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82화 (282/401)

은밀한 이야기 (2)

"나 왔어."

"음? 생각보다 일찍 왔네. 이틀은 더 있다 올 줄 알았는데."

"어제 다 흩어졌어. 남수는 시골 간다 그러고. 태윤이도 입대 앞두고 밴드에 더 집중하고 싶은 거 같고. 정석이는 뭐 잘 알 것이고."

"기분이 별론 거 같네. 싸운 건 아니지?"

"우리 뭐 맨날 그렇지. 얘기해 보니까 넷이서 모인 게 2년만이더라. 조금 어색하긴 하대."

"너네도 그렇게 되는구나."

다음 날 서울 마포. 사촌 동생(?)과 앉아 어제 애들과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뭔가 대화가 많이 어긋나긴 하더라."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각자 하는 일이 있다 보면 그렇게 될 수 있지."

"남수는 부대 얘기하고, 태윤이는 음악 얘기 하고. 정석이는 돈 버는 얘기만 하고. 난 그냥 세 놈 떠드는 거 가만히 들었어."

"왜? 니가 젤 할 얘기 많지 않어?"

"하하하. 어째 기사니 뭐니 해서 내 얘기가 젤 많이 퍼져 있더라고. 그래서 그냥 애들끼리 웃고 떠드는 거 들어 주고."

"돈 또 니가 다 냈어?"

"내가 내야지. 이 새끼들 내 앞에서 절대 지갑 안 열어."

두런두런 이런 일도 있었다. 저런 일도 있었다.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 주는 가운데, 어제 늦게 정석이와 있었던 얘기를 해 줬다.

"참 나 진짜 너한테 따질 거 하나 있는데."

"뭐?"

"넌 나한테는 우리 얘기 하지 말라고 해 놓고, 선아한테 다 얘기했더라?"

"선아는 어디 가서 남 얘기 할 애가 아니거든."

"나는 하냐?"

"글쎄... 하지 않을까? 특히나 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혜정이의 눈빛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다 지난 이야기를 뭐 지금 와서 꺼내는지. 서둘러 주제를 바꿨다.

"남수가 몸이 변했더라. 군대가 확실히 사람을 바꾸긴 하는 거 같아."

"솔직히 모르니까 그냥 넘겼지.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얼마나 많은지..."

"뭐가? 그거 나 아냐."

"어쨌든. 걔들은 문제가 안 돼. 너가 문제지."

"좀 하면 어때서... 어차피 사귀는 사인데..."

"그냥 조용히 사귀면 안 돼? 꼭 여기저기 다 알아야 되는 건 아니잖아."

"정석이는? 이미 걔가 아는데 뭐."

"정석이는 선아가 하지 말라고 하겠지."

"그걸로 끝이라고?"

"응. 정석이 착하잖아."

"허허허. 허허허허. 같은 사람을 놓고 왜 이런 평가가 나오는 거지?"

"무엇보다 선아가 있으니까. 난 내 친구를 믿어."

그렇게 또 혜정이와 함께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뭐 할 거야?"

"어제 술도 마셨고. 그냥 집에서 쉴래."

"쉬는 것도 잘 쉬어야지. 잠을 잔다. 가벼운 운동을 한다. 책을 본다 등등."

"흠. 잠을 잔다가 괜찮네."

"그럼 자. 나 알바 가기 전에 깨워 줄게."

"같이 잘래?"

"몇 시에 깨워 줄까? 오후? 아니면 그냥 나 나가기 전?"

"내 말이 안 들리나...?"

처음엔 첫사랑과 함께하는 연애 및 동거에 많은 기대를 했었다.

하루하루의 일상이 엄청 특별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혜정이는 혜정이대로 여기서 1년 동안 보낸 자기 시간과 패턴이 있고, 난 은퇴한 직후라 뭔가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는지라 딱히 뭘 억지로 하는 게 더 어색해서 그냥 편하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오늘도 낮잠?"

"음. 아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지?"

"그동안 너무 운동만 해서 피로가 쌓였나?"

"모르겠어. 혜정아 나 잘게... 저녁 혼자 좀 챙겨 먹어라."

"그건 걱정하지 말고. 어디 아프면 병원을 가 봐."

"아니야. 진짜 잠만 쏟아지는 기분이야."

처음엔 한방을 쓰자고 했다.

어차피 이 집에서 침대는 안방만 있고, 둘이 써도 여유로운 사이즈라 그러자고 했는데. 혜정이가 극구 반대 하며 처음 여기 들어와 쓰던 현관 옆 방을 자기 방으로 만들었다.

바닥에서 이불 깔고 자는 게 안쓰럽길래 침대랑 책상이랑 사 줬는데. 침대는 그렇다 쳐도 책상값은 주겠다고 하길래 그냥 맛있는 거 사 먹는 걸로 퉁치고 말았다.

"너 어제 몇시에 잤어? 새벽에 보니까 방에서 TV 소리 들리는 거 같던데."

"보자. 다섯 시?"

"한 달이 지났는데, 시차 적응이 안 됐을리는 없고..."

"아. 드라마 봤어."

"무슨 드라마?"

"장금이."

"몇 년 전 드라마를 지금 보고 있는 거야..."

"안 볼 수가 있냐고. 장금이가 경연을 앞두고 미각을 잃었는데. 우리로 따지면 대회 앞두고 인대 늘어나는 거 아냐."

혜정이와 함께하는 일상 속에서 나는 선수가 아닌 일반인 구마하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하고 얼굴도 좆같이 생겼었지만. 외형을 뺀 나머지 삶에 있어선 나름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던지라, 정신없이 대회 일정에 쫓기는 나날 속에서도 가끔은 그 시절이 그리웠었다.

"오오... 최 상궁 저 망할 년."

"아. 이게 이런 내용이었구나."

"너도 이거 안 봤어?"

"이때 드라마가 뭐야. 나도 고3 앞두고 겨울 특강이다 뭐다 1년 거의 TV를 놓고 지냈는데."

"음..."

"왜?"

"그때 아니냐? 우리 막 처음 서로 하고. 겨울 방학 중에 우리 집 와서 너 맨날 아침에 섹스하고 가고 그러던."

"몰라. 기억 안 나."

"몸은 기억할 걸?"

"죽을래!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운동하기 전의 나는 TV도 잘 보고 게임도 적당히 하고 유머와 개콘을 놓치지 않으며 최신 문화를 섭렵하고 살았었다.

근데, 지금은 연예인이 누가 누군지 모르겠고, TV 예능의 웃음 코드도 뭔가 저게 웃기나? 싶은 기분이다.

3년이란 시간 동안 선수로 살면서 많은 것들이 변해 버렸다.

입지나 주변 관계도 그렇고, 당장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의 분위기도 즐겁긴 하되 예전같이 막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많이 흐려졌다.

원래 시간이 그런 거다 하면 할 말은 없는데. 가끔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건 은퇴한 선수의 삶을 떠나, 운동선수로서의 삶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용산이나 갔다 올까?"

"용산은 왜?"

"그냥. 컴퓨터 바꿀까 싶어서."

"저거 사서 얼마 안 썼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는데. 최신 게임 돌리려니까 용량이 딸리는 거 같아서."

"돈 아껴. 어차피 야동밖에 안 보는 거 뭐 하러 최신을 깔어."

"뭐라는 거야. 너 혹시 내 컴퓨터 열어 봤어!"

은퇴한 선수가 누구나 그렇듯 나도 조금은 방향을 잃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쨌든 혜정이가 옆에 있으니까.

불타는 사랑을 하지 않더라도, 매일 밤 각자의 방에서 잠이 들어도. 나름의 풍족함을 느끼느라 결핍을 잘 모르겠다.

한편으론 선수로 살아온 시간 속에서, 운동에 빼앗긴 삶을 되돌리는 기분이라 나름 풍족함을 느끼는 점도 있다.

그래도 옆에 여자 친구가 매일 붙어 있으니 가끔은 그녀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은 나가는 거야?"

"어. 재민이가 입대한다고. 몰랐는데 작년에 이미 신청서를 냈었다네."

"재민이는 누구야?"

"대학 친구. 선수 아니고 그냥 일반 체대생이야."

"너도 학교에 친구가 있구나."

"그럼 있지. 재민이도 있고 익범이도 있고. 익범이는 농구 선수야. 둘이 젤 친해."

"먼저 통화하는 거 보니까 니네 선배가 도와 달라고 하는 거 같던데. 그건 무슨 내용이었어?"

"아~ 상택이 형. 별 거 아냐. 겨울이라고. 고등학교 대표 팀 애들 모여 있는데 좀 가 보라고 그러는 거."

"가 봐. 좋겠네. 걔들도 너 보면 의욕 날 거 아냐."

"안 돼. 가면 코치 해 달라고 하니까."

"몸값 따지는 거야?"

"하하하! 무슨 몸값을 따져. 내가 아직 누구 가르칠 정도의 기술이 없으니까 그러지."

"어머~ 금메달이 겸손도 하셔라."

"크하하! 이건 겸손이 아니라. 나같이 스키 타면 애들 다 죽어. 뉴스 나와."

"그럼 그냥 오늘은 학교 사람들 보고 돌아오는 걸로?"

"응. 왜? 뭘 할 거 있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넌? 알바?"

"응. 오늘은 저녁 타임만."

"그럼 밖에서 볼까?"

"아니. 집에서 봐."

내심 밖에서 데이트라도 하자면 기쁜 마음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그녀는 언제나 조용한 일상을 추구한다.

한편으론 정석이 말대로 내가 부끄럽나? 싶은 의심이 드는 때도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 보면 이게 자기 연애 스타일이라고 그러고. 자기는 원래 예전부터 집순이라고 그랬었고.

따져 보면 혜정이 못지않게 나도 집돌이니까. 어찌 보면 우리는 나름 잘 맞는 거일지도.

그러고 보면 서로 어디가 성감대고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고, 친척은 누가 좋고 누가 싫고. 먹는 건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는 잘 아는데. 연애에 있어서는 어떤 스타일로 하는지는 모르고 있구나.

"흠."

생각해 보면 나랑 얘는 왜 매번 이렇게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과정들을 건너뛰고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친구들과 약속을 보내고 돌아오니 혜정이는 방에서 공부중이었다.

"나 왔어."

"어서 와. 일찍 왔네?"

"어. 재민이가 여기저기 얼굴 비출 데 많다고 그래서. 같이 가자는 거 그냥 피곤하다고 들어왔어."

"후후. 너도 참 비싸게 군다."

방문에 기대고 서서 조용히 책을 넘겨 보는 혜정이를 지켜보았다.

"빵 사 왔는데. 먹을래?"

"응. 근데 지금 말고 이따가. 이거 보던 거마저 봐야 해서."

"뭐 보는 거야? 원서?"

"계절 학기 듣는 거 때문에. 과제야. 너도 한번 봐 볼래?"

"회화는 몰라도 리딩은... 어우. 문법 어려워."

"그 짧은 시간에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지. 가만 보면 너도 공부를 안 해서 그러지. 머리가 나쁜 건 아닌 거 같아."

"하하하! 듣기 좋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냥 방 침대에 걸터앉아 혜정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혜정이도 내가 옆에 있든 없든 보던 책에서 눈을 떼지는 않는다.

"침대는 어때?"

"우리 집에 있는 거보다 더 편해. 얼마 주고 샀어?"

"얼마 안 해. 어차피 1인용인데."

"너 돈 쓰는 거 보면 신기해."

"신기할 것도 많다. 난 그러는 너가 더 신기하다."

"왜?"

"그냥. 안경 쓰고 공부하고 있으니까."

"나 책 볼 땐 안경 쓰는 거 알았잖아."

"알아도. 이런 모습은 처음 보니까. 뭔가 지적이네. 분위기 있어."

그녀가 내 말에 씩 웃으며 책장을 넘겨 보고 있었다.

"휴학 중인데도 그런 걸 해?"

"휴학해도 미리미리 학점 딸 거 따 놔야지. 안 그럼 내년에 복학해서 수업 몰아서 들어야 되거든. 난 거기다 알바까지 있어서."

"참. 부지런하게 산다."

"부지런해야지. 그래야 취직도 하고. 직장도 얻고."

"넌 취직 어디로 하려고?"

"글쎄. 모르겠어."

"영문학이니까 영어 관련된 회사로 가는 건가?"

혜정이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가만히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흠. 무역도 괜찮고. 패션 이런 쪽으로도 가 보고 싶고"

집에 있으면 딱히 외모를 그렇게까지 가꾸진 않는 편이다.

하지만, 본판이 있어 잔머리가 삐져나오든 안경이 콧등을 누르든 그녀는 언제 어떻게 보더라도 이혜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이 사람을 원했었던가.

그 얼굴과 표정이 지금 내 집에서 내가 보는 앞에 오롯이 나만 볼 수 있는 상태로 있다는 것에 뭔가 마음이 꿈틀거렸다.

보자. 아직 1시 전이구나.

내일 알바 있나? 없지.

공부 중이긴 하지만, 한번 살살 꼬셔 볼까?

"너는?"

"음?"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나? 나 뭐?"

"정말 계속 이렇게 있어도 돼?"

"응. 나 은퇴했는데?"

"흠. 그렇구나."

슬금슬금 내가 먼저 씻고 올까? 아니면 같이 씻자고 해 볼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혜정이가 새삼스런 이야기를 묻는다.

"왜? 나 이러고 있는 거 싫어?"

"아니. 내가 싫고 자시고 할 건 없지."

"근데?"

"그냥 궁금했어. 넌 앞으로 어떻게 살 건가."

그러면서 혜정이가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다.

알게 모르게 그동안 옆에 있으면서 내 생각을 많이 했었는가 보다.

"고3부터지? 너가 대표 팀 선수 생활 한 게?"

"응. 아테네 올림픽 때부터."

"3년... 물론 숨 가쁘고 힘들게 지나온 거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무슨 의미야?"

"아니.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그렇잖아."

여자 친구가 보는 구마하가 아니라, 그냥 보통의 시각으로 나를 보면 궁금증이 생긴단다.

지금 우리 나이 때 남자들은 거진 군대를 갔거나, 아니면 입대를 앞두고 마지막 청춘을 불태우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혜정이같이 없는 시간까지 쪼개며 사람을 만나거나 알바해 모은 돈으로 세계 여행을 가거나 하는 식으로 견문을 넓힌다.

하지만 나는. 남들이 보는 나 구마하란 인간은 열아홉에 스포츠에 데뷔해, 동·하계 올림픽 메달 4개. 세계 선수권 2개. 아시안 게임 2개. 그 외 자잘한 국제 대회와 국내 대회를 포함 금메달만 스물 몇 개를 받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상금으로 받은 돈만 십오억이 넘고 연금 포상금과 광고 및 화보 촬영으로 벌어들이는 수익도 무시할 수 없다.

NICE와 계약한 MAHA 상표도 있지. 그쪽으로도 쏠쏠하게 들어오니까.

그래서 궁금하단다.

얘는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자 친구가 보는 구마하가 아니라, 그냥 보통의 시각으로 나를 보면 궁금증이 생긴단다.

"..."

"스물두 살에 많은 걸 이룬 건 멋지지만. 그래도 인생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있잖아."

사람에 지치고 기대에 부응하는 게 너무 피곤해 선택한 은퇴였다.

남은 시간이라는 건 크게 생각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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