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19화 (319/401)

이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야 (9)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민구 형이 자꾸 한숨을 쉬고 있다.

"형. 왜 그래요."

"아니. 난 좋은 기회를 날리는 거 아닐까 싶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괜찮아요. 기회야 또 오겠죠."

"마하야. 역시 이렇게 거절하기보다는 회사랑 이야기를 해 보고."

"형, 괜찮으니까 일단은 그냥 덮어 두세요."

"야, 그러다 나중에 저 사람들 마음 바뀌면 어떡하려고 그래."

"하하! 그건 그거죠. 그리고 패션이 유럽만 있나요. 한국도 있고 미국도 있고."

"새끼 진짜... 대범한 건지 뭔지..."

짧은 파리 여행은 나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주었다.

얻은 게 있다면 사람이고, 잃은 것도 사람이다.

일단 민구 형과 서로 으악 거리고 소리친 덕에 가까워지기도 했고, 빅토리아 말고 누나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물론 그 누나는 한국 사람이지만, 직장을 프랑스로 옮겨 결국 유럽 누나라는 점은 다르지 않은데, 그래도 누나가 있다는 게 어디냐. 형보단 누나가 좋아. 단어부터 뭔가 포근하고 따듯하게 안아 주는 그런 느낌이 있으니까.

"근데 마하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네. 뭐요?"

"진짜 선생님이랑 뭐 했어?"

"하하! 아. 형?"

"아니.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하냐고."

"진지한 얘기 하다 보면 시간 갈 수도 있죠."

"설마... 잤냐?"

"하하하하! 와 나, 진짜 돌겠네."

"새끼야. 나이 든 분이랑 그러고 싶어?"

"형도 진짜 성격 독특한 거 아셔야 돼요."

선생님이 매력적인 건 알지만, 그래도 한참 연상이랑 그럴 수 있냐는데.

매력이 나이로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원래도 여자 이야기 남들 이랑 잘 안 하는 만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리고 있다.

아무튼, 좋은 것에 이어 나쁜 것을 말하자면.

그것도 사람이라고 했는데...

"아. 근데. 진짜 기자 개새끼들..."

"후우. 그러게... 공항에서부터 얼마나 난리가 나 있을지..."

"감독님은 뭐라고 그러세요?"

"차는 준비해 주신다고 했는데, 공항에서 따로 특별 대우는 없을 거라고 그러셨데."

"망할 새끼들. 어떻게 하필 딱 나 없을 때 일을 터트려서..."

스캔들이 났을 때 한국에 없다 보니 아무리 회사가 있고 감독님이 있어도 대처가 늦어 버렸고, 그 사이 의혹이 정말 말도 못 하게 불어나고 말았다.

무엇보다, 어느 종목인지는 몰라도, 올림픽 국가 대표 팀 출신의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냈는데.

올림픽 때도 나는 단체 생활보다 개인 생활을 더 많이 했고, 올림픽 선수촌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 알려지고 있었다.

실제로 빅토리아를 만난 것도 아테네 선수촌이었으니. 씹고 뜯기 좋아하는 네티즌 성격상 이 이상 지어내기 좋은 소스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 비키한테 되게 미안하네..."

"그러게. 그분 한국 좋아했는데..."

빅토리아가 잠시 한국에 머물기로 한 건, 일에 지치고 사람에 치인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였다.

명성이나 유명세를 내려놓고 자연인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과거의 추억이 있는 나라에서 언어적인 문제도 해결됐겠다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녀의 소중한 휴가가 나 때문에 박살이 나 버리고 말았다.

빅토리아는 내가 귀국하기 며칠 전, 우리 회사의 보호 아래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공항을 떠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현재 내 연락을 피하고 있다.

모르지. 피하는지 씹는지. 당사자 아니고서 알 수 없지.

"호텔이란 장소가 문제야."

"..."

"뭐. 두 사람 일은 두 사람이 알겠지만..."

"형. 입국 카드 다 쓰셨어요? 곧 있으면 인천 내리는데."

"넌 꼭 말 돌릴 때 이러더라."

아무튼, 나도 빅토리아 오랜만에 봤는데. 어디로 갔는지. 유럽으로 갔는지, 아니면 다른 어디 거처를 마련하고 있는지 아는 게 없으니 걱정만 남는다...

이제는 이메일이 아니라 서로 직통 번호를 알면 뭐하냐고. 전화를 받질 않는데.

아무튼, 그녀도 그녀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그건 역시 혜정이와 관련되는 이야기라, 가슴에 20키로 원판이 하나 내려앉는 기분이다.

"..."

"마하야. 입국 카드 나 주고."

"아, 새끼들 진짜..."

"왜? 뭔데?"

"아니요. 친구들인데..."

공항에 내려 꺼 놓은 핸드폰에 전원을 켰다.

문자가 빗발치는데, 성남 놈들이 폭발해 있었다.

입대 일주일을 앞둔 김태윤부터, 선아의 울분까지 대신하고 있는 정석이, 잠깐 주말 외박 나와서 PC방 무료 문자를 보낸 남수.

얘네가 봤을 땐, 내가 첫사랑 놓고 외국에서 온 여자 만나러 호텔 드나든 꼴이긴 하겠지만.

새끼들아. 헤어졌다고...

그것도 내가 깬 게 아니라 걔가 그만하자고 했어.

아니, 이혜정 얘는 선아한테 다른 건 다 떠들면서, 그런 걸 얘길 안 했나?

안 했으니까 오해가 쌓여 있겠지.

심지어, 형까지 꽤 심각한 어조로 한국에 돌아오면 바로 집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

"진짜 다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래 동네 친구 만나면 그러는 거야. 후폭풍이 쌔."

"그러게요... 이제 무서워서 동창 만날 수 있나."

"또 만나려고 했었냐?"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아무튼, 서로 별로 말도 안 나눠 본 민혜까지. 다양한 문자를 쭉 확인한 끝에.

"..."

그녀에게서 들어온 한 통의 메시지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혜정이한테서 연락이 들어와 있었다.

"마하야. 아까 잠깐 문 열릴 때 봤거든? 역시 기자들 장난 아니다. 긴장해야 되겠어."

"민구 형..."

"왜? 야. 지금 핸드폰 보고 있을 시간 없어! 우리도 나가야 돼.

언제까지 게이트 앞에 있을 거야."

"그게 아니라요..."

"왜? 뭔데?"

"걔가 연락이 와 있는데..."

"누구?"

"혜정이요..."

이혜정은 굉장히 단순하고 간략한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어디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와. 알았지?]

그래. 헤어졌다곤 해도 우리는 동거인이지.

바로 집으로 오라는 말이 자기가 자리를 피한다는 건지, 다시 만나자는 건지. 아니면 그냥 천천히 이야기를 해 보자는 건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당황하는 나와 다르게 민구 형은 조금 신나 보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연애가 그렇게 쉽게 끝나는 게 아니라고!"

"...성남으로 가려고 했는데."

"가지 마. 대표님이 그러시는데 너네 형님 엄청 무섭다고 그러시던데."

"형이 무서워도 내가 꿇릴 건 없으니까요. 사실은 이렇다고 말을 해 주려고 했는데..."

어쨌든 게이트를 빠져나와 기자들을 만났다.

인간들 진짜 추잡하다...

남 사생활을 뭐 이렇게 커다란 일이라고 흥분해서들 카메라를 들이미는지...

"구마하 선수! 아 정말 반가운데,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요?"

"뭘요?"

"어. 그러니까. 축하한다고 해 드려야 되나요?"

"그러니까 뭘요."

"네?"

"스캔들 이야기라면 별로 할 얘기 없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나는 약물 파동도 겪었고, 연맹과의 갈등 끝에 대표 팀 탈퇴와 복귀도 있었다.

가만 보면 연애 스캔들 말고도 때때로 이런 폭풍을 겪었던 만큼, 기자들이 뭘 묻든 그냥 덤덤하게 무시하고 지나치면 그만이었다.

근데, 나만 그들이 익숙해지나. 기자들도 그만큼 내가 익숙해지지.

한 기자가 존나 띠껍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물었다.

"구마하 씨. 우리가 알기론 연애 중인 분이 따로 계신 걸로 들었는데."

"네. 근데요?"

"바람입니까? 시원하게 해명해 주세요."

"하하하! 뭐요? 저기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자의 떡밥을 무시할 수 없어 덥석 물고 나니, 민구 형이 옆에서 제지하고 나섰다.

"야. 그냥 가. 저희는 할 말 없습니다."

"형. 잠깐만요."

"야!!"

말리는 민구 형을 보면서 기자들은 더 신나서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민다.

재수 없게 쏘아대던 기자를 보며 말했다.

"저기요."

"네. 뭔가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해 주세요."

"그러니까. 내가 왜요. 난 지금 대표 팀 선수도 아니고. 그냥 개인으로 친구 만나러 갔는데, 그걸 제가 뭐라고 해명하냐고요."

"호텔에서 사흘간 있었는데, 그 시간 동안 두 분이 뭐 하고."

"이봐요, 당신 지금."

"야!! 상대하지 말고 가라고! 그냥!!"

민구 형이 퍽퍽 밀면서 기자와 나를 떨어뜨려 놓았다.

"그걸 왜 맞서고 있어!!"

"아니. 어이없게 얘기를 하잖아요. 내가 무슨 죄진 거마냥."

"그 사람들은 그게 직업인 거야! 일부러 더 너 흥분시켜서 문제를 확산시키려고 하는 거라고!"

"하하하! 형도 회사 사람 다 되셨네요. 예전에 감독님도 그러셨는데."

"아 진짜, 이 새끼..."

회사에서 준비한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다.

민구 형은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행동 조심하라고 하는 거 아냐."

"알았어요."

"니가 어떻게 하더라도, 사람들 시선에선 넌 그냥 일반인이 아니야. 스타지."

"후우... 스타의 숙명이란..."

"대충 듣지 말고. 이러면 잘 될 것도 안 된다고. 알았어!"

민구 형이 얘기하는 잘 될 것들에는 혜정이와의 관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들 아는 것과 다르게, 진실은 둘이 헤어진 거긴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그게 아니라고 하니.

"그냥. 혜정 씨한테는 아무 소리도 하지 마."

"왜요?"

"왜라니. 그게 맞잖아."

"끝났는데 제가 왜요. 걔가 뭐라고."

"마하야. 너 왜 이렇게 사람이 닫혀서 그러냐."

"이게 닫힌 겁니까? 현실을 받아들인 거지."

솔직히 말하면 반반인 거 같다.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레는 내가 있다.

하지만, 그만큼 커다란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나도 있다.

그녀는 아직도 내 안의 커다란 방을 비우지 않았는가 보다.

어쨌든 두 가지 감정 모두 다 내가 느끼는 것이니.

그렇다면 나는 아픈 것을 더 높게 쳐주련다.

혜정이에 대한 애정보다는 서운함과 미움을 더 마주하련다.

"형. 그저께 우리 숙소에서 다 얘기했잖아요."

"아는데. 그래도. 이렇게든 저렇게든 다시 가면 좋잖아."

"...형은 왜 그렇게 혜정이랑 저를 다시 이으려고 하세요?"

"왜겠냐. 너 때문에 그러지."

"...나를 생각하면 지금 이런 이야기를 안 하는 게 맞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때 나 너네 집 갔을 때. 그 친구랑 있는니 표정이 완전 달랐어."

고백 비스무리하게 듣긴 했지만. 민구 형한테 나는 생각보다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고, 그만큼 높은 벽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혜정이와 함께 있는 나는 그런 벽을 다 허물고 굉장히 편안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였단다.

인간이 편안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에, 제삼자인 자기가 보기에도 미소가 절로 나오더란다.

"나도 뭐 그렇게 나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알어."

"..."

"너. 살면서 그런 사람은 쉽게 안 온다."

그건 인정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욕망을 느끼는 것과 애정을 느끼는 건 다르니까.

진짜 모든 걸 던질 만한 사람은 또 보기 어렵겠지.

많은 여성들을 만나 본 내게 있어서도 진심으로 빠져든 사람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까.

아, 진짜. 사랑 너무 어렵다.

아무 짓 안 해도, 그냥 내 옆에 그런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쭉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다.

"하아, 모르겠어요... 서울 다 오니까, 지금이라도 성남으로 가자고 하고 싶기도 하고"

"내 말 들어. 가서 그냥 일하고 왔고. 둘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돼."

"형. 근데. 우리 지금 반찬도 안 깔았는데 너무 김칫국 드링킹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고깃집 동생으로서 말하자면, 밥 먹는 것도 순서가 있다.

먼저 직원이 테이블을 안내해 주고 식탁에 물컵을 놔 준다.

그다음에 반찬을 깔고 마지막에 메인 요리가 나온다.

근데 민구 형은 혜정이 문자가 왔다는 한마디에 김칫국을 막 그냥, 3년 된 묵은지와 돼지비계가 어우러진 오모가리 찌개를 맛도안 보고 그냥...

"아니면 어떡해요? 얘 그냥 자기 나갔으니까 집주인인 나더러 피하지 말라는 뜻에서 한 얘기라면?"

"분위기는 살펴봐야겠지만. 그래도 잘 되려면 너도 어느 정도 맞출 필요는 있다 이거지."

"...그렇게 다시 사귀면 될까요?"

"넌 싫어? 진짜 다 끝내고 싶어?"

모르겠다. 다시 만난다? 헤어진다? 모르겠어.

갑자기 이러니까 너무 혼란스러워 생각이 정리가 안 돼.

다시 보는 건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끝내면. 이제 혜정이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건가?

이미 끝이라고 받아들였는데, 상처를 더 크게 생각하겠다 했는데 왜 마음이 갈등을 하는 거지?

"후우..."

한숨이나 쉬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운전하러 와 주신 분이 백미러로 엄청 관심 있게 우리 두 사람을 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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