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중독 (5)
"네. 동호 형님. 선수로서 굉장히 존경하는 분이고요. 결혼 너무 축하드립니다."
"운동할 때 만나신 적이 있나요? 형님이라고 부르시네요."
"아, 얼마 전 방송 나갔다가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셔서. 초대도 그때 받았어요."
"구마하 선수 연예계 진출 이야기가 있던데. 혹시 예능으로 가시는 건가요?"
"아우. 왜 제 근황을 물어보세요. 전 그냥 오늘 신랑 신부님 축하만 해 드리고 가겠습니다."
기자들을 만난 뒤 구마하는 신랑을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형님. 축하드립니다."
"어어~ 마하야. 고맙다. 근데 혼자 온 거야?"
"아. 저 같이 오려던 친구가 오늘 일이 있어 가지고요."
"그렇구나. 아무튼, 와 줘서 진짜 고맙다. 밥 먹고 가라."
"네. 아 참, 저 형수님 인사드리고 싶은데."
"어어~ 그래! 저쪽이다."
"아이고 여기 계세요. 제가 혼자 갔다 올게요."
"에이, 그래도 국민 영웅을 이리 혼자 놔둘 수 있나. 저기, 저기야. 여기 구 선수 좀 챙기 주라."
혼자 온 그를 낯선 연예인들이 먼저 다가와 알아보고 챙겨 준다.
심지어 신부 대기실을 찾아갔는데, 신부보다 그를 먼저 알아보고 악수를 건네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구마하는 모든 게 쑥스럽고 감사한 상황에서 신부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축하드립니다."
"어머. 와 줘서 너무 고마워요."
"아이고, 무슨 말씀이세요. 초대해 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저, 구마하 선수. 신부님이랑 사진 한 장 찍고 가시죠?"
"아,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여기 앉으세요!"
대한민국에, 아니 동양인에겐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육상과 스키를 제패한 인물이었다.
모두가 그를 반겨 주며 짧은 팬 미팅이 신부 대기실에서 이루어졌다.
식장으로 들어서자, 연예인뿐만 아닌 스포츠 선수들의 얼굴도 보였다.
구마하는 지난 도하 아시안 게임 때 같은 태극 마크를 달았던 야구 대표 팀을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안녕하셨어요."
"어? 어! 마하야. 혼자 왔어?"
"하하. 네."
"자리 찾는 거야? 여기 앉아라. 사람 많지?"
"네."
친절하게 반겨 준다곤 하지만, 아무래도 연예인들보다는 선수들이 더 편한 감이 있다.
실제 친분이 없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대표 팀이란 카테고리에 묶여 오랜 선후배같이 대해준다.
"마하가 연세대지?"
"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번에 너네 학교 출신 투수 하나 들어왔는데."
"아. 정말요?"
"음. 이름 알까? 그 친구는 너랑 육상 훈련 해 봤다고 하던데."
태연하게 사람들과 어울리고는 있지만, 구마하는 속으로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시합이라면 몰라도, 이런 격식 차리는 자리는 너무 어렵다. 그래서도 누군가 있어 줬으면 했는데...
감독님 결혼식도 이랬을까?
따지고 보면 그는 실제 결혼식도 처음 와 보는 것이었다.
민구 형한테 같이 가자니 사적인 자리라 싫다고 하고, 한상률감독님께 부탁하니 축의금이나 대신 전해 주라면서 만류했다.
혜정이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신부 못지않게 아름다운 그녀를 주변에 소개해 주고.
그렇게 공인된 커플이 되어 또 다음으로 나아가고...
"장내에 계신 하객 여러분들께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식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개그맨 유지석이 사회를 보고 어릴 때 웃음을 안겨 준 이경오가 주례를 맡았다.
"우와..."
"마하 왜?"
"정말 초호화 결혼식이네요..."
"인기 있는 얼굴들이 많지."
너무 아쉽다.
유명한 사람들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럼 또 얼마나 둘이 할 얘기도 많고 떠들 거리도 있고. 멋지게 차려입고 나왔으니 끝나고 데이트도 가고.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공개니 뭐니 강동호 결혼식이니까 비밀 유지 같은 건 저리 치우고 같이 가자고 할 걸 그랬나...
즐거우면서 감동적인 주례사가 이어지고.
각자 친한 사람들끼리 친분대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구마하는 결혼하는 신랑 신부의 뒷모습을 보았다.
"..."
이게 결혼이구나.
좋다. 형도 호텔에서 하자고 해야지. 멋있을 거야.
수정이 누나도. 아니 형수님도 돈이 얼마가 들든 다 해 줄 거야.
그리고 언젠가 나도 저렇게.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예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의 첫 걸음을 축하해 주자, 준비된 식사들이 분주하게 차려지기 시작했다.
"아. 배고파라. 마하도 배고프지?"
"네. 저도 시간이 애매해서 아침 안 먹고 나왔어요."
"요즘도 새벽에 운동해?"
"가끔 하긴 하는데요. 예전만큼은 확실히 열심히 안 하는 거 같아요."
"하하. 안 그래도 몸이 조금 불은 거 같아서."
"네? 그게 보이세요?"
"그럼 보이지. 야, 우리 도하 때 너 때문에 욕 엄청 먹었어. 그거 알어?"
"하하하... 그게 왜 저 때문이에요..."
"주루가 특기인 선수가 살이 왜 이렇게 쪘냐고. 육상 보면 다들 말랐다는데."
"아우 됐어. 저쪽은 금메달이 몇 갠데. 우리가 할 말이 있나."
"하하하... 저도 나갈 만큼은 나가는데."
"구마하 선수. 진짜 몸무게 얼마나 나가요?"
"현역 땐 85에서 87왔다 갔다 했고요. 지금은 90 초반 나가는거 같아요. 저도 운동 안 하니까 배가 조금씩 나오긴 해요."
"야! 여기서 뱃살 얘기하지 마!"
"하하.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구마하가 선수들과 식사를 드는 가운데, 이혜정은 접시들을 나르고 있었다.
"..."
저기 있구나. 넓은 홀이니까 가까이만 안 가면 마주칠 일은 없겠다.
친구 말대로 애가 몸이 커서 그런가 멀리서도 딱 보인다.
어쨌든 난 오늘 일을 하러 온 거야.
내 일에 집중해. 마하가 뭘 하든 아무 상관없어.
여러모로 각별한 주의를 가지고 움직이는 이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연예인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도 빛을 내고 있었다.
"어..."
"다 드셨으면 접시 치워 드릴까요?"
"저 죄송한데, 혹시 여기 직원이세요?"
"네? 아닙니다."
"저기, 저기요!"
천 명이 넘는 하객들이 모여 있다.
다양한 군중들 속에는 가족과 함께 온 사람, 행동을 조심하는 사람, 체면과 명성이 중요한 스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성을 좋아하는, 소위 예쁜 여자만 보면 일단 껄떡대고 보는 이들도 더러 뒤섞여 있었다.
"저기."
"네. 뭘 도와드릴까요?"
"전화번호 좀 주세요."
"아. 네?"
"아까 들어보니까 직원 아니라면서."
"죄송합니다."
다행히 이혜정은 지난 1년여 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런 손님들을 수도 없이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게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가지만, 그들은 일반인들이 아닌, 작은 인기에 취해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연예인들이었다.
"에이, 너무 그러지 말고."
"..."
"알바죠? 맞죠? 대학생? 끝나고 우리랑 같이 놀러 갈래요? 우리 뒤풀이 갈 건데."
"아. 저..."
난처한 상황을 정복을 갖춰 입은 직원이 다가와 도와준다.
"왜 그러시죠?"
"네? 어어, 아니에요."
직원이 이혜정을 피로연장 뒤로 데려가 물었다.
"아까 저쪽 테이블 손님들이랑 무슨 얘기 하셨나요?"
"아무 얘기 안 했는데요."
"손님이 연락처를 물었다던가?"
"그런 일 없었어요."
직원이 보기에도 그녀는 유독 도드라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런 애가 왔다는 점에서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고가 벌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만 한다.
까딱하다간 호텔 측의 책임 문제가 될 수도 있기에 직원은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성격이 깔끔하고 책임감이 있는 거 같아 잘 넘어가는 것 같지만, 사고는 그녀가 아닌 하객들이 벌이니까...
"가능하면 홀로 나가지 말고 주방에서 보조하세요."
"네."
그러나 주방에선 한 사람이라도 빨리 나가서 빈 접시들 가지고 오라고 성화다.
어쩔 수 없이 이혜정은 떠밀리는 자세로 피로연장으로 나갔다.
다시 정신없이 서빙을 돌고 있는데. 일하는, 오늘 알바로 온, 아까 마하 이야기를 즐겨하던 무리들이 갑자기 그녀에게 쏘아붙인다.
"네...?"
"아까부터 보니까 일부러 편한 쪽만 골라 가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다들 바쁜 상황에."
그 와중에 친구는 어디로 갔는가 얼굴도 보이질 않고, 이상한 애들은 갑자기 다가와 시비를 건다.
몸은 피곤하고 옷은 불편하고 사람은 치이게 많았다.
나는 밥도 못 먹고 남들이 남긴 음식을 치우는데.
정말 돈이 뭐라고... 이 고생을 하는지...
"아무튼, 빨리빨리 좀 해요."
"..."
이것들이 진짜... 가만히 있으니까...
그렇다고 싸움을 할 성격도 아니었다.
이혜정은 그냥 표정을 숨기고 다시 여기저기 테이블에 빈 접시를 치우고 새 요리를 놓는다.
"저기. 물 좀 갖다 줘요. 술도요."
"이거 좀 치워 주세요."
"더 먹을 수 없나요? 양이 부족한 느낌인데."
바라는 것들도 많다. 호텔이라 그러나...?
몸이 지치니 자꾸만 다른 생각이 끼어든다.
내 남자 친구도 여기 있는데... 나도 원래 여기 초대받은 사람이었다.
마음만 고쳐먹으면 아무 고생 없이 고귀하게 차려입고 당신들 못지않게 하하호호 웃음 짓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라는 게...
"..."
아니야. 부담되는 것보단 차라리 몸이 피곤한 게 나아.
그래. 마하가 강동호 결혼식이라고 했어도 난 여기 안 왔을 거야.
아니, 더 피했겠지.
"저기."
"아. 네."
"진짜로 전화번호 주면 안 돼요?"
그 와중에 아까 그놈이 다시 찾아와 집요하게 군다.
이번엔 지 자리도 아닌데 쫓아와서 말을 걸었다.
매니저님은 어디 계시지? 쉽게 떨쳐질 거 같지 않은데.
"죄송합니다. 규정이 있어서."
"에이 뭐 그런 걸 따져. 알바 같은데."
"..."
이러지 마라. 정말. 지금도 터질 거 같은 걸 꾹꾹 눌러 참고 있단 말이다...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르지만, 나름 인기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주변에선 그의 행동을 호기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말릴 생각은 없고, 심지어 아까 괜스레 시비 걸던 애들까지 먼발치서 은근슬쩍 쳐다보고 있었다.
빨리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데.
그 순간. 뒤에서 익숙한 무거운 목소리가 들린다.
"야?"
"어. 구마하..."
"..."
마하가 왔다. 얼굴을 봤다.
가능하면 모르는 척 지나가고 싶었는데. 이래서 주목을 끌면 안됐는데...
"혜정아. 너... 여기서 뭐해...?"
커다란 덩치의 구마하가 다가와 한 마디 말을 건네자, 귀찮게 껄떡대던 놈이 지레 쫄아 물러나 버린다.
수준 낮은 놈의 행동이란 역시...
놈이 사라진 건 다행이지만, 대신 이혜정은 더 큰 숙제를 부여 받았다.
"죄송합니다!"
"어?"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인기가 마치 중력이라도 되는 듯한 이곳에서 마하는 아까 그 이상한 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주목을 끌었다.
그래서 이혜정은 꾸벅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 * *
"디저트 준비 된 거 빨리빨리 나가라."
"순서대로 해! 서두르지 말고!"
주방 한쪽 구석.
혜정은 뒤늦게 찾아온 혼란을 정리하고 있다.
왜...?
내가 왜 피했지...?
웃으며 지나갈 수 있는 상황 아니었나?
나 얘기했던 알바가 오늘 여기였어. 그냥 얘기해도 됐던 거 아닌가?
내가 왜 그랬지...?
나도 나지만, 쟤는 지금 얼마나 당황하고 있을까...?
"저기."
"..."
"저기요?"
"네?"
그 와중에 아까 그 시비 걸던 한 무리의 여자애들이 찾아와 그녀에게 묻는다.
"구마하 아세요?"
"..."
"보니까 아는 사람 같던데."
뭐라고 대답하지...?
아니 그보다 얘네는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거지...?
"아니요. 모르는데요."
"흠. 아닌 거 같던데?"
대답하자 뭔가 물이 엎질러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불쾌했다.
무엇보다 아까 그놈이나 눈앞의 얘들이나. 살면서 얼마나 마주칠 애들이라고 자꾸 마주치는지. 그런 것도 너무 싫었다.
"그리고. 그쪽이 무슨 상관이세요?"
"네?"
"내가 구마하를 알든 말든. 뭔데요."
"뭐야. 재수 없어..."
니들이 더 재수 없어...
아 이 언니는 진짜 어딜 간 거야... 같이 일하러 와 놓고...
* * *
"정말? 걔네가? 너한테?"
"어... 막 와서 시비 걸고 그러는데. 되게 짜증났었어."
"왜? 뭐라고?"
"...몰라. 피곤해서 그랬는지 뭔지. 알고 싶지도 않어."
오후 다섯 시. 모든 일을 마친 이혜정과 친구가 퇴근길에 올랐다.
동국대나 S호텔이나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놓고 장충동에 위치하고 있다.
길을 거니는데, 익숙하면서 낯선 기분이 들었다.
"미안. 근데 갑자기 막 사람들이 찾으니까."
"알았어."
"혼자서 많이 힘들었어?"
"아니야. 언니도 고생했는데."
"야. 진짜 나도 갑자기 끌려가서 정신없었어."
"알았어. 사정 모르고 툴툴대서 미안해."
어쨌든 알바는 끝났다.
이제 집에 가서 마하를 봐야 한다.
핸드폰을 열자 부재중 전화가 여섯 개 와 있는데 문자나 이런건 없었다.
"아, 피곤하다."
"진짜 정신없다. 호텔 일해도 로비에서 키나 전해 줘야지. 저런건 사람이 할 짓이 못 돼."
"언니. 우리 알바도 했는데 족발이나 먹으러 갈까?"
"야, 족발 비싸."
"내가 살게."
"정말? 에이 어떻게 그래.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뭐가 됐든, 일단은 밥부터 먹어야겠다.
마하도 설명도 다 나중 이야기야.
무엇보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서로의 입장이 조금 달랐을 뿐이지.
"어디로 갈까? 우리 늘 가는데?"
"아니. 조금 걸어서 신당동으로 가자."
"지금 이렇게 피곤한데?"
"금방이야."
그렇게 이혜정이 피곤한 걸 뒤로 미루며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대한민국 인천 국제공항에 또 다른 아름다운 사람이 찾아오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한국말 할 줄 아세요?"
"그럼요. 저 어렸을 때 한국에서 살았다니까요."
"이야. 정말요? 우와. 아무튼 환영합니다, 알렉산드라 씨."
"알렉스라고 불러 주세요. 저도 모델로서 다시 한국에 돌아와 너무 기쁘네요."
"하하하~ 와 진짜 말 잘하시는구나. 아니 한국인 친구가 있으세요?"
"있죠. 멋있는 친구가."
벨라루스의 스포츠 스타이자 패션모델.
2004 아테네 올림픽 여자 단식 동메달 리스트 빅토리아 알렉산드라가 한국을 찾아왔다.
구마하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라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