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중독 (2)
"아 당연히 밥 먹었지.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잘 먹고 다닌다니까. 복지랑 처우는 대기업이랑 다르지 않아요. 하하하! 엄마! 돈이 어디서 나오긴 어디서 나와. TV 틀면 죄 마하 얼굴만 나오는데.
우리 회사, 돈 많어!"
구마하의 스케줄이 바뀌며 매니저 양민구도 오랜만에 쉬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양민구는 스포츠 가방을 열어 이것저것 준비물을 챙긴다.
수건과 속옷 세면도구와 줄넘기.
그리고 실밥이 다 풀린 붕대와 땀복이었다.
"네. 나가려고 하고 있었어요. 친구들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오랜만에 체육관 좀 가 보려고. 나야 운동이 쉬는 거지."
스포츠엔 빈부 격차가 있다.
체육 환경은 자본에 영향을 받는다.
나라가 부유하면 다양한 종목과 인프라가 확충되지만, 빈곤한 국가는 몸으로 뛰는 운동이 메이저 스포츠가 된다.
그래서 주로 가난한 국가일수록 단순 구기 종목이나 투기 종목이 인기가 있다.
하지만, 감동의 깊이는 돈을 따르지 않는다.
스타는 어디서든 탄생하고 승자와 패자의 값진 드라마는 인종과 자본. 성별과 연령을 초월한 구슬땀을 흘리는 곳에 피어나니까.
"으으음. 아니, 육상 말고 복싱."
한때 이 나라도 가난한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던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 시절 대한민국 국민들은 커다란 올림픽 스타디움이 아닌, 좁다란 사각 링에 열광했었다.
"샌드백 좀 두드리고 싶어서. 하하하하! 마하가 속상하게 구는 게 아니라 몸이 굳는 거 같아 그런다니까."
한국은 세계에 명성을 떨친 복싱 챔피언들을 배출했었다.
김기수와 홍수환, 유명우와 장정구, 그 외에도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나왔다.
산업화 시대, 고된 노동을 마친 시민들은 사각 링에서 펼쳐진 뜨거운 승부를 기억한다.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복싱은 대한민국에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선사하기도 했으며 88올림픽의 전야제라고도 불렸던, 86서울아시안게임에서 복싱 12종목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한 적도 있었다.
"취직하면 정 사장님한테 가기로 한 약속도 있고, 겸사겸사 인사드리고 오려고. 알았어요. 엄마, 조만간 연락드릴게요. 들어가세요."
* *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86년 열두 명의 영웅 중 한 사람이었던 페더급 챔피언 최두필은 현재 서울과 가까운 곳에 세계체육관이란 간판을 걸어놓고 있었다.
아마추어 복싱을 제패하고 프로까지 진출했었던 최 관장은 요즘 속상한 마음이 떠나가질 않는다.
오늘도 불타는 속내를 열심 회원 정 씨의 곁에 앉아 털어놓았다.
"지랄. 태권도면 태권도고 복싱이면 복싱이지... 태보가 뭐야 태보가."
"또 그러신다. 유행이라잖아요. 그냥 받아들이세요."
"주먹도 쓰고 발도 쓰는 게 왜 태보야? 엄밀히 킥복싱이 따로 있는데. 안 그래?"
"그래서? 환불해 주셨어요?"
"해 줘야지 어째... 소비자 고발인지 니미럴 것에 신고한다는데."
"그러니까. 여성 다이어트 이런 거 함부로 붙이지 마시라니까."
"아. 사람이 오냐고."
전국을 뜨겁게 만들었던 복싱 열기도 이제는 먼 과거가 되고 말았다.
글러브와 챔피언 벨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남은 불씨를 살려 보고 싶지만 대중은 관심을 주지 않는다.
"살을 빼고 싶으면 지가 땀을 흘리던가! 운동은 나오지도 않고 왜 나한테 난리냐고 난리는!!"
"아이고 진정하세요, 관장님. 하루 이틀인가 뭐."
"옷이니 신발이니 새로 사서 좋다고 자랑질 할 땐 언제고. 젠장할..."
"또 오겠죠. 지나가세요. 훅 훅!!"
퍽퍽. 정 씨의 펀치백 두드리는 소리를 뒤로하며, 최 관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가죽 샌드백들이 줄줄이 걸려있지만, 오직 하나만이 묵직한 소음을 내고 있다.
자고로 복싱장은 시끄러워야 되는데. 왜 이렇게 적막하기만 한지...
땡.
종소리가 체육관 벽면에 울려 퍼지자 정 씨가 최 관장을 향해 말을 건넨다.
"후우~ 어딜 그렇게 보세요?"
"세상이 너무 변했어... 나 때는 체육관 100미터 밖에서부터 줄넘기랑 스텝 소리가 끊이질 않았는데..."
"또 그러신다. 밤 되면 젊은 애들 오잖아요. 그때는 시끌시끌하더만."
"운동하는 사람들 말고. 선수가 와야지, 선수가..."
"요즘 애들 힘든 운동 하려고 합니까."
"쩝... 육상은 돈을 쓸어 담는다던데... 젠장."
"미국이나 남미 이런 데는 아직도 선수들이 쏟아져 나온다고들 하던데. 참 아쉬워요."
"후우. 그래서 쪽수를 무시할 수 없다는 거야. 인구가 적으니 뭐 하나 떴다 하면 죄 우르르 몰려가 버리니 원."
최 관장이 체육관 벽면에 붙은 포스터를 둘러보며 말한다.
"그 와중에 챔피언 방어전은 해서 뭐하나. 관심들이 없는데."
땡.
1분이 지났다.
체육관 벽에 걸어 놓은 종에서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회원 정 씨는 숨을 고르며 주먹을 들어 펀치백을 향한다.
"훅. 훅! 그럼 구마하라도 꼬셔 보시든가요."
"그 친구 꼬셔서 뭐하라고?"
"은퇴하고 논다 그러던데, 20대 초반이면 선수로 키워 볼 만하지 않으시겠어요?"
"이 사람아. 복싱은 장난이 아니야.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배워야 하고 무엇보다 근력이 붙어야."
"구마하 몸 엄청 좋잖아요. 요즘 애들 그것 때문에라도 헬스장안 가고 육상하고 다니던데."
"...암튼, 그것도 사람을 봐야 말이지."
"민구한테 얘기해 보세요."
"민구?"
퍽 퍽. 정 씨가 좌우 위빙을 거쳐 잽과 스트레이트 콤비네이션을 찔러 주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후욱. 훅. 관장님 민구 모르세요? 우리 가게서 알바하던 친구."
"알지. 양민구. 그 녀석 요즘 잘 안 나오잖아."
"언제 오면 한번 물어보세요. 구마하가 민구 대학교 후배예요."
"그래? 그놈이 대학을 다녔어?"
"무슨 소리세요. 운동이고 공부고 얼마나 열심히 하는 앤데. 걔연대생이에요."
"그랬어~? 허어~ 사람 생긴 걸로 판단하지 말라더니."
"하하! 왜요? 민구 생긴 게 어때서?"
"피부는 시커메서 은근 몸은 각져 있고. 난 뭐 어디 건달 똘마니 하다가 정신 차리고 운동하러 온 줄 알았지."
"아 관장님, 애 들으면 서운하게. 열심히 사는 앤데."
"허허. 그나저나 정 씨. 팔 너무 그렇게 뻗지 말어. 팔꿈치 나간다."
"예."
"천천히 해. 천천히."
"알겠습니다. 훅. 후욱."
퍽 퍽. 정 씨가 운동에 집중하도록 자리를 비켜 주는 최두필 관장.
그때 체육관 계단에 발소리가 울려 퍼지며 양민구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반긴다.
"어이구야? 이게 누구야?"
"안녕하세요, 관장님. 사장님도 여기 계셨네요."
"하하하! 민구야. 너 범띠야?"
"네? 두 분 제 얘기하셨어요?"
"자식. 어서 와라."
땀복으로 갈아입은 양민구는 의자에 앉아 꼼꼼하게 붕대를 감는다.
정 씨가 수건으로 이마를 훔쳐 내며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바빠? 한동안 안 나타나더구먼."
"아. 저 취직했어요, 사장님."
"오~ 잘됐네. 어디? 선생님 된 거야?"
"아니요. 마하랑 같이 일해요. 매니저 됐어요."
"어?"
구마하 이야기에 최 관장도 슬며시 다가와 대화에 끼어든다.
"구마하랑 같이 일한다고?"
"네. 마하가 제 후배거든요."
"안 그래도 방금 정 사장이랑 그 얘기 했었는데. 그 친구 은퇴안 했나? 뭐 하는데 매니저가 필요해?"
"은퇴는 했는데, 연예계 준비하거든요. 마하도 도와달라고 그러고, 대표님도 부탁하고. 그냥 취직했어요."
"야. 민구야. 이게 다 무슨 소리냐. 너 인마. 니가 뭐가 아쉽다고 그런 일을 하고 있어...?"
"에이 사장님. 매니저 나쁜 일 아니에요. 돈 많이 줘요. 선생님보다 훨씬 낫죠."
"그래도 공부한 게 아깝잖아."
"대한체대도 아니고 우리 학교 뭐라고요."
"왜? 연대잖아."
"체대생 학력이 중요한가요. 메달이 있어야지. 맞죠, 관장님?"
"그럼. 선수는 연금이야. 학력 다 쓸모없어."
"그래요? 나야 그쪽 사정은 잘 모르니까."
양민구 이야기에 최 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근데, 자네도 선수했었나?"
"네. 고등학교까지 하다가 대학 와서 은퇴했어요."
"종목이 뭔데?"
"육상이요."
"근데 왜 매니저를 해? 요즘 육상 돈 쓸어 담는다고들 그러던데."
"하하하! 그것도 코치를 해 온 사람들 이야기죠."
준비를 마친 양민구가 줄넘기를 챙기며 몸을 푼다.
"근데, 정 사장 생각이랑 다르지만, 내가 봐도 매니저는 아니다."
"왜요? 일 재밌는데."
"그냥 나가서 사람들 모아다 육상 교실 같은 거 만들어. 요즘그게 돈이 된다고 하더구만."
"저 대학 때 후배들 데리고 비슷한 거 해 봤는데, 사람들 코칭하기 너무 어려워요."
"야 인마, 뭐가 어려워! 육상 까짓 거 애들 놓고 줄지어 뛰어라하면 그만이지."
"하하하! 관장님. 육상 그런 운동 아니라니까요. 얼마나 체계적으로 훈련해야 되는데요."
정 씨가 다가와 이런저런 일 때문에 요즘 뿔이 나 계신다고 정보를 업데이트해 준다.
양민구도 웃으며 흘려들었다.
"아무튼 간. 진짜로 그 구마하랑 같이 있나?"
"네."
"이야. 사인 좀 받으면 좋겠구만. 나도 그 친구 경기 재밌게 봤었는데."
"알겠습니다. 언제 부탁해 볼게요."
"구마하라. 그 친구 나이가 몇이야?"
"올해 스물 둘이요."
"어리네."
"민구야. 걔 그렇게 어렸어?"
"마하 처음 아테네에서 메달 딴 게 고3이었어요."
"허허... 진짜? 대단한 재능이네."
"천재지. 어떻게 보면 육상을 시작한 게 그 친구의 오점이야."
"아~ 관장님~ 자꾸 왜 그러세요."
"줄넘기 할 때 누가 말 해? 혀 깨물려고."
양민구는 정 씨와 눈을 마주치며 피식 웃어넘기고 줄넘기에 집중하고 있다.
탁탁. 휘리릭거리는 줄 소리와 경쾌한 풋 스텝이 체육관에 다채로운 리듬을 만들어 준다.
그 순간 또 다시 땡 하고 울리는 종소리.
알람과 함께 사람들이 다리를 멈추고 호흡을 고른다.
"후우. 역시 몸이 무거워..."
"오랜만에 나오니까 죽겠지 그냥."
"네. 사장님. 역시 운동은 할 때 계속하든가, 아니면 그냥 멈추든가. 둘 중 하난 거 같애요."
"온 김에 땀 쭉 빼고 가."
"저기. 민구야?"
"네. 관장님."
"구마하 그놈 키는 몇이냐?"
"키요?"
"어. TV로 볼 땐 몰랐는데 언제 기자회견 하는 거 보니까 제법 몸이 체구가 있던 거 같던데."
"마하 키 189 넘나 그래요."
"진짜로 민구야? 걔가 그렇게 컸어?"
"그럼요. 가까이서 보면 머리 하나가 더 있는데."
"허허~ 그럼 몸무게는?"
"몸무게라. 글쎄요? 걔가 90정도 나가던가?"
"90이라... 189에 90."
땡.
1분이 지났다.
종이 울리자 다들 운동할 준비를 시작한다.
줄넘기를 골라잡던 양민구가 최 관장에게 묻는다.
"근데, 관장님. 마하 팬이셨어요? 엄청 관심 많으시네요."
"아니 그냥. 아까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까.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유명한 친구 있다니 호기심이 동해서."
최 관장은 구마하를 생각하며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품어 보았다.
진짜 천부적인 재능이 아닐 수 없구먼.
무엇보다 몸이 조선 놈에게선 볼 수 있는 체급이 아니지.
큰 키에서 오는 리치. 육상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
결정적으로 지금 운동을 시작해도 절대 늦지 않는 나이.
아쉽구만... 그런 놈이 왜 육상을 했어. 복싱을 해야지.
현역 시절. 작은 체중으로 속도감 있는 경기를 운영했던 최두필은 내심 묵직한 주먹에 갈증이 있었다.
그래서도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마이크 타이슨 같은 무게감 있는 선수들을 동경했었다.
구마하의 몸이 그랬다.
189cm에 90kg의 몸무게.
정확하게 헤비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