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94화 (294/401)

명절음식 (6)

[오늘 나갔다 왔었어?]

[어? 어떻게 알았데?]

[백화점 갔었다며.]

[오~ 이혜정. 설마 하루종일 내 소식 찾아보고 있는 거야?]

[무슨... 친구가 알바하고 있어서 들었지.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아냐!!]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구마하 선수 복귀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복귀라..."

남들이 보는 구마하. 스포츠 스타 구마하는 영업 종료다.

아쉽기도 하겠지.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은퇴한 여배우들 작품은 따로 폴더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국제 대회는 계속 있고, 당장 수영의 김태주, 월드컵 축구 대표 팀.

정말 많은 예비 스타들이 국민들의 사랑과 지지를 얻기 위해 오늘도 명절을 잊고 피땀 흘리고 있을 것이다.

나 같은 놈은 대신할 누군가가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진다.

그래 잊혀지는 것이다.

아 맞다. 옛날에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고 넘어가게 될 거라고.

"후우..."

그럼 왜 한숨을 쉬고 있지?

잘했어. 결정을 번복할 마음은 없잖아.

정상에 있으면 내려올 줄도 알아야 한다고들 하잖아.

난 내려왔을 뿐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쉽게 은퇴를 결정한 건 아니었다.

운동은 좋아도, 그 외적인 모든 것들이 너무 힘들었다.

선수가 느끼는 부담감은 좆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원대한 그림을 그리는 박문기와 연맹들이나, 그런 박 회장에게 휘둘려 금메달 몇 개 같은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써 갈기는 언론 등.

친구들이 짐을 나눠 주어 떠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지금도 운동을 벗어나 펼쳐지는 그 모든 욕망을 혼자 감내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 나는 그림같이 밝은 은퇴가 아닌 무거운 현실에서 도망쳤다고도 할 수 있다.

오늘 우연히 팬들을 만나 그러한 현실을 깨우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뭐? 뭐 어째야 했는데..."

난 좆밥이다.

겸손이 아니라 진짜로 나라는 놈은 알면 알수록 운이 좋았을 뿐이지. 모두가 생각하는 스포츠 천재니 국민 영웅이니 하는 타이틀을 짊어질 자격이 없는 놈이었다.

이러다 언젠가 정체가 들통나면...

모두가 나를 싫어하게 된다면...

그렇게 되기 전에 내린 결정이 바로 은퇴.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니다 자연스러운 절차였어.

그런데...

그런데도 참 뭐랄까...

정곡을 찔린 기분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똑똑똑.

"어."

"자냐?"

"어쩐 일이셔? 형이 노크를 다 하고."

"나 원래 이랬어."

"하하하! 형도 누나랑 사니까 변하는구나."

"시끄럽고. 너 내일 올라간다고 했지?"

"어."

"그럼 가기 전에 잠깐 가게 들려. 반찬이랑 챙겨 줄 테니까."

"형. 잠깐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먹는 건 내가 알아서 사 먹으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 자식이 기껏 신경 써 주는데..."

"혼내는 거 이따가 하고, 형 잠깐만 앉아 봐."

"왜? 뭔데?"

연애 상담은 친구. 진로는 동료. 삶은 가족과 나누는 법.

형한테 낮에 있던 일을 얘기했다.

"그래? 고마우신 분을 만났네."

"아니 뭐. 그렇긴 한데... 난 그 사람 얘기 듣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뭐?"

"좀 불안하다 같은 거..."

"왜 불안해?"

내가 하는 모든 도전은 팬들이 날 좋아해 준다는 전제 조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오늘 백화점에서의 일을 바탕으로, 내가 운동 아닌 다른 걸 하면 사람들이 싫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잘하는 운동이나 하지 저 새낀 왜 딴짓을 하지? 이러지 않을까?

육상에서 스키에 도전할 때도 그랬으니까.

오늘 일은 긍정이 아닌 부정적인 미래의 일면을 보여 주는 기분이다.

"흠..."

"그렇잖아. 뭐든 자기 분야를 넘어 다른 거 할 때 반발이 생기니까. 나 스키 탄다고 했을 때도 엄청 시끄러웠고."

지금의 인기나 광고 영향력이 쭉 이어지리란 건 우리만의 기대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좋게 될 수도 있지. 하지만 확신할 순 없는 거야.

내가 한 선택은 그런 이면도 담고 있는 것이었다.

"마하야. 너는 뭘 하든 사람들이 칭찬해 주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당연한 거 아냐?"

"흐음. 난 욕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욕심인 건 인정해. 대신 열심히 할 거야. 모델을 하든, 연기를 배우든. 그래서 하는 만큼 인정받고 싶은데. 다들 뭔가 생각보다 너무 아쉬워하니까... 팬심이 돌아서면 또 무섭거든."

모든 유명 인사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최근 구마하 안티카페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른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좋아하는 만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장난 아니게 나를 미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형. 솔직히 말하면..."

"어."

"운동은 계속 하고 싶어."

"..."

"근데, 그런 마음들이... 주변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둔 것도 있어."

"남들 신경 안 쓰고 너 운동만 하면 되잖아."

"어떻게 그래. 이미 내가 혼자가 아닌데."

"혼자가 아니면 너가 누가 있는데?"

"감독님도 있고. NICE나 후원 기업들. 내 위치가 그럴 단계를 벗어났어. 이건 잘난 척이 아니라 진짜 내가 처한 현실이 그래..."

"흠. 마하야. 너한테 이 얘기를 해 주면 좋겠다."

치고받고 썰고 죽이는. 들을 때마다 황당한 무림 이야기였다.

그렇게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무림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 바로 '인연'이란다.

"인연?"

"그래. 인연. 사람과의 인연."

"네 이년! 하하. 아니 그냥 장난친 거지. 아. 알았어. 조용히 들을게... 미안..."

무림인들은 원한과 복수 못지않게 감사함과 은혜를 중요시하는데, 형은 그것을 '신의'라고 불렀다.

"신의라... 어렵네."

"넌 사람들이 너한테 전해 준 관심과 응원을 어떻게 생각해?"

"고맙지. 그래서 더 열심히 했고. 진심이었어."

"그냥 고마운 거로 끝이야?"

"글쎄? 그렇게 따지면, 그 사람들도 내가 국가 대표니까 응원한 거 아닐까."

"야. 그런 게 어딨어. 국가 대표가 너 한 사람도 아니고."

"난 그래도 나름 성적을 냈잖아... 응원할 맛이 있었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도."

"그럼 그 고마움을 은혜를 입었다고 다시 봐 봐. 어떻게 되겠어?"

"뭐... 그렇게 따지면..."

"어떻게 해야 될 거 같아. 편안하게."

"형 말대로 하면 갚을 게 많아지겠네. 은혜를 입은 이상, 남자가 가만있을 수 없으니까."

"그래. 그게 우리들. 무림의 방식인 거야."

이 와중에 난 무림인이 아니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내공을 써서 좋은 성적을 거둔 건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형 말은 세상에 뭘 기대하지 마라 이거구나."

"맞아. 바로 그거야. 환경이 바뀐 건 알아. 하지만, 더 이상 뭘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돼. 너는 이미 충분히 많은 걸 받았으니까."

기대가 없으면 상처도 없다.

뭐 어느 정도 동의는 한다만, 근데 또 막상 그렇게 뭘 많이 받았다고 하기엔 아직 좀 성에 안 차는 부분이 있지 않나?

수익적인 측면이나 명성이나.

"알았어."

"바라지 마. 오히려 세상에 먼저 뭘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봐."

"근데 뜻은 좋은데, 사람 사는 게 그렇지 않잖아."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장사도 봐. 손님 기다리면 손님이 와? 내가 먼저 나가서 가게 앞에 낙엽이라도 쓸고 닦아야지."

형은 여기서 바라는 모든 것이 욕심이라고 정의 내렸다.

인생 스물둘에 욕심을 버려야 하는 인생을 살라니...

말같이 쉬운 길이 아닌데...

"욕심은 사람을 타락하게 만든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그게 더 멀리 갈 수 있는 길이 될 거야."

"아... 더 어렵네..."

"차차 알게 되겠지. 쉬어라. 내일 가게 들르고. 자."

"어. 형도 자."

형이 해 주는 얘기들은 당장은 답답해도 늘 그것이 맞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금도 그렇겠지? 언젠가 이 말이 맞겠지?

"흐으음."

그래도 어렵긴 마찬가지구나.

기대하지 말라니... 당장 한구 스포츠가 나만 보고 있는데...

"음? 문자가."

사랑하는 님한테서 날아온 문자가 나를 고민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우리 내일 몇 시에 올라가?]

[글쎄다. 형한테 점심 지나서 간다고 했는데.]

[너 먼저 올라가면 안 돼? 나 친구들 약속 잡혔는데]

[무슨 약속? 어기면 안 돼? 목숨이 걸려 있는 약속인가?]

[유치해. 뭐야...]

짜증 낸다. 혼자 붉으락푸르락거리고 있을 이혜정을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다.

[자?]

[아니. 아직. 오랜만에 집에 오니까 엄마가 옷 정리하고 가라고 그래서.]

[그럼 바쁘겠네.]

[왜?]

[아니. 시간 되면 잠깐 산책 좀 하자고.]

[지금?]

[지금이 어때서. 11시 조금 넘었는데. 우리 평상시면 한참 둘이 야한 거 할 시간이잖아.]

[방금 문자 지움.]

[ㅋㅋㅋㅋㅋㅋㅋ]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냥. 보고 싶어서.]

[흠. 알았어 잠깐만 있어 봐. 먼저 내려가 있어.]

* * *

띵.

"이야~ 안녕."

"음. 안녕..."

"뭐라고 하고 나왔어?"

"그냥 너가 보자고 그랬다고..."

"아저씨가 나가라고 하셔?"

"일단. 뭐. 너 성남 있는 건 아빠도 들으셨으니까."

"허를 찔렀구나... 그 구마하가 당장 우리 딸 남자 친구라는 건 아저씨도 생각 못 하고 계시니까."

"시끄러. 차로 갈 거야?"

"아니야. 놀이터로 가. 오늘 별로 안 추워."

놀이터로 건너와 둘이 그네를 타고 시소를 타며 이야기를 나눴다.

"진짜 별로 안 춥다."

"그치? 봄이 오는 거 같아. 따뜻해."

"시계는 뭐야?"

"아. 아까 애들이랑 나가서 산 거."

"멋있다. 나도 보여 줘."

"애들 입대 선물로 사 줬어. 너도 하나 사 줄까?"

"내가 군대 가냐."

슬금슬금 혜정이 그네를 밀어주며 대화를 나누는데, 조급했던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다.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불안함이 멀어진다.

"혜정아."

"응?"

"새해 복 많이 받아."

"응. 너도."

우리는 주변을 슥 둘러보며 CCTV도 확인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참고로 안 해. 지금은 절대! 차에서 안 해. 저쪽 공원 깊숙이 안 갈 거야."

"걱정하지 마. 나도 상황 파악은 하니까."

"흠."

"뭐지? 이 아쉬워하는 눈치는? 알고 보면 NO라고 하지만 속은 YES였다는 그런 건가?"

"너는 정말로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어?"

투덜거리는 혜정이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아까 있던 일. 형이랑 나눈 이야기 등을 정리해서 알려 주었다.

혜정이도 놀랐다는 듯이 대화에 경청해 준다.

"신기하다. 백화점에서? 손님 상대하는 사람이 그랬다고?"

"어. 바로 앞에서. 심지어 사람들 이렇게 동그랗게 서서 나 구경하는데. 대놓고."

"진짜 팬이었나보다. 그럼 그럴 수 있지."

"다들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어. 애들도 그렇고."

그 순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기 혜정아. 있잖아."

"응."

"진짜로 나랑 결혼 안 할래?"

"..."

"진심으로."

미래가 두려운 건 결국 혼자라서가 아닐까? 함께 이겨 갈 누군가 있다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을 것 같은데.

"마하야.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니가 키가 커서도 아니고, 돈이 많아서도 아니야. 유명해서 좋아하는 건 정말 아니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들어 봐. 난 너가 같이 있어서 재밌는 사람이라서 좋아해. 그치만."

이런 말장난은 정말로 싫어한단다.

"왜 내 말이 장난이라고 생각해...?"

"그럼 진짜 결혼하자고?"

"...난 진심으로."

"야. 우리가 알고 지낸 게 십 년이지. 사귄 건 지금 몇 달 되지도 않았어."

"나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이런 장난은 앞으로도 하지 말라고. 지금 분명하게 얘기하는 거잖아."

왜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내가 그렇게 진지함이 없었나...?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아니. 나는..."

"마하야. 결혼이야. 연애도 아니고 결혼.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얘기를 해."

혜정이는 형이 결혼한다니까 나까지 흔들리는 거라고 말했다.

물론, 어느 정도 영향은 있지만 나라고 인생의 반려자를 쉽게 결정 내리지는 않는다.

"난 우리가 결혼 얘기를 해도 된다고 생각했어."

"왜?"

"왜라니. 서로 좋아하고. 속궁합도 잘 맞고."

"결혼을 그것만 가지고 결정한다고?"

"그럼? 어쨌든 사랑하는 건 맞잖아."

"아무튼 싫어. 그런 얘기 할 거면 나 집에 갈 거야."

혜정이가 그네에서 일어나 서벅서벅 몇 걸음 앞으로 가더니 뒤돌아본다.

"뭐야. 왜 실망하는데. 상식적으로 봐도 그렇잖아."

"..."

"지금 우리 나이에 결혼 얘기가 왜 나와. 먼저 문자도 그렇고."

생각보다 더 격한 반응에 나도 길게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다만, 조금 실망스러운 건 있었다.

"너. 나 싫어?"

"야...? 뭐야 갑자기?"

"아니. 보통 이런 얘기 하면 농담이라도 그래라고 해 주지 않나?"

"..."

"너무 딱 잘라서 뭐라고 하니까 좀 그렇네..."

혜정이도 한숨 길게 쉬더니 돌아와 얼굴을 마주 본다.

"마하야. 넌 어떻게 나를 믿고 결혼을 얘기할 수 있어?"

"좋으니까. 사랑하니까."

"그게 다야?"

"뭐가 더 필요해. 생각보다 의지가 되고. 믿음이 있고. 지금도 힘드니까 너 보고 싶어 하고 있고."

"..."

"그냥 더 같이 있고 싶다는 그 마음이 잘못된 건가?"

"같이 있잖아. 니 말대로 지금도 나오라고 하니까 나왔고. 내일부터는 또 쭉 같이 있을 것이고."

그렇긴 하지만. 너무 질색팔색을 하는 바람에 고민들이 싹 날아가고 말았다.

오히려 얘는 나랑 평생 같이 있지 않겠구나 하는 불안이 생긴다.

아니. 어쩌면...

혜정이는 언젠가 나랑 헤어질 생각도 하고 있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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