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81화 (281/401)

은밀한 이야기 (1)

"마하야? 준비됐냐?"

"음. 흐음. 네. 뭐. 됐어요..."

"왜? 원고가 별로야?"

"아니요. 그냥 굳이 기자 회견까지 해야 되나? 아직도 이해가 안 가서요."

"해. 박수 받고 가는 것도 영광스러운 거지."

"아 그냥 번거로운데..."

"자식. 답지 않게 센치한 척하기는. 준비됐으면 나가자."

"네. 감독님."

도하에서 돌아오고 은퇴 기자 회견을 가졌다.

감독님 말씀대로 떠나는 이에게 큰 자리를 마련해 준 건 고맙지만, 솔직한 말로 좀 민망했다.

내가 뭐라고 이런 거까지...

더 유명하고 대단한 선배님들도 조용히 물러나셨는데... 아 진짜...

"너무 운동만 한 거 같아서요. 대학도 다니고 싶고요. 그 외 더 많은 경험을 가져 보고 싶어서 내린 결정입니다."

"그럼 구마하 선수. 마지막으로 국민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없나요?"

"으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늘 큰 힘이 됐고요. 네. 이건 진심을 다 표현하기가 더 어려운 거 같네요."

"팬들이 너무 아쉬워하던데, 다시 대표 팀으로 돌아올 계획은 없는 겁니까?"

"지금은 없는 거 같습니다. 몇 년간 너무 달렸어요. 쉬고 싶어요."

"그럼 스키 대표 팀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김정준 감독이나 박상택 선수는 뭐라고 하십니까?"

"솔직히 좋은 이야긴 안 나왔죠. 상택이 형은 그런 걸 왜 혼자 결정하냐고 뭐라고 했고요. 차차 더 깊은 이야기 나눠 볼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한국 모든 스포츠계에 아낌없는 응원 부탁드리겠다는 인사를 끝으로 기자 회견을 마쳤다.

그리고 2007년 1월. 새해를 맞이했다.

경기도 성남.

신년회를 기념하여 오랜만에 친구 놈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였다.

"어! 씨발! 구마하다!!"

"어디 어디! 아이고 이게 누구야? 유명한 사람 아니야!?"

"닥쳐 새끼들아. 쪽팔리게..."

"오오~ 형 사인 해 주세요!! 사진 한 번만 찍어 주세요! 악수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돼요!!"

"꺼지라고. 돌았나 이것들이 진짜..."

"으하하하! 야 그러고 보니까 너 우리한텐 왜 사인 안 해 주냐?"

"여러분 보셨죠? 이게 구마하 실체입니다. 이 새끼 욕 존나 잘해요."

"아 좀 제발!! 미친놈들아!! 사람들이 불편해하잖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든 동하계를 정복하든 아시안 게임의 기념비를 새로 쓰든 성남 놈들은 언제든 머저리 같았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변하지 않는 편안함과 안정됨을 느낀다.

"건배!!"

"아 시원하다."

"야 근데 너 언제 은퇴했냐? 진짜로 그만하는 거야?"

"남수 몰랐어?"

"뒷북을 씨발 놈이."

"아니야. 이 새끼. 군인이라고 컨셉 잡는 거야. 병신이 괜히 세상 물정 어두운 척하고 있어."

"어두운 게 아니라 진짜로. 너 아시안 게임 때 우린 혹한기 나가서 나중에 들었다고."

알고 보니 남수는 근 1년 반 만에 보는 거고. 우리 넷이 이렇게 모이는 건 2년이 넘었다.

그만큼 운동에 빠져서 지냈던 시간이었구나 싶은.

"야. 구마하. 까놓고 우리 말은 바로 하자. 니가 운동만 했냐? 여자 존나 만났지."

"내가 여자 누굴 만나?"

"안 만났어? 진짜로! 너 연금 걸고 맹세할 수 있어!!"

"그러니까. 운동과 기타 등등에... 삶을 뺏기다 보니까..."

"잘했어. 사람이 쉴 땐 쉬어야지. 아 태윤이 너도 그만해."

"그래. 야 마셔. 다 먹어. 오늘 저 새끼 왔으니까."

"크으! 돈 잘 버는 친구 있으니 부담이 없구만!!"

정말로 언제 어느 때 보더라도 늘 변함없는 친구들이다...

* * *

"아... 어지러."

"가라. 얘들아. 재밌었다. 정석이 잘 챙기고."

"야. 취한 놈 맡기고 넌 그냥 가냐?"

"나 학교 가야 돼."

"이 시간에? 이 밤중에??"

"그러니까. 입대 앞두고 휴학했다는 놈이 학교는 왜 가?"

"놔둬. 마하야. 가라 태윤아."

"어. 구마하 잘 먹었다. 담에 봐."

태윤이를 먼저 보내고 남수와 술에 취한 정석이를 챙겼다.

비틀거리는 놈을 부축하는 게 더 힘들어 그냥 들쳐 업고 어슬렁 성남 골목을 걷는 중이다.

"아 씨... 새끼 존나 무겁네."

"그래도 역시 국가 대표는 국가 대표구만. 술 취하면 몸무게 배로 늘어나는데."

"후욱. 후우! 넌 부대 생활 어떠냐?"

"다 똑같지. 넌?"

"나 뭐. 내가 군인이냐?"

"아니 새끼야. 요즘 그래서 뭐 하고 지내냐고."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특별한 게 있겠는가. 그냥 조용히 쉬고 있는 중이라고 해 줬다.

"심심하겠다."

"몰라. 아직은 그런 거 느낄 새도 없어."

"왜?"

"운동만 안 하는 거지. 일이 진짜 많았어."

"오~ 무슨 일?"

"뭐 그냥 여기저기. 광고도 있고. 인터뷰도 있고."

"새끼. 하여간 존나 잘나간다니까."

남수도 복귀 전에 다시 한번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끙끙거리고 정석이를 업은 채 이 새끼 자취방에 도착했다.

"허억 후욱. 와 존나 빡세네."

"여. 고생했다. 구마. 편하게 왔구만."

"이 새끼 죽여 버릴라... 술 안 취했으면서..."

"아니야. 진짜로 어지러웠어. 있다 보니까 깬 거야."

집까지 데리고 오느라 고생했다며 정석이가 라면을 끓여 주겠단다.

"새끼야. 술 취한 놈이 라면을 끓인다고?"

"라면이야. 손 없어도 끓이지."

"아 나 진짜로 오랜만에 살인 충동이 밀려오네..."

"하하하. 그래서 넌 안 먹는다고?"

"끓여! 사람 힘 다 빼 놓고!!"

"새끼. 이제는 은퇴했다고 밤에 라면도 처먹네."

"원래 먹었거든!!"

정석이와 둘이 마주 보고 후루룩 라면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선아는?"

"걔는 걔네 집에 있지."

"같이 안 사냐?"

"니나 여자 친구랑 같이 살지. 집에 와도 밤에는 가."

"..."

"미친놈. 표정 왜 그러냐?"

"선아한테 들었냐...?"

"그래. 넌 왜 아까 혜정이 얘기 안 했냐?"

그렇다. 정석이는 내가 혜정이와 한집에 살고 이제는 연애를 시작한 것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던 이놈의 진중한 면에 새삼 놀라는 중이다.

"그냥. 뭔가 하고 싶지 않더라고."

"왜? 언제는 맨날 하루가 멀다 하고 이혜정 이혜정 하고 살았으면서?"

"그러는 넌 왜 말 안 했냐? 다 알면서?"

"니가 조용히 있는데 내가 왜 떠들어. 니네 일인데."

"새끼. 그래도 선아랑 지내면서 개념이라는 게 조금 생긴 거 같은데?"

"구마. 애들 불편하냐?"

"뭐라는 거야. 니가 불편하지. 애들은 그런 거 없어."

"근데 왜 아까 가만히 있었어. 마치 애들 존나 어색한 거처럼."

"내가 떠들 틈이나 줬냐. 남수 군대 이야기하고, 태윤이 부대 생활 물어보고. 듣다 보니까 그랬지."

정석이가 가만히 쳐다본다.

"혜정이가 부끄러?"

"아 새끼야 제발 혼자 급발진하지 말고."

"근데 왜 숨겨. 이상하잖아. 친구들이랑 있으면서 말도 별로 안 하고. 여자 친구 사귀는 것도 숨기고."

"좋아해. 좋으니까 사귀고. 같이 있고. 근데 이건 내가 아니라..."

"설마. 걔가 얘기하지 말래?"

"어..."

"어... 그래?"

"그렇다니까."

한동안 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정석이가 술이 다 깼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진짜 걔가 너한테 하지 말라고 그랬어?"

"아 미친놈아. 몇 번을 물어. 그렇다니까!!"

"왜? 니가 왜???"

"몰라... 너 더 안 먹냐? 그럼 나 국물 다 마신다."

"야. 아니. 잠깐만. 진짜로? 혜정이 너 오늘 성남 오는 건 알아?"

"아니까 그렇게 신신당부를 시키지."

"뭐야...? 니넨 대체 왜 그러냐?"

"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사귀게 된 거냐 묻길래, 작년 넷이서 펜션 갔을 때 이야기를 해 줬다.

그날 약속을 했고. 지금은 대회에 집중하고 싶어 아시안 게임 끝나고 제대로 만나자고 했더니 알겠다고 해 줬다.

그리고 대회를 마치고 돌아왔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싶었는데 혜정이도 별생각 없이 어서 와 고생했어 두 마디로 나를 받아들였다.

"그걸로 끝이라고?"

"음. 좀 단순하긴 하지?"

"고백하고 이런 거 없어? 장미꽃 이런 거 없냐고? 분위기 좋은 식당 이런 데 안 갔어?"

"넌 선아한테 그런 거 해 줬냐?"

"야. 아니. 난 돈이 없다지만. 넌 아니잖아. 넌 능력이 있는데."

"그냥 애가 생각보단 덤덤하더라고. 원래 그러기로 했어서 그런지."

"니가? 걔가?"

"둘 다."

"...서로 좋아는 하냐?"

"당연하지 새끼야."

"허어~~ 허허허..."

"왜? 왜 그러고 어이없다는 듯이 보는데?"

"그냥. 너 존나 신기하게 생겨서."

말은 빈정대지만 정석이도 이해가 어려운가 보다. 여러 가지를 묻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만날 거면 왜 진작 안 만났냐? 어차피 걔 너네 집 살고 있었잖아."

"그 집으로 가기가 싫었어."

"왜??"

"수빈이 때문에."

시간이 지났으니 말해 주는데. 마포 집에서 그녀와의 추억이 많았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일부러도 작년 한 해 좀 멀리 돌아다닌 것도 있었다.

"혜정이한테 미안하지. 내 감정 때문에 기다리게 했으니까."

"뭐가 미안해. 1년간 집 공짜로 쓰게 해 줬으면 고마운 거지."

"하하하 이 새끼."

"근데, 넌 왜 가끔 안 어울리게 감성적으로 굴고 그러냐?"

"새끼야. 난 마음 없냐! 넌 선아랑 헤어지면 아무렇지 않을 거 같아!!"

"안 헤어질 건데."

"그렇게 되나 보자..."

"진짜로. 왜 헤어지냐? 이렇게 서로 좋은데."

"아 씨 아무튼, 이야기 계속하자면."

오랜만에 들어간 집은 뭔가 가구나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향기가 바뀌어 있었다.

"그랬겠지. 이혜정이 거기서 방구도 뀌고 문 열고 똥도 싸고 그랬을 건데."

"아 넌 진짜..."

"하하하! 뭐? 왜? 다 그래."

"혜정이는 선아랑 달라!!"

"우리 선아도 문 열고 똥 안 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연애도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었다.

남녀, 연애. 첫사랑. 이런 복잡한 걸 떠나서. 마치 처음부터 둘이 그러고 있던 것 같이. 혜정이는 혜정이 할 거 하고 나는 내 일 하고 그렇게 우리의 연애와 동거가.

"그래서 잤냐?"

"..."

"왜?"

"너 선아랑 얘기할 때도 그렇게 말 끊냐?"

"하하하. 이 새끼. 왜 매번 선아를 데리고 오는데."

"짜증 나니까!! 거기다 내 성향 알면서."

"알았어. 오케이 미안. 가볍게 할 얘기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안 잤어..."

"어?"

"그게... 그러니까..."

"뭐라고?"

좀 격하게 짜증을 낸 건, 정석이가 말을 끊어서도 있지만. 진짜로 지난 3주간. 걔는 걔 일 하고 나는 내 일 하는 자연스러운 시간 속에서 둘이 그 어떤 스킨십이 벌어지지 않은 이유도 있다.

동거. 그리고 연애. 혜정이와 나는 늘 그랬었지만, 뭔가 당연하게 지나가야 하는 남녀 관계의 과정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막상 둘이 연애를 시작한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좀... 애를 못 건드리겠더라고."

"니가?"

"아니 그러니까. 하고는 싶지. 얘도 좀 그런 눈치를 주는 거 같기도 한데. 그게 뭐랄까. 텀이 안 나."

"크리스마스는? 둘이 같이 있었을 거 아냐."

"혜정이 그때 알바 갔었어."

"허허허. 와 걔도 진짜 생활력... 아니 너랑 같이 있는데 왜 지가 알바를 해?"

"작년에 배낭여행으로 모아 놓은 돈 다 썼대. 내년 용돈이랑 등록금 낼 돈 없고."

"걔네 집 어렵냐?"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아무튼, 그랬어."

누군가 여자 친구 있으세요? 라고 물으면 있다고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기자들이 요즘 연애하냐? 라고 물어도 오피셜로 대답해 주고 싶다.

그 사람을 좋아하냐?

물론이지. 어릴 때부터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렇게 함께하게 된 혜정인데...

"뭔가 좀 음."

"그거네."

"뭐?"

"니가 이제 걔를 안 좋아하는 거야."

"아 제발 정석아... 아까부터 왜 자꾸 말을 이상하게 들어."

"그러니까! 이런 고민을 나랑 하지 말고 애들이랑 하라고. 애들 있을 때 이야기했으면 좋잖아. 대화거리도 풍부해지고. 왜 가만히 있냐고."

이제 보니 내 연애보다 친구들 우정이 더 크게 걸려 있구나.

왜 자꾸 말을 좆같이 꼬아 듣나 했네.

"할 분위기가 아니니까 그랬지."

"우리끼리 무슨 분위기를 따지고 있는데."

"야 인마. 상식이 있으면 생각을 해 봐라. 여자 친구랑 깨지고 바로 입대한 군바리 새끼 하나. 아직까지 여자 한 번 만나지 못해서 입만 열면 섹스 섹스거리는 기타에 미친 놈 하나. 거기서 내가 어떻게 나 첫사랑이랑 연애한다 그런 말을 하는데?"

"자랑할 수 있잖아. 그래도 혜정인데. 너고."

"그런 걸 왜 니네들 앞에서 자랑하냐고!"

한참을 씩씩거린 다음에야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케이 오케이. 근데 왜 말하지 말랬지?"

"뭘?"

"혜정이가 너랑 지 얘기. 우리들 앞에서."

"아 제발 정석아. 지금까지 말했잖아. 한 놈은 군인에, 한 놈은"

"그건 니 사정이고. 우리 이야기고. 걔. 걔가 하지 말라고 한 거. 왜 그랬냐고?"

"..."

"이건 다른 얘기야. 너도 좀 이상하지 않아? 혜정이가 너랑 우리들 관계 몰라? 걔가 선아랑 연락 안 해? 선아한테 니네 얘기 안 했어? 나 살아 있는 거 모르냐고. 아니잖아. 근데 너한테 하지 말라고 딱 자른 건."

"...그냥 말하기 싫었나 보지."

"넌 그걸로 돼?"

"..."

"그렇게 딱 쉽게 잘라서. 아 내 여자 친구가 말하기 싫어하는구나. 하고 인정이 돼?"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조금 답답한 건 있었다.

나와 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놈들이 나보다 더 우리 둘이 연결되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짜 정석이 말대로 애들 앞에서 혜정이랑 사귄다고 했으면 아마 아침이 될 때까지 넷이서 붙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 말라잖아. 난 원래 여자들이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는 놈이고."

"와 존나 이해 안 가네. 다른 놈도 아니고 내 남자 친구가 씨발 구마한데. 그걸 숨긴다고...?"

"하하하. 미친놈아 씨발 구마하는 뭐야 새끼야."

"야. 선아도 그랬어. 아니. 먼저 민혜도 놀러 와서 그러더라. 만약에 너랑 사귀면 진짜 자기들은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닐 거라고."

"오~ 선아가 나 좋아해?"

"뒤질래? 이 새끼가 숯불에 구워 버릴라..."

"미친놈. 하여간 말 진짜 거칠어."

선수를 관두고. 나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연애를 시작하며 관계를 주변에 숨겼다.

아직도 우리 마포 아파트 단지에서 나와 혜정이는 사촌 관계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바라는 모든 조건을 다 수용해 주기로 했다.

"그런 거 아닐까? 어쨌든 난 유명하고, 걘 그냥 일반인이니까 부담되고."

"뭐래. 너도 일반인이지. 지는 뭐 존나 특별한 줄 알아요."

"그니까 명성이라는 게..."

"겸손한 척하면서 은근 지 자랑은 존나 해. 재수 없는 새끼."

"아. 고향 와서 비싼 술 처먹고 너랑 이런 대화를 하는지 모르겠다..."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그녀는 끝날 수도 있는 관계를 염두하고 자신을 지키는 거라 생각한다.

남자 친구로서 서운은 해도 그 마음을 이해 못 해 주는 건 아니었다.

왜냐면 나는 정말로 그냥 보통의 대학생이 아닌, 구마하라는 어떤 명성을 가진.

"그러니까 너 이제 일반인이라니까? 특별하게 생각하지 마."

"야. 나 그냥 갈란다. 아 피곤해..."

"하하. 자고 가. 오랜만에 너 독점하는데."

"꺼져 병신아. 선아는 왜 너 같은 새끼랑 만나냐?"

그리고도 둘이서 여러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석이는 끝까지 정신 이상자 같은 소리를 하지만, 한 가지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야. 구마. 근데 난 정말로 모르겠는 게."

"니가 세상에 아는 게 뭐가 있어."

"너도 진짜. 말 존나 독하게 하는 새끼야..."

"크하하! 아무튼간 뭔데? 뭐가 궁금한데?"

"아까도 했던 얘긴데, 왜? 연애를 하는데 이별을 앞두고 연애를 하냐?"

"..."

"좋은 관계를 왜 굳이 끝을 내려고 하냐고?"

정석이의 질문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왜냐면 이 녀석은 아직 여자 친구랑 끝나 보질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아픔을 모르는 거다.

"헤어지는 게 그래. 끝까지 가면 좋지. 진짜 니 말마따나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그럴 수 있으면 좋다고 나도. 근데 아니잖아. 나라고 수빈이가 그럴 줄 알았냐고. 난 아직도 한수빈 생각하면 화도 나는데, 안타까움이 너무 커."

"지난 얘긴 그만하고. 혜정이가 왜 그러냐만 생각해."

"걔도 이별의 아픔이 있으니까 그러나 보지. 그래서 대비를 하는 거고."

"까놓고 뭐 얼마나 사귀었다고? 어차피 고딩 때잖아."

"사람 마음 누가 알겠냐."

어쨌든 마침내 혜정이와 연애를 시작했다.

남들은 모르는 우리 두 사람만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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