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야 (8)
"어디 갔었냐."
"그냥. 선생님이랑 있었어요."
"지금까지 뭐 했는데?"
"형. 제가 애도 아니고, 뭐 그런 걸 물어요."
"이 와중에도 사생활이다 이거야? 너 여기 놀러 온 거 아니잖아. 일 때문에 왔어. 그리고 난 널 케어해 주고 지켜봐야 될 의무가 있고. 그런데 내가 이런 거 못 물어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던 민구 형이었다.
대학 선배면서 물심부름 같은 것도 웃으며 받아 주던 사람이 오늘 처음으로 매니저란 직업에 회의감을 느끼나 보다.
뻔뻔하게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개념이 있어야지.
실제로 내가 끈적하고 음란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형은 걱정에 휩싸여 여기저기 분주하게 움직이고 다녔다니까.
조용히 털어 내는 짜증을 받아 주는 게 맞는 것 같다.
"미안해요. 생각보단 이야기가 길어졌어요."
"새끼야. 내가 진짜..."
"..."
"후우우. 그래, 다 좋다. 좋은데, 내가 너한테 실망하는 건 다른게 아니야."
"형. 죄송해요. 우리 그만하고 다음에 얘기해요."
"들어 보라고!"
술기운인지 짜증인지 평상시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준다.
이 형도 거친 모습이 있구나.
상택이 형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라 개지랄을 떨든 소리를 지르든 별 신경 안 쓰이는데, 착한 사람이 화내니까 엄청 불편하게 느껴진다.
"난 너 같은 애가 여자 때문에 망가지는 모습이 도무지 이해가 안 돼."
"형. 제가 뭘 망가져요."
"한국에서도 그랬고. 여기 와서도 그러고!"
"뭐... 그거야."
"새끼야. 넌, 나한테, 너는, 씨!!"
또 뭔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흥분하시나 기다리고 있는데. 술병을 벌컥 들어 마시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후우. 넌. 그래, 너는! 내 대학 후배를 떠나서. 니가 나보다 나이는 어릴지 몰라도. 나한테 넌 존나 영웅 같은 존재였었어."
"하하... 뭘 영웅까지야."
"왜 웃어! 진짜야, 인마!!"
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형한테 나는 하나의 우상이었다.
더 심하게 말해, 인간적으로 다가가고픈 존재였었단다.
그래서 가끔 내가 전화해서 뭔가 물어보거나. 찾아갔을 때 그렇게 좋았었단다.
오죽하면 내가 벌려 놓은 연세대 육상부를 졸업을 앞둔 4학년이 다 받아 줬을까.
이 사람이 나한테 참 고마운 존재임을 또 한 번 깨닫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지금이지.
"그건 형이 절 너무 좋게만 본 거고요..."
"진짜로 그랬다고. 실제로 넌 애가 꽤 진중하고 능력도 좋고.
그리고 매너도 있고. 막 떴다고 거들먹거리는 재수 없는 놈들이랑은 다르니까."
"..."
"정작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던 상택이도 알고 보니 너 좋은 놈이더라 같은 말도 해 줬고."
"근데, 사람이란 게 원래 멀리서 볼 때랑 가까이서 볼 때가 다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애 한번 실패했다고 이렇게까지 파괴적으로 절제 없이 노는 건, 진짜 니가 보기에도 좀 아닌 거 같지 않냐...?"
살다 보니 남자한테도 이런 소리를 듣는구나.
남녀가 바뀌었다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고백이었을 텐데. 너무 아쉽다.
민구 형이 솔직하게 말해 주길래, 나도 형한테 내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근데요, 형. 저는요. 만약 신이든 악마든 나한테 그런 기회를 제공한다면."
"무슨 기회?"
"내가 가진 금메달이나 연금, 광고 수익 모두를 가져갈 테니, 대신 평생토록 곁에 있을 한 여자를 주겠다. 그럼 난 과감하게 여자를 택해요."
"..."
"무너진다.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근데 진짜 온전하게 있기가 조금 어려운 상황이에요."
일 뭐. 돈 뭐. 광고 뭐?
알려지는 게 그렇게 좋은 건 아니야.
편한 건 있지. 어딜 가나 호감을 받는 것도 좋고.
하지만, 그 못지않은 피곤과 번거로움이 있어.
명품도 그래.
이 정도 몸을 키워 놓으면 옷이야 뭘 입든 다 태가 나.
차도. 외제 차 탄데도 달라지는 것도 별로 없어.
당장, 내 주변만 보더라도 그렇잖아.
고깃집 해도 잘 살어. 정석이 봐. 우리 형 보라고.
어떻게 보면 여자들은 명품보다 고기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애.
농담과 진심이 뒤섞인 말을 건네 본다.
민구 형이 날 하늘 위에 떠 있는 스타가 아닌, 내 옆에 있는 사람으로 봐 주길 원했다.
그러자, 어느 정도 진심이 통한 건지, 형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잘 좀 하든가."
"하하... 아 진짜..."
"너 이러면 다시 잘 될 것도 안 되지 않겠냐?"
이 형 취했구나.
하긴, 민구 형을 좋은 사람이라고 본 건, 원래도 이렇게 남의 일을 내 일 같이 고민하고 들어주는 점도 있었지.
갑자기 사적인 범위로 이야기가 확 번지고 말았다.
대화를 피하고 싶어, 마른 입이나 쩝쩝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어쨌든 피곤했다.
나도 며칠째 이어진 수면 부족과 패션쇼. 그리고 화룡점정을 찍은 광란의 섹스로 인해 만사가 다 귀찮은 상황이었다.
혼나도 혼나는 거 같지 않고, 미안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보다 내 귀찮음이 더 크게 느껴지는 순간.
한숨을 쉬며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는데.
"마하야. 너 지금 뭐 하냐?"
"뭐가요."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선밴데... 그 태도는 뭐야."
큰일이다. 이러면 진짜 싸움이 되는데...
"형.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하세요."
"뭐를...?"
"이러시는 거요. 죄송하고. 형도 사정 다 아는 만큼 나도 뭐 빠져나가고 싶어 나간 것도 아닌데. 선생님이 따라오라니까 간 건데."
"..."
"그만해요, 좀 진짜."
"너. 이렇게 행동하면, 혜정 씨도 진짜로 끝나는 거야."
"민구 형."
오늘 새롭게 삶의 지혜를 하나 배운다.
어른들이 왜 가까운 사람을 조심하라는 건지 확실하게 알았다.
아는 게 많으니 한 마디 한 마디가 듣는 사람 좆같으라고 하는 말도 아닌데, 씹쓰러움이 장난 아니다.
이 형도 감정이 상해서 더 독하게 구는 걸 테지만, 아까의 경험으로 겨우 봉합해 둔 상처가 아직 딱지도 안 아물었는데 새롭게 후벼 파지고 말았다.
"아니. 다 끝난 이야기를 왜 또 꺼내는데요!"
"안 끝났어."
"끝났다고요!"
"아니라고!!!"
대학 선배와 업무로 묶이며, 진심으로 좋은 관계로만 있고 싶었는데.
이쯤 되니 나도 슬슬 인내심이 끝을 보이는 것 같다.
목소리가 높아진다.
"아. 나 진짜 미치겠다. 저기요. 민구 형."
"왜?"
"제가 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대체 뭐라고 우리 관계에 그렇게 확신을 가지는데요. 네?"
"너 연애 처음 해 보냐? 여자애들 원래 다 그런 소리들 하잖아."
"그럼 그게 문제가 되겠죠!!"
"하... 나 이 새끼."
"그만하세요. 제발. 저라고 이 상황이 쉽겠냐고요. 걔는요, 저한테 있어서."
감정과 감정이 맞서자 민구 형도 조금은 누그러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나도 호흡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한편으론 이런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었어.
친구고 어디고 아무도 이별에 관한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나마 하나 있다면 그게 빅토리아였는데.
솔직히 내가 미안한 거지. 갑자기 들이닥쳐서 나 헤어졌다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 줬으니까.
"이혜정 걔는요, 내가 진짜 어떻게 보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평생을 좋아했던 사람이고."
"..."
"아무튼, 나라고 진짜. 허우. 형, 저 걔 진짜 좋아했어요. 남들이 보는 그 이상으로 노력했었고."
혜정이는 그렇다.
걔가 그렇게 쉽게 헤어진다 끝낸다 할 성격이 아니다.
몸은 조금 가벼울지 몰라도 마음은 진중한 애니까.
사랑이란 가치를 배신한 내 모습에 실망한 건 잠시 내려놓더라도, 그 친구가 그렇게 말을 하기까지 꽤 많은 갈등과 아쉬운 순간들이 있었다는 게 너무 서운하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전력으로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 과정이었다.
섹스도 그랬고, 선물도 그랬고, 삶에 있어서도 모든 걸 맞췄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런 부분이 믿기지가 않는다.
이렇게 애를 썼는데 날 안 받아 준다고...?
걔는 날 하나도 안 좋아했던 거야.
그녀가 나를 하나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딘가 현실감이 떨어져서 그냥 그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욱신거리는데...
"그런 애를 왜 자꾸 형이. 그것도. 겨우 한 번 봤으면서."
"...그건 내가 미안하고."
"그만 좀 해요.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울분을 토해 내자 그렇게 뭐라고 하던 사람이 달래 주기 시작했다.
"원래. 사랑하니까 더 미워지는 거야. 그런 노래 가사도 있잖아. 아픈 만큼 사랑한 거라는."
"젠장, 그딴 게 어딨어요."
"있어! 있다고!"
"그럴 거면 애초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죠. 내가 병신도 아니고, 아픈 짓을 뭐 하러 해요."
"운동은 안 그러냐? 운동도 기본은 몸을 혹사시키는 과정이잖아. 고생한 만큼 더 좋은 성과가 나오는 거고."
형 말대로라면 지금 아픈 만큼 난 더 좋은 사랑을 할 거라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쉽게 정리되진 어렵지.
"아무튼, 진짜 그만해요. 걔 얘기 듣기 싫으니까."
"그래. 나는 그냥, 둘이 잘 어울려 보여서."
"아 형. 또!"
"..."
"진짜. 나도 씨발!"
"야... 그래도 욕은 아니지, 인마!"
"욕 안 나오게 생겼냐고요!! 겨우겨우 참고 있는데, 하지 말라고 부탁을 하는데. 자꾸 왜!"
"마하야, 하나님이 이런 말을 하셨어."
형도 다급한지 갑자기 신을 꺼내 들고 나왔다.
황당하고 허탈한 기분에 그냥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아, 형. 진짜 뭔 신까지 나와요."
"그냥 신이 아니라, 하나님은."
"저 종교 안 믿어요."
"그러니까 들어 보라고."
교회에서 하는 말인 거 같은데, 하나님이란 존재는 문을 닫으면 창문을 열어 주신단다.
나쁜 일이 지나가면 좋은 일이 온다는 뜻이겠지.
나도 알어. 그래서 오늘 생각지도 못한 질펀한 섹스를 즐겼고.
하지만 겨우 그 정도잖아.
사랑으로 뚫려 버린 커다란 구멍을 겨우 유부녀의 일탈로 채우기는 부족하단 말이야.
실제로 나는 시간과 차원의 벽을 넘어온 존재니까.
하나님이란 분은 내공 좀 쓰시려나? 나한테 말빨 좀 먹히려면 능력 있으셔야 될 거 같은데.
"형. 우리 이제 그만하고 쉬어요. 내일 일정도 있는데."
"그래, 맞다. 내일 미팅 있지."
"미안해요.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한 건 고치도록 할게요."
"...알았다."
"쉬세요. 저도 자요."
내일은 빅토리아가 소개해 준 여기 에이전트를 만나기로 했다.
그래.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모든 걸 내려놓지 못하고 낯선 세계로 또다시 몸을 던져야 한다.
사는 게 참 버겁다.
사람과의 관계, 부담. 이런 걸 피해서 성공한 몸으로 룰루랄라 행복한 여생을 살 줄 알았는데, 뭔가 은퇴를 하고서도 일상은 별로 달라지는 게 없어.
오히려 더 짜증 나는 일들만 늘어났어.
어쩌면 민구 형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느님의 창문인지 뭔지, 일단 오늘은 생각지도 못한 뜨거운 경험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만약, 아까 그런 일이라도 없었다면 파리도 그저 마음을 황폐하게 만드는 도시로 남았겠지.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이곳은 뜨거운 기억을 남겨 줬잖아.
* * *
"어제 잘 봤습니다."
"아. 오셨었어요?"
"그럼요. 정말 오랜만에 원더풀이란 형용사를 썼던 것 같습니다. 무대에서의 당신은 스타디움의 모습 그 이상으로 판타스틱했어요."
하나님이란 분이 창문을 이쪽으로 여셨나.
생각보단 공력이 있으신 양반이구나.
연애와 사랑에선 낙제점을 받았지만, 실제로 일에 있어선 꽤 좋은 기회가 많이 들어왔다.
우선, 에이전시에서 말하길, 이유이 선생님 런칭 행사가 기대 이상으로 호평을 받은 부분에 내가 있던 것도 큰 작용을 했단다.
"그게 왜 저 때문인가요. 옷이 좋았던 거지."
"미스터 구. 그게 모델이라는 거에요."
"..."
"NICE에서 왜 당신을 안 놔주는지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유럽인들은 스포츠를 사랑하고 건강함에 열광한다고 에이전시가 말한다.
내가 운동계를 떠났다는 소식에 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가졌지만, 그래서 지금 패션계는 열광하고 있단다.
"보물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알렉스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야겠어요."
"빅토리아... 저한테도 참 고마운 친구죠."
"자. 그럼 여기 계약서에 싸인을."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전, 잠깐 민구 형을 돌아보았다.
어제 일은 어제 일이고 오늘은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료로 형의 의견을 물어보는데, 회사에서도 내가 하자는 대로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전해 준다.
"전적으로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랬다고요?"
"음. 일단 이것도 기회니까."
"흠..."
"왜? 뭐가 고민돼?"
"아니요.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선택의 순간이다.
지금 여기 서명을 하면 난 이제 스포츠 스타가 아닌 모델이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다.
에이전시 말대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세계적인 메이커들의 패션 위크를 책임지며, 백화점이나 전광판에 멋들어진 모습이 올라 가게 된다.
파리, 런던, 밀라노 그리고 뉴욕을 여행하면서 화려하고 멋진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촌티 나는 삶과는 영원히 안녕이란 뜻인데. 이렇게만 들으면 참 좋은 거 같은데.
"저기..."
"네. 고민이 길어지시는데. 뭔가 추가하고 싶은 조건이 있으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니요... 그런 건 없는데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혜정이와의 이별이 그렇게 나쁜 게 아닐지도 몰라.
지금까지는 운동선수+'무언가'였지만, 이건 진짜로 연예인 같은 게 되는 거니까.
간접 경험한 삶 속에서 느꼈던 갈등이나 부닥침 같은 게 앞으로의 인생에 펼쳐진다면.
내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화려한 세계의 사람들로 바뀌고 그로 인해 나를 지탱해 주었던 인물들이 멀어지게 된다면.
"일단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네? 미스터 구?"
"조금 생각을 해 봐야겠어요."
성급하게 인생을 결정지을 순 없다.
지금은 물러나는 게 정답 같애.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성향이라는 게 있지.
아버지부터 무림인인데, 내가 땀내 나는 곳이 어울리지 번쩍번쩍 휘황찬란한 세상이 어울리겠어?
나에게는 이 세계가 독이 될 수도 있어.
사랑을 잃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