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중독 (6)
"혜정아, 내 말 듣고 있어?"
"어? 미안. 좀 피곤해서."
"아니. 우리 얘한테 속은 거 아니냐고. 이게 무슨 간단한 일이야. 완전 노가다였잖아!!"
"알바가 다 그렇지 뭐. 걔라고 알았을까..."
"아무튼, 얼굴 보면 한마디 해야겠어. 그냥은 못 넘어가."
"됐어. 뭘 얘기해. 연예인 나타날 땐 좋다고 뛰어다니던 사람이."
"그건 그거지!!"
원래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몸은 힘들어도 가슴 한쪽 뿌듯한 감정을 느끼곤 했었다.
아.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 이렇게 나는 또 한차례 사회를 경험하며 나아가겠구나.
하지만, 오늘은 그냥 졸리고 피곤할 뿐이다.
떡볶이도 맛있는 거 모르겠고 더부룩하기만 하다.
원인이 뭔지는 알고 있다.
마음이 편치 않은데 입이라고 즐겁겠는가.
"안 되겠다. 너 지금 눈이 감기고 있어."
"배불러서 그러나. 점점 졸려져..."
"혜정아. 그냥 빨리 택시 타고 들어가. 응?"
"됐어. 버스 타면 돼. 얼마나 멀다고."
"아끼지 말고. 그러다 종점에서 눈 뜨는 거야."
"하하하! 그때 언니같이?"
"어~ 어!"
친구에게 물어보고 싶다. 내가 왜 그랬는지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다.
왜 피했을까...?
짧게라도 지금 알바중이야 라든지, 먼저 말한 게 여기였어? 같은 대화를 했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웃고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
아. 아니다.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럼 마하를 어떻게 알았냐부터 모든 걸 설명해야 되는데, 말과 행동이 앞뒤가 안 맞잖아. 바로 아까만 하더라도 난 걔 모른다고 했는데, 친구가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언니.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뭐?"
"만약에 말이야..."
"응. 응."
"...아까 그런 데 언니 남자 친구 있으면 어떻게 하겠어?"
"무슨 의미로? 같이 일하러 와서?"
"아니. 애인이 되게 유명한 사람이고 아까 그런 데 초대된 하객이라면. 언니는 같이 가겠어?"
"그럼."
"진짜?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부담될 게 뭐 있어. 사람들이 관심 가지는 게 내가 아닌데. 내가 할 게 없지."
"..."
"그런 인맥이 없으니까 우리는 일한 거고 거기 있던 사람들은 앉아서 고기 썰고 그랬겠지."
단순하게 보면 그렇지만.
막상 닥치면 안 그럴걸?
그런 시선들. 이야기들. 안 겪어 본 사람들은 몰라.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반반 내."
"괜찮아. 오늘은 내가 낼게. 먼저 언니가 밥 사 준 것도 있잖아."
"흠. 근데 그건 또 뭐야?"
"아. 얘랑 같이 가서 먹을 거."
"싸웠다고 하지 않았어?"
"그거야말로 그거고... 같이 먹으면 좋잖아."
"야. 이럴 거면 그냥 남자 친구한테 데리러 오라고 해."
"됐어. 갈게. 언니 전화해."
"어이구... 너 진짜 내 말 들어라. 지금도 눈 반 감겼어. 택시 타고 가."
"알았어."
"남자 친구 놔두고 뭐하냐. 이럴 때 써야지."
남자 친구 두고 뭐하냐고?
글쎄. 우리는 섹스를 잘 해.
생리나 몸이 힘들어, 할 수 없는 몇몇 날을 빼고는, 서로 진솔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몸에 있어선 거리낄 게 없어.
자유로운 편이야. 그런 쪽으론 눈치 볼 것도 없고. 보지도 않고.
관계에 있어서 스트레스가 쌓이진 않어.
다만, 그런 건 파트너 시절이나 연애 초창기 때 이야기지.
함께 있는 순간이 길어지자 이제는 몸이 아닌 마음이 깊어지면서 오는 문제가 너무 버거워.
아마, 나 힘들다고 데리러 오면 안 되냐고 하면, 얘는 어디 있든 달려오긴 할 거야.
하지만 그건 비겁해 보이잖아.
상대방이 원할 땐 밀어냈는데, 내가 필요하다고 도와달라는건...
좀 그래.
"후우... 아, 또 놓쳤네. 다들 택시만 타고 다니나..."
하염없이 도로에 바짝 붙어 지나가는 차들을 보고 있는데, 어떤 트럭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느 세월에 너와 내가 만나 점 하나를 찍을까~♬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
진짜. 저런 노래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구나.
사랑 정말로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어떻게 너랑 내가 만나서 이렇게 됐을까.
지금도, 반대편 버스에 마하의 광고가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나에게 이 사람의 성공은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었다.
십 년간 키가 작고 왜소한 아이에서 학교 여자애들이 수군거리는 아이로. 그리고 국민 영웅으로. 나만이 다가가고 만질 수 있는 사람으로.
상처도 깊지만, 아까 알바하던 애들이 수군거리는 그 이상으로 그에겐 여자들이 좋아할 매력들이 넘쳤다.
이혜정은 손안에 쥔 떡볶이 2인분 세트를 바짝 움켜쥐며 손을 들었다.
"여기요. 아저씨."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의자에 앉아선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문자를 찍어 본다.
[저녁 먹었어? 나 지금 떡볶이 사 들고 가는데 같이 먹을까?]
토닥토닥 배가 부르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문자를 전송한 뒤 이혜정은 창밖을 보며 생각을 정리해 본다.
마하의 인기나 명성은 그 사람의 개성이야. 그런 걸 핑계로 굴면 안 돼.
그냥 어떻게 생각해 봐도 내가 원인이야.
처음부터 우리 관계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면.
친구들이 누구 만나냐고 물었을 때 얘길 했다면.
우리 학교 놀러 오고 싶다고 했을 때 자연스럽게 초대했다면.
그냥 데이트하잘 때 편안하게 같이 돌아다녔다면...
만약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선은 창밖 빠르게 스쳐가는 풍경을 쫓는다.
그러자 속에 꾹꾹 눌러 담아 둔 먼 과거의 일들까지 불쑥 튀어 나오는 것 같다.
(이혜정? 걔 뒤로는 호박씨 존나 까고 다닐걸?)
아니야. 그만하자. 그만 생각해.
집에 가. 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차분히 앉아서 이야기해 봐.
화났으면 달래 주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나도 당황스러워서 그랬다고 말하면 돼.
이해해 줄 거야. 마하는 좋은 애니까.
그냥 주목받고 그러는 게 싫은 거니까.
나만 그러는 거 아닐걸? 누구라도 그럴걸?
당장은 좋아 보여도 막상 이런 사람 만나면 다들 번거로워할 거라고.
그런 주변의 관심이나 수군거림. 감당할 수 있는 사람 몇 없어.
이혜정은 밀려오는 졸음을 참아가며 간신히 아파트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현관문 밖으로 TV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문을 열었다.
"나 왔어."
언제 돌아왔는지 몰라도, 구마하 역시 외출복 차림으로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내가 왔는데도 돌아보지 않는다. 역시나 마음이 상한 것 같다.
감정이 온몸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밥 먹었어? 내가 보낸 문자 봤지?"
"..."
이혜정의 질문에 구마하는 답하기 싫다는 듯 가뜩이나 큰 볼륨소리를 리모컨을 들어 더 키워 버렸다.
그런 모습을 보며 혜정은 짧게 한숨을 쉬고, 밖에서 사 온 음식들을 식탁에 올려놓으며 연인에게 다가가 곁에 앉는다.
"화났어?"
"아니."
"뭘 아니야... 제대로 토라져 있는데..."
"..."
연인의 눈을 바라보지만, 그는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감정을 더 쉽게 살피고 얼굴을 보기 위해 혜정은 소파 아래로 내려가 그를 올려다 보았다.
구마하는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그래서 괜히 리모컨만 여기저기 누르다 그냥 TV를 꺼 버리며 한숨을 쉬었다.
"저기 있잖아."
"미안."
"..."
"일 시작 전에 호텔에서 무섭게 얘길 한 게 있어서 그래."
"...뭔데?"
"하객들이랑 아는 척하지 말라고. 말 걸어도 피하라고 그랬단 말이야. 안 그러면 오늘 알바비 안 준다고..."
이혜정은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차근히 알려 주었다.
호텔에서 제시한 주의 사항도 있지만, 자꾸 이상한 사람들이 전화번호 달라고 귀찮게 굴기도 했고, 여러모로 신경이 날카로운 상황이었다.
"누가 너한테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고?"
"응. 아까 너 나한테 왔을 때도 그런 상황이었어."
"그래서... 줬어?"
"미쳤냐! 내가 왜!!"
오히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하가 참으로 고마운 순간이었다.
혜정은 그런 마음을 담아서도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미안해. 잘못했어. 화내지 마."
"후우..."
"나도 놀래서 그랬어. 사람은 많지. 일은 복잡하지. 옷은 불편하고 주변에선 자꾸 니 얘기 하고 있지."
"누가 내 얘기를 해?"
"있어."
"누군데. 뭐? 내가 뭘 어쨌다고."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그냥 좋은 얘기였어."
"근데 왜 그런 게 힘들어?"
어느 날 갑자기 서로의 성별이 바뀌지 않고서야 그가 이 감정을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혜정의 이야기가 멈추자 구마하가 말하기 시작한다.
"친구랑 아르바이트를 간다고 했어. 그래, 그럴 수 있어. 학교도 바로 앞이고, 나도 내가 어디 간다고 분명하게 얘기하진 않았으니까."
"...넌 왜 말 안 했어?"
"그냥. 동호 형님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비공개라고 하는데 그런 거 지켜 주고 싶고. 나도 기자들한테 시달려 보니까 그럴 수 있겠다 싶었던 거지."
"착하네. 배려해 준 거 아냐."
"아무튼 간, 너도 뭐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뭐 그래. 그런 사정이 있었으면 놀라고 당황했을 수도 있지."
"응..."
"근데, 문자 하나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나?"
"...바빴다니까."
"아무리 바빠도. 사람들이 내 얘기하고 있었다면서. 그럼 너 여기 왔어? 이런 문자 하나 정도는 보낼 수 있잖아."
"진짜 정신이 없었다니까... 시키는 건 많고."
"니 혼자 그 많은 일을 다 했어? 아니잖아. 중간중간에 화장실 정도는 갔을 거 아냐."
이제 와서 밥도 안 주고 일 시켰다는 얘기 해 봐야 답답함만 커지겠지.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조차 조용히 지나가자 했던 본심을 부정할 수 없다.
혜정이 할 수 있는 건 미안하단 얼굴로 조용히 말을 듣는 것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론 끝까지 외면하고 피해 버린 모습에 마음이 상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전화 한 거야?"
"아니. 끝나면 그냥 가자고. 나 차 끌고 갔으니까."
"..."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했어. 대체 니가 날 끝까지 외면하는 이유가 뭘까. 대체 쟤가 왜 저럴까?"
"......"
"오늘도. 거기 있던 사람들, 다 먼저 알아보고 같이 사진 찍자 그러는데. 동호 형도 자기가 신랑이면서, 주인공이면서, 후배들한테 나 막 챙기라 그러고... 나도 내가 어디 가서 그렇게 부끄러운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너 씻었어?"
"어?"
"같이 씻을까?"
피곤했다. 몸이 너무 지쳐 있었다.
오랜만에 일을 나간 것도 있어 더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몸이 피곤한 것보다 마음이 지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은 이혜정이었다.
구마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혜정과 함께 거실 욕조에 들어가 몸을 뉘였다.
한 사람이 쓰기엔 여유로운 공간도 둘이 들어가니 복작복작해 진다.
구마하는 최대한 허리를 세워 앞에 공간을 만들었고 이혜정은 그의 품속으로 들어가 무릎을 접고 앉았다.
"엉덩이에 뭐가 닿아."
"아. 뭐라는 거야. 당연히 닿지..."
"뭔가 이렇게 있으니까 좋다."
"...너무 치사한 거 아니냐?"
"미안. 정말로. 근데 진짜 거기까지 생각이 닿질 못했어."
"..."
첨벙.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내며 혜정이 욕조 물로 세수를 했다.
구마하가 그녀에게 묻는다.
"거기라는 게, 내 마음이라고 봐야 하나?"
"응..."
"듣기에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닌 거 같은데..."
"마하야."
혜정이 몸을 뒤로 눕히자 젖은 머리카락이 구마하의 가슴에 흘러내린다.
"너 희진이 알어?"
"희진이가 누구야?"
"서희진이라고 기억 안 나?"
"누군데? 우리 고등학교 나온 애야?"
"아니. 중학교 때 공부 잘하던 애."
"몰라. 그런 이름도 처음 들어."
"..."
"왜? 걔가 뭔데?"
"넌 진짜 예쁜 애들만 기억하는구나."
"야. 이혜정. 말이 좀 이상하게 흐른다?"
"후후, 아무튼, 내 친구였는데."
혜정은 짧게나마 자신이 왜 이렇게 소문이나 사람들의 평판을 신경 쓰는지 그에게 알려 준다.
한때 잘 어울리던 친구가 있었다.
그룹으로 뭉쳐서 어울리던 친구라, 가끔 쉬는 날엔 집에도 놀러 가고 최대한 가깝게 지내던 아이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나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다.
"왜?"
"...모르겠어. 내가 싫었나 보지."
"싫으면 대놓고 말을 하든가. 왜 뒤에서 암투를 벌여. 여인천하야 뭐야?"
"참 드라마 좋아해."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내가 예쁜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듣고 혜택받은 것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려서부터 억울한 일들도 보기보다 많이 겪으며 자랐던 순간들이 있다.
"뭐. 그럴 수 있지."
"그래서 그래. 너가 싫거나 부끄럽거나 그런 건 진짜 아니야."
"남자겠네."
"어?"
"여자애들 그러는 거. 남자잖아 보통."
그리고 구마하가 이야기한다.
"서희진인가 뭔가 걔가 걔 좋아했던 거야. 확실해."
"..."
"김우진. 니 남자 친구였던 애."
이혜정은 바짝 몸을 웅크리며 입을 다문다.
생각보다 욕조 물이 뜨거워서였을까? 아니면 하루의 피로가 풀려서 그런 걸까?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다.
어쩌면 엉덩이를 지나 허리까지 닿는 마하의 성기가 딱딱해지고 커져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그래. 그런 거다.
씻고 나가서 할 생각을 하니까 그래서 긴장되는 거야.
그렇다고 해 두자.
"근데 혜정아."
"...응?"
"그건 어릴 때 이야기잖아. 그런 걸로 아직까지 사람들 눈치 보고 그런다는 건..."
"..."
"아니야. 됐어.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이런 주제로 남한테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