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75화 (275/401)

손에 손잡고 (10)

세리머니를 마치고, 기자들도 보고 인사도 하고.

다 끝낸 뒤 동민이 다빈이와 자리를 옮겼다.

"애들도 들어갔는데, 우리도 적당히 건배만 하고 가자. 내일 예선 있으니까."

"야 그래도. 아. 이제 좀 한결 마음이 놓이는 거 같다."

"왜? 뭐 긴장하고 있었어?"

"너 시합."

"내 시합을 왜 니가 걱정하냐?"

"걱정되지. 괜히 우리들 운동시키느라 니 할 거 못 하면 어쩌나 했었는데..."

"아하하하~! 야. 이동민? 너 누가 누굴 걱정해 지금?"

"그러게. 병신이냐? 그런 생각을 왜 하고 있냐?"

"하면 안 되냐 미친놈아! 그래도 친구 마음이라는 게 있는데... 애들 다 그랬어. 우리 챙기다 너 아무것도 안 되면 미안해서 어떡하냐고."

"병신들 지랄들을 해요..."

"남자들 우정이다 진짜."

새끼들 그런 걱정들을 하고 있었어? 난 몰랐지.

역시 이래서 팀이 좋다고 하는가 보다.

이제는 친해졌다고 말 한마디 한마디 정석이 빙의 된 듯 거칠게 나오지만, 다들 마음으로는 서로를 응원하고 있음에 뿌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래도 또 그걸 우승을 하냐? 진짜 지긋지긋한 새끼..."

"야 씨발 뒤지는 줄 알았어. 진짜 마지막 300 돌고 최종 트랙 딱 나오는데 막 숨이 넘어갈 거 같은데."

"아시안 게임은 몰라도 세계로 나가면 안 된다?"

"어렵지. 여기서 1~2초를 더 줄여야 하는데. 못 해. 그건 진짜 목숨을 걸어도 안 되는 거야."

"그래도 난 너가 베이징 때 100, 200, 400 도전하는 거 보고 싶은데."

"그럴 바엔 차라리 데카트론을 하지. 육상 단거리는... 나도 감정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건 아니라고."

목표와 도전 의식을 떠나서 선수이기 전에 나도 사람이었다.

연맹과 겪는 갈등이나 희생과 고생이 이제는 버거운 단계다.

선수 구마하가 아니라 인간 구마하가 무너질 상황 앞에서 다들 내 은퇴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그만큼 마무리가 잘되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하필 지성이가..."

계주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제가 지성이에 관한 것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오늘 관중 진짜 많더라... 새끼 인기는 좋아요."

"내일도 오겠지. 아마 모레까지 그럴 거야. 폐막까지 쭉 이어 간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

"그렇겠지. 너 시합이 계속 있는데."

"안 그래도 아까 지성이도 나한테 그랬었어."

"뭐라고?"

"누나. 계주 때도 오늘같이 관중들 오겠지? 라고..."

"흐음."

"와... 이 새끼랑 팀이라는 게 그런 의미가 되는구나. 그랑프리나 해외 대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너도 떨리냐? 넌 그런 거 신경 안 쓰지 않았어?"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아까 그런 분위기는 좀 다르지 새끼야..."

동민이 말대로 우리는 한 팀이기에, 나에게 거는 관중들의 함성은 곧 팀원들의 부담이 된다.

"난 잘 모르겠어. 그게 힘들어? 응원받으면 좋지 않나?"

"케바케지. 무조건 좋다고 하긴 어려워."

"다빈이 너도 그래?"

"음... 만약 아까 같은 상황이 된다면... 힘들지."

이해가 안 되네. 팬들 있으면 막 없던 힘도 생기지 않나?

"지성이 지금 누구랑 방 써?"

"얘. 걔는 태릉부터 마하랑 계속 한 방 쓰고 있었어."

"알게 모르게 대표 팀은 내가 선배라서."

"으음. 너 그럼 그냥 오늘 내 방에 와서 잘래?"

"어!???"

"와... 다빈아 니네 지금..."

"아니. 따지고 보면 지금 지성이 컨디션 젤 잘 아는 건 얜데. 둘이 같이 있는 게 안 좋을 거 아냐. 난 삼촌 방 가서 자도 되니까."

어우 식겁해라 동민이도 있는데 다빈이 얜 조심성이 없나 싶었는데...

"뭔 소리를 하나 했네. 내가 지성이한테 부담이 된다?"

"부담이지. 그걸 몰라?"

"...모르는 건 아닌데."

"근데 그러면 이 새끼도 컨디션 떨어질 거 아냐."

"얜 뭐. 잘하니까. 더 힘든 애 생각해 줘야지."

"하하하. 칭찬이지?"

"하긴... 아까 너 우승했을 때도 우리랑 다르게 지성이 표정이 좋아 보이진 않더라."

"아 새끼 진짜 왜 그러지...? 왜 큰 시합만 나오면 그럴까..."

최일묵 감독님은 그것도 실력이라고 하셨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아니다. 실력이 없는 게 아니야. 준비가 안 된 것도 아니라고. 그냥 뭔가 잘 안 풀리고 있는 거야.

지성이는 꾸준히 땀을 흘리며 자신을 갈고닦아 온 놈이다.

모두가 노력하는 스포츠에서 함부로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이놈이 해 온 노력에 비해 지금 그 모습을 실력이라고 평가를 받아선 안 된다고.

반드시 이겨야 하는 건 아니어도 져도 되는 놈은 아니라는 뜻이다.

져도 최선을 다하고 져야지. 그래야 상처를 안 받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지성이가 나한테 그랬거든. 지는 어려서부터 이기는 게 당연한 시합을 뛰어왔는데, 우리 만나면서부터는 져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됐다고. 난 그래서 존나 대범하게 잘할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건 니가 잘 모르고 그렇게 받아들인 거야."

"어?"

다빈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야?"

"패배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거랑 패배를 받아들이는 건 다른 거라고."

"같은 거 아냐?"

"넌 져도 돼.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어."

"글쎄? 아니야.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어. 진다는 건. 그러니까. 본인이 아니니까 뭐라 말하긴 어려운데. 난 지성이 얘가 그런 마인드를 가지는 순간 내면에 무언가 깨진 건 아닐까 싶어."

"뭐가 깨져?"

"그 새끼가 깨질 게 뭐가 있어?"

"뭐라고 해야 되지... 뭐라고 해야 될까? 그냥 너네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애들은 그런 게 있어."

다빈이나 지성이. 체육계 관계자 누구나 그 이름을 들어 본 선수들.

이런 엘리트 선수들은 어려서부터 우승이 당연하게 성장하여, 패배란 자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아니라, 나의 세계가 조금씩 무너지는 이야기란다.

"세계관이 무너져? 그렇게까지 생각한다고?"

"응."

"..."

"다빈아. 무너진다는 게 그런 의민가? 내가 설 땅을 조금씩 갉아먹는 그런 이미지?"

"이동민 잘 말했네. 시합을 즐겨? 선수들과 교류를 한다고? 어떻게? 왜? 적인데? 너네도 기억해 봐. 고등학교까지 지성이나 내가 누구랑 말 한마디 하는 거 봤어?"

"그건 니네가 싸가지가 없어서 그런 거 아냐?"

"야! 넌 나를...!!"

"다빈아. 지성이 우리랑 친해. 농담도 잘하고. 그 새끼도 술 좀 들어가면 은근 마하 못지않게 헛소리 잘하는 놈이야."

"그래. 그 새끼 은근 진지하게 미친 소리 하면 얼마나 웃긴데."

"그건 너네가 형으로서 애를 끌고 다니면서 채워 준 거지. 걔가 또래 친구들 있는 거 봤냐고."

"그러고 보니까..."

"마하야 너 지성이 친구들 이야기 들어 봤냐?"

"아니. 걔 진수랑 같이 다니잖아. 지금 대한체대 가서도 진운이랑 붙어 다니고."

동민이나 나는 일반 고등학교에서 운동을 했다.

뭐 나는 아니라고 해도, 동민이만 하더라도 체육 하느라 학교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지는 못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환경이 너무 다르니까. 나만 하더라도 고3 체육 특기생으로 움직이자 친구들과 사는 세상이 완전히 변해 버리는 걸 느꼈고.

하지만, 지성이는 운동 때문에 친구들 못 사귀었다고 하기엔, 체육 중학교 체육 고등학교 체대를 다니는 놈이었다.

환경적으로 사람 사귀기 어렵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애가 싸가지가 없거나 존나 개새끼라서 애들이 싫어하는 놈도 아니고.

그런 배경이 있을 줄이야...

"아마. 너네 아니었으면, 걘 진작에 트랙 떠났을걸? 운동과는 담을 쌓는 길을 갔겠지."

"그렇게까지 생각한다고?"

"그럼. 그만큼 지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그래서 관중들이 좋으면서 한편으론 무서운 게 더 커."

"너도 그런 거 있어?"

"없다곤 못 해. 뭐 언제 이런 대회를 나와 봤냐... "

한국 시합은 큰 경기장에 코치 한 두 사람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관중이 없다.

나라는 선수가 나오고 요즘은 좀 나아졌다곤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한국 선수들은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본 실력을 내기가 어렵다.

싸가지의 문제가 아니었구나. 얘네한텐 시합이 생존 게임이었어.

나와는 정반대의 케이스다.

삶의 많은 시간을 외롭고 개찐따로 살아온 나는 누가 봐 주고 응원해 주면 없던 힘도 생기지만, 얘네는 반대로 무너지는 거야.

"그렇다고 매번 관중 없는 경기장만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따지고 보면 한국 체육계의 고질병이지. 지성이만의 문제는 아닌 거야."

"아~ 그래서 대회만 오면 지성이보다 진수 진운이 이런 애들이 잘하는구나."

"이동민 너도 그렇잖아."

"난 뭐.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내 기록 내 컨디션이 우선이지."

권지성이란 그늘에 가려져 평생 2인자로 살아온 김진수는 그 앞이 지성이가 됐든 내가 됐든 상관하지 않는다. 오로지 승리만을 갈구할 뿐

진운이도 원래는 주목받던 선수가 아니었지만, 더 인기를 얻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는 야망에 불타 지금은 나를 대신하여 한국 중거리의 간판선수가 되었다.

동민이는 뭐. 이 새낀 아무 걱정이 없고.

후우. 지성아... 널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결국 지성이 없음 우리 계주도 안 되는 건데...

"내일 예선 몇 시에 해?"

"몰라... 200 결승하고 이것저것 한 다음에 그다음에 계주 시합 시작한다고 들었어."

"시간이 너무 없네..."

다빈이는 걱정 어린 한숨을 쉬고, 나랑 동민이는 서로를 어둡게 보았다.

"따지고 보면 넌 계주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냐?"

"맞어..."

"야. 혹시나 만에 하나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걱정 마. 내가 이 새끼를 원망할 건 없으니까."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무리가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거고 받아들여야 한다.

승부에 절대란 없고 무조건 내가 이겨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질 수 있어. 아쉬울 건 없다고.

하지만 그건 내 마음이지...

권지성 이 새끼는...

모두가 메달을 가져가고 있었다. 아마 진수나 진운이도 좋은 결과를 낼 거라 본다. 색깔의 차이지 난 두 녀석이 반드시 포디움에 설 거라 믿는다. 내외공도 충만하고 바로 옆에서 금은동이 나왔는데, 이놈들 승부욕과 야망이 조용히 박수만 치고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정말 지성이만 뺀 나머지들이 다 그런 멋지고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면...

"한 감독님이..."

"감독님 왜?"

"...아니야."

감독님을 알기에 그 녀석의 남은 인생을 어림잡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다빈이 말대로 아마도 지성이는 육상을 떠나 다시는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감독님이 과거의 분노를 잊지 않고 살아온 만큼 지성이도 분명...

하지만 이놈을 짓누르는 감정은...

그것은 분노가 아니겠지.

아마도 패배감이 될 것이다...

"후우..."

"왜 한숨을 쉬어. 너 오늘 금메달 땄어."

"그래. 너무 남의 사정 담지 좀 말라니까."

지성이 걱정에 두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왜냐면 너무 잘 알아서... 그렇게 패배감에 찌들어 산다는 게 어떤 의민지 정말 누구보다 잘 아니까 나는.

분노는 차라리 나.

하다못해 씨발씨발거리고 화라도 내잖아.

성질 괴팍한 놈들은 어디 가서 눌려 살진 않는다고. 까칠할 뿐이지.

허나, 패배감은... 그것은... 정말 끝도 없는 자기 불안과 우울. 그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를 혼자의 힘으로 뚫고 나온다는 건...

내가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운동하는데.

좋은 것도 있지만,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고.

비약이 아니다. 난 그게 보여.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진짜 막막하네."

"어쩔 수 없어. 시간도 없고. 당장 내일이 예선이고 모레가 결승인데..."

"결승은 가겠지. 너네가 있는데."

"..."

이렇게 보면 태윤이가 다가온 것도, 남수나 정석이나 늘 곁에서 응원해 준 것도 정말 대단한 일 같다.

친구들이 나에게 해 준 일을 왜 나는 할 수 없을까...

금메달이 많으면 뭐 해. 이 종목 저 종목 운동 잘하면 뭐하냐고.

옆에 있는 친구 하나 지켜 주기도 어려운데...

* * *

"너도 가서 자."

"그냥. 잠깐 지성이 얼굴만 보고 가게. 나도 얘 걱정돼 지금."

"..."

자리를 마치고 동민이는 자기 방으로 가고, 다빈이도 잠깐 지성이 얼굴만 보고 가겠다면 남자 숙소로 따라 들어왔다.

"넌 내일 200m에서 김진수보다 지성이가 더 메달 따면 좋겠어?"

"솔직히 누가 받든 상관은 없지. 난 그냥 두 녀석이 후회 없는 경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둘 중 하나겠지? 그리고 진수는 절대 양보할 생각 없을 거고?"

"원래도 진수는 200m에서 나도 인정 안 하는 놈이야. 은근 200m 프라이드가 강하다고."

"주 종목이라는 건 있으니까."

그런 주 종목 100m에서 결승도 못 간 지성이었다.

올 초 동민이와 둘이 보여 주었던 실업 팀 대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땐 참 좋았는데. 새끼 자신감도 충만하고 멋졌는데.

"어디야?"

"저기. 복도 끝 방."

"으음."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지성인 불도 끄고 혼자 침대에 멍하니 있었다.

"뭐 하냐? 자는 것도 아니고."

"..."

"야."

"지성아?"

"어. 형. 어? 누나도 왔네."

"생각보다 더 심각한 거 같은데..."

"그러게..."

시뮬레이션 돌린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성이는 내일 시합을 앞두고 긴장과 두려움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단다.

"너 밥은?"

"...아까 형들이랑 먹었어요."

"그럼 자. 쉬든가. 왜 이러고 앉아 있어?"

"누나 여기 왜 왔어?"

"그냥 너 걱정돼서."

"뭘 걱정해. 내가 앤가..."

"이러고 있는데 걱정이 되지 새끼야."

"아 맞다. 형 우승 축하해요."

"됐어 인마. 이제 와서 뭔."

"멋있더라. 괴물이야 진짜..."

"야... 너 그냥 오늘 밤 혼자 있을래?"

"그럼 형 어디 가서 자고?"

"난 뭐. 얘 방도 좋고."

"어???"

"착각하지 마. 내가 삼촌한테 가서 자는 거야."

"그럼 자. 쉬든가. 왜 이러고 앉아 있어?"

"누나 여기 왜 왔어?"

"아. 어어... 됐어. 뭐 하러 그래. 형도 내일 시합 있는데..."

"씻긴 했어?"

"아직요. 씻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들어서."

"그럼 혼자 몇 시간 동안 뭐 하고 있었냐?"

"그냥... 뭐 이것저것 생각들..."

자연스레 열린 말문에 지성이도 속으로 고민하던 문제를 털어놓고 있었다.

"과거를 좀 돌아봤어요."

지성이가 스르륵 벽으로 가 등을 기대고 앉았고,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 주기 위해 다빈이와 나도 반대편 내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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