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00화 (300/401)

사랑. 사랑. 그리고 또... (5)

"미친놈아. 5시까지 어떻게 오라고. 수업이 있는데. 나도 학교 가야지 새끼야! 아 씨발. 그러면 다 때려치든가!!"

3월의 마지막 주.

태윤이 입대 한 달을 앞두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로 했다.

남수가 빠진 김태윤 이정석과 약속을 잡는 만큼 어느 정도 진통은 예상했지만,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미친놈들이 억지를 부린다.

"아우. 망할 놈의 새끼들. 아 진짜."

혼자 흥분해서 씩씩거리고 있으니 혜정이가 나와서 물 한 컵을 내민다.

"진정해. 왜 싸워. 싸우긴."

"아니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지들 입장만 따지냐고."

"그럼 부르지를 말든가."

"김태윤 병신이 오고 싶다잖아."

"참어. 애들도 바쁘니까 그러겠지."

"그러니까 지난주에 오라니까. 시간 많을 땐 뭐 하고 새끼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맞추는 수밖에 없다.

수업은 하루 빼고 스케줄은 다른 날로 몰아서 약속을 잡았다.

"네. 형. 죄송해요. 아니 그냥 모임이 있는데... 네. 친구들이요. 고맙습니다. 죄송해요. 이틀만 놀고 다시 열심히 뛰어 볼게요."

그렇게 시간을 만들었다.

다음 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 시쯤 지나자 혜정이한테 전화가 들어온다.

"어. 지금?"

"응. 뭐 사갈 거 있으면 얘기해."

"하하. 뭘 너까지 그래. 부부도 아니고. 하하하!"

"좋아?"

"좋지 그럼. 내 일을 자기 일 같이 나서 주는데 고맙지."

"너 친구들만 오는 거 아니거든. 내 친구도 오거든."

"선아도 온대?"

"온다고 그러네. 어제는 갈지 안 갈지 모르겠다고 하더니만."

"그럼 음식을 더 준비해야 되나?"

혜정이도 집에 도착해 대청소를 시작했다.

"혜정아. 요리하는데 뭘 그렇게 각을 잡고 청소를 해?"

"시어머니 오시는데 치워야지..."

"시어머니?"

"선아. 걔 은근 놀러 오면 얼마나 따지고 둘러보고 그러는지 몰라."

"오~ 그래? 걔가 그런 성격이 있었어?"

"알게 모르게 피곤한 성격이야..."

"그래서 정석이를 만나나? 그 새끼가 은근 정신은 나갔어도 인간은 수더분하거든."

혜정이가 피식 웃으며 묻는다.

"맨날 욕하면서. 왜 친구가 됐어?"

"뭐라고? 청소기 소리 시끄러워서 안 들려."

"애들. 맨날 뭐라고 하면서 왜 친해졌냐고."

"흠..."

뒤적뒤적 소스를 저어 주며 말했다.

"몰라."

"뭐야 그게. 뭔가 계기는 있었을 거 아냐."

"태윤이랑 친했고. 뭐. 친했다기보다는 그냥 내가 따라다녔고."

"...니가 따라다녔다고?"

"따라다녔지. 근데 밀어내지 않더라고. 그리고 남수랑 정석이는 고등학교 올라와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넷이 뭉쳐 다니게 되고."

"..."

"그러게. 왜 이 새끼들이랑 친해졌지? 갑자기 궁금해지네."

모든 손님맞이 준비를 끝내자 피로가 밀려왔다.

혜정이랑 둘이 맥주 캔 하나씩 따고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것 봐. 개새끼들. 5시까지 지들이 오라고 해 놓고. 지금이 몇 시야?"

"선아가 온다고 했잖아."

"시계를 사 주면 뭐하냐고... 시간을 볼 줄 모르는데. 아우. 빌어먹을."

"후후후."

"왜?"

"가끔 보면 넌 엄청 좋은 감정을 꼭 그렇게 툴툴대면서 풀어."

"..."

"내 말이 맞지?"

"아닌데. 난 좋은 건 좋은 거. 싫은 건 싫은 거. 딱 구분하는데."

"무슨. 니가?"

"왜? 맞잖아! 난 너 좋아하는 거 티내고 다녔고."

"하하! 마침 잘 됐다. 김태윤 오면 나도 물어보고 싶은 거 진짜 많았는데."

"걔한테 뭐?"

"대체 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는지."

"아 별거 없다니까. 그때 우리 집에서도 얘기했잖아. 진짜 사소한 것들이 많았다고."

"지가 감정에 솔직하대. 좋아하는 마음도 표현 못 해서 인상만 쓰고 있었으면서."

"야. 넌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되지."

"왜 안 되는데?"

"그때랑 지금이랑은 다르니까."

혜정이가 그윽한 눈매로 스윽 돌아보며 묻는다.

"마하야."

"...어."

"넌 그럼 예전이랑 지금이랑 뭐가 더 좋아?"

"당연히 지금이지. 뭘 비교하는 거야."

"그래도 가끔은 옛날이 좋다고 생각 들지 않어?"

"아니. 한 번도."

"정말...?"

"어어. 왜 실망하는 눈치로 이러지? 뭐야? 무슨 의민데?"

"아니. 그냥. 가끔 그런 걸 느끼는 날이 있으니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나 가만히 듣고 있으니,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감상적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난 가끔 한 살 한 살 어른이 되면서 변해 버리는 나 자신이 싫어져."

"그게 왜 싫어? 발전하는 건데?"

"변화가 꼭 발전은 아니잖아. 퇴보되는 것들도 있고."

"사람이 변화한다는 건 발전한다는 뜻이야. 퇴보라는 건 없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내가 그랬으니까."

혜정이는 조용히 웃어 보였다.

"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험에 비춰 보면 그게 맞어."

"그래. 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난 지금도 우리 과 동생들. 뭐 가끔 형 어떻게 하면 더 실력이 좋아져요? 이렇게 물어보면 그냥 운동을 하라고 해."

"음..."

"아무튼, 난 예전의 나는 싫어. 지금이 좋아."

진짜 그러니까.

굳이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는 과거의 나.

그때의 내가 지금 얘랑 이렇게 같이 앉아 있을 수나 있었겠어?

지금 그녀가 나랑 함께 있다는 것만도 어찌 보면 노력의 보상이야.

난 발전했기에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해질 수 있었다.

긍정적인 영향이라고.

비단, 심적이거나 외적인 문제를 떠나서 환경이 변하고 사람들의 대우가 바뀌었다.

물론 어떤 것들은 그때가 더 순수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난 싫어.

"알았어."

"왜? 요즘 뭐 싫은 거 있어?"

"없어. 그냥 마음의 문제니까."

"흠."

"어. 선아 연락 온다. 다 왔나 보다."

다 왔다고 생각한 친구들은 막상 지하철을 반대로 내리고 반대편 마을버스를 타, 약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늦게 도착했다.

"아 씨. 야! 니네 집 원래 이렇게 찾기 어려웠냐?"

"왜 이렇게 길이 꼬불꼬불해."

"미친놈들. 혜정아 이것 봐 봐. 내가 지랄할까 봐 먼저 선수 치는 거 봐..."

"어서들 와."

"오오~ 야. 진짜 혜정이가 집에 있는데?"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빨리 들어와."

남수가 빠지고 선아가 붙었지만, 뭔가 전체적으로 시끌벅적한 우리만의 분위기는 여전한 느낌이다.

애들은 집에 도착해서도 지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니가 그쪽이 맞다며 병신아!!"

"헷갈렸다고! 그러는 지야말로 지하철에서 지도보고 헛소리했으면서."

싸우는 태윤이와 정석이를 멀리 놓고 선아와 혜정이 셋이서 교양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늦어서 미안. 너네 많이 기다렸지...?"

"모자란 것들 끌고 오느라 선아 니가 고생이 많다..."

"연락하지. 왜 거기서 헤매고 있었어."

"오~ 이혜정. 뭔가 알고는 있었지만, 너 막상 이렇게 있는 거 보니까"

"보니까 뭐?"

"뭔가 좀 어색한데? 되게 사모님 같고."

"이상한 소리 하고 있어... 빨리 손 씻고 와. 밥 먹게. 배고프니까."

"내가 도와줄게. 마하야, 너도 앉아 있어."

혜정이와 선아가 저녁 준비를 하러 가고, 태윤이와 이정석이 거실로 돌아왔다.

"어... 근데 진짜 둘이 사귀고 있었구나."

"하하! 병신아. 정신 차려."

"동거... 씨발 새끼..."

"아 미치겠네, 진짜."

"야. 구마. 근데 어째 냄새가 우리 주방에서 나는 거랑 비슷하다?"

"형이 보내준 반찬들이랑 요리들 데폈으니까 그러겠지."

"새끼야. 그런 거 하면서 그렇게 밥 차린다고 생색낸 거야?"

"늦은 주제에 넌 참 면상도 두껍다."

정석이와 둘이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태윤이가 조용하게 집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

"정석아, 잠깐만 타임. 이 새낀 왜 이래?"

"놔둬. 지금 얼마나 자극적인 생각을 하고 있겠어."

"아 씨발. 미친놈이 진짜."

"마하야... 정석아."

"야. 태윤아. 우리만 있는 거 아니야."

"그래 새끼야, 왜 그래? 쪽팔리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씨발 놈들아."

태윤이가 주방에서 상을 차리는 혜정이와 선아를 보면서 한 마디를 꺼냈다.

"내가 민혜랑 사귀면 저기에 어울릴까?"

"..."

"..."

"민혜도 예뻤는데..."

"병신아. 내가 누누이 말하지. 걔 사귀는 남자 친구 있다고."

"하지 마. 정석아 그냥 놔둬."

"아. 씨발... 너무 외롭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김태윤은 우리를 보며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입대를 앞두고 있어 더 그랬으리라 생각한다만...

저녁을 먹으면서도 태윤이의 넋두리는 계속됐다.

"난 이 새끼가 선아 만난다고 할 때부터 뭔가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어."

"뭐 어떻게?"

"야. 구마. 먹어. 듣지 마. 다들 그냥 먹어. 혜정아 밥 먹어."

"...그래도 애가 말을 하는데."

"안 들어도 돼. 야 새끼야. 나 배고파.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닥치고 있어."

"나쁜 새끼들. 동창을 만나다니..."

"하하하! 뭐냐?"

"마하야. 혜정아. 너네는 처음 듣는 얘기지?"

"그럼 너네는 자주 들었다는 얘기야?"

태윤이가 주절거리는데, 정석이는 상대를 안 해 주고 선아가 대신 설명을 해 준다.

"얘 맨날 이래. 자주 만나면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지."

"애초에 남수. 이 새끼가 문제야."

"하하! 대체 뭐가? 열심히 나라 지키는 놈한테 왜 지랄인데?"

"야. 구마! 상대해 주지 말라고! 들어 주면 이 새끼 더한다니까!"

"그래. 마하야. 밥 먹어. 우린 지겨워..."

"나도 동창들 만날 수 있었어... 근데 안 한 거지."

안 되겠다. 이미 김태윤의 마수에 빠져들었다.

정석이랑 선아는 지겹다고 흘려 버리는 얘기지만, 혜정이랑 나는 귀가 쫑긋 설 수밖에 없는 화두였다.

"하하! 그럼 너도 만나지 그랬냐?"

"그래. 너도 좋아하는 애 있었으면 얘기를 하지."

"있었는데, 만나질 못 했지. 아니. 우리 앞에 나타나질 않았어."

"와... 살벌하다. 진짜. 밥이 씨발."

"왜 욕을 해."

"하하... 태윤아. 여기 우리 집이다."

혜정이도 씩 웃으며 말했다.

"근데, 난 너한테 그런 거 없었는데."

"후후. 이혜정, 학교에 여자가 너밖에 없던 게 아니야."

"너 뭐 아까 들어 보니까 민혜 얘기하고 그러더만. 결국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 고르고 있던 거잖아."

"아무튼! 동창은 아니야. 그건 뭔가 예의가 아니라고!! 밖에서 찾아야지!"

"아 병신아. 그런 게 어딨냐고.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사귀는데 동창이고 자시고 따지는 니가 미친놈이지."

"정석이 말이 뭔지 알겠다. 혜정아. 상대하지 마. 미친놈이다."

그래도 혜정이는 태윤이 이야기가 관심이 생기는가 보다.

"나랑 마하는 원래 학교 다닐 때도 만났었어."

"진짜 니네가?"

깜짝 놀란 태윤이를 놓고 정석이 커플이 커다란 리액션을 보여 준다.

"오~ 이혜정."

"이야~ 고백."

"고백이 아니라. 쟤가 그러니까."

혜정이도 친구들의 반응에 갑자기 쑥스러운지 고개를 돌려 묻는다.

"몰랐어? 너 말 안 했어?"

"안 했지."

"진짜?"

그러자 정석이와 태윤이가 말해 준다.

"저 새끼 여자 얘기 절대 안 해."

"구마. 연애사는 진짜... 국가 보안이지."

혜정이가 그렇게까지? 라는 식으로 계속 눈이 동그래져 쳐다본다.

"아 왜. 뭘 그렇게 이상하게 쳐다봐."

"진짜 안 했어?"

"니가 하지 말라면서."

"...얘네한테도?"

"안 했어. 한 번도."

"왜?"

"하지 말라고 하니까."

선아가 센스 있게 분위기를 전환하고 나섰다.

"오~ 이혜정. 감동 받은 눈친데?"

"뭘. 감동까지..."

"말 잘 듣는데? 나한테 한 얘기랑 다르게."

호오~ 그렇다라.

"선아야. 얘가 너한테 내 얘기 하냐?"

"하지. 많이 해. 쟤."

"와. 이중 잣대."

"뭘! 내가 무슨 이중 잣대를!!"

"나한테는 한 마디도 꺼내지 말라면서 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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