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음식 (3)
친구들에게 가면서도 혜정이와 문자를 계속했다.
[미쳤어? 뭐하는 거야!?]
[ㅋㅋㅋ 왜? 어른들이 뭐라고 하셔?]
[아빠가 누구랑 있었냐고 물어보시잖아!!]
[ㅋㅋ 미안. 너무 보고싶어서.]
혼자 당황하고 있을 혜정이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 걸음이 멈춘다.
역시 사랑이 최고다. 나한텐 금메달보다 여자 친구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언제 어느 때고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좋고,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도 값지다.
형을 봐도 그렇잖아. 수정이 누나 만나면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게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아무리 그래도 시끄럽게 뛰어오면 어떡해. (ꐦ¯¯)]
[아저씨한테 뭐라고 했어?]
[그냥 윗집 사람이 갑자기 내려갔다고...]
[ㅋㅋㅋㅋ 믿어주셔?]
[너 같음 믿겠어? 왜? 뜬금? 윗집이? 이러면서 이상하게 쳐다보지(>ㅁ<)]
[ㅋㅋㅋㅋㅋㅋㅋ]
내내 붙어 있다 잠깐 떨어졌는데 왜 이렇게 보고 싶을까?
친구들과 약속을 잊을 정도로 혜정이와 문자로 떠드느라 가다가 멈추고 한쪽에 앉아 핸드폰을 붙들고 시간을 보냈다.
[그냥 가서 제대로 인사를 드릴까?]
[안돼. 절대로.]
[왜? 정식으로 허락 받으면 좋잖아.]
[애들 만나러 안 가?]
[좀 늦어도 돼.]
[엄마면 몰라도 아빠는 안돼.]
[아저씨가 나 싫어해?]
[좋아하는데. 아빠는 누구 사귀고 있는 줄 모른단 말이야.]
[그래도 난데?]
[무슨 자신감이지?]
부모님이 남자 친구 사귀는 걸 싫어한다고 했었는데, 그게 아줌마가 아니라 아저씨였구나.
하긴, 남자 마음 누가 더 잘 알겠냐. 나 같아도 내 딸이 남자 친구랑 동거한다면 눈앞이 깜깜해지지.
허허허. 대통령을 데려다 놔봐라. 면상이 곱게 보이나.
[무엇보다 같이 있는 거 아빠가 알면... 안돼. 절대! 나 머리 밀리고 어디 산에 갇힐지도 몰라.]
[그런 건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지.]
[아무튼, 나 씻어. 꿉꿉해. 넌 어디야?]
[형네 가는 길. 여기 바다 미용실 없어졌다. 동네 많이 변했네.]
[술 많이 안 먹기로 한 약속 지키기. 차 안 가지고 나갔지?]
[그럼. 동네야 눈 감고도 돌아다니지.]
[오빠한테도 인사 전해 줘.]
웃으며 핸드폰만 보다 보니 어느새 형네 도착.
카운터를 보던 정석이가 아까 도착했다는 놈이 왜 이제야 오냐고 지랄지랄 한다.
싹 무시하고 태윤이를 보러 갔는데, 고등학교 때 친구 두 놈이 같이 있었다.
"하하! 마하야!"
"뭐야? 니네가 여기 왜 있어?"
"야 명절이잖아. 안 그래도 태윤이가 너 온다고 하길래 와 봤어."
"이야~ 씨발! 이 새끼들. 존나 반가운데!!"
"아하하하! 야. 근데 너 이렇게 혼자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뭔 상관이야. 동넨데."
나이들고 명절이 되니까 이런 맛이 있구나.
다들 대학이다 뭐다 집 떠난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반가움에 또다시 핸드폰을 들어 보고를 날렸다.
[와 형식이랑 준태가 있네. 졸업 때 보고 오늘 보는데 어색하다.]
[걔네가 누구야?]
[크리스마스 때 우리 집에서 봤던 애들. 2학년 때 같은 반. 스키장도 같이 가고 했었잖아.]
[아아~ 기억나. 준태란 애는 나랑 같이 학원 다녔었어.]
반가운 얼굴들이 눈앞에 있어도 여자 친구와 문자를 멈출 수 없다.
그러자 세상 두 쪽 나도 지 할 말 하고 사는 김태윤이 대놓고 뭐라고 한다.
"어이. 구마하. 이 새끼 뭔 개매너냐?"
"뭐가? 또 왜?"
"병신아. 애들 있는데 핸드폰 뭐냐고."
"아. 미안. 급한 연락이 와 가지고."
"꺼져 미친놈아. 실실 쪼개면서 문자질하는 주제에 뭔 급한 연락이야. 여자지?"
"지랄이야 병신이."
"야. 불러. 누군데?"
"아 있어. 너 모르는 애야."
"야. 저 새끼 숨기는 거 뭔가 좀 수상하지 않냐?"
"하하. 글쎄 난 마하 오랜만에 봐서."
"그러게. 서울에서 만난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형식이와 준태가 두둔해 주고 나서서 겨우 얼버무릴 수 있었지만, 김태윤은 한번 물은 목덜미를 놓치지 않는다.
"여자 친구지. 맞지? 너 연애하냐?"
"아.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말해 봐. 왜? 숨겨야 하는 사람이야? 설마 연예인?"
"아니라고 미친놈아! 야. 남수는 언제쯤 도착한대?"
"하하! 저 새끼 말 돌리는 거 봐. 진짜 뭔가 있는데?"
"야. 니네 남수 알지? 우리 친구. 맨날 우리 반 와서 설치던 놈 있잖아."
"알지. 남수."
"잘 알지. 왜 몰라."
그때 지나가던 정석이도 다가와 한마디 하고 지나갔다.
"야. 니네 더 먹을 거 없지? 오늘 명절이라 일찍 끝난다."
"아직 남수 안 왔는데."
"남수 올 때까지 가게 못 열어. 사장님한테 물어 봐."
"우리 형인데..."
"정석아. 마하가 남수 언제 오냐고 물어보는데."
"거진 왔을 걸. 두 시간 전에 지하철 탄다고 했으니까."
"야. 이정석! 구마하 저 새끼 여자 있어."
"아 있겠지. 병신아. 구마가 여자 없는 거 봤냐."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놈은 태윤이 말을 흘려들으며 허탈하게 웃고 지나갔다.
새끼. 진짜 말 안 했는가 보네. 진짜 여자 친구 말이라면 잘 듣는구만.
"씨발. 왜 다들 아무렇지 않은 거지?"
"하하하! 태윤아. 아 마하도 누구 만날 수 있지."
"그래. 연예인들보다 인기 좋은 게 마한데."
"아 씨 그런 게 아니라고..."
나도 원래 오늘 만나면 다 얘기해 주려고 했는데, 김태윤이 저 지랄 하니까 끝까지 숨기고 싶어졌다. 아니. 빅엿을 먹이고 싶어졌어.
"야. 그러는 너는 뭐 언제 후배한테 어장 당했다며. 그건 뭐냐?"
"미친놈이 그건 또 왜 지금..."
"하하하! 뭐야? 어장을 당해?"
"진짜 죽여 버릴라... 다 지난 이야기를 왜 지금..."
"하하하! 얘기해 봐. 난 건너 들어서 잘 몰라."
"있어. 형식이 넌 내가 먼저 얘기해 줬었지?"
"아아~ 걔. 그 화장발이라는 후배?"
무대 매너 좋고 입담 좋은 태윤이였다.
쪽팔린 이야기도 생동감 넘치게 살려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진짜? 그걸 그냥 참았어?"
"그럼 참아야지. 내가 너냐..."
"와. 무섭다. 신입생이 그 짧은 사이에 선배들 저울질한 거야?"
"요즘 그런 애들 많아. 우리 학교에도 몇 명 있었어."
"진짜. 목구멍 여기까지 마하 불러서 썅년 기 좀 죽일까 싶었는데. 저 새낀 또 훈련한다고 태릉 가 있지. 어우..."
"크하하! 전화하지 병신아. 왜 혼자 당하고 있어."
"어장인 줄 알았냐고 내가."
다 같이 웃고 떠드는 가운데 시커먼 그림자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설마 싶어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멋들어진 군복을 입은 남수가 우리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남수의 등장에 우리는 가게가 떠나가라 시끄러운 함성 소리를 질렀다.
"하하! 뭐야? 언제 왔어!!"
"이 새끼들 여기 니네가 전세 냈냐? 왜 이렇게 시끄러워. 밖에서도 다 들려."
"하하하! 남수야!"
"어이! 박 일병! 빨리 앉아 새끼야!"
"김태윤 병신은 훈련소도 안 간 새끼가 개념 없게."
"야. 근데 너 이 옷 뭐야? 집에 안 들렀어?"
"지금 집에 가면 못 나오지. 니네들 오랜만이다."
남수까지 합류한 우리들은 거침이 없었다.
오죽하면 정석이가 다른 손님들도 생각하라고 뭐라고 하고, 형까지 잘 노는 건 좋은데 목소리 좀 낮춰 달라고 한 소리를 하고 갔다.
"알았어. 미안 형."
"어이구. 동생 친구들이라 뭐라고도 못 하겠고..."
"형님. 전 단골이잖아요."
"하하. 그래. 태윤이 봐서 참는다."
"난... 친동생인데..."
그런 소소한 일들도 다 혜정이한테 문자로 일렀다.
[충격이다. 형이 나보다 애들을 더 챙겨...]
[ㅋㅋㅋ 그러니까 가족들도 자주 봐야 된다니까.]
[아니. 그래도. 인간적으로 너무 배신감 드는데?]
"오~ 마하 진짜 연애하나 보네. 아까부터 핸드폰을 놓지를 않는데."
"아니. 그냥."
형식이가 슬쩍 언급을 했지만, 애들은 군대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어 관심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남수야 일병 되면 뭐 다르냐?"
"뭐가 다르냐고? 글쎄. 너 훈련소 끝나고 자대 배치 받을 때 난 상병이지?"
"하하하. 아... 맞다. 그렇게 되는구나."
친구들 사이 웃긴 일 하나하나 바로 혜정이한테 문자를 보냈다.
[ㅋㅋㅋ 방금 김태윤이 남수한테 시비 걸다 되려 쿠사리 먹음.]
[왜? 뭐라고 했는데?]
[별거 아닌데, 가만 보면 새끼가 공부만 잘하지. 멍청해.]
"저 봐. 저 봐. 니네 봤냐? 또? 또 문자질!"
"아... 진짜..."
"왜? 마하는 누군데?"
남수까지 합류한 마당에 김태윤 등쌀을 이겨 낼 순 없다.
처음엔 눈치껏 편들어 주던 형식이와 준태도 이제는 대세를 따라가고 있었다.
"누군데? 말해 봐."
"있어."
"아까부터 이런 식이야. 얘기를 안 해 줘."
"아. 진짜 그냥 아는 애라고."
"태윤이가 막 캐묻는데. 계속 둘러대고."
"너 진짜 연예인 같은 사람 만나냐?"
이런 자리일수록 남수가 진짜 이놈이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잰지 깨닫게 된다.
"하긴. 이 새끼 원래 여자 이야기 잘 안 해. 너네도 그만 물어 봐"
"그치! 미친놈아. 내가 언제 너네한테 여자 이야기 한 적이나 있었냐고!!"
"씨발 친구 사이에 그게 그렇게 당당하게 할 소리냐!!"
"야. 마하 스캔들 나 새끼야. 조용히 좀 해."
"아 뭐 어때? 어차피 동네와서 떠드는데. 그리고 저 새끼 은퇴했잖아."
한참 웃고 떠드는 가운데, 남수가 툭 치면서 말했다.
"새끼. 그래도 좋아 보인다."
"뭐가 병신아. 너까지 지랄하지 마."
"하하하! 지랄이 아니라 미친놈아. 먼저 봤을 땐 너 죽다 살아난 놈 같았다고."
남수는 먼저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더 생동감이 넘치고 활력이 느껴진단다.
그때는 뭔가 죽다 살아나서 눈빛도 죽어 있고 앞에서 놀리든 뭘 하든 허허 그래그래 하는 식이었다는데.
"그래? 그랬나?"
"태윤아 맞지. 우리 이 새끼 보고 걱정 존나 했지."
"근데 그날 저 새끼도 뭐 학교 간다고 일찍 일어나고 그랬잖아."
"야. 내가 가고 싶어 갔냐. 너도 귀찮아 하는 거 같고 대충 피해 준 거지."
"피하긴 뭘 피해. 니가 그렇게 배려심이 깊다고. 정석이 취해서 그냥 토낀 거지!"
결과를 내야만 하는 승부의 세계를 벗어나서 그럴 것이다.
혜정이와 하트가 샘솟는 매일매일을 보내는데 사람이 밝아지지.
그래. 얘기하자. 얘네한테 뭘 더 숨겨.
혜정이도 해도 된다고 했잖아.
형식이 준태는 변수지만, 동창들 사이에서 소문 나면 어때.
"야. 나 실은."
"근데 마하야. 넌 왜 미니홈피 안 해?"
"어? 아. 그거. 별로."
"야. 요즘 다 해. 왜 안 해."
"그래. 유명한 사람들도 엄청 관리하더만."
"저 새끼. 비싼 척 하는 거야."
"하하하! 마하가 뭘 비싼 척을 해. 미친놈아."
"와 진짜... 야. 내가 태윤이는 좀 때려도 되는 거 아니냐? 아까부터 사람을 존나 빡치게 만드는데."
그런데, 막상 혜정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도. 남수는 포상을 나왔고, 다른 두 친구는 2년만에 얼굴을 봤다.
태윤이도 몇 달 뒤 입대를 앞둔 상황에 도저히 내 얘기를 꺼낼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 * *
"사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 그래. 정석이도 내년 잘 부탁한다."
"네!!"
"잘 먹었습니다."
"그래 그래. 남수는 군복 입으니까 멋있다."
"하하! 고맙습니다."
"이야~ 우리 형 인기 좋네."
"시끄러워. 넌 애들이랑 놀다 올 거지?"
"어. 조금만 더 있다 갈게."
"명절날 형 보러 온 거 아냐?"
"아 좀 들어가."
가게를 마친 형은 먼저 집으로 들어가고 나는 친구들과 조금만 더 놀고 들어가겠다고 허락을 받았다.
일단 남수가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남수네 집으로 다 같이 움직였다.
"이야. 마하랑 이렇게 다니니까 기분이 좀 남다른데?"
"그러니까. 유명한 사람이랑 있으니까 좋다."
"아 제발. 니네까지 그런 거 하지 마."
"진짜? 그럼 너 좆밥으로 대우해도 돼?"
"뒤질래?"
"야. 이 새끼 미니홈피 보잖아? 연예인들도 와서 인사하고 간다."
"어! 나도 봤어."
"마하야. 미니홈피 좀 해. 금메달 사진 몇 개만 올려도 방문자 폭발하겠구만."
"아니. 그런 거 일일이 올릴 시간도 없고. 자랑하는 거 같아서 쑥스럽고."
"자랑하려고 하는 거지!!"
"달라. 이 새끼는 우리랑은 사는 세계가 다른 놈이야."
다를 건 없다. 그냥 말하지 않는 게 있을 뿐.
그치만, 막상 물어봐 놓고 들을 생각도 안 하고 있잖아.
새끼들 오늘 안에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야. 아무튼, 뭐 할래? 간만에 이렇게 뭉쳤는데. 시간도 있고."
"글쎄. 마하 뭐 하고 싶은 거 있냐?"
"나보단 휴가 나온 놈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남수 나오면 뭐 하고 싶은 거 있었어?"
"음. 하나 있긴 한데."
남수는 정석이를 보면서 말한다.
"정석아. 선아 뭐 하냐?"
"집에 있지. 왜?"
"선아한테 얘기해서. 혜정이랑 애들 다 부르면 안 되냐? 다 같이 모이는 거 안 될까? 마하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