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96화 (296/401)

사랑. 사랑. 그리고 또... (1)

"혜정아. 나 이 바지에 이 옷 입으면 어울릴까?"

"외투 뭐 입을 건데?"

"그냥 나 입고 다니는 잠바."

"음. 그거 말고 코트 입고 청바지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신발은?"

"아무거나 신어. 먼저 산 워커 신든가."

"역시. 무난하게 가는 게 맞구나."

"누구 만나러 가는데? 일?"

"아니. 학교 사람들."

"넌 학교도 안 다녔다는 애가 왜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많아?"

"어어. 내가 1학년 때 사고를 친 게 있어서."

"사고??"

"하하! 나쁜 게 아니라, 그냥 학교 문화가 미쳐 있길래 그러지 말자고 한 게 있었거든. 선배들도 니가 바꾼 기풍 니가 책임지라고 그래 가지고. 복학생 선배들도 도와 달라고 하시고. 미리미리 사람들 만나서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거야."

"바뻐. 스케줄도 많은 양반이. 그러다 너 총학생회도 하는 거 아냐?"

"야.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하지 마라... 내가 무슨 깜냥이라고 남들 앞에 나서냐..."

결혼은 싫어!! 칠색 팔색 했지만, 그래도 우리 사이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결혼... 순간의 감정에 취해 나온 말인 건 맞다.

이제 와선 그것도 내 욕심이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라는 게... 되도록 싫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마하야 잠깐만. 잠깐만 있어 봐."

"음? 왜?"

"이거. 향수 살짝만 뿌리자."

"에이 됐어. 남자가 뭔 향수야."

"가만있어 봐. 유명한 사람이 좋은 냄새를 풍기고 다녀야지."

그냥 내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 나이에 결혼이라니. 평범하게 봐도 이상한 건 맞으니까.

"어 좋다."

"그치? 향 괜찮지?"

"너 겨드랑이에서 나는 냄새가 내 몸에서 나네."

"야아!!"

"하하하. 갔다 올게."

시간이 흘러 학교는 개강을 맞이하고. 거리엔 신선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나는 학생이자 사회인으로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민구 형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형은 정식으로 한구 스포츠의 양민구 실장이 되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이유이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 날씨는 좋았고, 원래도 친한 형이 옆에 있어 그런가, 일 가는 게 그냥 나들이 가는 기분이었다.

"마하야. 성함이 이유이 디자이너라고 했지?"

"네. 앞으로 해도 이유이 뒤로해도 이유이. 그래서 메이커도 ㅇㅇㅇ 세 개."

"하하! 유명한 분이신 거지?"

"한국에선 최고라고 하더라고요."

"흠. 난 명품도 잘 몰라서..."

"감독님이 그러는데 그 세대에서 돈 있는 집 애들은 다 여기 옷 입고 다녔다고 했었어요."

"아. 떨리네. 첫 업문데 실수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잘 하실 거예요."

모든 게 처음인 회사라, 민구 형도 전임자 없이 스스로 매니지먼트를 시작해야 하는 단계였다.

그래도 서로서로 돕고 으쌰으쌰하다 보면 잘 될 거라 생각한다.

"와 진심. 형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혼자 운전하고 다니면 피곤하지."

"피곤한 걸 떠나서 뭔가 그냥 지치는 게 있었거든요. 심심하고 말할 상대도 없고. 특히나 작년엔 감독님도 안 계셨으니까."

"좋아. 그러자고 온 거니까. 앞으로 편하게 부려 먹어."

"무슨 소리세요. 부려 먹다뇨. 형 우리는 동료예요."

"후후후. 듣기는 좋다."

이제는 선후배를 넘어 직장 동료가 된 사이.

민구 형의 은은한 미소에 친밀감이 확 오르는 기분이다.

"아 참 그리고. 주말에 전화 받아 줘서 고맙다. 인간들이 말을 해도 믿지를 않아서."

"에이. 뭐 그 정도 가지고요."

"야. 내 사촌 동생이 뭐라는지 아냐? 오빠 혼자 아는 척하는 거 아냐? 이 지랄. 싸가지 없는 것이."

"하하하! 누가요? 누가 우리 선배님을 무시해!! 형네 집안 행사 있을 때 꼭 불러 주세요. 같이 가요."

"친척들 앞에 너 데리고 나타나면. 이야~ 생각만 해도 설렌다."

"취직한 거 집에선 뭐라고 하세요? 그래도 선생님 하는 게 낫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 부모님 그런 거 크게 관심 없으셔서. 원래부터 전공 살릴 생각 말고 돈 벌 직업 택하라고 하시던 분이라."

"열린 사고를 갖고 계시는구나. 애들 얘기 들어 보면 어른들 그러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청담동에 도착했다.

민구 형이 긴 숨을 내쉬며 긴장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어우. 시작부터 이런 공간을..."

"들어가요."

"후우. 그래. 이렇게 내 매니저 인생이 시작되는구나."

오랜만에 이유이 선생님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선생님은 여전히 화려한 인상을 보여 주신다.

"어서 와. 조금 지났지만 우승 축하하고."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잘 지내셨죠."

"나야 뭐. 그나저나 이제는 얼굴 보고 살 수 있는 거니?"

"하하! 그럼요. 자주 불러 주세요. 백수예요 저."

"너도 참. 근데 이쪽은 누구?"

"아. 이번부터 같이 일하게 된 형님이요."

"안녕하십니까. 양민구 실장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매니저셨구나. 여기도 운동했죠?"

"네? 어. 네."

"저희 대학 선배님이세요."

"역시 운동한 사람들은 태가 달라. 모델 애들은 이런 몸이 될 수가 없거든. 얼마나 자연스럽고 멋져."

"하하... 고맙습니다."

"우리 직원이랑도 인사해요. 서로들 자주 연락할 거 같으니까."

원래도 잘나가던 패션 브랜드 이유이지만, 지금은 젊은 20대의 사랑을 받고 있단다.

해외에서도 많이 찾고 다음 달엔 파리에 매장도 연다고 들었다.

"우와 선생님."

"뭘 놀라고 그러니. 다 니 덕분인데."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마하가 쇼에 선 뒤로 어린 손님들이 많이 늘었어. 동계 올림픽 끝나곤 유럽에서 인지도도 넓혀 줬고. 고맙다."

"아... 다행이네요..."

"하하! 뭘 쑥스러워하고 그러니? 내가 없는 말 지어내는 것도 아닌데."

"아니 그래도... 사람들 있는 데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잘한 건 잘한 거야. 받아들여. 당당하게."

선생님은 올가을 파리 매장 론칭과 함께 쇼를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 무대에 서 달라는 요청을 들었다.

"우와 파리요...?"

"왜? 떨려? 너 몇만 명 앞에서 시합하는 애 아니었어?"

"어휴. 그래도 제가 뭐라고 벌써부터 파리를..."

"하하하! 파리가 무슨 의민지는 알아?"

형은 욕심을 버리고 은혜를 갚는단 생각으로 살라 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게 쉽게 풀리질 않을 거 같다.

시작부터 파리라...

화려함으론 올림픽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무대가 아닌가.

"마하야. NICE랑은 어떻게 된 거야?"

"진짜 형. 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먼저 감독님이 회의하고 오신다고 들었는데."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당분간 계약 유지 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마하 옷 입을 때 스포티한 건 피해야겠네요?"

"네. 저쪽도 의류가 있어서요."

"정말요? 나 은퇴했는데. 그냥 데리고 간대요?"

"그럴 수밖에 없지. 니가 이뤄 낸 업적과 퍼포먼스는 현대 스포츠의 기적이야. 동·하계 금메달이라니. 그것도 2년이란 짧은 시간에."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말을 해요. 사람 민망하게..."

"그럴 거야. 마하야. MAHA라는 이미지는 이미 조던이나 우즈같이 대체 불가능 한 상징이 됐으니까. 저기도 봐 봐. 우리 직원 너 신발 신고 있잖아."

"하하..."

"맞습니다. 정확히 아시네요. 신발 판매도 순조롭고. 저쪽도 마하 이름 걸고 이것저것 더 다양한 거 준비하는 거 같더라고요."

"아쉽다. 우리도 너 입히려고 이것저것 많이 준비했는데... 그건 다 빼야겠네."

"다음에 꼭 입을게요."

* * *

"후우. 떨려라..."

"잘하셨어요."

"그래? 나 뭐 실수한 거 없지?"

"그럼요. 형 되게 멋있었어요."

"어우. 너도 그렇고 유명한 사람들만 있으니까 더 떨리네."

패션쇼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민구 형과 이것저것 일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럼 쇼가 두 번인 거지?"

"네. 한국에서 한 번 그리고 파리에서 한 번."

"모델도 나름 전문적인 체계가 있구나."

"저도 잘 몰라요. 먼저는 진짜 알바 개념으로 했던 거라."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진짜 너랑 있으니까 별일을 다 한다. 하하하!"

감독님이 왜 민구 형을 내 옆에 붙여 줬는지 알겠다.

그냥 아는 선배라서가 아니라, 이 사람은 넓은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

기댈 수 있는 사람. 가족과 친척이 많이 없는 나에게 민구 형은 애들이 말하던 친한 사촌 형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진짜?"

"네. 여자 친구 있어요."

"대표님은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

"감독님도 아는 애라서 일부러 말 안 했어요."

"그래? 누군데?"

"우리 동창요. 아시죠? 감독님이 원래 우리 학교 체육 선생님이셨던 거."

그런 형이니만큼 나는 혜정이의 존재를 거리낌 없이 알려 주었다.

매니저니까 알 건 알아야 하는 것도 있고. 연애에 관해서 나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와. 동거라고? 알려지면 진짜 스캔들이네..."

"그래서 조심하고 있어요. 형 그러지 말고 언제 한번 같이 집에서 밥 먹으면서 인사하세요. 애 착해요."

"너 1학년 때 포르쉐 탄다는 그분 말고 다른 사람이라는 거지?"

"그럼요."

그날 밤. 혜정이한테도 민구 형 얘기를 전해 주며 조만간 집에서 같이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를...? 왜...?"

"같이 일하는 분이니까. 현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동료잖아."

"아. 맞다. 매니저라고 하셨지. 그럼 집에도 왔다 갔다 하시겠네."

"그래서도 얼굴을 익혀 두면 좋지. 이미 같이 산다고 얘기했어."

"그런 거 얘기해도 돼...?"

"괜찮아. 뭐 어때. 대학생 동거 우리만 하나. 이 형도 자취생이야."

"흠. 일 얘기는 어떻게 됐어?"

"패션쇼 하재."

"진짜? 우와."

"한국에서 한 번. 그리고 파리 가서 또 한 번. 두 번."

"그런 건 건당으로 계약하는 거야?"

"야. 건당이 뭐야. 무슨 용역도 아니고. 하하!"

"나야 잘 모르니까 그러지..."

"괜찮아. 나도 잘 몰라."

"파리라. 파리 멋있었는데."

"같이 가자."

"됐어. 어떻게 그래. 너도 일 때문에 가는 건데."

"가자. 뭐 어때."

"또 이런다. 너 은근히 니 말대로 안 하면 되게 징징대는 거 알아?"

좋아하니까 그러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서운한 기분이 가시질 않고 있다.

과대 해석 하고 싶진 않지만, 나를 좋아는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뜻인가 불안하고, 내가 결혼할 정도의 남자는 아니라는 뜻인가 걱정도 들고.

"여기였구나. 동그라미 세 개. 옷 예뻐서 외국 건 줄 알았는데 국산이었네."

"여자 옷도 있어. 언제 가 볼래?"

"비싸지 않나?"

"비싸긴 한데. 난 좀 DC해 줄 걸?"

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의 마음을 내 곁에 꽁꽁 묶어 놓을 수 있을까. 옆에 있는데도 괜시리 불안해진다.

"혜정아. 이리로 와 봐."

"옷 구경 하다가 어디 가?"

둘이 컴퓨터 앞에 앉아 쇼핑몰 구경하다, 갑자기 급! 여러 가지 이미지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이거 한번 입어 봐."

"지금...?"

"어. 빨리."

"그냥 이 옷만 입어 보면 돼?"

"아니지. 컨셉이라는 게 있으니까. 바지는 벗어야지 브라도 벗고."

"후우... 넌 진짜..."

흰 남방을 건네며 여러 가지를 요구했다.

알몸에 흰 셔츠는 남자의 로망이 아니던가.

맥락 없이 부탁하는 요청에도 혜정이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지만, 막 그렇게 대놓고 싫다거나 안 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흔쾌히 장난스레 바지를 내리고 웃옷을 벗어 남방을 걸쳐 준다.

"오오~!!"

"크다. 팔이 이렇게 남아. 꼭 어릴 때 아빠 옷 입은 거 같네."

"그게 좋은 거지!"

"취향. 진짜 이해 안 간다니까..."

"하늘하늘 야들야들. 크으~! 이래서 흰 남방 흰 남방 하는구나.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하는 거야."

"어~어!? 야 뭐 해? 아 침대는 또 왜 가!!"

이런 애가. 이렇게 다 받아 주는 애가. 결혼은 그렇게 반대를 한다고...?

"잠깐만. 왜 이렇게 서둘러."

"그냥 흥분돼서."

"차암... 가만있어 봐."

결혼하고 싶다. 진짜 가정을 이루고 싶다.

이렇게 둘이 있는 것도 좋지만 역시 확실한 무언가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너무 커.

잠깐 티격태격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나눴고, 혜정이는 큼지막한 흰 남방 하나만 걸친 모습으로 너무나 매력적인 표정을 보여 주었다.

절정에 달아오르고 있었다.

오늘도 한 번에 안 끝날 사랑의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혜정이가 빨갛게 달아오른 몸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하아 아아~ 으응. 저기. 잠깐만."

"응? 왜?"

"저기... 나도 부탁 하나만 하면 안 돼?"

"뭐?"

"아니. 그니까... 나도 이런 옷 입으니까 한 가지 해 보고 싶었던 게 생각나서..."

"그니까 뭐?"

"다... 단추..."

"단추?"

"어. 단추가... 이렇게 확 하고... 옷 벌리는 거."

"하하! 안 될 게 뭐 있어. 해 달라면 다 해 줘야지!!"

부욱~!!

"야아!? 아 이게 뭐야. 옷 찢어졌잖아. 어떻게 이거..."

"뭐 어때. 내 껀데."

형. 역시 안 되겠어.

세상 모든 욕심 버리고 감사하게 여기고 살아도, 얘는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보면서 어떻게 욕심을 안 낼 수가 있어.

그래. 더 사랑해 주자.

그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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