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야 (1)
"마하. 그런 상황을 뭐라고 그러지?"
"뭐? 어떤 상황?"
"계산할 때. 가격 이런 거."
"설마? 디스카운트를 말하는 거야?"
"어. 뭐라고 하는 말이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
"뭔 소리야. 그냥 사. 돈도 잘 버는 사람이."
"아니야. 한국은 그렇게 해야만 했었어."
"아하하! 내가 사줄게. 뭔데? 뭐가 필요한데?"
"아니라니까. 시장이든 백화점이든. 제값 주고 사는 사람은 바보라고 그랬었어. 진짜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데."
"누나.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으음. 그때 한국 대통령이... 미스터 노태..."
"제발! 지금 2007년이야!!"
리허설을 마치고 빅토리아와 종로에 왔다.
누나가 기억하는 거리에서 소박하고 분위기 좋은 식당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
초등학교도 아닌 국민학교를 다녔던 사람답게 많은 것들이 과거에 묻혀 있지만, 그럼에도 꽤 많은 것들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며 현재와 그때를 비교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정말로? 아까 그런 건물이 그때는 없었다고?"
"없었어. 시청 앞도 그렇게 크지 않았고."
"시청이 작아졌을 리는 없고. 흐음."
"아무튼, 정말 많이 변했다. 마하 없었으면 헤맸을 거 같애."
"크하하! 누가 들으면 6.25 참전했다가 돌아온 줄 알겠네."
빅토리아는 나를 생각해 한국말을 썼지만, 나는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영어를 사용했다.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후훗. 마하도 정말 많이 변했어."
"봤을 때 난 어떻게 변한 거 같아?"
"BOY에서 GUY가 됐어."
"멋지네. 어른이 됐다는 뜻인가?"
"마하는 이미 멋진 어른이었지."
우리는 가슴에 담아 두고 하지 못했던 많은 말들을 나눴다.
농담이라든지, 아테네의 분위기라든지. 그때 만났던 친구들과 선수들. 파티와 추억. 마지막으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까지도.
"넌 그때도 플레이보이 기질이 보였어."
"아니라니까. 그냥 인사만 한 거라니까."
"후후후."
"무엇보다. 지금은 트루 러브를 만났어.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
짧게라도 혜정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줬다.
뷰티풀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만났다.
행복하다. 나는 절대 여자 친구 놓고 바람 같은 건 피우지 않는다.
그러자 빅토리아가 씩 웃으면서 턱을 괴며 묻는다.
"그래서. 그녀를 트루 러브라고 생각했다고?"
"어. 진짜라니까."
"흐음. 트루 러브라."
"후우... 아무튼, 그래서도 요즘 조금."
"스탑. 마하."
"왜?"
"러블리한 걸 프렌드 자랑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는데."
"자랑이 아니라, 솔직히 말하면 하소연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러니까 스탑이라고. 난 오늘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안 될까?"
"아. 미안.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구나."
"으으음. 그렇지 않어. 아직도 날 의지해 주고 있다는 건 기쁘고 고마운 일이야. 다만."
그냥 오늘은 인간적인 고뇌보다 우리가 재회했다는 사실을 더 기뻐할 수 없을까? 라며 그녀가 말했다.
연상은 연상이구나. 거기다 외국인이고.
뭔가 나이나 성별에 따른 개념이 없어서 더 한결 여유로운 기분이 느껴진다.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서도 그녀의 능숙하고 여유로운 행동은 배울 점인 것 같다.
"당분간 이곳에 있을 거니까. 마하도 지금 다 얘기하면 앞으로 더 할 이야기가 줄어들잖아."
"그래. 누나도 피곤할 건데. 미안하네."
"하하하! 끝까지 날 누나라고 불러 주는 거야?"
"그렇게 하라며. 알잖아. 한국인은 이런 데 민감한 거."
"으음. 우리 일 때문에 다시 만나야 되는데.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부르는 건 어때?"
"알았어. 나야 뭐든 해 달라면 오케이지."
"좋아. 그럼 다음엔 친구로서 지금보다 딥한 스토리를 들어 줄게. 괜찮지?"
"아우. 나야 그래 주면 좋지."
"오케이. 그럼 러브 스토리 말고, 마하 이야기를 해 봐. 듣고 싶어. 어떻게 모델이 될 생각을 한 거야?"
"하하! 그거는 말이지. 아까 우리 타고 온 차 있잖아."
"응. 응!"
"내가 사고를 쳤는데. 잠깐만. 이 얘기를 하려면 우리 형 소개를 먼저 해야 하나?"
퇴근길 혹은 데이트.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온 대학생들.
수많은 시민이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보았다.
나 때문에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름 그대로 승리의 여신이 보여 주는 금빛 아우라에 시선이 고정되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꿇릴 건 없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나는 국민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이니까.
오히려 혜정이와 같이 있으며 이런 게 너무 막혀있었어.
사람들의 시선 속 어딘가에서 나는 후련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럼. 제대로 된 에이전시가 있는 게 아니었구나?"
"아니야. 그냥 여러 가지 관리를 해 주는 우리 컴패니가 있는 거고. 모델 쪽으론 그때의 아르바이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뭐랄까, 나도 이 일을 제대로 진지하게 한다고 보기는 어려워."
"그런 거 치곤 스테이지를 멋지게 잘 소화하던데?"
"그건 그냥 쑥스러워서 무뚝뚝하게 걸어가는 거고. 하하!"
"역시. 뭘 하든 타고난 사람들이 있어."
"에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타고났는데?"
"마하는 전문 모델들 못지않은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잖아. 그것도 재능이야."
"비키. 그거는 내가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 거고."
모델이란 직업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 직업이 가지는 매력. 인지도 수익 등등.
비키는 현재 소속된 의류 메이커만 몇 갠가 되다고 말해 준다.
"우와. 그럼 패션 위크 이런 거 하면 바빠지겠다."
"그렇지. 그럴 땐 밀라노 파리 뉴욕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해야 되고."
"와, 멋있다."
"마하도 할 수 있어. 오히려 한국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에이전시에서 먼저 연락을 할걸?"
"진짜? 난 모델에서 무명인데?"
"마하. 이 바닥은 명성이 곧 파워야. 마하가 어때서? 스포츠 스타잖아. NICE 모델이고."
"하하. 그런가?"
"얼마 뒤 파리 간다고 했었지? 우리 매니지먼트 한번 만나 볼래?"
"나야 좋지."
그런데 갑자기 비키가 표정이 바뀌어 솔직히 말해 보란다.
"뭘?"
"모델이 된 건 어때? 만족해?"
"좋아. 나쁘지 않어."
"후회하는 거 아니야?"
"후회? 내가 왜?"
"그냥. 중간중간 뭔가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 기분이 들어서."
"오오~ 역시."
"내가 너무 바로 맞췄나?"
"아니라곤 못 하겠고. 솔직히 지금도 뭘 하고 있는지 잘은 모르겠어."
잠깐 시선을 돌려 가게 밖을 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손을 흔들어 준다.
반갑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자 그들이 디카를 꺼내 우리 사진을 찍었다.
"저렇게 그냥 찍게 놔둬도 되는 거야?"
"뭐 어때. 신기하니까 찍겠지."
"뭐야 방금 그건? 락 스타야?"
"하하! 나 한국에서 인기 좋아."
"멋있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모르겠다는 거. I don't know anything."
"Hm~ What do you want to know?"
"퓨처. 라이프. 그냥 내 인생의 남은 시간들."
스물한 살에 모든 걸 이룬 시점에 나의 남은 삶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도 사랑에 매달렸는데, 그 사랑이 내 마음같이 흘러가지 않는다.
"후후후. 결국 이야기를 하는구나."
"뭐. 지금 느끼는 심정이 그렇다는 거니까."
계속해서 화두를 이어 가자면.
빅토리아는 학생 때부터 모델과 선수 활동을 병행해 왔으니 지금 하는 일이 자연스레 프로페셔널과 자아실현으로 이어지겠지만, 난 그냥 뭔가 사는 대로, 가는 대로 흘러가는 기분이다.
일이 많아지고 찾는 곳이 늘어날수록 더 그러는 거 같다.
쇼 오락 프로그램을 출연해도, 광고를 아무리 많이 찍어도. 오히려 통장에 돈이 쌓이면 쌓일수록 이 돈으로 평생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하루하루 시간이 공허해지며 성취감만 멀어지는 기분이다.
그런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생각보다 꽤 심각한 상황인 거 같은데?"
"그래서 사랑에 더 매달리는 거 같아."
"흠."
"암튼, 그래. 뭔가 열심히 살고 싶은데..."
선수 때는 진짜 하루하루가 치열함의 연속이었고. 그렇게 해야만 했었는데. 이상하게 왜 지금 와서 그때가 그리워지는지...
똑같이 바쁘게 살고 있고, 똑같이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고 있다. 똑같이 사람들이 좋아해 준다.
단지, 경기장 대신 무대에 서고, 응원하는 관중들 대신 패션을 즐기러 온 관람객들의 시선을 받을 뿐.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채워지는 게 다르다.
도대체 왜일까...
"나는 이유를 알 거 같은데?"
"왜? 뭐 때문에?"
"살아가는 매 순간 승부가 없어서 그래."
"승부?"
"맞어. 승부. Competition."
컴피티션... 경쟁을 말하는 건가?
비키가 말하길, 자신도 선수를 은퇴하고 처음엔 공허한 감정이 찾아왔었다고 해 준다.
Competition이 주는 긴장감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주지 않느냐는데, 크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 게 있긴 하지."
"시합을 앞둔 상황이면, 난 언제나 그랬던 거 같애."
긴장감에 잠을 못 자고, 소화도 안 돼 뭘 먹어도 먹었는지 잘 모르겠고. 불안과 초조로 숨이 막힐 것 같다.
훈련은 힘들고 결과는 불확실하다.
아파 죽겠는 몸을 이끌고 테니스 코트 위에 오르면, 상대는 너무나도 잘 정비된 강한 모습으로 우뚝 서서 존재감을 비춰 준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승부가 되려나?
만약 지면, 패배에서 오는 좌절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매일 나를 옥죄여 왔지만.
"하지만 그런 상황을 이겨내고 시합에서 승리하면. 크레이지한 순간이 오는 거지."
원래대로라면, '아니야. 비키. 난 그 승부의 세계가 싫어서 스포츠 세계를 떠난 거야.' 라고 말을 했어야만 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나도 놀라 더더욱 입을 열지 못했다.
어딘가, 마음 속에서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말들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스포츠는 스포츠로서 가치가 있다.
메달은 그저 색깔일 뿐이다.
결과보단 과정이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 모든 세계를 벗어나고 난 다음에는...
그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지 못하는 현실에 버거워하는 내가 있으니까.
"Hey! Listen. Look at me. MAHA."
"어? 어."
비키가 가만히 눈을 바라본다.
그녀의 푸른 두 눈동자가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괜찮아. 이제는 끝났어."
"뭐. 뭐가...?"
"전부 다."
모두가 나에게 앞으로 뭘 하고 살 거냐 물을 때. 나는 단 한 번도 깔끔한 답을 해 주지 못했다.
기자들. 형이나 친구들. 심지어 감독님도 그랬고 혜정이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그녀만이 지금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줬다.
"마하. 너는 파이널 라인을 멋지게 넘어섰어."
"결승선..."
"그래. 최종장의 이야기를 덮고 다음을 보면 돼. 그것도 멋진 도전이야. 마하."
"결승선을 지났다고?"
"그래. 끝났어. 다 끝난 일인 거야. 게임은 끝났어."
처음이었다. 은퇴한 나에게 이렇게 명쾌한 답을 내준 사람은.
그렇구나. 끝난 거구나.
그것이 은퇴라는 거니까.
내가 택한 길이니까.
"무엇보다 지금 마하가 들어온 이 세계도 스포츠 못지않게 치열해. 열정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려워. 편안하게 보면 안 돼."
"안 그래. 내가 뭐라고 이 직업을 편하게 생각해..."
"후후후. 그래. 그럼 되는 거야."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었다.
오늘 처음으로 은퇴하고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그만 일어날까?"
"좋아. 데려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