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15화 (315/401)

이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야 (5)

"마하. 아까부터 계속 전화 오는데 안 받아도 돼?"

또 한 번 사랑에 실패하고. 난 비키의 호텔에 틀어박혀 있었다.

누군지 모를 전화를 계속 피하자 빅토리아가 핸드폰을 가져와 내민다.

"시끄러워. 어떻게 좀 해 봐."

"비키… 난 진짜 왜 이러는 걸까."

"이제 그만하고."

"진짜 사랑이 뭘까… 아직도 모르겠어."

"사랑이란 건 없어. 아직도 그런 환상을 믿는 거야?"

처음엔 무슨 일이냐며 달래 주고 안아 주던 그녀도 슬슬 귀찮다는 듯 짜증을 내고 있었다.

빅토리아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나는 잠시 현실로 돌아와 전화를 받았다.

민구 형이었다.

"네, 형. 저 호텔이요. 그냥 여기 있어요. 알죠. 내일 떠나는 거.

여권이랑 그런 건 집에 있어요."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을 위해 이것저것 묻는 형한테 덤덤하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 주었다.

"끝내기로 했어요. 뭘 잘 얘기해요. 끝났는데. 그러니까 여기 있죠."

자잘한 일을 부탁하고 다시 그냥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실망감인지 분노인지 모를 기분에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다.

수빈이 때는 운동에라도 전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으니까… 누구한테 매달릴 수도 없고, 친구들도 다 같은 친구들이라 말을 꺼내기도 쪽팔리고….

남들이 한심하고 유치한 새끼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혼자서는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래서 빅토리아한테 붙어 있다.

"누구였어?"

"민구 형. 나랑 같이 일하는 스태프."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내일 나가는 거 때문에 일정 확인차 연락했어."

민폐도 여기까진 거 같다.

나가서 따로 방을 구하든가 해야지.

일어나서 짐을 챙기는데 그녀가 있어도 된다고 말해 준다.

"미안. 너무 내 기분만 생각한 거 같아."

"그건 괜찮아. 내가 기분이 나쁜 건 언제까지 끝난 일에 매달리 느냐는 거야."

빅토리아가 앉아 보라며 차분히 이야기를 건넸다.

"마하. 이제 그만 좀 하고."

"난 이번에야말로 마침내 완벽한 사람을 만난 줄 알았어…."

"어떤 의미의 완벽함이라는 거야?"

"사랑이지."

"세상에 완벽한 사랑이란 없어."

무표정하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정말로 그런 거 같다.

완벽한이란 단어만큼 불안전한 것이 어디있단 말인가.

하물며 사랑. 이 좆같은 것에서 완전함을 찾은 내가 모자란 놈이지.

"또 왜 울어."

"비키. 난 정말로 최선을 다했어. 진짜 몸과 마음을 다 걔한테 바쳤다고…."

"플리즈… 돈 크라이…."

여복은 없어도 내가 인복은 있는가 보다.

훌쩍거리는 초라한 모습을 그녀가 또 한 번 달래 준다.

이래서 사랑보다 우정이라고 하는 건가….

"이제 그만. 마하는 멋진 사람이니까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돼."

비키는 이번 일에 대해 이렇게 단평을 내렸다.

나는 꿈을 꿨고, 그래서 꿈에서 깨어났을 뿐이다.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그 사람의 현실이 끔찍하게 변한 건 아니다.

그냥 눈을 떴을 뿐.

다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된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남녀가 사귀다 헤어질 수도 있고, 나라고 이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니까.

그럴 테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되겠지.

하지만, 그 사람이 내 가슴속에서 이혜정의 위치에 도달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비키. 내가 힘든 건 그런 것도 있지만…."

"응."

"…."

"괜찮아. 얘기해."

진짜로 혜정이가 헤어지자고 얘길 한 게 아니다.

나를 무너뜨린 건 바로 나 자신.

그토록 사랑에 목마르고, 세상 누구보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 자신했던 바로 나.

그날 그 시각 그 집에서의 나는 혜정이가 정말로 싫어졌었다.

그래서 상처 받으라고 일부러 못된 말들을 골라서 소리쳤었다.

내가 나 자신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 * *

"예. 대표님. 네.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니요. 반응은 좋아요. 여기 사람들도 마하한테 좋은 이미지 가지고 있더라고요. 네.

스포츠 아니라 패션계에서요."

끔찍한 밤을 보내고, 무너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뒤. 프랑 스 파리로 넘어와 이유이 선생님 론칭 행사에 참가했다.

이것저것 미팅도 잡고 사람들이랑 저녁도 먹고 마침내 쇼케이 스 당일이 됐는데.

"네? 마하가요…?"

한국에서 나랑 빅토리아의 스캔들이 터졌단다.

스포츠 신문, 연예계 정보 프로그램, 그리고 인터넷.

어디든, 소문과 사진들이 번지고 있다고 감독님한테 연락이 들어왔다.

"아. 네. 알겠습니다…."

스캔들 소식에 민구 형은 도핑 걸린 선수처럼 떨었지만, 당사자인 나는 조금은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고 있었다.

오히려 바로 그때가 아니라 왜 지금? 회사랑 조율할 이야기가 있었나? 할 정도로 태연하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 정도로 혜정이와의 이별 후 모든 일들은 나에게 시시한 일들이 되고 말았다.

"마하야. 대표님이 잠깐 통화 좀 하자시는데?"

"나중에 제가 끝나고 전화한다고 말씀해 주세요."

"야… 너. 아니요. 대표님. 마하가 지금 메이크업 중이라. 네.

행사 중입니다. 알겠습니다…."

감독님한테 따로 혼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스캔들이 나는 건 상관없지만, 진짜 사귀는 사이면 데리고 와서 인사라도 시켜 주라고 짧게 한마디 하시고 넘기신다.

"감독님 화 많이 내세요?"

"아니… 빅토리아 씨 아는 친구라고 하시네."

"알죠. 같이 아테네에서 밥도 먹었는데."

"마하야…."

"네. 형."

오히려 감독님보다 민구 형이 더 이번 일에 실망한 눈치다.

처음 보는 표정으로 목소리까지 근엄하게 바뀌고 있다.

후배 된 입장에서 선배한테 죄송하지만, 그런들 어떻고 이런들어떠리. 모든 일이 심드렁하게 받아치게 된다.

"뭐요. 말씀하세요."

"후우…."

"괜찮아요. 뭔데요?"

"아니다… 사생활이다. 그렇지?"

"그럼요."

싹수없는 나와 다르게, 민구 형은 역시나 착한 사람이었다.

먼저 나 대신 집에서 여권이랑 여행 짐 좀 챙겨 달라고 부탁했을 때도.

형은 내 행동이나 프로답지 못한 자세보다, 연애 문제로 노발대 발 난리를 쳤었다.

자초지종을 다 알고 난 다음에도, 내 편을 들지 않고 혜정이 입장에서 대변을 해 줬다.

여자 친구가 보기엔, 내 행동이 당연히 서운한 거라고. 자기가 봐도 내가 너무 바짝 붙어 지내는 것 같았다면서 문제의 원인을 내가 제공했단다.

개인적인 감정은 내려놓고 말하자면, 난 민구 형이 나보다 그녀의 시각에서 말해 준 걸 고맙게 생각한다.

"마하 씨. 올라가실 시간이에요."

"네. 형 우리 나중에 얘기해요. 일단은 여기 일해 주러 왔으니까."

"그래."

그렇다고 내가 형한테 내 마음을 대변하거나 변명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얘기를 한다고 민구 형이 해결해 줄 일이 아니지 않던가.

무뚝뚝한 얼굴로 스테이지에 올라 이유이 선생님의 옷을 알렸다.

꽤 많은 기자가 찾아와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관객이나 기자들이 서양인들이라는 것뿐.

리드미컬한 음악에 맞춰 커다란 무대를 한 바퀴 돌고 오는데, 어딘가 정리되지 않던 생각이 마무리가 지어졌다.

그냥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 같다.

늘 가지고 있던 걱정. 그녀가 나를 떠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현실로 목격했을 뿐.

우리는 서로의 몸은 잘 알아도 마음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거고. 나도 그렇고 걔도 그렇고 환경이 너무 달랐던 것뿐이다.

그저 그뿐이다.

앞에서도 한 번 말했지만, 문제는 그녀가 아닌 바로 나.

사랑을 마치 종교처럼 믿던 나 자신.

신념 그 이상의 가치를 순간의 감정에 치우쳐 부정하고 한순간에 돌아서 버린 좀만 한 나에게 있었다.

"마하 씨! 분위기 너무 좋았어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아. 저… 정말 멋있었어요."

"다음 준비할게요."

"뭐 문제 있으셨어요?"

"아니요. 그냥 긴장해서 그래요."

"의상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고요?"

"그럼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날 선 기분이 주변까지 전해지는 것 같다.

밤을 새우면서까지 이번 행사를 준비한 선생님네 직원들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표정을 살핀다.

아. 진짜 나라는 놈은 왜 이렇게 어른스럽지 못할 걸까….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좀 멋지게 끝내든가….

짜증 나게….

울며불며 폭발하던 혜정이의 모습보다 더 볼품없던 내 모습이 자꾸 기억을 괴롭힌다.

정말 왜 그랬을까….

한평생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 다짐했을 건데.

세상 더없는 행복을 주겠노라 선언했었잖아.

근데,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닌 미움을 느끼고.

똑같은 입으로 웃음이 아닌 역성을 질렀다.

운동 안 했으면 어디 가서 고개도 못 들 좆같은 면상으로, 성질 없는 성질 긁어모아 눈알을 부라리고. 주변에 인정받고자 피똥을 싸 가며 갈고닦은 몸으로 165도 안 되는 애 앞에서 과장된 액션으로 위협을 주었다.

난 좆같은 새끼다.

아니. 진짜 그냥 좆질이나 할 줄 알지 아무것도 모르는 병신이다.

근데 생각해 보니, 그 좆질도 다 그녀가 알려 줘서 그나마 헤쳐 나갈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한심하다. 정말….

강해지면 뭐 해.

메달을 따면 뭐 하냐고.

여기 이렇게 사람들이 챙겨 주고 웃음 지어 주면 뭐 하는데.

내가 한심한데….

* * *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요. Thank you everyone! Merci Paris!"

론칭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모두들 뒤풀이 장소로 옮겼다.

이유이 선생님이 의자에 올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도 난 사랑에 관한 끝도 없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사랑. 이 씹스러운 건 대체 뭘까?

파리는 사랑의 도시라는데, 어디 답 좀 알려 줘 봐라.

혜정이는 나의 완벽한 사랑이 아니었나?

어릴 때부터 꿈을 이루는 그 순간까지 나는 그녀만 보고 있던게 아닌가?

다른 여자를 만나도 마음 한구석엔 늘 그녀가 있었잖아.

긴 세월이 무색해질 만큼 어떻게 그렇게 포악하고 사납게 변할 수 있던 거지?

결국 나란 놈도 말만 뻔지르르한 새끼였다는 거야.

사랑? 희생? 행복?

하하! 좆 까라 그래.

"마하도. 너무 고생했어."

"네. 선생님. 축하드려요."

"왜 이러니? 분위기 처지게. 한국 소식 때문에 그래?"

"아니요. 저 괜찮아요…."

"어이구. 잠깐만 있어 봐. 사람들 인사 돌고, 다시 이야기해 보자."

까놓고 말해 난 그냥 내가 서운한 게 싫었어.

걔가 답답하게 구는 게 싫었다고.

내 말을 안 들어 주는 게 싫었어.

이혜정이. 그녀가. 가족보다 더 커다란 존재로 내 안에 존재하던 그 사람이….

그냥 싫었다고….

"마하 너. 또 분위기 잡고 있다. 잠깐 나갈까?"

"오셨어요. 근데 어딜 나가요?"

"잠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자."

"지금요? 무슨 말씀이세요. 주인공이 어딜 나가요. 선생님."

"괜찮아. 우리 슈퍼스타가 얼굴이 다 죽어 있는데. 그 정도는 내가 챙겨 줘야지."

"제가 무슨 슈퍼스타라고 그러세요… 전 그냥 아무것도 아닌 놈이에요."

"따라와. 센강 구경하러 가자."

이유이 선생님과 거리로 나왔다.

자줏빛 파리의 불빛이 도심을 밝히고 있다.

"으음~ 너무 멋지지 않니?"

"뭐가요?"

"이 도시. 어쩌면 난 여기에 오고 싶어서 패션을 시작했는지도 몰라."

"축하드립니다. 꿈을 이루셨네요."

"마하는 파리 와 봤어?"

"예전에 한 번요. 근데 저는 어디 가도 늘 경기장 주변에만 있어서. 관광지나 이런 도심은 처음이에요."

"애들한테 들었다. 유명한 사람이랑 아주 그냥 큰 스캔들을 냈던데?"

"…."

"빅토리아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꽤 유명한 모델이잖아."

"테니스 선수잖아요. 저한텐 모델보다 올림픽으로 이어진 인연이 있죠."

센강에 마련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멀리 노트르담 성당도 보이고 야경을 눈에 담는 관광객들, 파리 시민들이 이따금 우리를 지나쳐 간다.

조용히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데 이유이 선생님이 물으신다.

"여자 친구랑은 싸운 거야?"

"설마. 그럴 리가요."

"근데 왜 그런 짓을 했어."

"선생님. 우선순위가 바뀌었어요. 헤어져서 빅토리아를 만나러간 거예요."

"그래?"

"그럼요. 저 여자 친구 놓고 바람 같은 거 안 피워요."

"흠. 마하야."

"네."

"나 어떻게 생각하니?"

"…네?"

갑자기 훅 찌르고 들어오는 이유이 선생님의 질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린다.

멍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싱글이라며. 바람피우는 성향도 아니라고 하고. 아니면 그 금발 모델이랑 연애하기로 했어?"

"…그건 아니지만, 선생님 결혼하지 않으셨어요?"

"누가 연애하자니. 그냥 오늘 하루만 같이 있어 달라는 거지."

패션 디자이너 이유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참 매력적인 중년의 여성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나이가 있어 얼굴에 주름은 조금 있지만, 몸매를 보면 자기 관리도 철저하고, 일에 열정적인 모습과 눈빛에서 섹시함을 느낀 적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분을 여자로 보지 않았던 건, 선생님이 먼저 내 앞에서 업무 외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처음으로 사적인 감정을 담은 표정을 보여 주신다.

여자의 표정으로 달콤한 눈빛을 내게 보내신다.

"그냥. 오늘 너무 기분이 좋아서 누구든 데이트를 하고 싶었거든."

"선생님. 저는요…."

이제는 나도 나를 모르겠다.

방금까지 사랑에 관해 고민하고 있던 거 아닌가?

가슴 아파하고 행동에 후회를 하던 것 아니었어?

미친. 진짜 씨발….

그냥 존나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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