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10화 (310/401)

감정 중독 (8)

"이야~ 마하 너 진짜..."

"하하하! 왜 그래요, 형. 자꾸?"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진짜로 친구야?"

"그렇다니까요."

"아까 보니까 누나라고 부르던데? 그건 뭐야?"

"처음엔 이름으로 불렀는데. 자기가 연상이라고 누나라고 부르라고 하더라고요."

"외국인이 그런 걸 따져?"

"어렸을 때 한국에서 몇 년 살았어요. 학교도 다녔고."

"오오~ 그래서 한국말을 잘 하시는구나."

빅토리아와는 틈틈이 사진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소식을 나눴었다.

다만, 직접 본 건 아테네 이후 오늘이 처음이다.

내가 유럽을 갈 때는 저쪽이 시합 때문에 남반구에 가 있거나, 훈련 때문에라도 보기 어려웠는데. 예상 못 한 곳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니, 반가움에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것 같다.

"헤이 마하~"

"누나. 근데 공부를 한 거야? 말이 꽤 늘은 거 같은데?"

"호주에서 만난 GYM 트레이너가 한국 분이었거든. 너 안다고 하니까 되게 잘해 주시더라고."

"아아~ 그렇구나."

"덕분에 공부를 많이 했지. 코리안 무비도 많이 보고."

"하하! 왜?"

"그냥. 언젠가 만나면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한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은데, 가뜩이나 대화가 안 되니까 사람이 더 어눌해지고.

그래서도 죽어라 영어를 공부했었다.

헌데, 그녀가 먼저 한국말을 해 주니 그게 어찌나 고마운지.

감동이었다.

"난 오히려 너가 온다고 하길래 놀라고 있었어."

"그러게. 한국을 오면 온다고 말을 했어야지. 그냥 왔다 가려고 했단 말이야?"

"스케줄이 급하게 잡혀서. 그리고 마하가 내가 보자면 볼 수 있는 사람이긴 해?"

"무슨 소리야.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지고 있어."

"슈퍼스타잖아. 나 공항에서도 니 사진 봤었어."

서로 정답게 근황을 나누고 있는데, 민구 형이 자꾸 옆에서 눈치를 준다.

연예인들 앞에서도 당당하던 사람이 이러니까 신기하네. 외국인들 좋아하는구나.

"어. 누나. 이분은 나 매니저 형. 동료야."

"Oh~ Hello. Nice to meet you."

"나! 나! 나이스 투 미츄입니다, 저도!!"

은퇴했다는 소식은 봤는데 모델이 됐을 줄은 몰랐단다.

나도 누나 화보 사진은 간간이 봤는데 설마 한국까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민구 형까지 함께, 셋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화 소리가 커지자 새침하게 콧대만 높이고 있던 외국인 모델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아까 민구 형이랑 쑥덕댔던 흑인 친구와도 안면을 텄다.

알고 보니 내 팬이었다면서, 경기 다 봤다는 말도 해 주고, MA HA 신발도 몇 켤레 가지고 있다는 말도 전해 주었다.

"너무 아쉽네요. 설마 여기서 구를 만나게 될 줄이야."

"아이고 고맙습니다. 제가 뭐라고."

"진심입니다. 당신은 올림픽에서 위대한 모습을 보여 줬어요.

그레이트 했어요."

"하하~ 뭘 그레이트까지."

머쓱하게 칭찬을 듣고 있는데 누나가 그에게 키득키득 웃으며 말한다.

"헤이 마이크. 마하가 아까 너랑 콴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어?"

"뭐?"

"에이 누나 왜 이래! 사람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것도 잠시. 우리는 일을 하러 온 거라 누나는 누나대로 스텝들에게 돌아가고, 나도 민구 형과 세팅을 받으러 가는데. 형이 자꾸 옆에서 신기한 듯 묻는다.

"아니. 왜 이렇게 친해?"

"누구요?"

"누구겠냐! 당연히 비키 씨지!!"

"비키는 예명이고. 원래 이름은 빅토리아."

"심지어 예명을 불러? 보니까 아무리 친한 사람들도 알렉스라고 부르는 거 같던데."

그도 그럴 것이. 아마, 내가 어리고 그러지만 않았다면. 즉, 그 때보단 성숙한 지금 정도의 모습으로 그녀를 처음 만났다면.

나의 사랑은 한국인 이혜정이 아니라 벨라루스의 빅토리아가 됐을 수도 있으니까.

"올림픽에서 만났잖아요."

"하이고야... 올림픽 못 나간 놈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하하하! 형 준비하러 가요."

새록새록 모든 순간들이 기억난다.

작은 선수촌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사랑을 나누던 순간들이라든가. 인형 같은 리듬체조 선수랑 친하게 인사했다고 화내던 모습들이라든지.

파티장을 압도하던 그녀의 존재감. 폐막 전날 몰래 빠져나가 건물 구석에서 나눴던 행위들 까지.

"하하하. 여기서 볼 줄이야."

혜정이 때문에 사그라든 욕망이 꿈틀대며 살아나는 것 같다.

아니야. 바람이 아니라고.

그냥 나와 그녀의 추억 속에 그런 장면들이 있다는 거지. 내가 이혜정을 왜 배신해.

그냥 모든 게 다 어제 일 같이만 느껴진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도, 선수였던 시절도.

그리고 올림픽도.

"..."

웃기네. 몇 살이나 먹었다고 벌써부터 추억을 운운하는지.

에이 됐다. 잡생각 접고 일이나 하자.

"그럼 몇 살 때 만난 거야?"

"고 3이죠."

"세상 좁아서 좋겠다."

"아 형, 왜 그래요. 끝나고 같이 식사해요. 누나도 선수라 운동얘기 많이 알 거니까."

정말이지. 그때만 해도 어리숙하고. 영어도 못 하고. 외국 나간 것도 처음이라 뭘 하든 긴장을 숨길 수 없어 촌티가 줄줄 났는데.

몸도 키만 컸지, 지금과 다르게 육상으로 날렵한 편에 속했었다.

그랬던 나를 품어 주고 사랑이 뭔지 생각해 보라던 빅토리아.

그녀의 눈에 현재의 나는 어떻게 보일까?

멀리 스태프들에 둘러싸여 화장을 받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립스틱을 바르고 있어, 살짝 입을 벌린 상태로 거울을 보는데.

내 눈에 비키는 여전히 아름답다.

보통 서양인들은 빨리 늙는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이 전성기다 이러는데, 저 사람은 그런 것도 잘 모르겠다. 역시, 예쁜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예쁘다는 말이 맞는 거 같아.

비키와 눈이 마주치자 씩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야?"

"네. 형."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뭐가요?"

"이 새끼. 아까까지도 혜정 씨 때문에 고민이다 이러더니, 뭔데 지금? 눈빛 뭐냐고?"

"하하하! 형 뭔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 * *

리허설을 마치고 비키와 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토리노 끝나고 연락이 좀 뜸해졌었지."

"서로 바빴지 뭐."

"아니. 그냥 너한테 질투가 났었어."

"왜?"

"후후후. 아틀레틱의 정상을 넘어 스키의 정상을 찍는 걸 보는 데, 플레이어로서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이 들더라고."

"그렇게 따지면 누나는 다른 직업의 정상이 됐잖아. 모델 이것도 해 보니까 어렵더만."

"벌이가 더 나아지긴 했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추억도 추억이지만 우리에겐 20대라는 현재가 있었다.

아테네 올림픽 테니스 여자 단식 동메달리스트인 빅토리아는 그 후에도 여기저기 많은 시합을 나갔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지금은 모델로 완전 전업. 은퇴를 선언하진 않았지만, 선수는 관두고 새로운 삶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굳혔다.

그녀는 유럽을 대표하는 모델 중 한 사람이었다.

패션에 있어 명성이나 인기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존재였다.

"내 여자 친구가 누나 팬이야."

"걸프렌드가 있어?"

"응. 사랑을 찾았어."

"하하~ 아하하! 맞다. 그랬었지?"

비키가 관심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누구야?"

"퍼스트 러브."

"하하! 정말?"

"응. 내내 마음을 밀어냈는데, 작년 말부터 같이 지내고 있어."

"좋겠다. 잘됐네."

"그렇지 뭐..."

'맞어, 잘 됐어. 그래서 요즘 너무 행복해.'라고 나도 웃으며 말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는 불만 때문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비키도 은은한 미소로 걱정스레 물어보았다.

"뭐가 잘 안 돼?"

"그냥 쉽지 않네."

"쉽지 않다니까. 세상에 사랑만큼 어려운 게 어딨어."

"누나는 좀 어때? 요즘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

얼마 전 사귀던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플레이보이였다고, 당장에 정리하고 싱글로 있다고 해 준다.

"힘들었겠네. 누나 같은 사람 만나면서 왜 바람을 피우지?"

"남자의 습성이지 뭐."

"아니야. 난 안 그래."

"흐음~ You so sweet~!"

"돈 많은 남자였지? 그러니까 사람을 볼 때 인성을 보라니까."

"시끄러워."

"누나도 늙어. 20대 중반 지나지 않았어? 좀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고."

"마하! Shut the fuck up!!"

당분간은 한국에 머물 거란다.

일도 일이지만, 오랜만에 한국에 와 보니 생각보다 너무 많이 변했고, 옛 추억도 떠오르며 어릴 때 친구들도 만나 보고 싶단다.

"누나. 국민학교 다녔다고 하지 않았나? 그때 친구를 찾을 수 있어?"

"인터넷은 모든 게 가능하니까. 그리고 아마 몇 명은 바로 가도 볼 수 있을 거야. 부모님이 식당 하던 친구들이 있었거든."

"하긴. 한 사람 알면 줄줄이 나오지. 동네가 어디였는데?"

"종로."

"종로. 오래된 동네니까 사람 찾기 그렇게 어렵진 않겠네."

대충 날짜를 둘러보고 스케줄을 확인하고 있는데, 누나가 묻는다.

"뭐해?"

"그냥. 같이 돌아다니려고."

"Why?"

"와이라니. 누나 아무리 말 잘 해도 여긴 외국이야. 당연히 내가 챙겨야지."

"마하. 너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괜찮아. 상관없어. 친군데 뭐 어때."

"흠."

"누나는 지금 손님이야. 여기는 내가 사는 나라고. 당연히 내가 운전해 주고 대우해 주는 거니까.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친구로 빅토리아를 대접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론 사랑에 관한 이 답답함을 토로할 누군가가 필요했었다.

여자 마음은 여자가 아니까. 혜정이와의 연애 상담을 누구한테 받을 수 있겠어?

누구한테 물어야 돼? 내 주변에 있는 여자라곤 형수님 아니면 감독님 사모님인데.

선아? 혜정이 오른팔인 애한테 걔 상담을 받으라고?

그런 사람들 아니면 죄 나랑 잤던 애들밖에 없는데.

그나마 연락되는 애들은 1년 후배 선영이나. 세계선수권 준비중인 다빈이고.

없다고. 없어. 주변에 도움을 구할 사람이 아무도.

* * *

[갑자기 스케줄 잡힌 건 잘 끝났어? 몇 시에 끝나? 나 오늘 일찍 들어갈 거 같은데. 내가 저녁 해 놓을까?]

구마하가 우연찮게 빅토리아를 만난 그때. 이혜정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아닌 그의 입장을 생각하니 서운할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그렇다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고. 그냥 최대한 옆에서 기분을 맞춰 주는 것뿐.

이혜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해 본다.

"야. 야. 남자 친구랑 문자 그만하고. 얘한테 말 좀 해 주라니까."

"문자 지금 하나 보낸다."

"정말로...? 그렇게 힘들었어?"

"그냥 빡빡하다. 쉴 틈이 잘 없다 정도."

"쉴 틈이 없는 게 아니라. 쉬게 두질 않는다니까? 호텔이라고 옷은 어찌나 불편한지."

"맞다. 밥도 안 줬잖아."

"어어! 굶겼어. 이것들."

"진짜? 밥을 안 준다고? 그럼 뭐 먹고 일해?"

"둘이 구석에서 떡 훔쳐 먹고."

"하하... 그게 뭐야... 엄청들 고생했네."

"괜찮아. 돈 벌었잖아. 이 언니도 괜히 오늘 너 보니까 툴툴거리지. 일 할 땐 좋아했었어."

"좋아했었다네!!"

"그건 그냥 연예인들 보니까 그러지... 아무튼 일은 진짜 빡셨어."

천 명 가까운 사람들, 수많은 연예인과 유명인들을 직접 보고 온 여대생들은 풍부한 대화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구마하의 이야기가 나와도 이혜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몇 가지는 더 맞장구를 쳐 준다.

"그럼 사인 같은 거라도 달라고 해 보지."

"안 돼. 그것도 호텔에서 어찌나 신신당부를 하던지."

"맞어. 하객들이랑 아는 척하지 마라, 얘기하면 돈 안 준다 그랬지?"

"응."

그녀들의 이야기에 친구가 말했다.

"난 이런 얘기 들을 때마다 그렇게 생각해."

"뭐라고?"

"그냥 그런 사람들은 우리랑 사는 세계가 다르구나. 씀씀이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마인드나 뭐나."

친구의 목소리에 이혜정이 깊게 공감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맞어. 정말 다른 거 같더라."

수업도 일찍 마치고. 만남도 정리된 혜정은 집으로 돌아가며 친구들과의 대화를 곱씹어 본다.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

같은 세계에 산다는 건 뭘까? 한 아파트 위아래 층으로 살던 그때는 같은 세계를 살았다고 할 수 있나?

초중고를 다니면서도 몰랐던 아이. 알아도, 그냥 나를 싫어하는애. 잘생긴 고깃집 오빠가 있는 키가 작고 왜소한 11층 아이.

어쩌면 마하는 한 번도 나와 같은 세계를 산 적이 없는 것 같다.

있다면 아주 잠깐. 고 3 시작 전 마음 편히 성욕을 풀었던 그 때?

미운 오리 아닌, 못생긴 오리가 불사조가 된 걸 뭐라 할 수는 없다.

어쩌면 나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라.

마하의 성공을 인정하면서도, 내 능력으론 절대 그런 세상을 오를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를 목격하고 있는 거니까.

"오리. 꽥 꽥..."

조용한 목소리로 버스 창밖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혜정에게, 핸드폰이 진동하며 문자가 왔음을 알려 준다.

[어. 나 오늘 친구 만나서 늦을 거 같애.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그렇구나. 대학교 애들?]

[아니, 외국인 친구. 우연찮게 만났어.]

다행이다. 주말 동안 속상해서 말도 잘 안 하던데.

나가서 재미나게 놀다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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