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79화 (279/401)

손에 손잡고 (14)

사랑과 열정(?)이 넘치는 밤을 보내고.

늘 그렇듯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으음."

지난밤 좁은 공간에서 한계를 느낀 우리는 내 침대와 지성이 침대의 매트리스를 바닥에 깔고 남은 시간을 보냈다.

다빈이가 옆에 꼭 붙어 잠들어 있었다.

지성이는 저 멀리 침대에 붙어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셋 다 알몸이었다.

원래도 하고 난 다음 날은 상대방 얼굴 보기 어색한 편이지만, 오늘은 지성이까지 벗고 누워 있으니 뻘쭘함이 한도를 넘어서는 기분이다.

혼자 어째야 할까 뒤척거리고 있는데, 다빈이도 인기척을 느끼며 일어나 눈을 비비며 말했다.

"어음... 일어났어?"

"졸리면 더 자.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잠깐만. 나 먼저."

소변을 누고 와서 다빈이와 이불을 둘둘 감고 앉아 지성이를 보았다.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돌아누워 있는 걸 보면 뭔가 측은하단 생각이 들었다.

"깼나?"

"안 깬 거 같던데."

"가서 흔들어 볼까?"

"놔둬 지금 보기 좀 그래."

"넌 좀 어때?"

"몰라. 시합 뛴 거보다 더 온몸이 얼얼한 기분이야."

다빈이도 슬쩍 근처에 벗어 둔 속옷을 챙겨 들며 말했다.

"넌 괜찮아?"

"나야 뭐. 문제 될 거 없지."

"으음. 마하야. 근데 쟤 가서 이불 좀 제대로 덮어 줘. 엉덩이 나온다."

"아 뭔가 손대기 좀 그런데..."

"남자끼리 뭐 어때?"

"야. 남자끼리니까 더 싫지. 원래 남자는 살 닿는 그 자체를 끔찍하게 여긴다고."

"정말? 너네들 목욕탕 가면 서로 등도 밀어 주고 한다면서?"

"그거랑은 다른 이야기지."

둘 다 서둘서둘 옷을 챙겨 입고 다빈이 숙소로 넘어왔다.

우리만 있자 조금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후우. 아 떨려라."

"뭐가?"

"그냥. 지성이 얼굴 보기 민망했거든."

"...야. 넌 그런 애가 날 그렇게!!"

"아하하하. 몸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몰라. 엉덩이가 얼얼해..."

몸은 조금 힘들지만, 다빈이는 어젯밤 일을 크게 담아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냥 특별한(?) 경험을 했다 정도로 넘기는 것 같다.

역시 성욕에 있어선 이해도가 넓은 아이다.

"음. 그래도 뭔가 추워."

"그래. 일로 와서 좀 누워 있어."

"뭔가. 어제는 셋 다 분위기에 미쳐 있던 거 같아..."

"미쳤지. 미치니까 그런 짓을 했지."

"넌 아무렇지 않아?"

"나? 나야 뭐. 난 그냥 좋았어."

"뭐가?"

"그냥 너 색다른 얼굴도 보고. 전에는 모르던 또 다른 모습도 느끼고."

"지성이랑 같이 해서 좋은 건 아니고?"

"다빈아. 참고로 말하는데, 정말 어제 딱 하루만이다. 이런 짓 또 안 해. 나도 분위기가 그렇게 흐르니까 그런 거지."

"그럼 당연하지. 내가 뭐 변태냐? 너도 아니고."

"난 그럼 변태냐?"

"넌 변태 맞잖아."

"으하하하! 다빈아. 나도 선이라는 게 있어."

색다른 경험을 가진 만큼 우리는 다양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런 거 해 봤냐? 여러 명이랑 또 하는 그런 걸 즐기는 편이냐? 그녀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 주었다.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데, 나도 딱히 즐기는 편은 아니야."

"있긴 있다는 소리구나..."

"뭐. 없진 않고..."

"넌 유명한 애가 배짱도 좋다..."

한국인이냐 외국인이냐? 남자냐 여자냐? 다빈이가 또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데, 대충대충 둘러대며 이불을 꽁꽁 둘러 애벌레로 만들었다.

"아 왜 이래 답답하게."

"몸 따뜻하게 하고 있어. 어쨌든 피곤하잖아."

"이제 와서 다정한 척을 한다고?"

"야. 나 원래 다정해."

"재수 없어... 너 싫어. 가!"

투덜투덜 궁시렁궁시렁.

뒤늦게 여러 생각이 밀려오는지 다빈이 입에선 좋은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사람 다리를 어떻게 그렇게 쩍 벌리고. 골반 아프게..."

"미안. 너무 심했나?"

"마하야... 근데. 지성이가 또 하자고 매달리면 어쩌지?"

"싫으면 싫다고 하면 돼. 뭘 걱정해."

"그래도..."

"그럼 좋아? 니 감정 가는 대로 행동해."

"...좋지는 않아."

"그래. 그냥 어제 그런 상황이니까 그랬던 거지. 지성이가 우리같이 섹스에 미친 놈도 아니고."

"왜 우리라고 그래? 내가 거기 왜 껴???"

"아무튼, 좋게좋게 넘어갈 건 넘어가."

토닥토닥 이불을 감싸고 따뜻하게 달래 주니 다빈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쿨쿨거리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편안하게 잠든 애를 지켜보다 밖으로 나왔다.

동민이가 혼자 아침 운동을 하고 있는데, 보자마자 어젯밤 들었냐느니 뭐라느니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길래 태연하게 시침을 떼고 나섰다.

"왜? 뭔 일 있었냐?"

"어떤 방에서 여자를 데리고 왔나. 신음 소리가 막 그냥..."

"미친놈들이네. 미국 애들도 아니고 한국 선수촌에서 그런 짓을 해?"

"넌 못 들었어??"

"어. 자느라고."

뻔뻔하게 구라를 치며 하루를 시작한다.

뭐 어때서? 사람 다 그렇게 불리할 땐 탈 쓰고 사는 거지.

오늘은 12월 11일.

가까운 친구들 경기론 남자 200m, 800m 결승과 내 은퇴 무대가 될 수도 있는 4x100m 계주 예선이 있는 날이다.

점심 전에 200m 결승이 예정되어 있어 친구들을 만나 식당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진수 진운이 그 외 다른 선수들 다들 모습을 드러낸 상황에서 지성이가 자리에 없었다.

"마하야 지성이는?"

"설마... 이 새끼 안 왔어?"

"니가 알지. 니가 룸메이튼데."

지금쯤이면 애들 주변에서 뻘쭘하게 시침을 떼며 앉아 있을 줄 알았더니, 아직도 방에 있다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다빈이 말대로 어젯밤 일이 지성이한테는 너무 큰 경험이었던 걸까?

최일묵 감독님이 사람을 시켜 데리고 오라는데, 제가 가 보겠다고 나서서 단걸음에 방으로 돌아왔다.

"..."

그리고 챔피언의 길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지성을 만났다.

"야. 너 거기서 뭐 해?"

"...형."

"뭐 하냐고. 너 밥 안 먹어?"

"형 사진 걸렸어요."

"아 새끼.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어제 400m 금메달을 받고 새롭게 내 사진이 걸렸는데. 지성이는 가만히 내 사진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형이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까?"

"하하하. 이 새끼."

"어떻게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긴 한숨을 쉬며 다가가니 녀석이 슬쩍 몸을 뒤로 피한다.

"왜 그래 인마? 재수 없게."

"...누나는요?"

"방에 갔지. 아침에 나랑 일어나서 나갔어."

"누나는 괜찮아요...?"

"얼얼하다네. 괜찮을 거야. 원체 튼튼한 애니까."

"..."

지성이가 한참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쉰다.

"아 왜?"

"...진짜 형은 어떻게 누나한테 그럴 수 있어요?"

"뭐? 내가 걔한테 뭘 어쨌는데."

"인간적으로... 형은 형 좋아하는 사람한테."

"지성아. 자. 진정하고 들어 봐."

차근차근히 이야기를 해 줬다.

다빈이와 나의 관계는 니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반적인 남녀 사이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불성실하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나름 충실하고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아니. 무슨 좋은 감정이 그렇게..."

"그것도 감정이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허락되는 거지."

"..."

"나도 다빈이 좋아해. 어제도 원래는 굳이 너를 끼려고 한 게 아니라. 넌 그냥 보기만 하라고."

"아 이 형!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밖이야 지금!"

우리는 자리를 옮겨 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니가 다가왔잖아. 원래 내 계획은 그냥 너 우리 하는 거 보면서 마음속 주저함을 벗어던지는 것 정도였지."

"..."

"어쨌든. 니가 걱정할 그런 일은 없어. 다빈이도 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고."

"진짜로 누나가 그런다고요?"

"야. 내가 얘기 했잖아. 내가 아니라 걔가 날 그렇게 부른다고."

"그래도 어제는 형이 누나를..."

"내가 걔 뭐?"

"막... 똥꼬에다 그러고..."

"하하하... 미친 새끼."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내 나름 어떤 말 못 할 저항이 아닐까 싶다.

다빈이의 색다른 반응을 즐기는 것도 있지만, 그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뭔가 남자로서 면이 안 서는 그런 게 있던 것 같다.

지성이는 구마하라는 색마가 최다빈이란 순진한 여자를 꼬드겨 희롱하고 괴롭히는 줄 알았단다.

그래서도 양심에 찔리고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이제 와선 그냥 허무하단 생각이 든다고 해 줬다.

"천만의 말씀이지. 정기를 뺏기고 있던 건 나였어..."

"그래도 누나는 형 좋아하는 거 같던데?"

"나도 걔 좋아해."

"근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아 이 새끼. 도돌이표 젠장."

어제는 좋다고 박아 놓고서 이제 와서 왜 딴소리를 하는지.

주먹을 불끈 쥐며 뭐라 하자 지성이도 움찔하며 반항한다.

"이 씨! 뭐가 됐든. 형은 진짜... 진짜로...!"

"뭐? 얘기해."

"형은 진짜 개새끼에요. 난 형이 진짜 좋은 사람인 줄 알았어!!"

잘은 몰라도 나한테 저 지랄 하는 거 보면, 지성이 마음을 어둡게 만들던, 그 어떤 체면과 자존심이란 벽은 무너져 내린 게 아닐까?

"아무튼, 빨리 가서 밥 먹어. 너 지금 준비 안 하면 오늘 200m 기권해야 돼."

"후우... 이런 상태로 무슨 시합을 뛰라고."

"야 그래도 어젯밤 보내고 나니까 좀 그런 건 있지 않냐?"

"뭐요?"

"세상이 조금 널널하지 않아?"

"아니. 난 오히려 더 팍팍해지는 기분인데..."

"새끼 존나 삐딱하네."

"형. 형한테 다빈이 누나는 그냥 쉽게 만나고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일지 몰라도. 나한테 그 누나는 진짜로..."

"야 인마. 그렇게 좋아하면 말을 하지 그랬냐?"

"..."

"니네 둘이 계속 붙어 있었잖아. 그 긴 시간 놔두고 이제 와서 왜 나한테 뭐라 그러는데?"

"아... 진짜 씨발..."

"하하하. 이 새끼. 하루 만에 성격 많이 변했네."

* * *

"좋아한다는 감정조차 잘 모르는 상태였어요."

"그래그래... 지성아 다 좋은데. 너 지금 30분 뒤에 결승전 뛰어야 될 놈이 이런 얘기나 하고 있어도 되는 거냐?"

"시합 무슨 상관이라고..."

"오~ 이 새끼?"

"뭐? 나 그럼 감독님한테 가서 이야기해? 어제 셋이서 뭔 짓 했는지 그냥 다 말하고 징계 먹을까?"

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어젯밤을 기점으로 지성이 눈에 시합이나 대회 메달 같은 건 더 이상 큰 부담이 아닌 것 같다.

역시 남자는 경험(?)을 해 봐야 어른이 된다고.

애가 자신감을 찾은 건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 대신, 귀찮은 성격이 문을 열고 나온 것 같다.

"누나가 옆에 있으면 뭔가 시합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안정되고 편안한 기분을 느꼈어요."

"그런 것도 있지..."

"근데 중학교 때였나? 다빈이 누나 성운 들어가고 바로 교복 입고 머리 길었을 때 만났는데."

"음. 갑자기 여자로 보였냐?"

"그냥 귀엽더라고요. 아 이 누나가 이런 모습도 있구나 싶고..."

고등학교 때의 다빈이는 말 그대로 육상계의 아이돌이었다.

커다란 리본 교복을 입고.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체육 특기생인 만큼 공부와는 거리가 있는 액세서리 같은 가방을 메고 다니던 그 시절.

"지금 무슨 생각 하세요?"

"뭐가 니 얘기 들어 주고 있잖아."

"...이상한 상상한 거 아니죠?"

이 새끼 눈치는...

그래 맞다. 그런 애랑 교복 치마만 올리고 별짓 다 하던 성남 집 거실을 떠올리고 있었다.

뭐 아무튼간.

"내가 용기가 있었으면... 누나가 형 같은 사람을 안 만났겠죠?"

"지성아. 10분 남았다. 이제 너 진짜 나가야 돼."

"..."

지성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긴 숨을 내쉰다.

"오케이. 더 이상은 주저하지 않을게요. 정말로. 아픈 건 이걸로 끝이야."

"그래. 기운 내고."

"아 건드리지 마요. 기분 되게 이상하다고."

"야 이 새끼야..."

진수와 지성이 및 다른 선수들이 운동장으로 빠져나가고 동민이가 다가와 물었다.

"둘이 뭔 얘기를 그렇게 하냐?"

"진지한 이야기였지. 사랑과 성장. 용기와 좌절."

"뭐??"

"있어.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야."

"뭐라는 거야 이 새끼는?"

200m 결승전은 모두의 예상대로 진수가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승을 결정지었다.

"역시 이렇게 되네..."

"흠."

"아 존나 애매하네. 진수를 생각하면 너무 좋은데. 지성이를 생각하자니 좋은 티를 못 내겠고..."

"좋아해도 될 거 같은데?"

"어? 진짜?"

"그래. 쟤 얼굴 봐 봐."

시합 바로 전까지 여자 얘기만 하던 놈이었다.

경기 결과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성이는 5위로 결승점을 통과했지만 크게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진수와 다른 메달 선수들에게 다가가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진짜 괜찮은 거 같은데?"

"그러니까. 후우. 하여간 손 많이 가는 새끼..."

진수가 감동의 세리머니를 도는 동안 지성이는 한 걸음 빠르게 선수 대기실로 돌아왔다.

"아 힘들다."

"지성아. 너도 잘했어."

"고마워요. 동민이 형. 우리 계주 몇 시에 하죠?"

"어? 어... 몇 시지 마하야?"

"오후. 2시부터는 운동장에 모여 있어야 돼."

"알았어요. 그럼 그때까지 저 좀 쉬고 있을게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지나치는 지성이를 보며, 동민이가 떨떠름하게 웃었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가?"

"글쎄다. 내가 볼 땐 평상시 지성이 같은데."

"어제까지는 되게 힘들어했었잖아?"

"모르지. 밤새 좋은 꿈을 꿨는지."

"흠."

지성이를 먼저 보내고 세리머니를 마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진수를 마중해 준다.

"마하야!! 내가 금메달이래!!"

"하하. 이 새끼 축하한다."

"아 붙지 마. 땀 묻어."

"좀 묻으면 어때! 야 이 기세로 우리 내일 계주까지 꼭 이기는 거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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