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80화 (280/401)

손에 손잡고 (15)

똑똑똑.

"네 누구세요?"

"누나... 나 지성이."

"어? 어... 왜?"

같은 날 밤 8시.

권지성이 최다빈의 숙소 방을 찾아왔다.

"왜?"

"아니... 누나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이길래. 걱정돼서..."

"어. 음. 피곤해서 쉬었어."

"나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돼? 여기 여자 숙소라... 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그. 그래! 잠깐만."

짧은 순간. 권지성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이내 생각이 멍해지고 말았다.

"들어와."

"응..."

그녀를 보는 순간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오히려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어젯밤 그녀의 모습.

행동. 소리. 숨결. 그녀의 신체 등등...

"왜 왔어?"

"아... 그... 사과하고 싶어서."

"야 됐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 그치만... 두 사람 하는데... 내가 끼어든 거잖아."

"후우..."

권지성이 문 앞에서 떨떠름하게 서 있고, 최다빈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누나.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괜찮다는 것치고는 앉는 게 조금 불편해 보이는데?"

"괜찮다고 인마. 이상한 거 신경 쓰고 있어."

"아니 그치만..."

"지성아. 미리 얘기하는데. 혹시나 오늘도 또? 뭐 이런 건 없다."

"어? 어... 알지."

"어제만이야. 그 순간의 분위기에 취해서 그랬던 거니까."

"..."

원래는 상처 입고 혼자 힘들어하고 있을까 위로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태연한 그녀의 모습에 권지성은 남자의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누나는 마하 형한테 그런 대우 받고도 아무렇지 않아?"

"뭐 무슨 대우?"

"그... 그러니까..."

"지성아. 야. 이상한 착각 좀 하지 마. 니가 우리 이야길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내가 걔한테 뭘 그렇게 이상한 대우를 받았다고 그래."

"그럼... 진짜 그냥 두 사람은 그러고 지내도 아무렇지 않아?"

"야. 지금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아니... 그러니까..."

"너 일로 와서 앉아 봐."

최다빈이 침대 옆 빈 공간에 손을 팡팡 때리며 말한다.

권지성도 뻘쭘하게 다가와 얌전히 앉았다.

"걱정 마. 좋아서 하는 거야."

"...그럼 그런 걸 또 하려고?"

"아니! 너니까 했지. 만약 어제 그 자리에 있던 게 이동민이나 김진운 이런 애들이었어 봐. 안 해. 구마하도 다시는 안 봐. 나도."

"나라서 했다고...?"

"그래!! 우리 이야기에 너를 끼어들게 한 건 누나도 미안한데. 괜찮아. 그러니까 고개 들고 나 봐 봐."

권지성이 최다빈을 돌아본다.

거기엔 욕정에 물들어 야릇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여자가 아닌, 어릴 때부터 보아 왔던 연상의 귀여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지금 이 말이 너한테 맞는지 모르지만, 나 걔 진짜로 많이 좋아해."

"...그럼 차라리 연애를 해. 이렇게 서로 몸만 가지지 말고."

"그건 우리 이야기야. 너가 걱정하고 신경 쓸 주제가 아니고."

"..."

"걱정하지 마. 마하도 나도 어제같이 특별한 상황이니까 그러지. 아니고선 선 넘는 짓은 하지 않아."

"어제는 뭐가 그렇게 특별했는데?"

"니가 무너지고 있었잖아."

세련된 위로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행위의 시작은 권지성 너라는 사람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는 말에. 청년의 가슴에 꺼져 가던 불씨가 살아난다.

"내가 뭐가 그렇게 한심하게 보였는데?"

"야. 아 좀 흥분하지 말고."

"젠장... 뭐냐고. 누나나 형이나 뭐 얼마나 나보다 많이 먹고 인생 살았다고."

"지성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동정하지 마!! 나도 병신은 아니니까!!"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가는 권지성.

최다빈은 엉덩이가 욱신거려 차마 그를 따라가진 못하고 그냥 멀뚱하니 지켜만 볼 뿐이다.

"그래. 잘해. 그렇게 힘내는 거야."

* * *

"다들. 오늘도 수고 많았다. 진운이도 은메달 축하하고."

"네..."

"진운아. 괜찮아 이놈아."

"죄송합니다. 감독님... 전 제가 이긴 줄만 알고..."

오후에 계주 예선을 마치고 펼쳐진 남자 800m 결승전.

전체적으로 우수한 시합 내용을 보여 준 김진운은 마지막에 긴장감이 풀려 속도를 늦췄고. 죽어라 따라오던 2위 파키스탄 선수의 전력 질주에 결승점 바로 앞에서 1위 자리를 놓치고 말았다.

0.008초 차이로 은메달.

김진운은 눈물을 삼키며 이번 대회를 큰 타산지석으로 삼겠단 각오를 다졌다.

"다시는 그런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큰 경험이라 믿고 기다리고 있으마."

이제 남은 건 필드 종목들과 남자 계주밖에 없었다.

최일묵 감독은 회의에 참석한 선수들을 돌아보았다.

"구 감독."

"네. 감독님."

"컨디션은 어떤가?"

"좋습니다. 권지성도 부활했고요."

"정말 부활한 거 맞나?"

주변에서 봤을 땐 그냥 시합에 별 감흥 없이 시큰둥하게 임하는 것 같겠지만, 구마하의 시각에 권지성은 번민을 떨쳐 내고 그 어떤 때보다 차분하고 내밀한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뭐.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감독님. 오히려 한 가지 제안 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선수 구성을 바꾸고 싶습니다."

"이제 와서 구성을 바꾼다고?"

"네."

지금까지는 1번 주자 권지성. 2번 주자 이동민. 3번 주자 김진수 그리고 마지막 4번 주자 구마하가 달리고 있었다.

권지성은 스타트에 강하고 나머지는 각자 기량에 따라 맞춰진 팀 구성이지만, 구마하는 이걸 다르게 바꾸고 싶다고 말씀드린다.

"김진수는 자네들 가운데 가장 속도가 떨어지는데? 1번 주자를 맡는다고?"

"그래도 늘 200미터를 주 종목으로 여겨 왔던 진수가 현재 코스에선 가장 안정적인 출발을 보여 줄 거 같습니다."

"김진수 자네 생각은 어때?"

"저는 괜찮습니다. 마하 말대로 오히려 3번 주자보다 자신감도 있구요."

"그럼 3번 주자를 권지성이 하는 건가?"

"아니요. 제가 3번으로 뛰겠습니다."

연맹과 최 감독은 마지막 직선 100m에서 구마하가 최고 스피드를 내 주길 바라지만, 올 시즌 그의 단거리 기록은 엄밀히 이동민 권지성보다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럼 차라리 이동민이 마지막 주자를 맡는 건..."

"저... 저는..."

"동민이는 2번 직선거리에서 버텨 줄 동력입니다."

"흠. 그것도 맞지."

"감독님. 저 아테네 200미터 800미터 금메달리스트입니다. 코너링에 있어선 제가 다른 선수들보다 균형 감각과 스피드 밸런스가 뛰어나다고 봅니다."

"하지만, 권지성은... 부활했다곤 해도, 당장 어제까지 제 컨디션이라 보기가 어려웠는데."

그때 회의실로 권지성이 찾아 들어왔다.

"하겠습니다. 감독님."

"음?"

"제가 마지막 주자 하겠습니다."

오는 길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들었다면서 권지성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당찬 목소리에 회의실 모두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최일묵 감독도 다시 한번 묻는다.

"정말 할 수 있겠냐? 메달이 걸린 일이야."

"네. 이제 더는 주저하지 않기로 각오했습니다."

"흠..."

권지성은 자리에 착석하며 구마하를 한번 돌아보았다.

"다시는요."

"...새끼. 갑자기 진지해져 가지고. 너 방에 간 거 아녔어?"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왔어."

김진수와 이동민이 구마하에게 귓속말로 "쟤 왜 갑자기 너한테 말을 놓냐?"며 물었다.

구마하도 씩 웃으며 친구들에게 답해 준다.

"놀 때도 됐지. 몇 년 알고 지냈는데."

그리고 그날 밤. 두 사람은 다시 방을 찾았다.

"오늘은 제발 그냥 조용히 자."

"새끼. 어색하네."

"뭐가 어색해?"

"그냥. 너 갑자기 격의 없게 그러는 것도 그렇고."

"이제 와서 무슨... 어제 형 똥꼬까지 다 봤는데."

"하하하! 나도 니 거 봤거든?"

"씨..."

"새끼 말 놓으랄 땐 안 놓더니. 편한 건 좋다."

한참을 뒤척거리던 권지성이 조용히 말했다.

"...아까 누나 보고 왔어."

"후후후. 그랬을 거 같더라니."

"..."

"그래서? 뭐 하고 왔냐?"

"내가 형인 줄 알어! 그냥 이야기만 하고 왔어."

"잘했네. 다빈이 아무렇지 않아 하지?"

"난 인정 못 해. 난 형같이 그렇게 안 살 거야."

"으하하하! 야 이 새끼야. 내가 뭘 어쨌다고?"

"난. 나는! 구마하랑은 다른 챔피언이 될 거야."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어젯밤 그 일이 권지성이란 선수의 투쟁심과 의지를 깨우쳤다면 구마하는 어떤 비난을 듣든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고 있었다.

"그래. 기대하고 있으마."

"진짜라고!!"

"알아. 기대한다고."

"...그냥 형도 은퇴 번복해."

"꺼져 새끼야. 나 진짜 힘들어. 육상 그만할 거야."

"뭐? 어차피 한 번 번복하고 돌아왔잖아. 그냥 있어. 나랑 쭉 같이 운동해. 끝까지 가 봐 그래서. 누가 맞나."

"크하하하. 이 새끼가 진짜."

권지성은 구마하의 앞에서 처음으로 큰소리를 외친다.

난 사람들에게 보여 줄 것이다. 구마하와 다른 진짜 올바른 챔피언의 모습을.

"아니. 넌 내가 뭘 얼마나 비도덕한 짓을 저지르고 다닌다고. 올바르니 뭐니..."

"난 한 사람만 사랑할 거고. 내 여자를 지킬 거야."

"야 뒤지고 싶냐? 이 새끼가 진짜 가만히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씨! 안 져! 절대!! 다시는!!!"

사랑만큼 인간의 영혼을 불태우는 이야기가 없다.

어젯밤 스리 썸이 그에게 상처가 됐을지, 트라우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수 구마하 입장에선 자신이 없는 한국 육상에 에이스가 빠질 염려는 덜 수 있어서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잘해라. 챔피언."

"당연하지!! 형이나 배턴 놓치지 마!!"

"이 새끼가 진짜 뒤질라고."

"아 씨!! 가까이 오지 마!! 다 이길 거야. 다시는 그 누구도 내 앞에 못 서 있게 하겠어."

야심한 시각. 다소 씩씩대던 분위기가 진정된 가운데 구마하가 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지성아."

"왜... 말 걸지 마 나 잘 거라고."

"아마 앞으로 니 상대는 내가 아닌 유진 볼트가 될 거야."

"..."

"어려운 승부가 될 거다. 어젯밤 다빈이를 안는 것 그 이상으로 힘든 도전이 될지도 몰라."

"됐어. 다 이길 수 있어..."

"그래. 오늘의 각오를 잊지 않도록 내일 잘해 보자."

* * *

2006년 12월 12일. 남아 있는 모든 육상 종목의 결승전이 벌어지는 날.

그러나 카타르 도하 칼리파 국제 경기장에 모여든 관중들은 다른 그 어떤 시합보다 남자 4x100m 결승전 경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파견된 중계 팀도 긴장감 있는 목소리로 현지 분위기를 알려 주었다.

[지금 현장 반응도 엄청 뜨겁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한겨울이라는 계절이 무색하게 이곳은 관중들의 열기로 그 어떤 때보다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아. 이현석 해설 위원님. 하루하루 갈수록 멘트가 좋다는 평가를 받고 계시는데요.]

[뿌듯해서 그럽니다. 무엇보다 이번 아시안 게임. 우리 대한민국 선수단 정말 너무나도 훌륭하고 또 멋진 결과 내 주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 육상 선수단이 정말 하루가 다르게 메달 소식을 전해 주고 있는 게 너무나도 기특해서!]

현지 해설을 나온 이현석 교수가 육상 팀의 메달 소식을 다시 한번 정리해서 알려 주고 있었다.

[구마하 선수 하나가 아닙니다. 한국 육상에서 이처럼 다양한 종목에서 다양한 메달이 나왔다는 사실이 저는 너무나도 기쁘고, 또 경사스러운 일이고요.]

[남자 복합 경기에서도 큰 메달이 나왔죠.]

[그렇죠! 최다빈 선수에 이어서 김건우 선수의 동메달까지!]

들뜨는 가슴으로 모두가 육상 계주를 기다리는 가운데 남자 창던지기 경기에서도 깜짝 금메달이 나왔다.

박문기 회장이 굳이 데려갈 필요 없다는 종목에서 나온 기쁜 소식에 대기실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구마하와 최일묵 감독은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서로를 보았다.

"회장님은 기억도 못 하시겠죠?"

"후후후. 자네도 참..."

"그래도 어찌어찌 메달 7개는 가져가네요."

"역대 최고 성적이네."

"네?"

"이번 아시안 게임이 우리 한국 육상 대표 팀의 역대 최고 성적이라고."

지난 아테네 올림픽에선 구마하의 금메달 3개가 있었지만, 내용을 따져 보면 선수 한 사람의 기량에 기댄 경기였다.

그러나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얻은 결과는 이현석 해설 위원이 말한 대로 한 종목 한 선수가 아닌, 여러 종목 다양한 선수에게서 나온 만큼, 육상이라는 종목의 저변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자네가 없는 한국 육상이 앞으로도 이만큼 성장할 수 있을지 우려스럽구만..."

"물론이죠 감독님. 제가 없어도 다들 잘할 겁니다."

"은퇴를 번복할 마음은 없지?"

"조금 지쳤습니다. 학교도 다니고 싶고요. 저라고 언제까지 운동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 아쉬워서 마지막으로 한번 물어봤어."

그리고 구마하의 은퇴 무대가 시작되었다.

[자. 말씀드리는 순간. 드디어 나옵니다. 우리 대한민국 육상 대표 팀!]

[최강의 멤버죠! 9초대 선수가 셋이나 있는 한국 대표 팀입니다. 전력으로 따져 봐도 일본이나 중국. 세계 그 어떤 선수단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아요!!]

중계석도 뒤바뀐 선수 명단을 관심 있게 불러 주고 있다.

[교수님. 마지막 주자가 구마하 선수에서 권지성 선수로 바뀌었네요? 알고 계셨습니까?]

[네. 감독과 선수들이 합의하에 더 좋은 쪽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이런 게 또 작전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다른 나라 선수들의 대응책을 무너뜨리는. 모쪼록 큰 기대 걸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번부터 8번까지. 태국 일본 중국 그리고 대한민국. 주최국인 카타르와 피지컬적인 면에 있어선 흑인과 다를 게 없는 사우디아라비아. 마지막으로 홍콩과 대만까지 총 8개 국가가 출발선에 자리를 잡았다.

[관중들의 함성이 어마어마합니다.]

[구마하 선수의 팬들이 많은 것 아닐까요?]

[하하하! 위원장님. 저는 오히려 검은 머리의 동북아시아인이 대거 진출한 경기다 보니 관중들이 홈팀인 카타르를 응원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200미터 금메달리스트인 김진수가 화면에 비춰진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팔을 번쩍 들며 대한민국의 출발 주자임을 알리고 있었다.

[정말 재미난 일은, 지금 시합을 뛰는 네 사람의 선수들이 다들 친구들이란 사실이란 말이죠?]

[그렇습니다... 지도 교수로선 속 터지는 이야기지만, 올 한 해 구마하 선수와 다른 선수들 모두 따로 합숙하면서까지 이 계주 시합을 준비했는데, 멋진 결과 가져가면 좋겠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심판이 장내를 진정시킵니다.]

심판의 안내에 따라 객석이 잠잠해지고.

선수들이 각자의 트랙에서 출발 자세를 갖추었다.

곧이어 총성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된다.

[김진수 선수 좋은 스타트!!]

[좋아요. 출발이 좋습니다! 이제 배턴 교체에 집중해야 해요! 이동민 선수 집중해 줘야 합니다!!]

한국에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의 계주 금메달 주역들이 있지만, 각기 소속 팀과 이해관계가 얽혀 차마 현역 선수들을 지도해 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구마하와 한상률이 멀리 자메이카에서 외국인 선수를 초빙해 따로 계주 코칭을 받는 등 노력한 이야기들이 오늘에 와서 빛을 받는다.

[김진수에서 이동민으로 안정적인 배턴 터치!]

[훌륭합니다. 이동민 선수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그대로 김진수 선수에 이어 2번 주자로 트랙을 달려 나가고 있어요!!]

2번 주자가 되니 점점 선수들의 격차가 좁혀지고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동민은 현재 중국과 일본 선수의 뒤를 이어 달려가고 있었다.

[구마하 선수가 뒤를 보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구마하! 집중해야죠!]

3번 주자로 곡선 코너에 자리 잡은 구마하가 이동민의 표정을 살피며 몸을 띄었다.

두 사람의 배턴 터치도 안정적으로 이어진다.

곡선에서 출발해 직선 코스를 지나쳐 다시 곡선 코스.

아직도 시합을 지켜보는 관중들의 눈에 경기 결과는 누가 앞서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태국 선수단이 조금 더 교체가 빨랐습니다. 일본과 중국도 우리 대한민국과 막상막하의 경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구마하 선수가 달리기 시작했어요!!]

월드 스타 구마하가 달려 나간다.

그가 뛰기 시작하자 관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곡선 코스를 마치 직선이라도 되는 듯 거리를 벌리며 달리는 모습에선 국경을 초월한 기립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권지성!! 고개를 돌려 구마하 선수와의 거리를 확인합니다!!]

[제발! 마지막까지 집중을!!]

[권지성 선수도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팔을 높게 벌린 상태로 권지성이 달려 나갔다.

아무리 잘 뛰어도 한순간의 실수가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계주 경기.

하지만, 세대를 이어 가듯. 구마하는 권지성의 손에 마지막으로 배턴을 쥐여 주었다.

[됐습니다!! 대한민국 교체에 성공합니다!]

[압도적입니다! 역시 구마하!! 일본과 중국 선수들이 보이질 않아요! 권지성도 끝까지 최선을!!]

이를 악문 권지성의 질주로 구마하는 아시안 게임 마지막까지 또 하나의 금빛 신화를 쌓아 올렸다.

[38.27!! 우리 대한민국 아시아 신기록을 달성합니다!!!]

[으아악! 대단합니다!! 훌륭합니다!! 세계 무대에 나가도 허락될 기록을 세웠습니다!! 우리 선수단!!]

* * *

"허억. 허억. 야. 진짜야?"

"미친... 우리가...?"

저 멀리 권지성이 결승점을 통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김진수와 이동민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구마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하야!! 우리가 이겼어!!"

"어... 진수야 잠깐만."

"왜?"

"마하 왜 저래?"

"어??"

체육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네 사람이었다.

구마하는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전광판에 권지성의 얼굴이 비춰지는 모습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야. 너 왜 이래?"

"후우... 끝났네..."

"새끼야 뭐가 끝나. 이제 시작이지!!"

"아니... 그렇긴 한데... 그냥 뭔가... 좀..."

그는 스포츠계 최고의 슈퍼스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위치에서, 거만하지 않게 주변을 챙기고 이끌었다.

부침도 많았고 저항도 거셌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내고 말았다.

"아 이 새끼."

"야. 왜 그래 새끼야? 아 좀 웃어."

"...모르겠어. 씨발 야 카메라 나 좀 못 비치게 해 주라."

선수가 아닌 동년배의 지도자로서 그가 짊어지고 있던 부담감을 이해해 주며, 김진수와 이동민이 와락 그의 고개를 감싸며 권지성에게 다가갔다.

권지성도 얼굴 한가득 열기를 머금은 채 온몸에 땀을 흠뻑 적시며 다가와 묻는다.

"허억 허억. 형들?"

"지성아."

"새끼. 잘했다."

"아니... 마하 형 왜 그래요?"

"그냥. 뭔가 울컥 하나 봐."

"아. 왜 그래? 좋은 날. 왜 울어? 형."

"몰라 새끼야... 닥치고 그냥 조용히 운동장이나 돌아."

구마하의 마음은 운동을 시작한 이래 그 어떤 순간보다 복잡한 감정이 사무치고 있었다.

어려운 상황을 딛고 승리자가 된 친구들이 너무 대견했다.

마지막까지 지성이가 메달을 못 가지면 어쩔까 너무 무서웠다.

그 모든 것이 이제 끝났다.

이제 트랙을 떠난다.

결정에 번복은 없다.

그는 지쳤고, 운동이 아닌 현실의 삶에 더 큰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뒤늦게 모든 것이 고마운 상태에서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사람들. 친구들. 연맹들. 끝에 와서는 이런 하나 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준 박문기 회장까지도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을 담아 퉁퉁 부은 두 눈을 감추지 않고 기자들을 만났다.

"은퇴를 결정했다고요?"

"네. 이미 코치님. 감독님. 그리고 동료 선수들과는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아니. 그래도 오늘 이렇게 멋진 결과를 냈는데."

"구마하 선수. 이 기세를 베이징까지 이어 갈 계획 아니었습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조금 쉬워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날. 모든 언론사들이 한국 금메달과 아시안 게임의 승전보보다 구마하의 은퇴 소식을 더 크게 보도할 때.

K일보 임한기 기자는 그가 동료들과 손에 손을 잡고 단상에 올라 기뻐하던 순간의 모습을 메인 기사로 올려 주었다.

『신화는 계속된다. 한국 대표 팀. 다음 무대는 베이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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