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01화 (301/401)

사랑. 사랑. 그리고 또... (6)

"아까 구마랑 혜정이 얘기도 그렇고. 난 그렇게 생각해. 연애에 있어서도 갑과 을이 있다."

저녁을 먹고, 안주로 피자와 치킨을 시켜 술판을 벌였다.

시시콜콜한 얘기로 웃고 떠드는 가운데, 정석이 놈이 맥주 한 캔 시원하게 들이키더니 민감한 화두를 꺼내 들었다.

당연히 저쪽 안주인께서 고개를 홱 돌리며 물어보신다.

"우리는 누가 갑인데?"

"너지. 나겠냐?"

"무슨. 너 맨날 일 마칠 시간 기다리는 내가 을이지!!"

혜정이와 둘이 쟤네도 싸우는구나 속닥거리니 이번엔 김태윤이 이상한 눈동자로 우리를 쳐다본다.

"아 또 왜?"

"그냥. 너 그러고 있으니까 이상해서."

"뭐가 이상해. 사귀는 사이에."

"야. 니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내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봐라."

열다섯 중2 때 전학 와서 친구가 된 놈이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다.

그 좋아하던 아이는 전학생인 지가 봐도 학교에서 젤 인기 있어 보이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인기는 고등학교까지 이어지고 지역을 장악하는 미모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근데, 그렇게 따지면 마하는."

"그래. 얘는 뭐..."

"아니지. 그런 게 아니지."

"맞어. 그런 거랑 틀려."

여자애들 이야기에 사내새끼 두 놈이 강하게 부정을 하고 나섰다.

"하하하. 뭐가? 뭐가 틀린데."

"메달이랑 다른 거야."

"그러니까! 니가 꿈을 이뤘는데. 내가! 새끼야! 내가 씨! 너네들 보면서 이런 감상도 못 하냐!!"

"하하. 또 지랄이다. 뭔 빌어먹을..."

"근데, 구마. 넌 진짜 이런 부분에 있어서 우리한테 할 말 없어."

"또 뭐가? 넌 하던 갑과 을 이야기나 계속해."

정석이가 태윤이를 돌아보며 묻는다.

"근데, 진짜로. 그런 거 있지 않냐?"

"있지. 있어. 저 새낀 당사자라서 몰라."

"솔직히 구마. 새끼야. 우리는 너가 금메달 땄을 때보다 지금 이렇게 혜정이랑 있는 게 더 좀 뭐랄까..."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게 있지."

"오~ 이 씨 공돌이. 오늘 좀 감상적인데? 어울리지 않게?"

"락커라고. 영혼이 순수한 남자만이 기타를 잡을 수 있어."

"영혼이 순수하단다 미친놈이... 그런 새끼가 왜 연애를 못 하냐? 우리 학교에 음악 하는 애들은 홍대 가서 여자 친구 잘만 사귀더만!"

오랜만에 성남 원투 펀치와 함께하는 자리였다. 정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혜정이와 선아도 입을 가리면서 기절하기 직전까지 웃었다.

"야. 니네도 그러고 있지만 말고 쟤 소개팅 같은 걸 해 줘."

"우리가 안 해 줬겠냐!!"

"혜정아. 모르면 가만히 있어."

"정말? 해 줬어?"

"안 했어."

"뭘 안 해 줘!!"

"아. 내 취향은 아니었잖아!!"

이건 나도 모르는 이야기라 선아가 혜정이한테 들려주는 앞뒤사정을 관심 있게 들었다.

"야. 들어 보니까 애들이 많이 노력했네. 선아도 대학 친구들 소개해 주고."

"아... 다르다고. 그리고. 왜 내 얘기만 해. 아까 하던 갑과 을얘기나 계속해."

"친구 다섯이 모였는데, 둘 둘이 커플이고, 하나가 솔로면. 모든 주제가 솔로에게 기울 수밖에 없어."

"닥쳐 새끼야. 야. 혜정아 너네는 누가 갑이냐?"

"우리 사이에서 갑과 을을 따지면, 당연히"

"마하지."

"음...?"

무슨 소리야. 내가 갑이라니?

고개를 돌려 피자를 한 손에 쥐고 있는 14층 딸내미를 보았다.

"내가?"

"너잖아."

"뭔 소리야. 니가 갑 오브 갑이지."

"무슨. 나는 을도 안 돼. 병 정 그다음에 뭐지?"

고학력자 김태윤도 모르는 10갑자를 알려줬다.

"甲(갑) 乙(을) 丙(병) 丁(정) 戊(무) 己(기) 庚(경) 辛(신) 壬(임) 癸(계). 10개로 끝나."

"오~ 구마하. 똘똘한데?"

"역시. 연세대."

"아 꺼져, 병신들아."

혜정이가 하나하나 읊어 보더니 자기는 병 정도 아니고 임 계즈음에 있단다.

"뭔 소리야. 니가 왜?"

"아무튼 그래."

"..."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얘가 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해 주고 아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데...

면전에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친구들이 알아서 분위기를 깨고 나섰다.

"야 이 새끼야! 뭘 따지고 있어! 니가 얼마나 못 해 주면 쟤가 저러겠어!!"

"아니야. 나 잘 해 줘."

"아까도 선아한테 전화해서 니 욕 많이 한다고 그랬지. 여자들은 없는 이야기 안 해."

"그럼 니 얘기도 얘한테 들리겠지."

"난 이해해. 을이니까."

정석이와 선아가 투닥거리는 동안 혜정이를 돌아보았다.

"왜 서운한 표정을 하고 있어."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후후. 농담이지."

"..."

농담을 왜 이런 농담을 하냐?

친구들 있는 자리에서. 사람 이상하게...

혜정이가 시선을 피하면서 태윤이한테 물었다.

"근데 너네는 어떻게 친구 됐어?"

"누구? 나랑 얘? 정석이?"

"아니. 마하. 전학 왔었다며."

"야 그 전에. 혜정이 너 나 중학교 때 알았냐?"

"몰랐지. 근데, 뭐. 우리 중학교 애들 원체 많아서."

"그래? 나 우진이랑도 친했었는데. 진짜 나 몰랐다고?"

김우진. 우리 중학교 전교 회장을 맡았던, 생긴 그대로 엄친아의 정석과도 같았던 존재. 혜정이의 첫 번째 남자 친구이기도 하다.

아마도 갑을 얘기에 감정이 미묘하게 흔들렸고, 그런 상태에서 이혜정 표정을 살피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놓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걔를 알어?"

"알지. 그럼. 전교 회장이잖아."

"어어... 하긴. 그렇구나."

뭐지? 방금 그건?

철부지 꼬꼬마 때 만났던 존재를 왜 저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거지?

"우진? 그건 누구냐?"

"있어. 우리 졸업하고 이민 간 애."

"마하 너도 아는 애야?"

"이 새끼도 알지 당연히."

"나는 걔 알아도. 걔는 나 모를 걸."

"하하! 지금은 걔가 너 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거다."

태윤이는 혜정이와 김우진이란 녀석의 관계를 모르는 것 같다.

알아도 그냥 친했던 애들 정도로 아는 것 같은데, 아니고서는 그런 이름을 이 자리에서 꺼내지 않았겠지. 쟤가 생각 없는 놈도 아니고.

대충 넘기는 게 좋을 거 같다.

"아무튼, 야. 태윤아. 진짜 우리 어떻게 친해졌냐? 아까 얘도 물어보던데."

"너 기억 안 나?"

"안 나. 모르겠어. 난 그냥 너 따까리하고 다녔던 것만 생각나서."

"뭘 또 니가 내 따가리야! 새끼야!!"

"혜정아. 저 새끼가 쉬는 시간만 되면 나한테 막 천 원 주면서 매점 가서 맨날 뭐 사오라고 그러고."

"지랄하지 마 병신아! 와 이 미친놈이!!"

정석이도 분위기를 읽고 참전한다.

"하하! 근데, 우리 사이에도 그런 건 있었어. 구마하 왕따설."

"맞어. 오래된 의혹이지."

"와 이 미친놈들이! 지들 편 들어 주는 사람 있다고!! 없는 말지어내고 있어!!"

웃고 흥분하고 놀리는 가운데 김우진은 화두에서 말끔하게 지워졌다.

모든 포커스는 다시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됐느냐로 돌아왔다.

"근데 나도 궁금하긴 했었어. 너랑 김태윤이랑 뭔가 안 어울리 는데. 둘이 붙어 다니니까."

"맞어. 지금이니까 내가 얘네보다 크지. 원래 내가 이 새끼보다 작았잖아."

"아 또 왜 키 얘기가 나와... 사람 민감하게."

한 대 맞은 정석이가 자기도 민감한 주제 거리를 들고나온다.

"그렇게 따지면 이 새낀 대가리 좋은데, 구마 너는 병신이잖아."

"야. 나 연대 다녀 새끼야."

"씨발! 지금 나 대학 안 갔다고 무시하는 거냐?!"

혜정이와 선아가 두 손을 저으며 진절머리를 낸다.

"어떻게 한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이야기가 또 나와??"

"얘네 맨날 이래... 여기 남수 있지? 더 해..."

여자애들 반응에 우리 셋은 객관적으로 머쓱하게 우리를 돌아보았다.

"하하하! 근데, 우린 원래 그래서."

"맞어. 그래서 남수가 고생이 많았지."

"크하하~! 박남수. 야. 박 일병 위해 건배 한 번 하자."

맥주 캔을 부딪치며 태윤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뭐. 남자애들 친해지는 게 별거 있나. 그냥 마하가 재밌으니까 그랬지."

"재밌다? 뭐가? 놀려 먹는 게?"

"키 크고 머리 좋은 놈이 키 작고 대가리 나쁜 놈을 괴롭히는 게 좋았다?"

"봤지? 내가 주제를 흔드는 게 아니다. 니네 남친들이 자꾸 옆에서 지방방송을 더하는 거야."

정석이랑 나란히 애인들한테 기강 잡히고 다시 경청한다.

"같은 반이었어. 마하네 반으로 내가 전학 왔는데."

"맞어. 어느 순간 그냥 친하게 지내고 있었던 거 같애."

"아니지. 새끼야. 카하하!"

"그럼 진짜 뭐가 있었냐?"

"크하하하! 와 나 이거 얘기해도 되나?"

태윤이는 혜정이 눈치를 본다.

혜정이는 불안한 듯 내 눈치를 본다.

나는 김태윤 눈치를 어이없게 받아들였다.

"뭐가? 병신아. 내가 뭐 했어?"

"하하하!!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왜? 뭔데? 뭐?"

"구마가 그때 뭐 할 게 있었나? 이 새끼 그때 조용했었다며?"

"너랑 남수 모르는 무슨 사고 친 거 아니야?"

"아니야. 선아야. 중2면 나 찐따력 최고조에 달했을 땐데 그때 내가 무슨 사고를 쳐. 학교 가서 조용히 앉아 있다 집에 오는 게 단데. 맞지? 너 나 어릴 때 기억나지?"

"음. 글쎄? 그때는 잘 모르던 애라서."

김태윤은 혼자 꺽꺽거리고 웃으며 모두의 기대감과 나의 불안함을 증폭시켰다.

"카하하하! 그러니까! 저 새끼가. 카하하! 야 이건 내가 너 무시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때 뭔가 좀. 아무튼."

"알았어. 인정하니까 말해 봐. 뭐냐고?"

"하하하하!"

"아 씨. 안 들어. 야. 구마 너도 묻지 마."

"아 좀 가만히 있어 봐. 저 새끼 저러니까 불안해서라도 들어야겠잖아."

전학 온 놈은 동네에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반 친구들한테 이것 저것 묻고 다녔단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미용실인데. 태윤이가 반 애들 모인 자리에서 여기는 어디가 머리 잘 짜르냐고 물었고 내가 답을 해 줬다.

"너 진짜 기억 안 나?"

"...모르겠는데?"

"나 얘기해?"

"..."

"왜 날 봐?"

"몰라. 쟤가 저러니까 갑자기 뭔가 불안해서."

혜정이도 눈빛이 반달을 그리고 있었다.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걸 인정하고 김태윤은 빗장을 풀었다.

"아하하! 그때. 반 애들 다 교실 뒤에 있었거든. 애들이 누구는 지네 동네에 있는 미용실 간다. 누구는 이발소 간다. 자기는 그냥 목욕탕 가서 깎는다. 그러는 순간, 마하가 딱 나서서 그러는 거야."

"뭐라고?"

"바다 미용실로 가라고."

"그게 왜? 그게 어때서?"

"야. 김태윤. 너 진짜 외로워서 미쳤냐? 그게 그렇게 웃겨?"

"아하하하! 그러니까 들어 보라고."

오고 가는 커뮤니케이션에 따라,

"오 그래? 거기 잘 해?"

라고 물은 태윤이.

그리고 내가 반 남자애들 모두가 모여 있는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거기 머리 해 주는 누나가 이쁘고. 심지어 가끔 머리 감겨 줄때 가슴이 머리에 닿는다고."

"..."

"크하하! 너 진짜 기억 안 나? 그때 애들 다 뒤집혔었던 거?"

맞다. 이렇게 들으니까 기억난다.

암울하던 열다섯의 어느 날. 유일하게 사회적 유대감을 느꼈던 몇 안 되는 순간이었지.

하지만, 모르는 척해야겠지? 그래야 내가 사니까?

"어어~ 뭐야... 어어~~ 으으~~"

"카하하하! 와 구마 이 새끼 존나 중학생이!"

"하하하!! 마하야!! 아하하하!"

"에이. 아니야. 무슨... 내가 언제!?"

"하하하하! 아니라고? 어? 근데 저 새낀 다 그랬어."

나의 과거에 혜정이가 질겁을 한다.

선아도 끔찍한 무언가를 봤지만 놓치기 싫다는 듯 정석이를 붙들며 웃고 미끄러진다.

이정석이랑 김태윤은 웃으며 굴러다니느라 한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망할 놈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크하하하! 진짜. 막 반에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놈이 애들다 있는 데서 그러는데 황당하지 않냐고. 근데 얜 다 그래."

나는 편의점을 가도 특정 시간 특정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 누나가 있을 때만 가더란다.

분식집을 가도 여고생들 하교 시간에만 맞춰서 갔단다. 노트나 필기구를 사기 위해 학교 앞 문방구를 가도 되는데 굳이 번화가에 있는 팬시 샵을 가더란다. 거기에 근처 학교 여학생들이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는데. 학교에서 제일가는 미녀.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애였단다.

"모든 게 여자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어. 아. 이 새낀 진짜구나.

이게 농담이 아니구나."

"와. 미친다 구마하... 씨발. 국민 영웅 빌어먹을 새끼."

"아, 아니야! 저 새끼가 오버하는 거라니까."

"하하하! 따지고 보면 내가 마하 따라다닌 거야. 이 새끼 옆에서 보면 재밌어서."

"꺼지라고 병신아. 말을 이상하게 지어내고 있어..."

"하하! 지어냈다고? 내가?"

"아니야. 야. 혜정아. 쟤 일부러 지금 우리 집 왔다고, 너 있다고 오버하는 거야."

이혜정의 눈빛에 정말 많은 감정이 담겨있다.

경멸심도 있는 거 같고, 동정심도 있는 거 같고. 아무튼 사랑하는 남자 친구 보는 눈빛이 참 처량하게 변한다.

"근데 뭔가 너가 다 했을 거 같긴 해."

"아! 아니라니까!!"

"아이고... 마하야..."

"아이고 이 새끼야. 운동이라도 잘하니 얼마나 다행이냐."

"크하하하! 지금 생각해도 웃기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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