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중독 (7)
"정말 안 해도 돼?"
"됐어. 피곤해 죽겠는 얼굴을 하고서 뭘 하자고."
"그래도 마음은 하고 싶잖아...?"
"자. 힘들 땐 별로 느끼지도 못하면서."
물론 하고 싶었다.
둘 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와 피부도 부드러웠고 은은 한 보디 샴푸 향과 그녀의 몸에서 나는 체취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참았다.
지금은 단순하게 욕구를 채우기보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입으로라도 해 줄까 하는 걸 극구 말리고 애를 편안하게 눕히며 말했다.
"다리 안 아퍼?"
"아퍼. 골반이랑 허리랑 다 아퍼."
"발 이쪽으로 줘 봐. 마사지해 줄게."
근육이 잡히지 않는 맨들맨들한 종아리를 주물거리며 얘기했다.
"너도 그런 게 있었구나."
"응..."
"난 너는 세상 모든 애들이 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신도 아니고.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냐?"
"하긴. 악플러들도 끝까지 떠드는 거 보면. 난 이번에 또 새로운 소문이 더해졌던데?"
"뭐?"
"몰라. 미친놈들이 의혹이네 뭐네. 굴더라고."
내 얘기가 번질 거 같아 다시 주제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선아도 혜정이는 알게 모르게 상처가 많은 아이라고 했었다.
그냥 못생기고 인기 없는 애들의 질투가 아니었을까? 라고 하기엔. 평판이라는 거, 남들이 수근거린다는 거. 그거 무서운 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니까.
사람들 이야기에 신경 쓰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러니까 왜 그런 애를 사겼어."
"어...?"
"김우진 말이야."
"..."
"공부 잘하고 인기 좋고. 내 기억에 걔 그때도 태윤이 못지않게 크지 않았나? 여자애들이 좋아할 놈이긴 해."
"...주변엔 우리 사귀는 거 얘기 안 했었어."
"그때도 숨겼어?"
"...뭐 그냥."
"아무튼 꼭 사귀는 것들은 지들만 몰라요. 남들 다 아는데."
"우리 다른 얘기 하면 안 될까? 걔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아무튼, 그래. 보통 남들 헐뜯는데 죄책감 느끼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너도 그냥 잊어. 나라고 안 그러겠냐?"
"너도 그랬어?"
"만약에 우리 중학교 때 니가 김우진 만나는 거 알았으면. 나도 친구들 붙잡고 그 새끼 욕 했지."
"왜? 날 좋아하니까?"
"그럼. 인간이 내 감정이 우선이지. 남들 누가 신경 써."
"...악플러들도 그래서 용서해 주고 있는 거야?"
"아니. 이것들은 그냥 상종하기 싫어서 회사에 알아서 해 달라고 하는 거고."
정말 그러지 않나? 내가 아쉬운 게 있고. 그리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그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면.
말할 수 있는 자리와 들어 주는 사람이 있는데 뒷담화 안 할 인간이 어디 있어. 다 그냥 존나 씹고 마는 거지.
"난 싫어. 난 그렇게 뒤에서 누구 욕해 본 적 없어."
"정말로? 아무도? 한 번도?"
"응. 지금까지는."
"오~ 인성."
오늘 여러 일들을 거쳐 그녀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
단지, 머리는 이해하지만 서운한 감정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혜정아."
"어. 아, 거기 되게 아프면서 시원하다."
"그럼 넌 계속 이렇게..."
"응?"
"그냥 조용히 사귀고 싶은 거야? 데이트도 안 하고 주변에 알리지도 않고? 집에서 둘이 시간 보내는 식으로?"
"...모르겠어."
"모르면 어떡해. 우리 문젠데."
혜정이가 슬쩍 자세를 돌리며 시선을 피한다.
"너는 그렇게 나랑 사귄다고 알리고 싶어?"
"어."
"왜?"
"그냥. 좋으니까."
"주변에 자랑하고 싶어서?"
주물주물 그녀를 만지던 손에 힘이 빠진다.
"자랑 좀 하면 안 돼?"
"...왜 그런 걸 자랑하려고 그래?"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난다.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다. 어디가 문제가 되는 거야?"
"그걸 꼭 남들이 알 필요가 있나?"
"우리 이런 얘기. 먼저도 했었고. 아니 둘이 싸울 때마다 꼭 다 투는 얘기 아닌가?"
"..."
"그래서 지금까지는 내가 맞춰 왔다가, 결국 오늘 그런 일이 벌어진 거 아니야."
"그건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렇게 사과를 들었으니 그냥 지나가면 되는 건가...?
다시는 안 그러겠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 같은 말을 듣고 싶은 건 내 욕심일까?
이런 게 남녀의 차이점인가?
"난 우리가 뭐 잘못한 애들도 아니고 굳이 숨기고 살아야 한다는 게 정말로 이해가 안 돼."
오랜만에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얘도 감정적으로 힘든 거 알고 몸도 지친 거 알지만, 그래도 할말은 해야 되겠다 싶었다.
"방법을 바꿀 필요가 있을 거 같애."
"어떻게...?"
"숨지 않는 쪽으로. 만약 세상이 알게 된다 하더라도. 평판이 떨어져도 내가 떨어지지, 너가 문제 될 건 없지 않을까?"
"우리 지금 같이 살고 있어. 동거라는 건 남자보다 여자가 더 리스크가 큰 거야."
"어떻게 큰데?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한다고."
혜정이는 한참을 말없이 고민하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쟤 구마하랑 살았었다며? 이러면 어떡해..."
"그러니까 내가 결혼하자고 한 거 아냐!"
어차피 연애의 끝이 이별 아니면 결혼이라면.
헤어질 거 아니니까 결혼하는 게 대체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지...?
나이가 빠르다고? 아직 대학생이라고?
내가 이기적인 건가...?
내가 지금 돈 잘 벌고 이런다고 삶을 너무 쉽게 생각하나?
하지만, 상대방 감정만 챙기다 상처 입은 아까의 모습을 생각하자면.
"나랑 있는 게 싫어?"
"그만하자. 그럼 또 다시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니까."
"후우..."
기사도를 발휘해 지금은 안 한다 했지만.
솔직히 다리 마사지하면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엉덩이나 보드라운 허벅지를 보면서 각만 재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내 인생 처음이다.
이렇게 섹스 생각이 떨어질 수도 있구나.
역시 섹스란 감각이 아닌 마음의 문제야.
사랑의 감정이 무뎌지고 답답하니, 아무리 혜정이가 샤워 가운만 걸치고 있어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가 않어.
내 여자 친군데... 욕망이 사그라든다.
와, 이제는 나도 정말 모르겠다.
* * *
"결혼식장에 혜정 씨가 있었다고?"
"네... 그쪽은 알바로. 저는 하객."
"우와. 하하하! 재밌었겠는데?"
"재밌긴요. 난리도 아니었어요..."
"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월요일이 되었다.
갑자기 급하게 스케줄이 잡혀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민구 형과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이다.
형한테 주말 동안 벌어진 일들을 털어놓고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니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갔다고?"
"모른 척 지나간 걸 떠나서. 저한테 죄송합니다 라고 존댓말까지 썼어요."
"아니. 보통 그런 상황이면 더 인사하고 아는 체하고 그러지 않나?"
"되게 매몰차게 돌아서던데요."
"허허허... 그렇게 생긴 사람도 남들 이목을 신경 쓰는구나..."
"생각보다 더 따지고 있었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일들이 너무 많았다고 하면서."
"보통 여자애들 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혜정 씨는 미인인데 그런다고?"
"모르겠어요, 저도. 당사자가 아닌지라..."
한수빈은 그런 걸 신경 썼을까?
수빈이 말고 다빈이만 하더라도 내 연애사에 남들이 뭐라든 관심 주지 않았을 거 같다.
하긴, 두 사람은 어쨌든 주목받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무대에 오르는 소프라노나 스포츠 선수. 다 남들 앞에 나설 수 있는 뱃심 없으면 할 수 없는 직업이 아닌가.
이런 것도 환경이 다르다고 봐야 하는 걸까?
부모님끼리 사이는 좀 나쁠지라도. 평범한 집안에서 어른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뛰어난 외모에 나쁘지 않은 두뇌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
고시 삼관왕이란 말이 있다. 사법, 행정, 외무고시를 모두 통과 한. 올림픽으로 따지면 세 종목 금메달과 같은 이야긴데.
예쁘게 태어난 여자는 고시 삼관왕과 같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그런 애가...
정말 누가 보나, 세상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난 도무지 납득을 못 하겠다.
혜정이가 괴롭힘을 당했다는 게 내가 놀림당한 그 정도의 수위도 아니고.
그냥 여자애들 질투 험담 같은 건, 민구 형도 말했듯 그 또래 애들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일인데.
지금도, 그녀가 내 여자 친구고, 그녀를 괴롭혔던 누군가의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론 난 혜정이보다, 서희진이란 애 감정이 더 이해가 된다.
사랑이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의 이해.
질투가 나지. 나도 지민이 형 진짜 얼마나 싫었는데...
사람이 좋은 걸 알면서도 그냥 싫어. 있다고 그런 거.
그래도 그런 마음이 있으니까 더 노력하고 운동하고.
안지민을 넘어서겠다는 일념 또한,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삼고.
"..."
"아무튼, 잘 이야기해 보고."
"민구 형..."
"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어. 뭐."
"얘가 저한테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
이해가 안 돼.
그런 애가. 그런 뒷소문 정도로 흔들린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무슨 소리야. 당연히 혜정 씨도 솔직하게 말하고 있겠지."
"저는 여자들 진심 꺼내는 사람 거의 없다고 보고 있거든요."
"마하야. 과잉 해석이야. 왜 그렇게까지 사람을 의심하냐."
"..."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그건.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그렇게 약한 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뭔가 아직 혜정이가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더 있는 거 같아요."
"마하야. 그런 일들은 나중에 둘이 술 한잔하면서 천천히 잘 풀어 보고."
"네."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지."
"알겠습니다."
해외 유명 업체가 새롭게 한국에 론칭을 하는데 모델 좀 서 달라고 제의가 들어왔다.
원래 외국에서 계약된 인물이 있었는데 뭔가 스케줄이 꼬였는지 취소되는 바람에 잡힌 일이다.
"아. 형 저는 연예인은 해도. 동호 형님같이 예능인은 못 할 거 같아요."
"이제 와서 왜?"
"그렇잖아요. 예능인 되면 내 삶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가서 웃고 떠들어야 하는데, 진짜 사람 할 짓 아닌 거 같고."
"야 인마. 여자 친구 문제로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냥 여자 친구가 아니니까 그러죠..."
"하하하! 새끼. 좋을 때다."
이것저것 떠드는 가운데 차는 서울 강남에 도착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미팅과 리허설을 겸하는 현장에 들어섰는데.
"우와. 해외 메이커라더니. 외국인들이..."
"그러게요. 어이고, 이거 한국 모델들 봐도 쫄리는데... 이런 자리에..."
"야, 야. 어깨 펴. 넌 국제적인 스포츠 스타야. 주눅 들지 마. 니가 여기서 빠질 게 뭐 있어."
운동이라면 몰라도 이건 모델 일인데.
한국 모델들이랑 있어도 잘생긴 사람들 지나가면 위축되는데.
하물며 외국 모델들 앞에서라면.
"와, 진짜 다들 멋있다. 확실히 외국 애들이 몸이 다르네."
"그러게요. 저 아저씨는 스페인 이런 쪽 사람 같은데. 저 흑인은 얼굴도 잘생겼네."
"그러게. 인기 많겠다."
"그 정돌까요?"
"그럼?"
"여자들 존나 따먹고 다닐걸요. 둘 다 게이여라."
"하하하! 야 인마. 너 미쳤어?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뭐 어때요. 여기 다 외국인들만 있는데."
외국 애들이 많은 곳이라, 형이랑 둘이 스테이지 구석에서 쑥덕대고 있었는데 누가 뒤에서 말한다.
"아쉽게도 그들은 둘 다 스트레이트야."
뭐야 이 어색한 한국말은? 누가 우리 말을 들었어?
아니. 그보다. 이 목소리는?
설마 싶은 감정으로 심장을 두근두근하며 돌아본 그곳에.
"비키...?"
"오랜만이야. 마하."
벨라루스의 테니스 선수. 빅토리아 알렉산드라가 있었다.
"어...? 누 누나가 어떻게 여기?"
"어떻게긴. 일하러 왔지."
"아하하. 하하! 진짜?"
아테네 이후로 근 2년 반 만에 만나는 나의 비너스.
여전히 금발에 푸른 눈을 한 그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누가 보더라도 홀짝 반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그녀가 반갑게 다가와 안긴다.
"마하! Long time no s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