 종목에서 상위 랭크를 받는 게 경쟁에서 유리하게 작동해. 아닌 종목에서도 일정 점수 이상의 기록을 만들어야 순위 경쟁이 되고."

"복잡하구나..."

"새끼 박식한데? 넌 그런 거 어떻게 알았냐?"

"다빈이가 알려 줬지. 내가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

어제 지성이에 이어 진진돌이들도 니네는 뭐냐고? 둘이 사귀는 거냐고 물어보는데. 시선을 피해 운동장이다 쳐다봤다.

"야. 진운아. 얘 지금 우리 말 씹은 거지?"

"놔둬. 동민이도 아니고 뭐 그런 걸 물어보고 있어."

"차였어 새끼들아."

"진짜? 쟤 너 좋아하는 거 아녔어?"

"몰라. 운동에 집중하고 싶대."

차였지만 대신 애널을 허락받았지.

그래도 차라리 낫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뭔가가 있어서 연애는 아니라고 하니까.

그러고 보니 비슷한 대답을 혜정이도 했었는데.

어떻게 보면 혜정이가 신기한 애지. 아주 떨어뜨리는가 싶더니 또 내 옆에 있고. 자자고 하면 거절하지도 않지만, 받아 달라면 애매하게 거리를 두고.

"야. 그럼 점수표가 어떻게 되는데?"

"뭐가 기준이 되는 거야?"

젠장 설명하느라 여자 생각도 못 하겠네.

아무튼, 세세하게는 나도 잘 모르는 편이라 나중에 따로 찾아보자고 말해 주면서 알려 주었다.

여자 7종 경기. 영어로 heptathlon은 첫날 100m 허들, 높이뛰기, 투포환, 200m 달리기를 하고, 둘째 날 멀리뛰기, 창던지기, 800m 달리기 순으로 진행된다.

우승자는 총점으로 따지는데, 순위는 득점 표에 따라 각 종목의 종합 득점으로 정해지고 내가 알기로 멀리뛰기가 최고 점수 1,500 몇인가 그렇고 800m가 1,200 몇 대인가 그렇게 알고 있다.

그래서 최종으로는 6,000점대나 7,000점대의 점수 계산에서.

"야 근데 왜 800이 젤 낮아!?"

"존나 들으면서도 모르겠다.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

"지들이 물어봐 놓고 왜 나한테 뭐라 그래. 내가 IAAF도 임원도 아니고..."

"나도 옛날에 허들 같이 했었는데."

"그래? 진수 너가?"

"어. 근데 너무 부상이 심해서 그만두고 200m만 집중한 거잖아."

"동민이도 그 소리 했는데. 재밌긴 한데 은근 잔부상이 계속 온다고."

"다빈이 어려운 거 하는구나. 저러면서 또 던지고 뛰고 다 해야 되는 거 아냐?"

그러니 말도 못 할 도전이란 부담감에 애가 눌린 만큼 내가 몸을 쓰게 됐지.

어떻게 보면 오늘 400이 힘들었던 건 그동안 너무 양기를 뺏겨서 그런 거 아닐까?

"허들은 잘 하나?"

"키가 작아서 불리한 거 아냐?"

"허들은 키보단 하체 길이로 결정되고 무엇보다 다리가 빨라야 허들을 잘 뛴다."

"어? 감독님 오셨어요."

"음. 여기들 모여 있었구만."

최일묵 감독님까지 관중석으로 오셨다.

나한테 왜 경기장에 안 있고 빨리 올라왔냐고 하시는데, 시합 마쳤으면 꺼지라고 동민이한테 쫓겨났다고 하니 껄껄 웃으며 말씀하신다.

"자네들은 참 믿음이 강해."

"그냥 옆에서 계속 다른 선수들이 비교할까 봐 귀찮았던 거 아닐까요."

그렇게 다들 모여 앉아 순수한 마음으로 다빈이를 통해 복합 경기를 보게 되었다.

남자 10종과 달리, 도전한다는 자체만으로 칭찬을 건네주고 싶은 여자 7종경기.

원래도 천재적인 스프린터 였던 최다빈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내 줄까?

혜성같이 등장한 천재적인 재능의 미소녀는 국민들에게 무슨 이미지로 다가갈까?

그 첫 번째 경기 허들이 시작되었다.

"와. 잘하네. 리듬감 있다."

"저러면 진짜 잘하는 거야. 연습 엄청 했구나."

"진수는 허들을 잘 아나?"

"저 어릴 때 허들 선수 했었습니다 감독님."

"감독님 저 정도면 여자 허들에서도 나쁘지 않은 성적 아닌가요?"

"아니지. 그래도 한 종목에 집중하는 선수들보단 기량은 떨어지지."

그런 떨어지는 기량으로도 다빈이는 종합 8위에 올라선다.

하지만 기록이나 순위보다 점수표에 들어가는 게 중요한 경기인만큼 일희일비 하지 않고 장소를 이동해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예선이 따로 없구나. 뭔가 아는 종목인데 다르게 하니까 신기하다."

"그런 재미로 봐야지."

"감독님 지금 중계 하고 있죠?"

"음. 한국에선 방송 중이라고 하더라."

한국과 6시간 차.

내가 예선을 뛸 때는 한참 점심이거나 오후였는데, 지금은 초저녁 황금 시간대에 딱 걸린 거 같다.

당시 한국에 없어서 체감하긴 어렵지만, 나 때문에 잠깐이나마 홍역을 치른 다빈이였다.

이번 시합이 끝나면 결과에 상관없이 엄청난 인기몰이를 할 거 같다.

일단 애가 인물이 좋잖아. 피부도 하얗고 이목구비도 오밀조밀 다람쥐같이 생겼고.

머리도 많이 길었어. 역시 최다빈은 긴 머리 포니테일이지.

2000년 시드니 때 사격의 초현이 누나가 은메달 따면서 또르륵 흘린 한 방울의 눈물로 국민적인 인기몰이를 했는데 쟤는 오죽할까.

귀여우면서 단아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묘한 색기를 풍기는 몸매와 복합 경기라는 어려운 종목에 도전하는 열정.

"감독님. 다빈이 잘되면 좋겠네요."

"그래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선수를 떠나서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멋진 모습 보여 줘야지."

이렇게 앉아서 시합을 보니까 박문기나 최일묵 감독님이 나를 대신한 육상 스타를 키워 낸다는 말도 거짓이 아닌 것 같다.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못 따도 다빈이는 그냥 저 상태 그대로 쭉 자기 하는 일만 도전해도 스스로의 위치를 만들어 낼 것 같다.

"높이뛰기는 어때요?"

"잘해. 키가 작은 게 흠이긴 하지만 대신 몸이 가벼우니까."

최다빈의 하체야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단단한 허벅지에서 오는 파워와 매끈한 종아리라고 믿기 어려운 두 다리로 풀쩍 뛰어올라 최고 점수보다 바로 아래 단계에 링크가 된다.

"진짜 대단하네."

"누구? 다빈이?"

"그냥 다들."

이런 걸 남자는 3종목을 더해 10종목을 뛴다고?

데카트론이라... 어떻게 보면 나한테 딱 맞는 종목이 아닐까 싶다.

이것저것 몸을 완벽하게 만들어야지만 할 수 있는 위대한 선수의 경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라도 지금은 도전할 수 없는 경기.

"..."

박문기나 연맹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내공의 문제다.

지금도 벅찬 순간이 더러 있고 또 내 몸은 집중하는 운동에 맞춰 근력이 남들보다 쉽고 빠르게 바뀐다.

만약 내가 데카트론이라는 종목에 도전한다면 그땐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구라 조금 보태서 하늘을 날 수 있을지도. 형이 말한 무림인들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어.

강해지는 건 좋아도 적당히 해야지. 까딱하다간 신체 실험 당할라.

그런 마음과 다르게 보는 건 정말 재밌는 경기였다.

"야 이거 재밌네."

"그러게. 보는 것마다 쪼는 맛이 있는데?"

"이거 잘하는 선수가 저것도 잘하니까 멋지다."

말 그대로 복합 경기였다.

한 사람의 능력치가 한 종목에 특화되지 않고, 다변해서 나타나는 만큼 달리기했던 사람이 던지기를 하는 건 어떨까? 던지기 하는 사람들이 점프를 뛰면 또 어떨까? 점프를 주 종목으로 삼는 선수들의 근력은 또 어떻게 보여질까? 색다르게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도 우리는 최다빈이란 선수의 활약에 집중하느라 100미터 예선전을 치르고 있는 동민이나 지성이 경기에 큰 관심을 주지 못했다.

아니 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감독님 말씀대로 앞에선 투덜거려도 애들 실력을 믿으니까.

누구보다 잘할 거라는 걸 아니까. 물가에 내놓은 대학생들을 누가 걱정하겠는가. 콘돔은 챙겨 갔나 그런 걸 따지고 있지.

그런데.

"어??"

"뭐라고?"

"떨어졌어..."

"누가?"

다른 누구도 아닌 권지성이 예선전 마지막 라운드에서 탈락하며 결승 명단에 이름이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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