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98화 (298/401)

사랑. 사랑. 그리고 또... (3)

"구제랑 빈티지가 다른 거야?"

"이것 봐 아무것도 모르면서... 완전 다르거든!!"

"그럼 복고는 뭔데?"

"복고는 레트로."

무슨 차이가 있나? 복고가 영어로 빈티지 아니야? 패션에선 기준이 다른 건가?

아무튼 오늘은 기념적인 날. 마침내 혜정이랑 둘이 야외 데이트를 가고 있었다.

"가끔 보면 지 몸 좋다고 은근 사람들 무시하는 거 있어..."

"으하하!! 야? 내가 언제 누구를 무시했다고 그러냐!? 아니 왜 없는 소리를 지어내냐고."

"내가 이상한 것만 입는다며!"

"그게 왜 너를 무시하는 말이야!"

"사람마다 추구하는 스타일이 다른 거지..."

"그러니까 나는 모든 옷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한두 벌. 유독 왜 저런 걸 입고 다니지? 싶은 게 있다 이거지."

"그러니까 뭐? 뭐가 그렇게 이상했었는데?"

"나팔바지 같은 거."

"부츠 컷이 왜? 그게 얼마나 이쁜데???"

"혜정아. 솔직히 너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발끈하는 거 아냐?"

"아닌데. 나 오늘도 그 바지 입으려다가 다른 거 입고 나왔는데."

시끌시끌. 그래 연인이라면 이런 텐션이 있어야지. 정말 즐거운 데이트 아니냐고. 일요일 오후. 강남으로 향하는 길은 미친 듯이 답답하고 여자 친구는 도통 알 수 없는 자존심을 부리니, 사람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하하하!

후우. 참자. 참는 거다. 인내하면 구마하. 구마하면 인내.

천 년 전 출생한 진정한 레트로 복고 빈티지인 내가 웃어넘겨야지...

"..."

"아 왜? 그 정도 쏟아 냈으면 좀 풀어라."

"뭘 쏟아 내 내가 또..."

"알았어. 미안해."

"그 바지 엄마가 입던 거란 말이야..."

"하하하하~!"

"왜 웃어?"

"야 그럼 이상한 게 맞네. 아줌마가 입던 옷이 어떻게 지금 어울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운전 중이라 정면을 보고 있는데, 혜정이가 쳐다보는 시선이 남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다.

"허어... 후우..."

"왜 한숨을 쉬어. 이것도 내가 실수한 건가...?"

"아니야. 됐어..."

모르겠다. 됐다고 했으니까 된 거야. 뱃속 편하게 흘려들어야지. 따지면 2라운드가 시작된다고.

패션의 패자도 모르면 어때? 복고와 빈티지의 차이점 모르면 어떠냐고.

스타킹이 살스와 검스 흰스가 다르다는 건 알잖아.

너무 투명하면 별로고 50데니아 이상이 보기에도 만지기에도 딱 좋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럼 됐지 뭐.

"일요일에 다들 어딜 이렇게 나와. 길은 왜 이렇게 막혀..."

"그러게. 역시 차 놓고 나올 걸 그랬나."

"..."

"왜? 아직도 나랑 다니는 게 싫어?"

"됐어. 그런 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럼 인상 좀 펴자. 그래도 데이튼데."

"그냥... 옷 사러 어디까지 가는 건가 싶을 뿐이야..."

목소리에 짜증이 많이 사라진 게 느껴진다. 잘은 몰라도 속에서 나름대로 정리가 된 거겠지?

분위기 반전을 위해 지금까지 밝히지 않았던 행선지를 알려 주었다.

"청담동."

혜정이도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묻는다.

"거기 뭐가 있어...?"

"있지. 많지."

"뭐...?"

"백화점도 있고. 유명한 메이커 전부 다 매장으로 있고."

"백화점은 여기저기 많이 있잖아..."

"좀 달라. 그래도 청담동이 한국에 있는 메이커 본사들이라. 물건도 많고 볼 게 많어."

이런 건 수빈이의 영향이 있었다.

촌티 풀풀 나던 몸만 커다란 놈을 그녀가 때 빼고 광내며 꾸며 주던 시절이 아니었다면 나도 어디 가서 멋지단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패션은 자본과 직결된다. 스타킹 데니아의 차이점을 떠나, 나도 그 정도는 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은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청담과 압구정이었다.

"그래. 맞다. 거기 가면 구제 이런 거 파는 가게도 되게 많어."

"마하야. 우리 그러지 말고. 여기 건대 근천데. 그리로 가자."

"에이 싫어. 건대 뭐 있는데? 술집이나 있지."

"니 말대로 옷 가게 유명한 거 다 있어."

"싫어. 인간만 많고. 너 나랑 있을 때 사람들 쳐다보는 거 싫어하잖아."

"아니... 그건 그런데..."

"여기가 나아. 동네 조용하고. 사람들 아는 척 잘 안 하고. 있다 보면 편해."

환경과 사람.

나는 그녀와 내가 그렇게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까운 사이로 발전한 건 알고 지낸 시간 대비 정말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매일 밤 같이 침대에 누워 잠이 들며.

같은 아파트에서 같은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고.

같은 급식을 먹으며 성장했고. 같은 교과서를 보고 같은 교복을 입고 졸업을 했기 때문이다.

"진짜로? 뭘... 사려고 왔다고...?"

"그냥 이쁜 것들. 너 잘 어울리는 거로."

"야..."

"왜?"

"다 명품이잖아..."

"그런데?"

"비싼 걸 왜 사..."

"에이 뭐가 비싸. 물론 가격이 있긴 한데. 괜찮아. 내가 이번에 찍은 광고만 몇 갠데."

"아니 그런 걸 입고 어딜 가라고."

"학교 가고 친구들 만나. 명품이라고 다 드레스 같은 것만 있는 게 아니야. 일상복도 많어."

"...싫은데"

"아 좀. 우리 첫 데이튼데. 입어 봐. 잘 어울릴 거 같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알고 보면 정말 다른 게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남자와 여자였고. 나는 운동 선순데, 얘는 평범한 학부생이다.

나는 부모님 없이 성장했고, 혜정이는 따뜻한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랐다.

알고 보면 우리는 취향도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편안하게 맥주를 즐기지만, 얘는 술에 쥐약이었고.

나는 무조건 식탁에 고기반찬이 있어야 하지만, 혜정인 과일이나 야채 같은 걸 즐기지 단백질이 없어도 밥투정을 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소득에 있어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내가 하루 광고 찍고 1억이 넘는 돈을 받을 때. 혜정인 한 달 주 4회 아르바이트에 120만 원. 휴일이나 명절 일당이 붙으면 150을 받았다.

"다 왔다."

"길 너무 좁은 거 아냐? 차 못 대겠는데?"

"괜찮아. 직원분 있어서 발렛 맡기면 돼."

"..."

"하하. 너 지금 주차할 데 없으니까 나가자고 하려고 했지?"

"아니야..."

"가 보자. 사람들 친절해."

아무튼, 나는 혜정이가 느끼는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옷에 대한 반발 내지 투정이라고만 봤을 뿐.

따지고 보면 나도 얘한테 불만이 없는 게 아니었다.

사랑과 별개로 사람이 어떻게 모든 게 다 좋을 수 있겠는가.

다정한 성격, 아름다운 외모, 황홀한 잠자리.

모든 게 완벽한 그녀에게 불만인 건, 바로 옷 입는 스타일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서오세요. 구마하 선수."

"안녕하세요."

이유이 선생님네 가게였다.

최근 일 관련 자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직원분들이 한구 스포츠 사람들같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오늘 선생님 안 계세요?"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이세요. 연락 드려 볼까요?"

"아. 그럼 제가 전화해 볼게요."

"야... 바쁘시다는데 왜 불러..."

"여자 친구 데리고 오면 꼭 말하라고 하셨거든."

"됐어... 그냥 보고 나가자."

"에이. 안 돼. 그냥 갔다가 나중에 더 뭐라고 그래. 너는 왔다가 얼굴도 안 보여 주고 갔냐느니 뭐라느니. 그쵸?"

"하하! 맞습니다."

연락은 직원분이 대신 해 주기로 하셨고. 나는 혜정이와 둘이 매장을 둘러보았다.

"넓다..."

"1, 2층이 여자. 3, 4층이 남자야. 지하도 있어."

"으음..."

"구찌나 샤넬같이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메이커는 아니지만, 그래도 난 여기 옷이 절대 외국 메이커에 빠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어. 실제로 곧 파리에 매장도 열 거고."

"음. 그렇구나."

개인적으로 여자들이 여성스러운 옷을 입는 걸 좋아한다.

아무리 겨울이라 하더라도 꾸밀 사람들은 꾸민다.

직업이 운동 선수인 다빈이도 사복에선 최대한 자신의 귀여움이나 여성성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고.

성격은 문제가 있었으나, 스타일은 최강이었던 한수빈은 말할 것도 없어.

하지만, 얘는 이상하게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꾸밀 마음이 사라지는 것 같다.

바빴던 건 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자기 미래도 준비해야 하고 알바도 나가야 했으니까.

그렇지만, 옷 입는 거 뭐 얼마나 바쁘다고. 어차피 사람이 밖에 나가려면 입어야 할 거 아냐. 한 번 입을 거 제대로 입고 다니면 좋잖아.

예쁜 사람이니까.

화장 꾸준히 하는 만큼 옷도 조금만 신경 쓰면 되는 걸 왜...

"혜정아. 이런 건 어때?"

"음. 별로."

"너 치마 잘 어울리잖아."

"나 치마 잘 안 입는데."

"흠. 이쁜데."

내가 아는 그녀의 가장 여성스러운 옷이 집에서 입는 커다란 원피스라는 건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그나마, 그것도 옆에서 조르고 달래고 징징거리면서 입어 달라니까 입어 주는 거였다.

정말 불만이라고. 예쁜 사람이 자기 미모를 죽이고 산다는 건.

"구마하 선수?"

"네."

"선생님이 바로 오신다고, 절대 나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라고 하셨어요."

"하하. 알겠습니다."

"..."

"들었어? 오신다고 하네."

"어. 뭐. 그래..."

잠시 후. 이유이 선생님이 여유로운 발걸음 소리를 내며 찾아오셨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죄송해요. 일하고 계셨는데."

"아니야. 안 그래도 피곤해서 멍 때리고 있었는데 잘 왔어."

이유이 선생님은 혜정이한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셨다.

"어머. 반가워요. 엄청 예쁜 친구네."

"안녕하세요."

"배우 지망생?"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학생이에요."

"그렇구나. 둘이 어떻게 만났어?"

"저... 그냥 좀 둘러보면 안 될까요...?"

"어머! 미안. 내가 너무 주책맞게 물었죠. 보기엔 이래도 내가 아줌마라 그래요."

"선생님이 나 많이 아끼셔서 그래."

"저도 말씀 많이 들었어요. 평상시 신경 엄청 써 주신다고."

"마하는 멋있잖아. 나는 월드컵도 안 봤던 사람인데. 얘 알고 난 뒤로 우리나라 대표 팀 경기라면 꼭 챙겨 봐요."

"진짜요? 월드컵을 안 보셨어요?"

"그때 이혼 소송 중이었거든."

"하하하! 아 선생님. 장례식에서도 월드컵은 봤는데."

"시끄럽고. 여긴 어떤 스타일 좋아해? 내가 골라 줄까요? 우리 옷 수수하니 괜찮죠?"

이유이 선생님이 혜정이 팔짱을 끼고 매장을 둘러보신다.

"보니까 얌전한 스타일 좋아하는 거 같네. 맞죠?"

"네. 크게 튀는 옷 안 좋아해요."

"그렇구나. 그럼 정장 같은 건?"

"어..."

"자켓 같은 건 가끔 입죠? 이런 건 어떨까? 중요한 자리에 입고 가도 좋고. 친구들이랑 약속 같은 때 빠지지 않고."

"괘. 괜찮은 거 같아요."

"신발은? 운동화? 그럼 단화 같은 건? 로퍼."

베테랑은 베테랑이구나. 손님 상대하는 말빨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네.

들어와서 내내 어색해하던 혜정이도 선생님이 전담해서 붙으니 엄마 손에 붙들린 유치원생같이 변해 버렸다.

얌전하다. 추천하는 옷들을 거절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 긍정하는 모습이 조금 신경이 쓰이는데.

"야. 싫으면 싫다고 해. 뭐 다 좋다고 하고 있어."

"아니. 근데 진짜로 보여 주시는 옷들이 나쁘지 않어."

"나쁘지 않어? 우응. 내가 더 노력해야겠다."

"아! 아니요 아니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았으니까. 이쪽으로 와 볼래요."

이것저것 선생님이 옷들을 맞춰 주었다.

"이렇게 한번 입어 봐요."

"어..."

"괜찮으니까. 저기 손님 께 피팅 룸 좀 안내해 드려."

"네."

"그리고 마실 것도. 혜정 씨 뭐 마실래? 마하도 뭐?"

"네? 어... 전 괜찮아요."

"전 과일주스요."

"오렌지?"

"아니요. 포도나 망고 같은 거로. 단 게 땡겨서."

"후후후 까탈스럽기는. 준비해 드려."

"네 선생님."

혜정이가 이상하게 쳐다본다.

왜 그러냐고 묻는데 아니라면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뻔하지 뭐. 그냥 주는 거 먹지 뭘 추가로 말하냐고 속으로 투덜투덜거리고 있겠지.

"후후. 마하야. 너네 싸웠지."

"아니요. 어제부터 내가 구제와 빈티지의 차이점을 모른다고..."

"하하. 그럴 거 같더라니. 생긴 거랑 다르게 되게 조용한 앤가 보다."

"조용하죠. 생긴 게 저래서 그러지. 되게 착해요."

"어디 폐 끼치는 거 싫어하고. 그럴 거 같다. 한동 그룹 딸이랑 완전 다른데?"

"..."

"어머. 내가 또 실수했나?"

"허허. 허허허... 옷 많이 사 가라는 뜻이죠 지금?"

"하하하~ 준비도 안 된 망고 주스 사 오라고 한 벌이라고 생각해."

선생님이랑 둘이 이런저런 얘기 나누고 있는데, 혜정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럼. 리허설 전에 한 번 더 와 봐야겠네요."

"음. 현장에서 컨셉이 바뀔 수 있으니까. 그 전에 체크할 건 다 체크하고."

"민구 형한테 얘기해야겠다. 스케줄 생겼다고."

"저. 구마하 선수."

"네. 어? 왔어."

"응... 어때?"

그래. 이거지. 이거야.

이런 느낌. 이런 분위기. 내가 혜정이한테 바란 건 이런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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