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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283화 (283/401)

은밀한 이야기 (3)

"응? 넌 뭐 하고 싶었던 거 없어?"

누구나 쉽게 묻고, 어디든 특별하지 않게 나눌 수 있는 대화지만.

그 질문을 내가 늘 좋아했던 사람이 마침내 꿈을 이뤘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에 물으니 특별하게 다가온다.

"하고 싶었던 거라..."

"앞으로의 계획이라든지. 취미. 배우고 싶은 거나 뭐든."

"학교 다니고. 그리고. 다양한 경험들 쌓고..."

"아하하. 그건 기자 회견 때 했던 거잖아."

그러니까 그 다양한 경험이 뭐냐 이건데.

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내가 간절히 원한 건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지 삶의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내 머릿속엔 그녀의 질문에 멋지게 대답해야지 보다는, 안경 쓴 모습도 괜찮은데 할 때 안경 써 달라고 하면 화내려나? 같은 것만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 정신 상태가 어떻게 되는 건지...

난 꿈을 이뤘지만, 동시에 꿈을 잃어버렸다는 걸.

진짜 이럴 때마다 나도 내가 싫어진다.

스포츠 선수로서 내가 올라갈 길은 더는 없다는 사실을.

아마도 그래서도 은퇴를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모르겠어. 갑자기 물으니까...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갈 곳 없는 길에서 쏟아 내는 노력과 사람 간의 갈등이 너무 힘드니까.

"그럼 운동 처음 시작했을 땐 어땠어?"

"하고 싶은 걸 말하려고 해도. 뭘 아는 게 있어야 말을 할 거 같아."

"좋았지. 재밌었고."

"음. 역시 지금은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게 우선이겠네."

"왜?"

"그치. 야 근데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다. 너가 이런 걸 물어볼 줄이야."

"운동은... 뭔가 처음으로 나한테 방향을 알려 주고 목표를 보여 줬으니까."

"왜? 물어볼 수 있지. 여자 친군데."

여러 대화 속에 그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도 은퇴를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갈 곳 없는 길에서 쏟아 내는 노력과 사람 간의 갈등이 너무 힘드니까.

"하고 싶은 걸 말하려고 해도. 뭘 아는 게 있어야 말을 할 거 같아."

"음. 역시 지금은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게 우선이겠네."

"그치. 야 근데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다. 너가 이런 걸 물어볼 줄이야."

"왜? 물어볼 수 있지. 여자 친군데."

여자 친구니까 삶에 관한 진지한 대화도 나눌 수 있다 이건가?

그녀가 보는 연애는 뭔가 내가 바라는 연애보다 깊은 맛이 있는 거 같다.

"알바도 해 보고 싶어."

"뭐?"

"그냥 친구들이 해 보는 거 같은 거? 배달도 좋고. 서빙도 있고."

"야. 니가 무슨 그런 일을 해..."

"왜? 난 왜 못 해?"

"못 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좀 더 뭔가 멋진 걸 해야지."

"흠. 글쎄다. 건너 건너 이야기 들어 보면 은퇴하고 식당 한다는 선배님들도 많이 계시고. 한 번쯤 경험해 봐도 나쁠 거 같진 않은데."

"그런 의미라면 뭐."

"그리고. 너 그때 정석이랑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비슷한 일 하면 서로 대화도 잘 되잖아."

"..."

"그러는 넌 내가 뭐 했으면 좋겠는데?"

"마하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니가 결정해야지."

"이왕이면 니가 좋아할 일 하는 게 좋잖아."

혜정이가 가만히 쳐다보면서 묻는다.

"내가 지금 너한테 실망감을 느껴야 되는지 아닌지... 헷갈린다..."

"왜? 넌 알바하는 남자 친구는 싫어?"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뭔가 큰 결정을 남한테 미루고 있잖아."

"이게 미루는 거라고?"

"아니야? 인생에 관한 이야긴데."

"난 생각이 없고, 상대방이 좋아하는 거 하면 될 줄 알았지."

"그게 뭐야. 진지함이 없잖아."

"흠. 나는 말이지. 앞으로 남은 삶을 세계 평화와 인류애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아하하! 그렇다고 헛소리는 하지 말고."

혜정이가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말하는데, 솔직히 자기는 내가 계속 운동하면 좋을 거 같단다.

"아. 진짜로?"

"응."

"은퇴 기자 회견까지 했는데?"

"그래도. 멋있었거든."

뭐야? 왜 갑자기 고백을 해? 사랑스럽게.

"아하하. 왜 그렇게 쳐다봐."

"너한테 그런 얘기 처음 들어서."

"됐어. 뭘 또 그렇게 억지 리액션을..."

"아니. 진짜로. 나 운동할 때 멋있다고 생각했다고? 진짜? 언제부터?"

"멋있지. 난 너 경기하는 시간 되면, 만사 다 제쳐 놓고 TV부터 켜는데."

"오~ 진짜로? 니가?"

"응. 그래서 이번 배낭여행도 아시안 게임 전에 맞춰서 들어온 거고."

"..."

아니. 얘가 나를 그렇게 보고 있을 줄은... 진짜 몰랐던 이야긴데...

"야. 그럼 말을 하지. 했으면 경기장까지 불렀을 거 아냐."

"무슨 거길 어떻게 가. 돈이 한두 푼도 아니고."

"내가 내 주면 되지. 에이 뭐야 이제 와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냥 뭐랄까? 신기했단다.

아는 애가 TV에 나오는 것도 그렇고. 시합을 마치고 내가 태극기 세리머니 같은 걸 하고 있으면.

"사람의 꿈이라는 게, 정말로 이루어질 수 있구나. 하는 감정을 느끼게 되거든."

"생각보다 꽤 딥하게 보는구나..."

"그럼. 보면서 감정 이입도 해 보고. 무슨 기분일까? 저렇게 수많은 사람 앞에 나서면 두렵지 않나? 싶고. 또 저렇게 되기 위해 실제론 얼마나 운동을 했을까. 나도 그렇게 노력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알고 싶고."

"그리고?"

"음. 그리고. 뭐 그냥 그래."

"아닌데. 너 지금 뭐 마지막 말 숨기는 게 있는데?"

"하하하. 그냥. 좀 부끄러운 거라."

"뭔데? 말해 봐?"

나랑 섹스한 남자가 저러고 있구나 같은 그런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내 음흉한 상상보다 더 로망이 담겨 있었다.

"내가 저런 자리에 선다면 나는 무슨 기분일까 싶은 거."

"하하. 그런 걸 생각했어?"

"응. 기자 회견도 상상해 보고. 난처한 질문에 혼자 진지하게 고민도 해 보고."

"오~"

"근데 마하야."

"응?"

"아까부터 자세가 자꾸 편해지는데. 너 지금 나갔다 온 거 아냐?"

"응. 맞지."

"침대에 바깥 먼지 문지르지 말고, 가서 씻든가 옷을 벗고 있든가 해. 뭐야. 나 거기서 자야 되는데."

"하하하. 와. 벗으라는 말이 왜 이렇게 안 야하게 들리냐."

"벗는 김에 양말까지 싹 다 벗어 놔. 어차피 내일 빨래 할 거니까."

진짜 같은 말인데 생활이 묻어나는 말이란...

아무튼, 대충 옷을 정리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안 씻어?"

"얘기 더 안 해?"

"나 지금 과제하고 있잖아."

"그래도. 오늘은 너랑 이런 얘기 하니까 좋은데."

"후후. 내일 해. 나 진짜 이거 오늘 봐야 돼. 시간 없어."

공부해야 된다고 애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길래 일단 거실로 나왔다.

"보자. 그게 어딨나? 혜정아. 나 먼저 도하에서 올 때 들고 온 가방 어딨어?"

"거기 옷방에."

공부도 공부지만, 잠깐 이것 좀 보여 주고 싶다.

"아. 왜 또 왔어."

"그냥 잠깐만. 이거 보라고."

"뭔데?"

도하에서 받은 육상 금메달이었다.

혜정이도 신기하단 듯이 쳐다본다.

"메달은 다 오빠네 집에 놓는 거 아녔어?"

"원래 모든 메달은 형네 집에 두는데, 이건 은퇴 기념이기도 하고 나도 너무 메달이 없는 거 같아서."

"으음."

"내 메달 처음 보지?"

"아테네 때 본 거 말고는. 따로 볼 시간은 없었지."

혜정이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메달에 새겨진 이름을 만져 보기도 하고 다양한 감상을 얘기해 준다.

"진짜 금 아니지?"

"하하하! 왜 사람들은 그걸 궁금해할까?"

"어쨌든 금이란 가치가 있으니까."

"아무튼, 한번 걸어 봐."

"음? 에이 됐어. 내가 왜."

"걸어 봐. 상상했었다며."

조심조심 메달을 목에 걸어 보는데 머리나 귀걸이가 걸려서 난처해하고 있다.

"이리 줘 봐. 원래 메달은 남이 걸어 주는 거긴 하지."

"후후후. 실제로는 메달 받을 때 기분이 어때?"

"부끄럽지."

"부끄러?"

"어. 칭찬받는 거 같잖아. 그래서 좀 쑥스럽고 그래."

메달을 목에 건 혜정이가 거울 앞에 가서 자신을 본다.

감동 어린 표정과 금메달의 신비로움이 그녀를 설레게 하는 것 같다.

"은근 무겁다."

"무겁지. 챔피언의 무게라고 생각하면 돼."

"챔피언의 무게라. 은근 무서운 말이다."

"그래서 힘든 거야. 거기까지 가는 것도 그렇고. 그 단계를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흠. 여기."

"음? 벌써 빼? 더 하고 있어도 돼."

"으으음. 가볍게 대하면 안 될 거 같아."

금메달을 가운데 놓고 말했다.

"원래 내 꿈은 이런 게 아니었어."

"음?"

"너한테도 말했지만, 진짜로 나는 메달이나 성공 이런 거보다, 그냥 누구든 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했지. 잘 모르겠어."

혜정이가 다가와 토닥토닥 안아 준다.

"대단한 거야.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모르겠어. 남들은 그렇다고 하는데. 나는 메달이나 돈 이런 거보다 역시 사람이 더."

"..."

"그러니까."

"손."

"음?"

"손 내리라고... 왜 만져..."

"니가 먼저 다가와서 안아 주니까."

"으이구! 진짜!!"

잠깐의 빈틈도 보여 줄 수 없다며 혜정이가 다시 책상으로 넘어간다.

"안 해?"

"뭘 해! 오늘은 안 돼. 과제 할 시간도 없어."

"...정말 궁금한 건데. 왜 이렇게 벽을 치는 거야?"

"야! 누가 벽을 치는데. 너 지금 씻지도 않았고. 술 냄새 풀풀 내면서 뭘 하자고 그러는데."

섹스는 물 건너갔지만 이대로 물러나기는 뭔가 아쉬워 치근덕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더 이야기를 더 나눴다.

"우리가 진짜 알기론 오래 알고 지냈구나."

"그럼. 아는 거로는 오래됐지."

"난 이렇게 니가 금메달 같은 거 따면 꼭 그때 생각나."

"언제?"

"너 처음 육상 시작할 때. 학교 운동장."

나에게 혜정이가 10년 이상 연속된 어떤 이미지가 있듯, 그녀에게도 나는 하나의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언제를 말하는 거야?"

"학교에서. 왜 너 한상률이랑 육상 기록 잰다고 했던 날 있잖아."

"아. 어~ 어... 그때 너가 있었어?"

"기억 안 나? 너도 그때 멀리서 나 보면서 고개 홱 피하고 그랬었는데?"

아! 어! 맞다. 기억난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새록새록 장면들이 떠오르고 있다.

처음 감독님을 찾아가 육상 하고 싶다고 한 날이었었다.

제대로 스타트 뛰는 법을 배우고 11초 기록을 세웠던 날이었지. 그때 저 멀리 혜정이가 친구들과 지켜보고 있었고.

"아. 어. 맞아. 그때 애들이 옆에서 엄청 놀리고."

"놀려? 친구들이?"

"으음. 있어. 아무튼. 근데 너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해?"

"뭔가 꼭 너 운동하는 걸 보면 그 시작점이 떠오르거든."

그냥 이름과 얼굴만 알던 이웃에서. 그날 나는 처음으로 혜정이에게 '아 쟤 운동해?' 싶은 첫인상을 주게 됐었단다.

"하하하. 하하!"

"왜?"

"아니야."

누구였지? 김태윤이었나? 박남수였나. 누가 그때 그랬었는데. 그 말이 진짜로 맞을 줄이야.

"그럼 그 전에 내 첫인상은 어땠는데?"

"음침하고 소심한 애."

"아 씨. 괜히 물었네..."

그러자 혜정이는 놀리는데 신이 나서 혼자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아하하하! 그리고 주는 거 없이 날 미워하는 애?"

"야. 그만해... 내가 널 싫어한 게 아니라니까..."

"나중에 알았잖아. 뭔가 너 보면, 오빠는 참 멋지고 좋은 사람인데. 동생은 왜 저러지? 싶은 그런 느낌?"

"허탈하구만... 이혜정 잔인하네. 멀쩡한 얼굴로 상처를 주고 있어."

추억을 꺼내 드니까 과제 생각이 날아가는 것 같다.

혜정이는 혼자 여러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때 너 지민이 형 만날 때잖아."

"으음. 너도 참 보면... 할 말 못 할 말 가리질 못하는 거 같아."

"왜? 아니. 지민이 형은 너를 떠나서 나도 그렇고."

"여름 지나서 생각난다. 갑자기 너 쑥 커져서 돌아왔을 때 진짜 놀랐는데."

"왜? 그때 반했나?"

"반하긴 무슨... 그냥 어? 얘 왜 갑자기 커졌지? 싶었을 뿐이지."

"혜정아. 나도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그때 내가 진짜로 학교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어?"

"있었지. 2학기 시작하고 은근 애들이 쟤 누구냐고 말 나오고 그랬었어."

"오... 이야... 그래...? 진짜로 그랬다고..."

"뭐야? 왜 갑자기 실망하는 표정이야?"

"실망이 아니라... 누구? 누가 있었는데? 진짜로 그랬던 거야?"

애들이 놀리는 줄만 알았었는데, 진짜였구나.

아쉽다. 그럼 적어도 더 뭔가...

"어머어머. 얘 왜 이래? 진심인가 봐. 표정이 그늘지고 있어."

"아니. 그냥 알았으면 더 멋진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이거지."

그러자 가만히 쳐다보면서 묻는다.

"진짜로? 정말로?"

"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좀 주변의 인정에 목말라 있었고."

"그래서 지금 내가 있잖아."

"..."

"나랑 있는데 그런 걸 신경 쓴다고?"

고민이다. 여기서 생각하는 대로 말을 하면 분명 싸움이 될 건데.

그래도 이야기는 해 보고 싶다.

"어차피 너는 나랑 안 하려고 하잖아."

"허. 허허... 허허허..."

연애 한 달. 슬슬 싸울 때가 되긴 했지...

오히려 그동안 너무 접점이 없었어.

"야. 구마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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