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사랑. 그리고 또... (4)
의상 디자이너 이유이는 결혼과 이혼, 성공과 좌절. 명예와 치욕을 모두 맛본 단물 쓴물 다 빨아먹은 40대였다.
그녀가 통찰력 깊은 시선으로 두 풋풋한 청년을 보고 있다.
마하와 혜정이.
예쁜 아이다. 수수하면서 청순한 매력이 있어. 남자들이 좋아할 조건은 다 갖고 태어난 것 같네. 어린 애 부러워하지 말고 전생에 큰 덕을 쌓았다고 생각해야지.
그녀와 함께 온 마하도 그렇고, 선남선녀란 이런 친구들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좋을 때다.
"넌 리액션이 과해."
"뭘 과해. 진짜로 잘 어울리니까 하는 말이지."
"그래? 너무 어른스럽지 않아?"
"어른스럽다는 게 뭔데? 나이 들어 보인다고?"
"아니 직장인 같지 않냐고. 뭔가 대기업 같은 데 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입고 다니잖아."
"괜찮아. 예뻐 예뻐."
"흠. 이러고 있으니 엄마랑 같이 일해도 괜찮을 듯."
"그러게. 옆에서 이렇게 종이컵에 손님들 녹차 타 주고."
"아하하! 야. 그게 뭐야."
"왜? 가면 꼭 그러시잖아. 정수기 위에 녹차 아니면 둥글레차. 사탕 바구니 조그만 거 있고."
이렇게 보니까 마하도 그냥 20대 애들 같구나.
승부의 세계에서 보여 주던 강인한 모습이 오히려 편견이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이유이는 세간에 돌고 있는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그는 한때 알 사람들은 다 아는 한동 그룹 상속녀 염문설의 주인공이었다.
사교계에서 혀를 내두르던 한동 그룹 딸은 지금 영혼이 바뀐 듯 개과천선하여 유흥을 끊고 나쁜 친구들과의 관계도 정리한 뒤 유학길에 올랐다.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늦게나마 노력하는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떨어진 평판을 바꾸기 시작했고, 몇몇 집안에선 이대로만 간다면 혼사를 올려도 되겠다란 말이 공공연하게 흘러나왔다.
그래서 다들 궁금해하고 있었다.
대체 구마하는 뭔 짓을 했길래 아무도 말릴 수 없던 아이를 바꾼 것일까?
"난 율무차 마셔야지."
"아 좀 제발 1절만 해..."
"율무차는 담터지."
"야?"
"맞다. 너 그거 알아? 임신하면 율무차 마시면 안 된대."
"진짜? 왜?"
이유이는 두 사람을 보며 빙그레 웃는다.
먼저 일 때문에 만난 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은퇴요?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왜? 남들도 그래?)
(많이들 하죠. 근데 저는 메달보다 더 큰 걸 얻어서 진짜 아쉬운 게 하나도 없어요.)
이 아이구나.
하늘이 내린 능력을 갖고도 과감히 스포츠 세계를 떠날 수 있던 배경이 이해된다.
"다른 것도 입어 보자."
"또?"
"또라니. 이제 한 벌 입어 봤으면서."
"..."
"아까 저 옷도 괜찮을 거 같다고 했잖아."
"저... 선생님. 이거 갈아입어도 되나요?"
"그럼요. 얼마든지."
"모델 된 기분이네..."
헌데, 왜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느껴질까?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뭔가 거리감이 있는 듯한...
깜찍한 커플에게서 왜 이런 기류가 읽히지?
"여자 친구가 너 인형이니?"
"네? 뭐가요."
"아니야."
"에이 그냥 나온 김에 다 해 주려고 그러죠. 은근 나가자면 싫다고 하거든요."
"조용한 성격인가 보구나."
"착하다니까요. 어. 나왔다. 이야~ 이것도 잘 어울리네. 그쵸? 선생님."
"야. 좀..."
"하하하. 거울 가서 보자. 진짜 예뻐. 너도 봐 보라니까."
구마하와 함께 거울 앞으로 간 이혜정.
귀찮고 어색해하던 그녀도 거울 앞에 서자,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머리를 만지며, 밖으로 내세울 수 없는 내적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유이의 곁으로 직원이 다가와 자그마하게 말을 건넨다.
"옷들이 잘 어울리네요 선생님."
"스타일이 좋은 친구니까."
"디자인이 좋은 거죠."
"후후. 고맙다 얘."
구마하도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선생님. 다른 건요?"
"음?"
"다른 것도 추천해 주세요!"
그의 목소리에 이혜정이 깜짝 놀라 말했다.
"또 입어 보라고...?"
"어. 왜?"
"아니... 벌써 위아래로 두 벌을... 이걸 다 살 것도 아니고..."
"살 거야."
"어~ 어?"
구마하의 이야기에 이혜정이 그건 아니라는 듯 눈동자가 동그래지는 순간. 이유이가 먼저 다가가 이야기했다.
"혜정 씨 부모님은 뭐 하셔?"
"네? 아... 그냥 작은 사업하세요."
"공인 중개사요."
"정말로? 멋진 일 하신다."
"야. 그런 걸 남한테 왜 얘기해..."
"뭐 어때 사람 사는 이야기 하는 거지. 선생님 아시죠? 우리 형은 고깃집 하는 거."
"맞다. 나 거기 가 봤다?"
"진짜요? 언제요?"
"먼저 분당에 미팅 있을 때. 근데 사장님은 못 뵀어."
"하하! 카운터에 이상하게 생긴 놈 하나 있었죠."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가 오고 가는 가운데, 이혜정은 마지못해 직원의 안내를 받아 세 번째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 룸으로 향했다.
이유이가 구마하에게 물었다.
"동갑이니?"
"네. 솔직히 어떠세요?"
"예쁘다. 어머니도 엄청 미인이실 거 같네."
"아줌마 예쁘죠. 동네 사장님들한테 인기 좋아요."
"하하! 그런 얘길 뭐 하러 해."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러죠. 아저씨도 잘생기셨어요."
"그렇구나. 동네 친구였구나."
"첫사랑이에요. 저 쟤 8살 때부터 좋아했어요."
"얘. 그건 너무 이른 거 아니니?"
"사람 마음이란 게 다 그렇죠. 뭐."
마음이란 소리에 이유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쟁률이 어마어마했을 거 같네."
"정확하십니다. 원래는 말도 못 걸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네요."
"니가 대시했어?"
"그럼요. 몇 년 노력했어요."
"흠..."
"왜요?"
"으으음. 아니야."
그래. 이제 알겠다.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림 같은 두 사람을 보면서 뭐가 그렇게 위태롭게 느껴졌는지를...
이유이는 답을 찾았다. 더불어 그가 한수빈을 개과천선시킨 방법도 알았다.
이 녀석은 여자를 온몸을 바쳐 사랑해 준다.
"선생님?"
"음. 왜?"
"오늘 혜정이 입는 건 다 살 테니까요. 두벌만 더. 이왕이면 치마 입는 그런 스타일로 추천해 주시면 안 돼요? 쟤가 은근 바지만 입고 다녀서."
"야. 그러지 마. 옷 자꾸 입는 것도 피곤한 거다. 너."
"예쁘잖아요. 아니 진짜 자꾸 막 보세 이런 것만 입고 다니니까."
다만, 한 사람의 감정이 상대방에 비해서 너무 크다.
그래서 여자애가 받는 만큼 돌려주지를 못하고 있다.
저 아이도 마하를 좋아는 하겠지. 관계도 맺을 것이고. 좋은 순간을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하만큼 애정의 깊이를 만들지는 못했어.
사랑은 소통의 다른 말인데, 한쪽만 지속적으로 주는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버겁겠다. 착한 아이 같은데...
생각이 정리된 이유이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사자에게 물어보고 결정해."
그렇게 세 번째 옷을 갈아입은 이혜정에게 구마하가 제시한다.
또 입냐고 칠색 팔색 하는 연인을 보며 구마하는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이유이는 직원과 멀찌감치 떨어져 다투는 듯한 목소리를 피해 준다.
"아니. 옷을 무슨... 이렇게 한자리에서 왕창 사는 게 어딨어."
"알지. 알어. 그래도 시간 내서 여기까지 왔잖아. 어?"
직원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훔쳐보자 이유이가 말린다.
"얘. 누가 그렇게 손님을 보고 있니."
"아. 죄송합니다..."
"가만히 있어."
"음. 저 같으면 남자 친구가 다 사 준다면 좋아할 거 같은데."
보통은 그렇겠지.
받은 만큼의 마음을 돌려줄 수 있다면.
"모르는 척 가만히 있어. 그래야 우리 매출이 오를 거 아니니?"
"하하. 근데요 선생님. 구마하 선수가 저러고 매달리니까 뭔가 신기해서 자꾸 눈길이 가요."
"흠."
이유이도 슬쩍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보았다.
목소리를 낮추고 있어 뭐라는지 잘 모르지만, 그는 연인을 달랬고 당사자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떨궜다.
체념이구나. 아마 늘 저런 식이겠지.
한쪽이 고집을 부리고 다른 쪽은 그것을 선의라 생각해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옆에서 보기엔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 싶겠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면 보기보다 힘든 사랑이었다.
"사기로 했나 보네."
"구마하 선수 정도면 부담되는 금액도 아닐 건데 말이죠."
"그게 미안하겠지."
"네?"
"아니야. 그나저나 우리 애들 이번에 마하랑 다시 일하면서 몇몇 큰 그림을 그리던데 마음 접으라고 해 줘야겠다."
"제가 남자여도 저런 여자 친구 놔두고 한눈팔 거 같진 않아요."
정리가 된 듯한 두 사람이 다시 이유이에게 다가왔다.
"혜정 씨."
"네..."
"싫으면 싫다고 해."
"괜찮아요. 사 주고 싶다는데요 뭐..."
직언을 던진 이유이는 구마하를 향해서도 눈빛을 건넸다.
그는 말없이 손가락 하나만 펼쳐 옷 한 벌만 더 추천해 달란 뜻을 건넸다.
"너도 참..."
"하하. 선생님. 여기 화장실이 어디예요?"
"왜?"
"아까 음료수 두 잔. 얘 것까지 다 마셨더니 갑자기 신호가 와서."
"들었지? 안내해 드려."
"네. 구마하 선수 이쪽으로 오세요."
"그냥 말로 해 주세요. 애도 아니고. 화장실 가는데 뭘 안내까지."
"어떻게 그러니. VIP가 오셨는데."
구마하가 멀어지자 이혜정의 표정이 풀린다.
이유이가 그녀에게 편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좀 앉을래요."
"아니요. 그냥 빨리 골라 주세요."
"쉬어도 돼요. 그러자고 숍도 크게 운영하는 거니까."
"후우... 확실히 일반적인 옷 가게랑은 다르네요."
"이런 데 처음 왔어요?"
"...익숙하진 않죠."
"무겁지 않아요?"
"뭐가요?"
"사랑받는 거."
갑작기 정곡을 찔렸다는 듯 이혜정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린다.
"무슨 말씀이세요...?"
"괜찮아. 그런 동네니까. 혜정 씨 같은 친구들 많이 봤거든."
"..."
"남자들은 그걸 몰라. 자기가 해 주면 상대방은 다 좋아하는 줄 알아."
경계하던 이혜정의 얼굴이 속마음을 읽는 이유이를 향해 누그러진다.
"방금도 얘기했지만, 싫으면 싫다고 해야 돼."
"못 해요."
"왜?"
"제가 싫다고 하면... 쟤가 상처 입으니까요."
"그럼 본인은?"
이혜정이 긴 숨을 내쉬며 말한다.
"사랑받는 거잖아요. 제가 참는 게 낫죠..."
본인도 왜 이러는지 모르게. 혜정은 처음 보는 사람한테 속 얘기를 꺼내 놓고 있었다.
"아까도 차 타고 오면서 장난식으로 싸움이 있었어요."
"그랬다며. 마하도 레트로가 뭐냐고 묻던데."
"엄마가 입던 바지가 있는데, 이번에 명절 갔다가 예뻐서 가지고 왔거든요. 근데 쟤는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해요."
"으음..."
"왜 그런지는 뭐... 전 국민이 다들 알잖아요."
무심하게 전시된 소품을 들추며 연애의 고충을 털어놓는 이혜정.
이유이도 다가와 그녀의 몸에 액세서리를 걸어 주며 말한다.
"그럼 더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줄 알아야 돼. 혜정 씨."
"왜요?"
"마하가 바라는 건 연인이 아닌 가족이니까."
"..."
"용기를 내 봐. 그래야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선생님은 마하 편 아니세요?"
"그래서 하는 말이야."
정적이 지나간다. 이유이는 말없이 원피스를 골라 주며 말했다.
"간단한 게 좋겠죠?"
"..."
"내가 너무 선을 넘었나?"
"저 마하 좋아해요."
"후후. 다행이네."
"진짜예요.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에요.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혜정 씨."
"그냥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를 뿐이니까. 그런 말 마하한테도 하지 마세요."
"알았어 미안."
* * *
"아 좀 그러네..."
"뭐가?"
"480을 긁었는데 겨우 이거 스카프 하나 주냐..."
"하하... 그게 뭐야. 저분이 너한테 옷 좀 사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뭐. 그래. 아무튼, 마음에 들어?"
구마하는 연인을 향해 평가를 구한다.
이혜정은 그런 남자 친구의 표정을 보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늘 뭔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아해 주고 이렇게 비싼 선물을 해 주는 애가 왜 이렇게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됐는데, 오늘 답을 찾은 거 같다.
어쩐지,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부터 더 심해지는 그런 경향이 있었어.
"좋아."
"오케이! 그럼 다음은 저기 가 볼까? 프라다."
"마하야 우리 그냥 집에 가자."
"무슨 안 돼. 자고로 패션이란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이 어우러져야 하는 거라고."
"..."
"내 말이 아니라 잡지에서 그러더라고. 나 얼마 전에 머리하러 갔다 왔잖아."
"하하하. 아직도 그런 걸 봐?"
"그럼. 공부 많이 돼."
과연 이 마음을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정체를 알고 나니 더 못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여기 가자. 너도 좋아하지? 악마는 프라다다. 이런 영화도 있잖아."
"우와... 넌 어떻게 그렇게 단순하게 무식할 수 있어..."
"왜? 뭐가? 지금 운동했다고 나 무시하는 거야?"
"악마는 프라다가 아니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겠지..."
"하하하! 아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