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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297화 (297/401)

사랑. 사랑. 그리고 또... (2)

이유이 선생님 스튜디오. 패션쇼에서 입을 옷을 맞추는 작업 중이었다.

"마하야 팔 뻗어 봐. 불편하니?"

"괜찮습니다. 근데요 선생님. 저 궁금한게 있는데요."

"정지. 움직이면 안 된다. 얘기하는 건 괜찮아."

"보통 모델들은 몸이 가늘잖아요. 근데 저는 근육도 있고 어깨도 넓은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요?"

"이번에 돌체 앤 가바나에서 이탈리아 축구 대표 팀을 모델로 시즌을 준비했어. 봤니?"

"아니요."

"얘. 저기 잡지 좀 줘 볼래."

선생님이 근처에 놓인 패션 잡지를 후루룩 넘겨 사진 하나를 보여 주셨다.

지난 월드컵 우승 팀 아주리 군단이 땀 냄새 진하게 풍기는 듯한 라커 룸에서, 팬티 한 장 걸치고 무섭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이었다.

"어때. 이상하니?"

"아니요. 뭔가 포스가 느껴져요."

"그치? 패션에서 남성성은 없어서 못 쓰는 아이템이야."

"아. 그래요?"

"그럼. 근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아니 그냥... 아까 저기 앞에서 인사한 모델 생각하는데. 멋있어서."

"후후 겸손하긴. 그 친구는 지금 너 봤다고 주변에 자랑하고 있을걸?"

다른 이들의 시선같이 내가 진짜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남이 아닌 나. 일상이 아닌 사랑 앞에서의 구마하였다.

"됐어. 마하야. 이쪽으로 돌아볼래?"

"네."

경기라면 자신감이 있다. 그만한 노력과 연습을 하니까.

하지만 사랑은 연습이 없잖아. 사랑에 훈련이 어딨어? 사랑의 실패는 이별이다.

아 진짜 스포츠의 강인함 같은, 사랑에서 흔들리지 않는 완전무결한 파워를 가지고 싶다.

"됐다. 끝. 이제 남은 건 리허설 때 준비하고. 마하도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아우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임 실장님도 기다리느라 지루했죠?"

"아니요. 재밌었어요. 옷 만들어지는 과정이 생각보다 복잡하네요."

보기엔 단순해 보이는 정장 한 벌도 뜯어보면 수많은 바느질과 패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사랑은 어떻겠냐고.

내가 너무 황당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대체 뭘 걱정하는 거지? 혜정이라 그러나? 다른 사람들 사귈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실장님. 마하도 잘 가."

"네. 선생님."

"그리고 너. 여자 친구 있으면 데리고 와."

"네?"

"모를 거 같니? 놀러 와. 이번엔 누구 만나나 궁금하다."

"하하... 가 보겠습니다."

후우 그래. 마음을 비워.

나는 지금 주어진 역할만 수행하기에도 벅찬 상황이라고.

무엇보다 당장 혜정이가 날 싫어하는 것도 아니잖아.

걔 나 좋아해. 서로 좋아하는 애라고.

왜 미리 쫄아서 지랄이야 병신도 아니고.

* * *

"형. 오늘은 더 없죠?"

"어. 끝났어. 내일 사진 광고 마지막으로 당분간 스케줄 없다."

"어후. 아 간만에 빡셌다..."

"근데 진짜 정신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바쁘게 돌아갈 줄은"

"아차! 나 수업!!"

"깜짝이야. 너 오늘 수업 있었어?"

"아 씨... 미치겠네..."

"말을 하지 자식아."

"금요일 오후에 하나 있거든요. 보자 지금 시간이... 에이. 이미 가도 늦어요."

일도 일이지만, 학교까지 겹치는 날은 정말 눈뜨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하루가 그냥 사라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이제는 선수가 아니라 수업에 빠진다고 봐주거나 하는 것도 없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3학기 연속 휴학을 하지 말고 그냥 수강 신청하고 D라도 받을걸. 그랬음 학점이라도 모았을 건데...

"아 그냥 자퇴할까...?"

"뭔 소리야. 학교 얼마나 다녔다고."

"공부는 진짜 아닌 거 같으니까 그러죠... 솔직히 제가 취직을 할 것도 아니고 임용을 볼 것도 아닌데. 거기다 등록금은 또 좀 비쌉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니까. 출석 체크만 하고 과제 내라는 것만 내면 돼. 공부 쉬워."

"형. 저요... 운동은 몰라도, 머리는 진짜 아니에요."

"하하! 야. 운동하는 새끼들 다 그렇지."

"나이만 3학년이지. 아는 건 하나도 없고... 가끔은 선배라고 인사받는 것도 쪽팔린 기분이에요."

"마하야. 다 어려워. 다 그래. 그래도 그냥 참고 배우는 거야. 그러다 보면 알아. 아 공부도 할 만하구나. 사람들이 괜히 공부가 제일 쉽다고 하는 게 아니구나."

"...그럴까요? 저도 하면 될까요?"

"물론이지. 지금은 그냥 환경이 변해서 그러는 거야. 너만 그런 게 아니라 애들 다 그래. 고등학교까지 선수 하다 온 애들. 실업 팀 못 갈 거 같아 뒤늦게 임용 준비하는 애들. 다 어려워 해. 말을 안 할 뿐이지."

공부가 어려운 것도 있지만, 한편으론 자꾸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게, 그만큼 혜정이와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그런 건 아닐까 싶다.

내려놓을 수 있는 짐들은 조금 내려놓고 싶어진다.

"과제 어려운 거 있으면 그냥 형한테 물어봐. 내가 이래도 수업 알차게 들었던 놈이야. 교수님들이 나 엄청 이뻐했었어. 체대생 아닌 거 같다는 말도 들었고."

"하하! 형 내일 끝나면 저녁에 시간 어떠세요?"

"내일 저녁? 없지. 왜? 공부하자고?"

"아니요. 우리 집에서 식사 어떠시냐고요. 제 여자 친구랑 같이."

"좋지."

* * *

"여기구나. 아파트 좋다. 산 거야?"

"전세요."

"오~ 오. 좋다."

다음 날. 일 마치고 민구 형을 집으로 초대했다.

"여자 친구가 몇 살이라고?"

"동갑요.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에이 어떻게 그래. 초면인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형이 기본적인 호구 조사를 물어본다.

"대학생이셔?"

"네. 동국대 다녀요."

"가깝고 좋네. 설마 불교는 아니지?"

"하하! 우리 학교라고 다 기독굔가요."

"난 기독교 맞아... 교회 다녀..."

"아하하하! 형. 들어오세요."

다들 아는 애라 그렇지. 생각해 보니까 혜정이를 주변 사람들한테 처음으로 소개하는 자리였다.

현관문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퍼져 나왔다.

"와... 뭐야? 요리도 하셔?"

"그러게요. 뭐 했나? 혜정아. 우리 왔어."

"어! 잠깐만."

봤을 때. 뭔가 실력을 발휘했다기보다는, 형이 보내 준 음식들 조리한 게 전부지만.

그래도 미리 손님 올 걸 생각해 준비를 해 줬다는 게 너무 고마웠다.

짧은 현관 복도를 지나쳐 어색하게 집구경을 하고 있는 민구 형과 내 앞으로 깔끔하게 앞치마를 맨 혜정이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

"제 여자 친구요."

"어... 아... 네. 우와..."

"형 왜 그래요?"

"와... 이야 마하... 너 이 새끼..."

민구 형은 늘 편안한 인상으로 주변을 아우르는 사람이었다.

처음이다. 이 형이 이렇게 긴장한 얼굴로 변하는 것은.

"여... 연예인이셔...?"

"하하하! 아 형. 왜 그래요."

"하하... 고, 고맙습니다. 식사 아직 안 하셨죠...?"

"네. 우와... 이야..."

마치 신혼부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직장 동료를 불러 대접하는 느낌이랄까?

실제로도 민구 형은 대학 선배님이기도 하여, 혜정이도 굉장히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학교 선배님이라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지금은 신세가 뒤바뀌었죠."

"형. 에이 제가 형 얼마나 존경하는데."

"하하! 먹자. 우와. 맛있겠다."

"오해하지 마시고요. 제가 한 게 아니고. 마하네 오빠가 보내 주시는 요리들이 있거든요."

"무슨 말씀이세요. 재료가 아무리 뛰어나도 주방장이 손재주가 없으면 맛이 안 나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오 맛있다. 제대로 요리했네.

"역시. 역시!"

"역시 뭐요?"

"맛있어요. 마하야 혜정 씨가 솜씨가 있으시네."

"그래요? 흠. 난 뭔가 야채가 너무 익은 거 같은데."

"야...?"

"이 자식이! 운동했다는 놈이 반찬 투정을 하고 있어! 먹지 마!!"

사석에서 민구 형은 어떤 사람일까 늘 궁금했는데.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구나.

적당히 오버하고 적당히 위트가 있는. 그러면서도 웃음이 넘치는 꽤 좋은 분위기에서 즐거운 시간이 지나갔다.

형도 처음이나 어색하고 긴장했지, 금방 편안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야기도 들어 주고 재미난 에피소드도 풀어 주고 그랬다.

"옛날에는 동국대가 우리 학교보다 더 좋은 학교였다고 들었어요."

"아 정말요?"

"진짜요? 우리는 윤동주가 있는데?"

"저쪽은 한용운이 있잖아."

"오오~ 누구지?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민족 대표 만해 한용운. 학교에 동상 있는 거 봤어요."

"맞습니다. 쓰읍. 마하야. 넌 인마 공인이란 자식이 이런 것도 모르고..."

"하하하...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 머리 안 좋다고."

"혜정 씨 영문과셨구나. 난 동국대라길래 당연히 연극 영화 쪽인 줄 알았죠."

"그런 오해를 많이 받죠. 얘가."

"뭘 많이 받아. 안 그래..."

* * *

"첫사랑이라고?"

"네."

"허허... 거기다 소꿉친구라고?"

"음. 엄밀히 소꿉친구는 아닌데..."

"초중고 같이 나왔으면 소꿉친구 아냐?"

"하하... 그렇다고 해 두죠 뭐."

"어떻게 또 그렇게 만났냐. 너도 대단하다."

"왜요?"

"그냥 낭만적이잖아."

"민구 형."

"응?"

"어때요 혜정이?"

"뭘 어때. 야 세상에 저런 여자 친구가 어딨어 새끼야."

"하하하..."

"좋겠다. 진심으로. 난 너 메달 따고 세상 인정받는 것보다 지금이 더 부럽다."

정말로 그랬다.

운동은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만, 사랑은 나 아닌 타인의 마음을 얻는 거니까.

진짜 뿌듯한 기분이었다.

"오늘 와 주셔서 고마워요."

"고맙긴. 밥 잘 먹은 내가 고맙지. 걱정 말고. 대표님한테는 모르는 척해 줄 테니까."

"네. 들어가세요."

"쉬어라. 야 근데 진짜 저녁 맛있었다."

민구 형을 바래다주고 들어왔는데, 혜정이도 밝은 미소로 잘 가셨냐 물어본다.

봤을 때 여러모로 서로들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아 개인적으론 아주 만족스러운 자리였다.

"좋은 선배님이네. 은근 유머스럽고."

"실제로 후배들이 젤 좋아하는 선배 중 한 분이야."

"체육과 선배님이라길래 되게 딱딱할 줄 알았는데."

"에이. 우리 학교는 그런 거 없어."

"너라서 없는 거 아니야?"

"하하! 모르지. 아무튼, 민구 형은 그런 사람 아니야."

둘만 있던 공간에 처음으로 손님이 다녀가니 대화도 다채로워진다.

"그리고 넌 평상시 주는 대로 잘 먹는 애가 아까는 갑자기 왜 그래?"

"하하! 아니. 진짜로 평상시랑 뭔가 맛이 달랐다니까."

"미식가 납셨네... 너 은근 막내티 엄청 내는 거 있어."

"뭐래. 자기는 외동티 팍팍 내면서."

"외동은 독립적인 사람들이라고! 무시하지 마!"

티격태격 둘이 설거지를 하고, 샤워도 끝내고.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갑자기 왜 손님을 불렀어?"

"갑자기가 아니라. 말했잖아. 매니저 역할을 하는 형이라 알 건 알아야 했다고."

"...나 보여 주고 싶었어?"

"..."

"내가 너무 숨는 거 같아서 싫었어?"

여자의 촉이란 진짜...

뭐가 있나? 어떻게 이런 걸 다 아는 거지?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믿을 만한 분인 거 같긴 하더라. 자주 오시라고 그래. 어차피 일 많을 땐 왔다 갔다 하셔야 할 거 아냐."

"정말 그래도 돼?"

"당연하지. 엄밀히 여기는 너가 주인인 집이고. 난 빌붙어 사는 존잰데 내가 되고 안 되고 말할 자격이 어딨어."

"또 뭘 빌붙어...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런 말 한 적 있냐?"

"아까 요리로 흠잡았잖아."

"아니. 그건 진짜로 야채가 너무 푹 익은 것 같았다니까..."

"후후후. 니가 요리를 알아?"

"알지. 그럼. 고기 야채 볶음은 고기는 부드럽게, 야채는 씹히는 맛이 있게 조리하는 게 관건이라고. 정석이한테 물어봐. 내 말이 맞다고 하지."

"마하야..."

"아이 그냥 장난이지. 아무렴 내가 진짜로 그런 걸 따질까..."

"애들도 오라고 해."

은은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을 타고 들어온다.

"어...?"

"애들. 친구들. 정석이랑 다들 부르고 싶잖아. 나도 선아 오라고 하면 되니까 같이 오라고 해."

"..."

이런 소소한 것들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어 주는 그녀의 배려와 이해심이 나를 감동시킨다.

"혜정아..."

"선아도 매번 놀러 오고 싶다고 하는데 안 된다고 했거든. 이번에 같이 보지 뭐."

"우리 내일 쇼핑 갈래?"

"갑자기 쇼핑?"

"일요일이잖아. 오랜만에 일도 없고. 너도 따로 약속 잡은 거 없지?"

"지금은 없어."

그래서 뭐라도 더 해 주고 싶어진다.

이 사람을 기쁘게 만들고 싶다.

늘 웃음 짓는 표정이 머물게 하고 싶다.

그것을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가자. 생각해 보면 내가 너한테 뭐 선물해 준 게 없어."

"됐어. 다 있는데 뭐."

"에이 뭐가 돼. 안 그래도 맨날 이상한 것만 입고 다니는 거 마음 쓰였는데. 가자. 어? 가서 우리"

"야. 잠깐만. 내가 이상한 것만 입는다고?"

"..."

"뭐? 내 옷 뭐가 이상한데?"

아차... 그렇게 다정하던 애 목소리가 앙칼지게 변했다.

"아니. 이상한 건 아니고..."

"구제라고 하는 거거든! 패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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