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12화 (312/401)

이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야 (2)

따스한 5월 중순. 서울 동국대 캠퍼스.

이혜정과 친구들이 공강을 맞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봄은 봄이구나. 날씨 좋네."

"그러게. 어디 가고 싶다."

"놀러 갈까? 야. 우리도 같이 여행 갈래? 애들 얘기 들으니까 국내 여행도 일박으로 가 볼 만한 데 많다고 하던데."

"됐어. 그럴 시간이 어딨어."

"왜? 너 뭐 있어?"

"있지. 휴학 없이 쭉 달려온 입장에선 슬슬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여행은 무슨..."

"그러니까 휴학을 하라니까?"

"안돼. 빨리 취직해야 돼. 돈 벌 거야."

"흠. 혜정이 넌 휴학 또 할 거야?"

"글쎄. 모르겠는데. 지금 와서 그냥 쉬는 건 시간 버리는 거 같고... 그렇다고 얘같이 취직에 올인하자니 뭘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미래에 대한 고민과 함께, 망중한을 즐기는 세 사람의 여대생앞으로 한 캠퍼스 커플이 밝은 모습으로 웃고 지나갔다.

"좋을 때다."

"좋을 때지. 부럽네. 1학년인가?"

"뭐야. 이혜정. 넌 남자 친구 있잖아?"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지. 누가 봐도 예뻐 보이지 않어?"

부담 없는 CC의 모습. 남들 눈치 볼 거 없이 서로만 챙기면 되는 연애.

연인의 책가방을 들어주는 남자 친구가 고마워, 키도 작은 그녀가 열심히 제자리 뜀박질을 하며 손부채질을 해 주고 있는데, 그런 모습까지도 모두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아. 그래. 맞어. 나도 연애를 해야 돼."

"연애는 아무나 하냐..."

"너 자꾸 나한테 왜 그래? 뭐 서운한 거 있어?"

"있지! 그럼! 먼저도 내가 소개팅해 줬는데 싫다고 깐 게 누군데!"

"그... 그건! 걔가 좀 실제로 보니까 이상한 애였다니까...!"

"알바를 소개해 줘도 힘들다고 투덜투덜. 소개팅을 해 줘도 투덜투덜. 언니는 진짜 우리가 같이 놀아 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 돼."

"와 진짜... 넌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할 수 있어...?"

"둘 다 그만해. 그러다 진짜 싸우겠다."

"너도. 맨날 착한 역할만 하지 말고. 니가 좀 소개시켜 줘 봐."

"나?"

"그래. 니 남자 친구 연대 다니잖아. 주변에 사람 많지 않아?"

"어... 어. 그렇긴 한데."

친구들 싸움에 괜한 불똥이 그녀에게 튀었다.

당황하는 이혜정에게 한 살 많은 언니가 선뜻 얼굴을 내밀며 묻는다.

"맞다 혜정아! 나 운동하는 애 한번 만나 보고 싶어!"

"어. 그... 학교에서 만나면 되잖아. 우리 학교에도 체육과 있고."

"됐어. 동국대 사체과 구려."

"하하하... 언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잠깐만, 연대면 구마하 있지 않나?"

"진짜. 야. 나 구마하 소개해 주면 안돼?"

"이 언니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언니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만나?"

"왜 못 만나! 나 먼저도 호텔에서 구마하 봤어!"

"하하하! 그건 얘도 봤잖아."

이혜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친구들은 유명인 이야기가 나오자 신나서 목소리를 높인다.

"안 그래도 내 친구가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다가 들었는데."

"뭐?"

"구마하가 그렇게 여자 친구한테 잘 해 준단다."

"진짜로? 뭐로?"

"아. 왜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해."

"없으니까 하지. 무슨 상관이야."

"그래. 너 착한 척 좀 그만하라니까."

"이게 착한 척이야?!"

다급하게 주제를 바꿔 보려 해도, 친구들은 이미 대화에 빠져들고 있었다.

"진짜로?"

"응~! 여친이 명품에 미쳐 있는 앤가, 먼저는 신상 나오는 건 와서 다 사 갔다고 그러더라니까."

들려오는 이야기에 혜정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챙겼다.

어느새 명품에 미쳐 있는 애까지 됐구나...

정말 그 가방 신발들 다 들고 다녔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뭐야? 너 갑자기 어디가?"

"도서관."

"야. 얘기하다 말고 어디 가?"

"설마. 착한 척한다고 삐진 거야?"

"안 삐져. 내가 애냐. 그냥 과제 때문에 자료 받을 게 생각나서.

잠깐만 있어. 금방 갔다 올 게."

"그럼 우리도 같이 가. 에어컨 쐬고 싶어."

"그래. 가서 시원하게 커피 한 잔씩 하고 오자."

열람실로 자리를 옮긴 혜정과 친구들.

과제를 핑계로 구마하 이야기에선 벗어났지만 그녀들은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해 줄 거야?"

"뭘?"

"언니. 소개팅."

"...그거 아까 끝난 이야기 아니었어?"

"뭘 끝나. 시작도 안 했는데."

"그러게. 너 된다 안 된다 말 안 해 줬어."

"근데... 그런 거 부탁하기가 좀..."

"왜? 나 어디 소개하기 쪽팔려?"

"에이. 언니. 아무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그래."

"그럼 뭐 어때. 소개해 주라. 난 농구부 같은 애들보다, 축구부나 야구부 이런 데 좋던데."

"아니... 그게 저기..."

"왜 그래? 너 진짜 남친이랑 뭐 있어?"

"후우..."

연애는 그냥 각자가 알아서 하는 거지... 그걸 왜 소개를 해 주고 말고 해야 하는지...

어떻게 거절해야 그녀가 상처를 안 받을까 고민하는데. 내적 갈등을 겪는 혜정을 보며 친구들이 먼저 말한다.

"야. 뭘 고민해. 곧 연대 축제 아닌가? 그냥 자연스럽게 놀러 갔다가 보면 안 돼?"

"그래. 니 남자 친구도 서로 인사하고. 그냥 잠깐 보면 되잖아.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아니. 그러니까..."

다들 나이가 있고 눈치가 있었다.

불편해하는 그녀를 보며 한 살 많은 언니가 먼저 물러나며 말했다.

"알았어. 없던 일로 해."

"언니. 그게 아니라."

"괜찮아. 나도 그렇게 학교 간판 보고 매달리고 하는 애 아니야."

"..."

"진짜 괜찮아. 농담으로 한 얘기였어. 자료 빨리 찾고 나가자."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떨어져 앉은 친구가 다급히 화두를 바꾸며 말했다.

"우와! 한국에 이 사람이 왔네?"

"누구? 너 누구 보고 있어?"

다행스럽게 그녀도 화제를 찾아 다른 자리로 가 버리고, 이혜정은 조여 오는 숨통을 풀어 내며 심호흡을 뱉는다.

정말... 이렇게 가다간 제 명에 못 살다 죽겠다.

다짐을 받고 진실을 알려 주든가 아니면 교우 관계를 정리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지...

일단은 과제부터. 그리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

타닥타닥 학번을 누르며 자료를 열람하는데.

주변에서 친구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우와. 되게 예쁘다."

"예쁘지. 이 사람 키도 엄청 커. 심지어 운동선순가 그럴걸?"

"진짜? 미국 사람인가?"

"아니. 동유럽인가 그렇지."

"으음. 운동은 뭔데?"

"테니스."

타자를 두드리던 이혜정의 귓가로 어딘가 익숙한 내용이 들려오며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이름이 뭔데?"

"빅토리아. 이름도 예쁘지?"

"그러게. AR 모델이라. 이것도 명품이야?"

"..."

AR이면...? 마하가 그때 급하게 갔었던?

이혜정도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모니터로 다가온다.

"명품이지. 언니 몰라?"

"나 명품 잘 몰라."

"이번에 한국에서 런칭한다는데. 음? 혜정이 너 왜 그래?"

"어? 너 자료 받는다는 거 다 받았어?"

"...빅토리아가 한국에 왔다고?"

"왜? 너도 이 사람 알어?"

"어. 알어..."

마하가 간 행사장에 그녀가 모델로 한국에 찾아왔다.

심지어 친구들이 먼저 이야기를 해 줬다.

"우와. 구마하도 여기 모델이라네."

"잘 나간다. 역시. 나도 운동을 할 걸 그랬나."

"..."

"근데 얘는 왜 이래?"

"혜정아. 너 뭐 있어?"

"어? 어... 아니 없어..."

그렇다면 왜 말을 안 했지...?

아니. 말은 했었나?

외국에서 친구가 왔다고 했던 게 그녀였단 말인가?

패션모델 같은 직업은 남성들보다 여성들 사이에서 더 인기몰이를 하고 이슈가 된다.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같은 유명모델이 내한했다는 소식은 이미 인터넷 한쪽에선 딱히 숨겨진 이야기도 아니었다.

[종로에서 봤던 빅토리아 실물 직찍]

[빅토리아 과거 한국에서 살았던 사진들]

그 외 기타 등등. 그녀의 한국 소식과 일터 환경 등. 많은 사진과 정보들이 인터넷에 떠도는 가운데.

[나 먼저 친구랑 서울 갔다가 빅토리아 구마하랑 단 둘이 밥 먹는 거 목격함.]

[헐? 어떻게 아는 사이지?]

[아테네 올림픽에서 만났다는 거 같던데. 현장 스텝들도 둘이 되게 친하다고 말해줌]

지난 강동호 결혼식 사건 이후로, 구마하는 집에 잘 붙어 있질 않았다.

친구 만나러 간다. 나도 약속이 생겼다. 같은 이야기에 이혜정도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원래도 스케줄이 많은 친구고, 그것 아니어도 사회생활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오늘에 와서는 그녀도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 진짜... 황당해서..."

집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알게 된 이혜정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거의 뭐 공개 데이트를 하고 다니셨네..."

불만을 표시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뭐가 있나?

사진은 많았고 수많은 사진 속 두 사람은 단순히 가까운 친구를 넘어 충분히 연인 관계로 보일 정도로 다정한 모습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렇게 컴퓨터를 붙들고 앉아 있기를 몇 시간.

밤 10시가 되어서 구마하가 집으로 돌아왔다.

"나 왔어."

"..."

이혜정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구마하가 들어오는 현관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오직 거실에 있는 모니터에만 집중한 채 굳어 있을 뿐.

구마하도 바로 그녀의 경직된 모습에 우려 섞인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디 갔다 와?"

"어딜 가. 오늘 수업 있었다고 했잖아."

"...너. 요즘 누구 만나고 다녀?"

싸늘한 목소리에 구마하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왜 뭔데?"

"누군데?"

"뭐 때문에 그러는데."

구마하도 모니터로 다가와 자신과 빅토리아의 사진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다.

"아아~ 난 또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의 행동은 혜정의 속마음에 불을 지핀다.

그녀의 목소리가 싸늘함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화가 실리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그 행동은...?"

"왜? 내가 뭐 잘못 했어?"

"그럼 안 했어?"

"친구 만난다고 했었잖아."

"무슨 친구?"

"아. 왜 그래, 갑자기. 뭔데?"

날카로운 반응에 구마하의 목소리도 힘이 실렸다.

"그럼 이 사람이 내 친구지 뭐야."

"야. 너."

"혜정아. 오해하지 마. 그냥 누나가."

"누나?"

"아후. 아무튼, 비키가. 한국에서 살아서, 예전에 자기 살던 동네도 가 보고 싶다 그러고. 사람들도 찾고 싶다고 하길래 도와준 거뿐이야."

"허. 허허. 허허허."

"야. 뭘 그렇게 웃냐?"

"그냥. 어이가 없어서."

그의 말도 일리는 있겠지만, 혜정 입장에선 납득되지 않는 몇가지 부분들이 있었다.

"너 일부러 그랬지."

"아. 뭐가 또?"

"내가 너랑 안 돌아다닌다고 일부러 더 이러고 다닌 거 맞잖아."

"야. 오버하지 마."

"오버라고?"

"그래!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니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어."

원래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편안함을 넘어선 익숙함이 있었다.

구마하도 참아 온 감정들을 숨기지 않는다.

서운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그의 주장에도 물러섬이 보이질 않았다.

"지금 나한테 자격이라 그랬어?"

"그래! 야. 내가 그래서 진작 같이 좀 나랑 같이 다니자고 했잖아."

"그래서 좋아? 나가 돌아다니고 사진 찍히고 이러니까 좋냐고."

"그래 좋다! 사람들 보고! 다 좋아해 주고! 싸인도 해 주고 사진도 찍고 아주 좋았다!!"

씩씩대는 구마하의 역성이 이혜정의 두 눈을 붉게 만든다.

"애초에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거야. 나가자고 해도 싫다. 사람을 만나도 싫다."

"나도 너랑 나가려고 했어!"

"뭘! 언제!!"

"앞으로 조금씩! 너한테 맞추려고 했다고. 근데 그걸 못 참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녀?"

"아니 그렇게 따지면 뭐 어떡하라고 나한테."

"먼저 얘기를 하든가."

"했잖아. 친구 만난다고!!"

"이 사람은 너랑 잔 사람이잖아!!"

이혜정의 목소리가 절규에 가깝게 울려 퍼졌다.

구마하도 심장이 조마조마해지는 기분으로 숨을 몰아쉰다.

"야. 이제 와서 왜 그러냐?"

"뭐...?"

"너 나름 열린 마인드로 있던 애 아니었어?"

"뭐라고...?"

"아니야? 왜 갑자기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냐. 너 맨날 나한테 그랬었잖아. 누구 만났냐. 잤냐. 그런 거 묻던 건 너잖아."

"야. 구마하..."

"그리고, 너도. 민서랑 셋이 할 땐 언제고. 왜 이제 와서 순진한 척인데."

* * *

밤 11시. 보통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려는 시각.

이혜정의 대학 친구도 자취방에 누워 TV를 보며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린다.

"어. 혜정아."

"언니..."

"뭐야 왜 그래? 너 울어?"

"언니... 나 지금 집으로 가도 돼...?"

"뭐야. 왜 그래? 너 지금 어딘데?"

"정말 미안. 근데 지금 성남까지 가고 싶진 않고. 하루만 부탁할게. 응?"

"야, 뭐야. 일단 빨리 와!"

* * *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집에 돌아왔는데 혜정이가 나랑 비키 사진을 보고 있었고.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꺼내며 따지고 들었고.

그리고...

"..."

그 얼굴. 그 표정....

늘 언제나 예쁘고 다정하던 그녀가.

여차한 순간조차 귀찮고 짜증 난다는 정도의 일그러짐만 보여 주던 그녀가...

완전히 나를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하아. 하하하. 하하... 아, 나 씨발..."

헤어지자고 말했다.

끝내자고 했다.

나도 화가 나서 막 생각 없이 소리를 질렀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잖아.

갑자기 왜 지가 그런 걸 따지고 있어...

내가 누구를 만나든. 그게 왜 문제가 되는데...

잤어? 아니. 그런 짓 안 했는데.

그건 바람이니까. 내가 얘를 놔두고 왜 그런 짓을 해.

무엇보다 나한테 먼저 내가 만났던 사람들 잤냐 어쨌냐 물었던건 지 아니었어?

아니. 지한테 다 맞춰 줬는데... 뭐야 대체... 왜 이런...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전화도 받질 않고. 밤 11시에 가방만 챙겨서 집을 튀어나가고.

성남으로 간 건가? 아니면 어디 찜질방?

대체 이 시간에 누구한테 간 거지?

선아한테 전화도 못 해. 둘이 무슨 일 있었냐고 물으면 혜정이 입장만 난처해지니까.

아니 그보다. 진짜 끝낸다고...? 이렇게...?

견딜 수가 없다.

이 집이 마가 끼었어...

수빈이에 이어서 혜정이까지. 여기 재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

숨통을 조여오는 좆같은 기운을 피해 나도 밖으로 나왔다.

짓눌려지는 큰 압박감을 벗어나기 위해 정처 없이 차를 몰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빅토리아가 머물고 있는 호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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