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88화 (288/401)

은밀한 이야기 (8)

"혜정아. 우리 먼저 초콜릿 재료 다 썼나?"

"아니. 좀 남았을걸."

"그럼 나 또 만들어 주면 안 돼?"

"그래. 좋아."

구마하와 이혜정이 함께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어색한 절반과 불타는 절반이 어우러져 생활은 자리를 잡았다.

"아니. 이런 인위적인 틀로 모양 잡지 말고."

"말고 뭐 어떻게 하라고."

"하트로. 핸드 메이드."

"야. 네가 해 먹어."

이제는 이혜정도 구마하를 분명한 보이프렌드로 받아들이고 있다.

파트너 시절에는 모르던 더 깊은 감정을 느끼는 중이다.

그가 옆에서 찡얼찡얼하는 게 듣기 싫지만, 한편으론 그 속에 사람에 대한 귀여움과 애정을 느낀다.

"으~음 그렇지. 이 맛이지."

"오버하기는..."

"오버라니. 야 우리 형 고깃집 하는 사람이야. 내가 맛에 얼마나 민감한데."

"그렇게 맛있어?"

"어. 혜정아 다음에는 말이야"

"알았어. 하트 틀 사 올게."

"아니. 하트 말고. 좀 뭔가 거친 느낌으로 벽돌 같은 모양은 어떨까?"

"아. 그냥 좀 먹어. 이상한 거 주문하지 말고."

두 사람은 하루하루 다채로운 이야기를 채워 나갔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함께 잠을 청하고 식사를 나누고 생활을 공유한다.

"혜정아. 혜정아. 바뻐?"

"아니. 그냥 책 보는데. 왜?"

"나 여기 등에 모기 물린 거 같은데. 좀 봐 봐."

"무슨 소리야. 겨울에 모기가 어딨어."

"있어. 아 좀 자세히 보라니까. 뭐 났어? 갑자기 왜 이렇게 간지럽지?"

"겨울에 모기가 있다고?"

뿌웅~~

"..."

"하하하! 모기가 아니었나?"

"......"

"아하하! 으하하하하!"

"야. 구마하... 너 진짜 죽는다..."

"크하하하! 어 씨 근데 냄새 왜 이러냐? 아까 낮에 고기를 너무 먹었나."

맛있는 초콜릿은 적절한 단맛과 쓴맛이 어우러져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끔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장난을 쳐 사람의 인내심을 소모시킨다.

그러나 연애가 어떻게 좋은 이야기만 채워지겠는가.

사소한 장난에도 짜증을 느낀다는 건, 그만큼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의 크기가 전과 다르다는 뜻이 되겠지.

"야. 장난이잖아. 왜 그래. 화 풀어."

"그런 장난을 왜 하냐고 애들도 아니고. 더럽게."

"맨날 붙어 있으니까. 편하게 방귀도 뀌고 하자고..."

"하나도 안 편해!"

"알았어. 오케이. 그럼 너도 내 앞에서 방구 껴. 내가 냄새 맡을게."

"아. 싫다니까! 어 저리 가! 어디다 코를 내밀어."

189cm가 넘는 듬직한 외형에 멋진 근육질 몸매.

잠자리 테크닉은 두말할 것 없고, 사람을 대하는 자세나 삶의 가치관도 훌륭하다.

20대 초중반. 아니 30대까지 넓게 봐도 과연 그만큼 성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수억 원에 달하는 재산과 능력을 오직 자신의 힘으로 쌓아 올린 인물이었다.

구마하란 존재는 모든 여자가 꿈꾸는 워너비에 가까울 것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뛰어난 능력과 조건을 갖췄음에도 그는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과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혜정아. 미안. 진짜 미안. 정말 다시는 그런 병신같은 짓 안 할게."

"..."

"화 풀자. 어? 내가 잘못했어. 진짜로."

마하가 좋다. 아마 감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한결같았을 것이다.

다만, 이혜정은 가끔 그를 대하면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을 느낀다.

이렇게 멋진 애가.

초라했던 과거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노력을 기울여 성공의 위치에 올라선 애가.

대체 내가 뭐라고...

버거울 정도로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려고 하는 걸까...?

"용서해 주는 거지? 그치?"

"알았어. 화 안 났어."

"좋아. 방으로 가자. 내가 오늘 너 그동안 쌓인 피로 싹 다 날아갈 정도로 전신 마사지해 줄게."

"..."

"왜? 그 책 오늘까지 봐야 돼?"

"아니야. 방으로 가."

그렇구나. 생리가 끝났지. 마하가 왜 갑자기 유치한 장난을 치는가 했더니, 기다리던 안전한 날이었구나.

독서에 집중하느라 잠깐 약속을 잊고 있던 이혜정이었다.

"시원해?"

"응. 좋아."

"별로 안 시원한 거 같은데?"

"아니야. 나 너 마사지 좋아해."

"후후. 영광인 줄 알어. 너 태릉에서도 나한테 마사지 받으려면 선배들 줄 서고 그랬었어."

"그래. 영광이네."

투박하지만 섬세한 터치였다.

정말 여자의 몸을 잘 안다.

힘있게 누르는 것 같으면서도 무겁지 않게 긴장감을 풀어 준다.

우리는 오늘도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되겠지?

손끝 발끝이 떨리는 오르가즘을.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될 정도로 인사불성으로 취하는 그런 시간을...

오늘도 갖게 되는 거겠지...?

* * *

[연휴를 앞두고 서울을 빠져나가려는 차들로 정체 현상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설 연휴는 기간이 짧은 만큼 극심한 정체가 예상됩니다.]

"흠. 저러면 성남도 막히겠는데."

"..."

"어떻게 하지? 혜정아 그냥 지하철 타고 갈까?"

"어? 뭐?"

"지하철. 아니면 우리도 지금 출발해?"

"뭐를? 어디 가?"

"명절. 집에 가야 될 거 아냐."

밸런타인 지나니 바로 명절이 찾아왔다.

곧 있음 개강이고, 그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게 뻔하기에 명절은 성남에서 보내려고 하는데. 애가 멍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만 돌리고 있다.

"뭐야. 내 말 안 들었어?"

"아. 어. 뭐 그래."

"어 뭐 그래가 아니라. 어떻게 할 거냐고. 방금 뉴스에서 엄청 막힌다잖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야. 정신 차려 이혜정. 너 왜 이래?"

"아니. 너는 너네 집 가고. 난 우리 집 가는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는 거지."

"무슨 소리야? 니네 집이랑 우리 집이랑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있으니까 그러지."

어디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질러 만난 것도 아니고. 엄밀히 지금도 형네랑 얘네랑 11층 14층 이웃사촌으로 있는데. 당연히 같이 움직이겠구나 생각했더만, 반응이 그게 아니었다.

"혜정아. 어디 아퍼?"

"아니."

"흠."

"아. 명절이구나. 알바 끝나서 이런 게 오는 줄도 몰랐어."

뭐야? 얘 왜 이래?

"명절 안 가려고 그랬어?"

"아니. 근데, 마하야. 어차피 성남 가도 넌 니네 집 있을 거고. 난 우리 집 갔다가 큰집이나 갈 건데. 굳이 같이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그런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뭐지? 이 말 하면 말할수록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은?

어디서부터 대화의 초점이 틀어졌나 돌이켜 보는데, 혜정이가 오해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갈 거면 차로 가야지. 네가 대중교통 이용하는 건 좀 그렇잖아."

"음? 아니야. 나 혼자서 지하철 잘 타고 다녀."

"앞으로 연예인 할 건데?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설마 그건가?

"너 설마 나랑 같이 움직이는 게 싫어?"

"아니. 내가 왜."

"...말은 나를 위해 주는 거 같지만, 본심은 나랑 같이 움직이는 게 꺼려진다는 느낌이 있어서."

정곡을 찔렀나. 멍하던 눈빛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그런 게 싫은 건 아니고..."

"그럼 뭔데?"

"..."

"얘기해 괜찮아."

"그게 아니라. 너랑 지하철 타면 또 사람들이 알아볼 거 아냐..."

'또'라고 하는 걸 보니 어디서 그런 일이 있었나?

이제는 마포 주민들도 사촌은 위장이고, 알고 보면 둘이 사귄다는 걸 암암리에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혜정아. 설마 누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앞집 꼬마 새끼가 아직도 난처하게 물어봐?"

"아니야. 나 걔랑 말도 안 해. 인사도 안 받아 주고."

"근데 왜 그래. 뭘 걱정하는 거야?"

"..."

"나랑 있는 게 싫어? 부끄러워?"

"아니라고.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 그냥. 시선이라는 게 부담되니까..."

이렇게 소파 누워 있으면, 쓱 와서 바지 속에 손 넣어 사타구니 주물주물거리는 게 누군데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는지.

혜정이가 말해 주는데, 먼저 밸런타인 재료 산다고 마트 갔을 때. 나는 다른 데 보느라 못 느꼈지만. 멀리서 사람들이 슥슥 쳐다보면서 엄청 수군거리고 지나갔었단다.

"네가 이뻐서 그랬겠지."

"하하. 야 그 사람들이 나를 봤을까."

"당연히 너지. 너 나 아니어도 원래 이런 일 되게 흔하게 벌어지지 않았어? 너도 어디 가면 사람들 많이 쳐다보고 그러잖아."

"아. 아무튼, 있어..."

"야. 얘기하다 말고 어디 가?"

"화장실. 소변 마려."

말은 화장실이라고 하지만, 정리되지 않는 논쟁을 피해 자리를 피하는 거로 보인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뜬금 모르는 사람들이 쳐다보면 부담은 되겠지만, 한편으론 내 남자 친구 유명해서 보는 건데 좋지 않을까?

"...아니야. 다시 생각해. 이렇게 내 기준으로 따지면 그게 싸움이 되는 거야."

구마하. 아낌없이 사랑해 주겠다며.

여자애잖아. 내가 모르는 혜정이만의 무언가가 있겠지.

실제로 나랑 다르게 쟤는 일반인이잖아.

나야 누가 다가오든, 아줌마든 아저씨든 다 국민 여러분이고 응원해 주신 분들이지만 쟤한테는 남이라고.

경계하는 게 맞아. 시선을 즐길 이야기가 아니라고.

"음? 어디 가."

"나도 오줌 누러."

"흠. 그럼 물 내리지 말걸. 아깝다."

"너 나한테는 방귀 가지고 더럽다고 하지 않았냐?"

시원하게 독소와 암모니아를 쏟아 내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혜정아. 성남은 차 가지고 가는 걸로 하자."

"그래. 편한 걸로 해."

"갈 거면 나랑 같이 가고, 아니면 그냥 집에서 쉬어. 난 오랜만에 형이랑 명절 보내고 싶어."

"알았어. 준비하지 뭐."

"...어쨌든 한 동네 한 방향이니까. 굳이 번거롭게 뭘 따로 움직여 돈 아깝게. 그치?"

"그래. 오는 것도 시간 맞춰 보자."

"..."

"왜?"

"아니야. 그렇게 해"

갑자기 예스 걸이 된 혜정이가 책이나 핸드폰을 챙겨 거실에서 일어났다.

"먼저 자 마하야. 난 정리할 거 있어서 그거하고 갈게."

"그럼. 나 자지 말고 기다릴까?"

"아니야. 오늘은 먼저 자. 명절 쇠러 가려면 끝낼 것들 있어서 그거 오늘 밤에 해야 돼."

"음. 알았어."

내심 어젯밤도 시작은 무미건조해도 나중 가선 화끈하게 반응하길래 오늘을 기대했는데. 혜정이 말대로 며칠 집 비울 건데, 그 전에 마무리할 것들도 있겠지.

귀찮게 하지 말고 집중하게 비켜 주자.

안방 침대에 누워 틈틈이 보던 장금이나 켜 놓고 누워 있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귀양 갔던 장금이는 최근 의술을 배워 불쌍한 민초들을 돕고 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저것도 은퇴 후 새로운 적성을 찾았다고 봐야 될 거야."

드라마는 재밌는데, 적적한 기분이 들어. 혼잣말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잠들었나 보다.

"어 뭐야...? 쟤는 언제 관비에서 궁으로 돌아왔어?"

드라마가 몇 편이나 자동 재생이 돌아갈 정도로 깊이 곯아떨어졌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이 훌쩍 지났는데. 이때까지도 혜정이는 침대로 오지 않고 자기 방에서 할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혜정아...?"

목도 마르고, 설마 공부하다 저쪽에서 자나? 싶어 부스스 거실로 나가 봤는데, 방에서 사각사각하는 펜 소리가 들린다.

"야. 너 안 자? 여기서 뭐 해...?"

"어. 왜 일어났어."

"...뭐 해? 뭐 써?"

"으음. 일기장."

"흠. 뭔데? 내 욕 쓰는 거 아냐?"

"아니야. 가서 자. 이제 다 끝났어."

"뭐야. 나도 보여 줘."

"안 돼. 남의 일기를 왜 보려고 그래."

부스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혜정이 방 침대에 걸터앉았다.

"설마 싶지만, 방학 숙제로 일기 쓰기 같은 과제가 있는 건 아니지?"

"아니야. 야. 내가 나이가 몇인데."

"2월 15일. 맑음. 오늘 마하가 내 앞에서 방귀를 뀌었다 지독한 냄새였다. 팬티에 싼 건 아닌가 역겨운 상상이 떠올랐다."

애가 입을 막 가리며 배꼽이 끊어져라 웃는다. 지 남자 친구 똥 쌌다는 얘기가 그렇게 재밌는 걸까? 슬픈 얘기 아닌가?

"아하하하! 아 진짜. 왜 일어나서 난리래 정말. 좀 가서 그냥 자라니까."

"2월 16일. 흐림. 구마하가 아침부터 가슴에 꼬추 비벼 달라고 짜증 나게 굴길래 엉덩이를 걷어차 버렸다."

"야! 내 일기를 왜 야설로 만들어."

키득키득 웃으며 장난을 걸었지만, 나는 그녀의 이런 모습이 너무 좋다.

"뭔가 쓰고 싶은 내용이 있었어?"

"응. 요즘 정리되지 않던 생각들이 있었는데. 그런 게 정리가 되어서.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있고."

"장난으로 말했지만, 거기 내 얘기도 있어?"

"그럼. 있지."

"우와. 보여 줘. 뭐라고 썼어?"

"안 돼. 남의 일기를 왜 보려고 그래. 변태도 아니고."

"그게 왜 변태냐. 내 얘기니까 내가 봐야지."

"이건 기사가 아니야. 보기만 해, 그땐 진짜 끝이야."

그러고 보니 저 다이어리 어디서 본 기억이 나는데.

"혜정아. 너. 그거 먼저 성남에서도 있지 않았나?"

"성남? 내 방?"

"어. 나 네 방에서 그때도 뭔가 그런 알록달록한 마법 서적 같은 다이어리 봤던 거 같은데."

"...너 내 방 몇 번 안 오지 않았어? 그걸 기억해?"

"기억하지. 내 기사 스크랩 한 거 위에서 봤던 거 같은데."

"오~ 구마하. 눈썰미 좋은데."

중학교 때 처음 선물 받은 뒤로, 일기장은 꼭 여기 메이커 것을 쓰고 있다고 해 준다.

"질감도 좋고. 뭔가 나만의 책 같은 느낌이 나거든."

"은근 소녀 감성이 있다니까."

"그럼. 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