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74화 (274/401)

손에 손잡고 (9)

"어디가 아팠어?"

"아니요. 그냥 컨디션이 안 나왔어요."

"왜? 니가 왜?"

"아 형. 나도 질 수도 있죠 왜 그래요."

그런 게 아니다. 난 사람의 내공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지성이는 누구보다 안정된 힘을 가지고 있었어.

오히려 동민이가 겉으론 태연해도 속으론 드러나지 않는 초조함을 가지고 있었지 이놈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고.

지성이가 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런만큼 다른 누구보다 이놈의 패배에 내가 더 충격을 먹고 있었다.

"선수들이 잘했어요."

"그래. 지성이네 조에 사우디나 중동 애들이 많았어."

"설마. 암내 때문은 아니지?"

진수의 썰렁한 농담에 애는 뭔 상관이냐고 씩 웃고 말았다.

웃는 걸 보면 또 별문제 아닌가?

나도 늘 베스트 컨디션에 시합을 나가는 게 아닌만큼 얘도 그런 불운한 순간이 겹친 걸까?

"하하하. 아 이 형들 진짜. 사람을 냄새로 가르고 있어."

"지성아. 너 진짜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지?"

"네. 맞아요. 괜찮다니까."

"..."

"형. 아 또 그런다."

또 그러는 게 아니라 새끼야...

난 지금 차라리 니가 부상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야. 넌 지성이만 걱정이냐? 나 준결승 나가는 건 관심도 없어?"

"넌 뭐 냅둬도 알아서 잘 하잖아."

"오 뭐야? 야 니네 들었어? 이 새끼가 이제는 날 인정하는데?"

"마하가 널 무시한 적도 없어."

"하여간 이상한 데서 자격지심 가지고 있어."

"하하하. 동민이 형. 축하해요."

"그래! 씨발 이렇게 된 거 내일 금메달 한번 보자!!"

동민이의 큰소리에 다들 힘찬 파이팅 외쳤다.

지성이도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순간 확실히 알았다. 이놈의 고질병이 또 터지는구나.

큰 대회에 나오면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데 치명적인 고질병이...

* * *

"자신감의 문제지. 선수 멘탈의 문제고."

"그랑프리 잘했는데... 왜 하필 아시안 게임에 와서..."

"대표 팀에 승선하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아서일까? 그런 거로 무너진다면 내가 권지성이란 선수에 대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린 건 아니겠군."

"후우..."

"한숨까지 쉴 일인가?"

"감독님. 제가 대표 팀을 떠나도 안심이 되는 건 그건 지성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연맹은 스타를 바랄지라도 나는 선수를 보고 싶다.

그리고 내가 보는 육상의 가장 기대되는 선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권지성이었다.

"잘하는데. 아 씨 자기를 믿으면 되는데."

"그만. 거기까지. 그 이상은 아무리 자네가 감독 대행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해도 넘어설 수 없는 문제야."

"이제 와서 자신감을 가지긴 어렵겠죠..."

"경험이지. 저런 선수들 많아. 안방에선 펄펄 날아도 국제 대회에 나오면 평범하다 못해 움츠리는 선수들."

사람이 완벽할 순 없다.

주변의 평가에 따르면 나도 천부적인 실력을 가진 만큼 인성은 떨어진다는 말을 들으니까.

"자네가 권지성 그 친구를 이렇게 아끼는 줄은 몰랐군. 200미터 경기도 남아 있으니까. 지켜보자고."

"네."

"들어가 쉬어."

"네 감독님. 내일 뵙겠습니다."

육상 대회 이튿날 남자 100m 결승에 진출한 동민이와 800m 예선전 진운이. 그리고 여자 7종 이틀 차 시합에 진출하는 다빈이의 경기가 있었다.

"와 재밌다. 누나 잘하는 구나."

"이게 은근 재밌다니까. 거기다 점수표가 있어서 쫄리는 맛이 있어."

"그러게. 마하 형. 형도 은퇴하지 말고 10종 도전해 봐요. 형 하면 잘할 거 같아."

"됐어. 지금도 힘들어."

시합이 없는 지성이는 느긋한 마음으로 관중석에 앉아 친구들을 응원해 주고 있었다.

그런 주변의 응원에 힘입어 진운이는 전체 순위 2위로 예선전을 돌파했고, 동민이는 생애 최초 국제 대회 은메달을 수상하며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흐윽! 으윽 마하야... 진짜 너무 고맙다..."

"아 미친놈. 왜 여기 와서 울고 지랄이야..."

"정말로 진짜... 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놓지 않은 거 내가 평생 갚고!"

"야. 야. 카메라 있다고 오버하지 마."

"병신아!! 제발 사람이 진지하게 말을 하면 들으라고!!"

동민이의 뜨거운 눈물에 나까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한국 상황이 어떤지 몰라도, 돌아가면 정석이까지 셋이 진탕 술에 취하는 날이 기대된다.

"중국 애들이 빠르네. 카타르도 무시 못 하겠고."

"저 선수 200m도 나왔는데. 피지컬은 유진이랑 비교해도 다를 게 없는 거 같아요."

"그럼 우리가 동민이의 원수를 갚아 줘야지."

100미터 시상식을 지켜보며 진수와 지성이가 투지를 다지는데.

"..."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지성이의 내면에는 주저함이 엿보이는 것 같다.

푸른 기가 한 풀 흔들리며 빛을 잃고 있었다.

"지성아."

"네?"

"부러워 하지 마. 동민이는 동민이의 시합이 있고 넌 너의 시합이 있는 거니까."

"물론이죠. 기뻐요. 좋고. 형 진짜 누구보다 고생했잖아."

최일묵 감독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건 개인의 문제지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빈아 힘내!!!"

당당하게 은메달 시상식을 마치고 관중석으로 들어온 동민이까지 합세하여 다 같이 최다빈의 이틀 차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창던지기였다.

다빈이는 어제에 이어 창던지기에서도 기적과도 가까운 밸런스 감각으로 전체 2위에 올라 메달권 진입을 가시거리에 두었다.

"와 누나 저러다 진짜 메달 따는 거 아냐?"

"멀리뛰기가 아까 안 좋았어. 거기서 점수를 너무 잃어 가지고."

"대신 800 죽어라고 뛰면 가능하지 않아요?"

지성이가 말한 대로 다빈이는 종합 점수에서 이미 금메달과 은메달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지만, 대신 일본 선수와 40점 차 엎치락뒤치락하는 순위 경쟁을 치르고 있어 끝까지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근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지금 그런 식으로 중계해 주고 있겠지?"

"그렇지. 어제도 보니까 다빈이 이름 실검 오르고 있더만."

지난 가을 최다빈에 대한 스캔들과 악플이라고 해 봐야 대다수 시민들은 큰 관심도 없는 육상계 내부 이야기지. 국민적인 집중을 받는 아시안 게임에 있어 다빈이는 구마하의 전 여친도 아니고. 육상 내부 관계자의 특혜를 받는 선수도 아닌. 도전하는 미소녀. 어려운 경기를 척척 해 내고 있는 스포츠 천재. 꼴찌를 해도 일본만 이기면 용서가 된다는 한일전의 영웅으로 등극하고 있었다.

"그렇지!! 다빈아 호흡 아껴!!"

그리고 여자 7종 마지막 경기 대망의 800m.

체력이 안 되어 기권하는 선수들과 달리, 다빈이는 끝까지 경기를 뛰었고.

전 남친이 아테네 올림픽 800m 금메달 리스트라는 명성에 부끄럽지 않게 당당히 전체 순위 1위로 결승점을 지나 쓰러지면서 일본을 넘어 5,647점. 카자흐스탄 인도에 이어 대한민국 여자 최초로 복합 경기 메달을 손에 쥐었다.

* * *

"오늘! 우리 선수들 다들 너무 고생 많이 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 주고 싶고!!"

박문기의 메달 금메달 여섯 개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는 몰라도, 일단 우리 대표 팀은 산뜻한 출발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 100미터와 여자 7종에서 메달 2개를 획득.

아직 시합이 남아 있지만 참석하고 싶은 사람들에 한해 선수촌 식당에서 회식을 가졌다.

은메달과 동메달 리스트인 동민이와 다빈이가 아무래도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난 일부러라도 오늘의 주인공들을 위해 잠깐 참석해 얼굴만 비추고 방으로 돌아와 혼자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음? 넌 더 있다 와."

"됐어요 나도 시합 있어."

"그래. 그럼 일찌감치 들어가서 쉬든가."

선수촌 식당에서 숙소로 가려면 운영 측에서 마련한 챔피언의 길을 지나가야 된다.

이런 작은 것 하나도 애한테 부담이 될까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새로운 종목 금메달이 나온 만큼 어제는 못 본 깃발들이 걸리고 있었다.

"아쉽다. 동민이 형 얼굴 걸리길 바랐는데."

"..."

"내일은 형도 저기 있겠죠?"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물었다.

"지성아 떨리냐?"

"아니요."

"그럼. 뭐야?"

"뭐가요."

"지성아. 너도 여기 니 얼굴 걸 수 있어."

"됐어요 크게 바라지도 않어."

형은 내 생각을 타인에 주입하지 말라고 그랬다.

좋아. 그럼 내 생각을 버리고 오롯이 지성이의 마음만 들어 보자.

"금메달 따기 싫어?"

"네?"

"얼굴 걸기 싫으냐고."

"마하 형...?"

"아니면 뭐야. 계주만 보고 있는 거야? 우리랑 있으면 메달 따겠다 그것만 보고 있어?"

"형. 왜 그래요."

"야. 육상 천재 권지성."

"..."

"대한민국이 어려서부터 오냐오냐 키워 낸 진정한 엘리트 선수."

"...형?"

부담 주기 싫다. 편안하게 운동하고 싶다.

하지만 지성이가 의기소침해져 겸손이란 가면을 덮어 쓰고 위축되어 다른 애들 칭찬만 하고 있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다.

"지성아. 니가 해야 돼. 이 벽은 너 스스로 깨든 넘든 오줌을 갈기든 씨발 뭔 짓을 해야 없앨 수가 있다고."

"...내가 무슨 벽이 있는데요."

"넌 이미 준비된 선수야. 그것만 깨면 아시안 게임이 아니라 넌 세계 선수권이나 올림픽 결승 무대에도 오를 수 있어."

"그건 형이나 유진 볼트 같은 사람들이나 그러죠."

"너도 할 수 있다고. 니가 병신 같은 생각만"

"..."

"미안. 말이 심했다."

"형... 저 조금만 걷다가 들어갈게요. 먼저 가서 쉬세요."

"야 같이 가."

"괜찮아요. 무엇보다 형은 내일 결승 뛰어야 하잖아. 난 다시 예선부터 시작이지만."

대회 열흘 차. 지성이의 남은 종목 200m와 계주 두 종목.

누가 금은동인지는 몰라도 난 지성이가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최소 참가하는 경기마다 아테네의 나같이 메달을 다 가져갈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나도 이런 욕심이 나는구나..."

잘할 수 있는 놈이. 누구보다 잘할 거라고 믿은 녀석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니 실망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박문기를 욕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 인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러고 싶지 않다고...

적어도 내로남불은 아니라는 뜻이지.

* * *

"와 사람들..."

"어제까지는 반도 안 찼었는데..."

"하하하! 이런 데서 시합을 뛴다고? 진짜로?"

12월 10일. 일요일. 칼리파 국제 경기장.

관중석은 전석 매진. 소문에 의하면 그날 암표 가격이 자리에 따라 1,000만 원이 넘는 돈에 거래됐다고 말도 들렸다.

그들 모두는 한 사람을 보기 위해 그의 시합이 열릴 순서만 애타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남자 결승을 마지막으로 미루지 않을까?"

"그럴 수 있나? 엄밀히 순서라는 게 있는데."

"뭔 상관이야. 인기 좋으면 그만이지."

구마하 한 사람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관중들.

시합을 마친 이동민 김진수 김진운 권지성 그리고 최다빈이 관중석에 앉아 그를 응원해 주고 있었다.

"와 사람 진짜 많다."

"그러게. 어제 좀 이렇게 오지."

"마하 형은 어떻게... 가는 데마다 이러냐."

"아테네 땐 더 했었어."

"어? 아 맞다. 누나 아테네 왔었다고 형이 그랬다."

최다빈은 2년 전 아테네에서의 800m와 1,500m 금메달에 도전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진짜 보는 사람이 다 가슴이 떨리는데 쟤는 아무렇지 않고."

"마하 형은 마지막에 일부러 질 거 같아서 쑈 한 거라고 하던데."

"그 순간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쟤는 우리랑 다르다는 뜻이야."

"...그렇겠지."

권지성은 어젯밤 구마하가 건네준 이야기를 곱씹어 본다.

"누나."

"응?"

"형이랑 둘이 있으면 뭐 해?"

"뭐 그냥 이야기하고 마사지도 받고."

"형이 누나 만져?"

"마사지야 마사지. 너도 알 거 아냐. 쟤가 그런 걸 되게 잘해."

"으음... 형 마사지 잘하긴 하지."

(넌 이미 준비된 선수야. 그 벽을 깨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이야.)

"병신 같은 생각인가..."

"어? 뭐라고?"

"아니야. 보자 슬슬 시작하겠다."

대회 순서가 진행되며 전광판에 다음 시합 목록이 떠오른다.

Men's 400m 알림만 뜨는데도 관중들은 열광한다.

그리고 영웅이 등장했다.

"함성 봐라..."

"터번 쓴 사람들도 마하 응원해 주고 있어."

"진짜 쟤가 스타는 스타구나..."

사람들은 기적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금빛 레이스를 이어 가는 구마하의 도전은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그 자체가 이미 즐거움이고 엔터테인먼트였다

하지만 영웅은 단지 도전에서 멈추지 않고 팬들의 환호에 부응해 주었다.

"새끼 그걸 또 이기네..."

"괴물이야. 진짜 괴물..."

"우리가 정말 누구랑 운동을 한 건지..."

구마하의 또 한 번 빛나는 커리어에 새로운 대회와 종목의 이름을 더하게 되었다.

45.34.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남자 400m 금메달.

그는 한국 육상 최초로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 그리고 아시안 게임 메이저 대회 3관왕을 달성한 인물이 되었다.

"다빈아 너 갑자기 왜 울어?"

"그냥 모르겠어... 난 이상하게 쟤 운동하는 거만 보면 울컥해져..."

"뭔지 알 거 같아."

"니가 뭘 알어?"

"쟨 감동이 있어. 같이 운동해 봐서 그걸 더 잘 알 수 있고."

형들과 다빈이 누나의 이야기를 듣는 권지성도 마음 속 꺼내지 못한 울림을 듣는다.

정말 멋있다. 저런 선수가 되고 싶었다.

땀 흘려 노력하고 끝끝내 해내는 모습.

이겨도 크게 기뻐하지 않으며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도리어 시합 자체를 즐기는 사나이.

세리머니가 익숙해 이제는 다른 선수들과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걸 더 즐기는 그의 모습은 늘 권지성이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이상향을 담고 있었다.

"누나..."

"응?"

"누나 아테네 때 어땠어? 힘들지 않았어?"

"힘들었지... 많이 힘들었어."

"그치? 뭔지 알 거 같아."

1등을 강요받으며 성장한 그들에게 시합장 관중들 그 모든 것들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구마하의 모습은 정말 뭐라 붙잡기 어려운 부러움과 이상 그리고 절망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