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음식 (7)
"여보. 혜정이 좀 이리 오라고 해 봐."
"딸 들었지? 엄마가 부른다."
"직접 가서 얘기를 하라고."
"다 들려."
"어후..."
"왜 한숨을 쉬어."
짧은 명절 여기저기 다니느라 지친 아버지. 손님보다 더 어려운 친척 상대하고 맥이 풀린 어머니. 그리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철저히 중립을 지키는 외동딸.
본가에서의 마지막 밤.
이혜정은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 왜?"
"너 온 김에 이거 니 옷들 정리해."
"다음에 하면 안 돼?"
"지금 해. 다음에 또 언제 올 거야. 엄마도 정리하니까 옆에서 같이 해."
"진짜? 그럼 나 가지고 싶은 거 가져도 돼?"
"그러든가."
"할래!"
여기저기 남들 챙기다 막상 가족의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은 어머니 김지애 여사가 마련한 자리였다.
모녀는 낡은 것을 솎아 내고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며 오붓한 순간을 만들었다.
"우와. 이 바지 뭐야?"
"엄마 처녀 때 입던 거."
"정말 유행은 도는구나. 이거 나 가진다?"
"그래라."
"여기에 그걸 신고. 가방을."
다 낡은 옷이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딸 아이는 나이만 스무 살이 넘었지 영락없는 애기였다.
김지애 여사는 딸의 표정을 살피며 웃음을 지었다.
"넌 좀 어때?"
"나 뭐 늘 똑같지. 다를 게 뭐 있어."
"알바는?"
"끝났어."
"진짜로 엄마가 등록금 안 줘도 돼?"
"그럼. 엄마 나 돈 많어. 이미 납부도 끝났고."
"장하네 우리 딸."
날 때부터 미모가 뛰어난 아이다보니, 자칫 되바라진 성격으로 자라지 않을까 일부러라도 칭찬에 인색했었다.
그런 아이가 이제 스스로 등록금을 벌고 남자 친구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다 큰 딸아이의 자립심에 가슴이 뭉클하면서 한편으론 아리는 무언가가 있다.
혜정이가 없었다면 진작에 남편과 갈라섰을 것이다.
그러나 딸이 있어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가정을 지켰고 끝까지 가족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혜정인 부모의 자부심을 키워 주는 아이였다.
"이것도 한번 입어 봐."
"싫어. 버려."
"입어 봐. 너 이런 거 좋아했었잖아."
"내가 언제?"
"중학교 때. 하하~!"
"아. 엄마!"
"좀 되긴 했네. 그치?"
"한번 줘 봐. 음- 아니야. 버려 버려."
"이거 그때 백화점에서 비싸게 주고 샀는데... 엄마도 이거 큰 계약 있을 때 딱 한 번 입었어."
"뭐야 그게. 아깝다고 나한테 떠넘기는 게 어딨어."
그렇다고 딸아이한테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뭐든, 자기 선에서 아니다 싶은 건 딱 잘라서 선 그어 버리는 모습은 어머니의 가슴에 괜한 서운함을 불러일으킨다.
김지애 여사는 혜정이가 당황스러워 할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혜정아. 이건 누구 옷이야?"
"어? 어..."
아 저 옷이 여기 있었구나... 얼마 전에 마하도 한번 물어봤었는데...
이혜정은 당황스럽다. 그것은 커다란 스포츠 후드 티였다.
집안 누구도 어울리지 않는 큰 사이즈의 옷. 바로 이혜정이 마하 민서와 함께 광란의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입고 온 그 옷이었다.
"내 거야."
"너한테 이런 옷이 있었어?"
"응."
"이런 큰 옷은 왜 샀어?"
"산 거 아냐. 친구한테 받았어. 오빠가 입던 옷이라고 하면서."
"친구 누구?"
"민혜."
"걔가 오빠가 있어?"
"사촌 오빠도 있고 다 있어. 뭘 그렇게 따지듯 물어."
이미 들킨 이상 이혜정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그렇게 대충 넘어가는가 싶지만, 딸의 현재는 엄마의 과거다.
김 여사는 혜정이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너 집에 마하 불렀던 적 있니?"
"무슨 소리야. 걔가 우리 집을 왜 와..."
"이 기집애가..."
"..."
시침을 뗀다.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면 엄마도 뭐라 할 수 없다.
정황은 정황일 뿐. 증거물을 소명하는 건 수사관의 일이지 피의자의 역할이 아니라고 소설에서 그랬어.
"마하랑은 잘 지내?"
"뭐... 잘 지내지."
"왜. 둘이 별로야?"
"엄마. 아빠 거실에 있어..."
"뭐 어때. 안 들려. 괜찮아."
이혜정은 스리슬쩍 엄마가 쳐 놓은 덧에 빠져들어 술술 두 사람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데이트 같은 것도 해?"
"잘 안 해. 걔랑 나가면 사람들이 얼마나 쳐다보는데."
"마하는 그런 거 신경 안 쓴다고 들었는데."
"내가 신경 쓰이잖아."
"너 걔 좋아해서 사귀는 거 맞지?"
"아 진짜. 엄마 뭘 물어보고 싶은 건데."
"왜? 내 새끼 연애 사정도 못 물어보냐. 괜히 성질이야..."
"잘해 줘. 나 진짜 좋아하고."
정말로 잘해 주고 좋아해 준다.
너무 잘해 줘서 가끔 과하다 할 정도의 사랑을 받는 기분이다.
그래서도 이혜정은 구마하의 넘쳐 나는 감정이 정말로 사랑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딸은 무거운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 표정을 밝게 바꿨다.
"엄마. 걔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어?"
"뭐? 예쁘데?"
"아니. 내가 뭘 하든 다 잘할 수 있는 애로 보인대."
"그래? 니가 뭘 잘하는데?"
"엄마."
"하하. 아니. 뭐에 그렇게 칭찬을 들었냐는 소리지."
딸은 엄마의 걱정과 관심을 덜기 위해 좋은 이야기만 꺼내 들었다.
머리도 좋다고 해 준다. 요리 솜씨도 괜찮다. 등등.
실제로 그런 것들이 이혜정에게 있어 느리지만, 분명하게 한 남자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참. 이야기 들을수록 신은 공평하구나 싶다."
"갑자기 신이 왜 나와?"
"구 사장을 봐도 그렇고, 마하를 봐도 그렇고. 그렇게 잘나고 능력 좋은 형제들이 가족도 없이 자란 거 생각하면..."
"마하네 오빠 결혼한대."
"진짜? 누구랑?"
"지금 사귀고 있는 언니."
"그 키 작은 여자? 에이... 헤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중매하려고."
"아 엄마... 제발 그런 짓 좀 하고 다니지 말라니까...?!"
옥신각신 난잡한 분위기 속에 모녀의 이야기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럼... 혜정아."
"또 뭐?"
"니네 잠은 따로 자니...?"
"아. 진짜... 왜 그래? 어??"
역시. 너무 떠들었어... 우리 엄마지만 내면은 주민들의 가십과 뒷말로 가득 차 있어... 그만 말해야지.
"엄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엄마가 걱정할 짓은 안 해."
이혜정은 단호하게 입을 열었지만, 모친의 눈빛은 이미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에서 발소리가 들려와 두 사람의 시선을 돌렸다.
"뭔 얘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해?"
"당신도 옷 정리 도와줄래요."
"됐어. 두 사람이 알아서 해."
웃고 떠들고 시끌시끌. 아빠도 궁금해서 와 봤겠지. 그걸 이렇게 냉정하게 발길을 돌아 세우다니.
딸은 엄마에게 아쉬움을 느꼈다.
"엄마. 아빠한테 그러지 좀 마..."
"내가 뭘 어쨌다고? 도와 달라고 하니까 저 사람이 싫다잖아."
"대체 왜 결혼했어? 이렇게 살 거?"
"이제는 니 이모들도 안 하는 소리를 니가 하고 있구나."
분위기는 진정되고 모녀는 다시 옷 정리를 시작했다.
이혜정은 옷가지를 접다 TV 소리가 들리는 거실 쪽을 돌아본다.
"아빠는 요즘 어때?"
"뭘 어때. 똑같지."
"사업병은 끝났어?"
"모르니? 니 아빠 조용할 때가 젤 무서운 거..."
"엄마. 그러지 말고 그냥 카드를 엄마한테 다 돌려. 그럼 아빠도 사업이다 뭐다 하고 싶어도 못 할 거 아냐."
딸의 조언에 김 여사는 피식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여기서 니 아빠 돈까지 다 뺏으면 그게 죽으라는 소리지."
"아니... 자꾸 사고를 치니까 그러지..."
"혜정아. 아빠한테 뭐라고 하지 마. 아빠는 그냥 너랑 나. 예쁜 아내 예쁜 딸 생긴 대로 살게 해 주려고 계속 도전할 뿐이야."
"허어. 이해심 뭐지?"
"시끄러. 그거나 이리 줘 봐."
투덜대지만, 그래도 엄마의 깊은 속내에 마음이 훈훈하고 뜨거워진다.
지지고 볶고 싸워도 가족은 가족이구나.
그렇게 싸우면서도 속으론 서로를 위하고 있었어.
"열녀네 열녀야... 나 같음 절대 안 봐줘."
"아빠 얘기 그만하고. 걔는 앞으로 뭐 하고 살 거래?"
"몰라."
"뭘 몰라. 너한텐 그런 얘기 안 해?"
"무슨 연예인 하겠다고 그러던데... 잘 몰라. 회사랑 스케줄 상의 중이래."
"어머. 좋다. 난 마하 가끔 TV 나올 때 너무 좋더라. 재밌고."
"뭐. 일단은 모델부터 시작한다고 들었어."
"역시. 혜정아. 엄마가 눈 딱 감아 줄 테니까"
"스톱. 거기까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니 나이에 결혼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라니까?"
"아. 제발 하지 말라고... 이제 엄마한테 아무 소리도 안 할 거야."
적당히를 모른다.
이런 엄마니까 얘기를 하고 싶어도 참는 수밖에 없다.
방으로 돌아온 이혜정은 핸드폰에 쌓인 문자를 확인했다.
"그러는 너도 양반은 못 되는가 보다..."
이혜정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놀이터에서 마하를 만나 엄마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결혼이야. 결혼은...?"
부모가 찬성하고 상대방이 원한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다가오는 봄가을 식장을 알아보러 돌아다닐 것 같다.
"너 앉아 봐. 낮에 무슨 일 있었어. 다 얘기해. 빨리."
그래서도 마하가 왜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문제의 근원을 찾아 해결해 주고자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진로 고민이었네."
"어. 맞아."
"진로에 대한 해결책이 어떻게 결혼이 돼? 진짜 황당하다니까...?"
"될 수도 있지.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내는데 부부만 한 게 없으니까."
"허어..."
"왜? 운동선수들은 일찍들 결혼하고 그래!"
"허어어..."
누군가는 그런 삶을 바랄 수도 있다. 그는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고 외모나 능력 등, 조건에 있어 빠질 게 없는 남자니까.
마하와의 결혼은 과장 조금 보태서 신분이 상승하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이혜정은 홀로 위태로운 가정을 지켜 온 독립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성장하고, 딸은 엄마의 가슴에 안겨 정서를 키운다.
"마하야. 잘 들어."
그가 좋다. 함께할수록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다만 결혼을 이야기하는 건 너무 일러...
이제 좀 좋아지고 익숙해지는데, 여기서 또 무언가가 앞서가는 건 싫어.
구마하와 이혜정. 두 사람은 사랑의 속도가 너무 달랐다.
"힘든 건 알겠어. 하지만, 그건 너의 고민이고 너의 어려움이잖아."
"..."
"나는 뭔데? 너랑 결혼하면 난 뭐 해야 하는데?"
"......"
"옆에서 그냥 너 멘탈 케어해 주고 니가 벌어다 주는 돈 쓰고 살면 되는 거야?"
그래서 그녀는 용기를 내 자신의 입장을 전한다.
구마하는 충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선을 긋는다고?
연인 커플 남자 친구 여자 친구 하는 그런 사이에?
같이 동거까지 하는데...?
남자나 여자 각자의 입장에서만 생각이 진행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아직 한국 나이로 스물두 살. 만 나이로 생일이 지나지 않아 스무 살이었다. 사랑의 기쁨은 알아도, 그만한 깊이를 담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다.
"야. 이혜정 방금 뭐냐? 그 냉정한 말은?"
"...뭐가?"
"너 나랑 사귀는 거 아냐? 그럼 같이 고민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그러니까 지금 고민해 주고 있잖아."
싸움에서 언제나 남자가 더 이성적인 건 아니다.
남자도 감정이 앞서고 여자도 침착할 수 있다.
이혜정은 최대한 차분하게 그가 해 줬던 이야기를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너는 성과보다 과정. 결과보다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었어."
"맞아. 근데 그게 왜 나와?"
"들어 봐. 넌 다른 사람들 위해서 운동하는 게 아니라고 그랬어. 니가 믿는 꿈이나 목표가 있다고 했었잖아."
"..."
"그럼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마. 주변은 결국 주변일 뿐이야. 흔들릴 필요 없어."
이혜정은 그에게 자신이 믿는 독립적인 시각과 자립심을 알려 주었다.
구마하도 흔들리는 중심이 잡히는 기분이지만.
한편으론 쓸쓸함을 피할 순 없었다.
나의 꿈은 너였어... 그리고 지금 그 꿈이 딱 잘라서 결혼은 아니라고 했고.
물론 우리가 아직 어린 건 알어.
그래도 농담이라도... 좋아.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해 주길 바랬어...
"후우..."
"제발 다른 사람들 너무 신경 쓰지 마."
"야. 나보다 니가 더 신경쓰잖아."
"난 시선이 부담된다는 거지. 너같이 인생 전반을 남들한테 휘둘리진 않아."
"혜정아. 이건 휘둘리는 게 아니라... 야. 니가 진짜 몰라서 그래."
"뭘 또 내가 몰라."
"악플 이런 거 봐. 그 새끼들이 나한테 얼마나 뭐라고 하는데."
"그런 걸 봐?"
"내가 보려고 보냐! 인터넷에 기사 나오니까 보이지."
"그런 걸 왜 봐. 그리고 그런 말을 왜 신경 써. 기사 보면 좋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두려워하는 거라고. 욕 쳐 듣기 싫어서. 잘해도 지랄인데 실패하면 얼마나 뭐라고 하겠어... 얼마나 날 조롱하고 비웃겠냐고..."
세상은 그를 국민 영웅이라 할지라도, 이혜정에게 마하는 이웃집 조그마한 아이로 더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나 봐 봐."
"..."
"아 좀 봐 봐. 고집 그만 피우고. 무거워."
"왜...?"
입을 맞춰 준다.
키스를 해 주자 그의 화난 표정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괜찮아. 두려워해도 돼. 너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그래."
그래도 너는 이미 결과를 냈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올림픽 때같이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너는 실패하지 않는다.
"세계 신기록을 냈었어. 정상에 올라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잖아."
"..."
"메달도 있고, 연금도 계속 나오고."
"알았어..."
구마하는 연인의 품에 안긴다.
따뜻하게 다독이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혜정도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해 준다.
"은근 소심해."
"누가 소심해 나 안 소심해."
"덩치는 산만 해서..."
역시 혜정이가 좋다. 이 친구를 놓치고 싶지 않아.
누가 나를 다 이룬 인생이라고 하던가.
성공은 잊혀질 것이고 연인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 무엇도 완성된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