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야 (10)
"마하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냐? 니 말대로면 두 사람은 헤어진 거고."
"형. 잠깐만요."
"그러면 난 너네가 다시 만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그러니까 잠깐만요."
근성 있게 혜정이랑 다시 만나라 설득하는 민구 형한테 턱으로 운전석을 가리켰다.
형도 그제야 이 차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표정이 굳는다.
"아. 어..."
"..."
"크흠, 흠!"
우리가 입을 다무니, 운전 기사분도 빠르게 헛기침을 하며 존재감을 드러내셨다.
아이고, 아무리 회사에서 나온 사람이라지만 너무 대화에 몰입하고 말았구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떠들었죠."
"아. 저 운전에 집중하느라 잘 못 들었습니다."
"괜찮아요. 뭐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아니... 저기. 그럼, 모델 분이랑은 사귀는 게 아니신 건가요?"
운전하는 분한테 민구 형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회사 사람 아니세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형."
"죄! 죄송합니다. 근데 저도 주변에 너무 시달려서..."
"뭘 시달리셨어요?"
"아. 저 회사 다니는 거 아는 지인들은 밤에도 전화해서 물어보고 그러거든요."
"아니, 내가 뭐라고... 그럴 걸..."
"뭐라뇨. 마하 씨 인지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거죠."
사무실에서 나온 직원은 그래도 이번 스캔들에 대해서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라고 좋은 점들을 말씀해 주신다.
"좋을 게 뭐가 있어요?"
"많아요. 보기와 다르게 축하해 주는 분들이 진짜 많아요."
"허허..."
"맞다. 아까 공항에서도 기자들이 그러던데. 마하한테 뭘 축하한다는 거에요?"
"일단. 빅토리아 그분이 완전 떴어요."
"거기는 또 왜요...?"
"그러게. 그분이 왜요?"
"왜긴요. 예쁘시잖아요!"
동양인이라고 다 검은 머리 콧대 낮은 동양인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야동도 서양물만 보는 사람들이 있듯, 생각보다 금발 미녀를 좋아하는 취향이 많다.
하물며,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장모님의 나라라고 불리는 벨라 루스에서도 미모와 몸매로 명성을 떨친 미녀.
팬들은 지금 나와 빅토리아의 만남에 엄청들 기뻐하고 있다고 해 준다.
"점심시간 이럴 때 얘기해 보면, 회사 여직원들도 은근 좋아하더라고요."
"여자들은 또 왜요?"
"왜긴요.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가 헐리웃 셀럽 같은 분 만나서 데이트를 즐기니까 로맨틱해서 그렇죠."
역시. 이 세상 모든 부분에 음양이 있다고...
딱히 데이트나 하자고 빅토리아를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어디든 기댈 곳이 필요해 일방적으로 행동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진실은 외면한 채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보러 외국을 가지 않고, 그녀가 한국에 나를 만나러 온 것도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포인트란다.
"아니, 거기는 나 보러 온 게 아니라."
"저희야 알지만, 어디 사람들이 그런 거 따집니까. 결과만 보죠."
"하하..."
전화를 안 받는 것도 이해가 된다.
진짜 이럴 때마다 내가 뭐라고 다들 그러는지... 속 까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좀 하고 싶다...
하긴, 멀리 볼 거 있나. 당장 옆에 있는 민구 형도 날 무슨 막 존나 대단한 그런 인물로 보고 있었다는데.
"마하 씨랑 이런 이야기도 하고. 오늘 오길 잘했네요."
"회사에서 아무도 안 오려고 했었어요?"
"아무래도 기자들 있는 자리는 부담되잖아요."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앞으로 회사에서 보면 편하게 인사해도 되죠?"
"그럼요. 언제 같이 밥 한번 먹어요."
운전하는 형님은 나이는 스물여덟. 민구 형과 동갑이었다.
이번에 회사를 확장하면서 새롭게 뽑은 신입사원인데, 현재 사무실에서 행정 업무를 맡고 계신단다.
"성함이?"
"이길수라고 합니다."
"길수 형님요."
이길수. 성과 이름만 놓고 보면 특이한 건 아닌데, 얼핏 들으면 구마하 이상으로 괴랄한 센스가 아닐까 싶은...
친한 사이면 뭔가 굉장히 다양하게 활용 가능한 이름이겠지만.
그래도 초면에 그런 걸 내색할 순 없고.
"하하! 이길수요? 뭔가 승부욕 생기는 이름이네요?"
"하하! 맞습니다. 실장님."
"이야, 이름 멋지네요."
"에이 형. 왜 사람 이름으로 웃고 그래요..."
"하하하! 괜찮습니다. 저도 어려서 놀림 많이 받았거든요."
"저만 하시겠어요."
"그러려니 살고 있어요. 뭐 어때요. 이름이 나를 규정하는 것도 아니고."
20대 후반의 길수 형님.
민구 형이 동갑내기 사회인 친구에게 관심이 많아 보인다.
"길수 씨는 그럼 결혼하셨어요?"
"아니요. 양 실장님은요?"
"저는 여자 친구도 없어요."
"아. 그러시구나."
"형님은 여자 친구 있으세요?"
"저보다, 그. 아까부터 혜정 씨라는 이름이 나오던데 그분은 그럼 누구세요?"
"형님, 못 들으셨다면서요."
"아니, 다 들은 건 아니고요.."
회사 사람들은 내가 빅토리아를 만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단다.
그런데 실상은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하니까 길수 형님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근데, 진짜로 헤어진 상태면 새로운 분 만나셔도 문제 될 건 없는데."
"길수 씨, 다 들으셨네."
"그러니까요. 형님 다 들으셨네요."
"아니, 그러니까... 하하! 저는 그런 분들이 좋더라고요."
"어떤 분요?"
"제가 썰렁개그 이런 걸 잘 하거든요. 그래서 재미없는 농담도 잘 웃어 주는 여자가."
"저기, 길수 씨. 갑자기 취향 고백을 하고 그러세요?"
"네? 아니, 그게 그냥. 뭔가 갑작스럽게 대화에 끼려다 보니까, 어색하기도 하고. 저도 뭔가 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기도 해서.
하하!"
사람들끼리 있다 보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다 하는 거지 뭐.
대수롭지 않게 화두를 돌렸다.
"여자들이 웃어 줄 때 좋죠. 형도 그렇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잖아. 자연히 설랠 때가 많지."
"그러니까요. 여자들 막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서도 웃으면서 반응해 줄 때. 전 그런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주제가 바뀐 상황에서 길수 형님이 물으셨다.
"마하 씨는 주로 운동하는 분들 좋아하시죠?"
"딱히 없는 거 같아요. 아무래도 사람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으니까."
"넌 그냥 예쁜 여자 좋아하는 거 아니냐?"
"에이. 아니죠. 저 얼굴 그렇게 안 따져요."
"근데 양 실장님. 예쁜 여자 싫어하는 남자 있나요?"
스캔들로 주변은 시끄럽고, 서울 가는 길은 막히고 있었다.
취향에 관한 이야기는 어색한 남자 셋이 한 차를 타고 가는 데 있어 꽤 즐거운 대화 거리였다.
길수 형님에 이어 민구 형도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말한다.
"난 사치 안 부리는 여자."
"있죠. 있어요."
"형. 사치란 개념이 뭔데요? 돈 없는데 명품 사는 애들?"
"그것도 있는데, 뭔가 막 과하게 꾸미는 애들이 있어."
"양 실장님은 청순 스타일이시구나."
"기본적으로 뭔가 태가 나는 사람이 있잖아요."
"뭐에요. 형이야말로 그냥 예쁜 애들 좋아하는 거네."
외모. 그리고 나이. 형들은 어린 사람이 좋지만 또 너무 어리면 일일이 맞추기 피곤하고 성격만 잘 맞는다면 연상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넌 연상도 상관없지?"
"저는 뭐."
"역시. 그럴 거 같았어."
"하하! 왜요?"
"그냥. 있어. 빅토리아 그 분도 너한텐 연상이잖아."
"외국인에 누가 연상을 따져요."
"누나라고 부르던 건 뭔데?"
"아. 형."
"우와. 마하 씨. 누나라고 부르세요?"
"아니요. 그냥 여러 가지 있어요."
사람 취향은 딱히 외모나 나이에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나이는 어리면 좋지만, 연상이어도 크게 상관없고. 예쁘면 좋지만 평범해도 웃는 얼굴이 좋으면 좋다.
결정적으로 형들은 사람의 배경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좋다고 말했다.
"와. 그거 진짜 중요한 건데."
"역시 길수 씨. 잘 아시네요."
"우와. 뭐가 이렇게 디테일하지?"
"꼼꼼해야지. 우리가 나이가 있는데."
"근데 배경은 왜요? 오히려 그런 건 좀 따져야 하는 거 아닌가?"
"거를 건 걸러야 하는 것도 있는데, 우리 나이쯤 되면 결혼을 생각해야 하잖아."
"그런 거 일일이 따지는 여자 만나면 되게 피곤해져요. 마하씨."
피곤이란 말에서 형들의 목소리가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차는 뭘 타냐부터, 옷 입는 스타일 하며."
"직업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직업도 있고. 직업 말하면 연봉 따지고. 부모님 뭐 하시냐 묻고."
뭔가 애들끼리 있을 때도 여자 이야기는 자주 하지만, 나이 있는 형들이다 보니 친구들이랑 있을 때와 내용이 다르다.
낭만보다 더 어딘가 현실적인 걸 보는 느낌?
사랑도 따질 건 따져야 한다지만, 여자들이나 그러는 줄 알았는데 남자도 똑같구나.
"와, 근데 그렇게 일일이 따지면 사람 좋아하기 어려울 거 같은데."
"어려워. 군대만 갔다 와도 가슴 설레기 쉽지 않다니까?"
"사회 나오면 더 해요, 마하 씨."
"그래요?"
"사회도 사횐데. 서른 살 되면 또 달라진다고 하잖아요."
"맞습니다. 결혼한 형들이나 선배들 이야기 들어보면, 그때는 또 남녀 입장이 바뀐다고 그러더라고요."
"흠."
최종적으로 형들은 부담되는 여자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부담되는 사람은 또 뭐예요?"
"누가 봐도 예쁜 사람들 있잖아."
"그게 왜요? 좋은 거 아닌가?"
"야. 그건 너니까 그러지."
민구 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데, 보통은 빅토리아나 혜정이 같은 사람을 연애 상대로 보지는 않는단다.
"와. 혜정 씨란 분도 미인이세요?"
"연예인이에요. 실물로 보면 헉! 소리 나와요."
"우와. 그 정돕니까?"
뭐지 이건? 뭔가 생각하는 개념들이 나랑 너무 다른데?
"아니. 그런 사람들이 왜요? 다 그런 여자 좋아하지 않나?"
"좋아는 해도. 연애는 안 하지."
"그냥 멀리서 지켜보죠."
"왜요...?"
"야. 걔네가 우리 같은 사람을 상대해 주냐!"
"아니죠. 양 실장님. 그 전에 우리가 그런 여자를 감당할 수 있냐를 말을 해야죠."
"아니. 감당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남자가 미인을 얻기 위해 싸우고 노력해야지."
"하하하! 마하 씨, 우리는 그럴 나이가 지났잖아요."
"형님들도 20대잖아요."
"같은 20대여도 20대 초반이나 그러지. 지금 나이에 누가 그렇게 연애를 하냐."
"허허..."
보통은 연애를 나를 반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지는 않는단다.
사랑은 사랑이고 노력은 노력이지. 두 가지를 혼용하는 사람들은 잘 없다.
무엇보다 상대방이 너무 예쁘고 잘나면 경쟁자들도 많고 껄떡대는 놈들도 많은데. 일일이 맞추고 신경 쓰다 보면 상대적으로 내가 너무 초라해지니까. 그런 감정을 견디면서까지 여자 친구를 사귀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라고 했다.
"허허..."
"그렇게 이상해? 너 아까부터 허탈하게 웃는다."
"아니요. 허탈한 게 아니라..."
"그냥. 마하 씨랑 우리는 입장이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마구잡이로 쏟아진 문자 폭탄들 가운데, 지금 형들이 했던 이야기와 똑같은 내용이 있었다.
정석이가 선아의 이야기를 전해 줬는데. 이혜정 얘가 나랑 있으면서 그렇게 모든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단다.
어느 정도는 나한테도 했었던 이야기라 알고는 있지만.
그냥 주변의 시선이라든지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걔가 느낀 부담도 이런 거였을까...?
"형."
"어."
"그럼 부담되는 사람이랑 같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요?"
"니 말대로 나를 그쪽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든가. 아니면 상대 방을 나한테 맞추든가. 둘 중 하나지."
"근데, 보통 잘 나가는 사람이 맞추진 않죠. 그러니까 어울리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거고."
연애는 좋은 감정을 위해 하는 것이다.
나를 따뜻하고 편안하게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이 얼굴 예뻐서 어디 데리고 다니기 좋은 애들보다 낫다.
형들은 그게 보통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건 남자보다 여자가 더 심할 거라고 했다.
"...여자들이요?"
"그래.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계속 이야기를 하는 거야."
"..."
"너가 조금만 바뀌면 너랑 혜정 씨는 문제 될 게 없어."
자꾸 혜정이 이야기가 나오자 길수 형님이 물으셨다.
"저. 근데 마하 씨?"
"네. 형님."
"아. 이런 거 물어도 되려나...?"
"왜요? 뭔데요?"
"아니요. 그게.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듣자 하니 그 혜정이란 분은 연예인 같은데 일반인이라는 거잖아요. 그냥 어떤 분인가 해서."
"혜정이요..."
"에이. 길수 씨. 그건 내가 봐도 선 넘은 발언 같은데."
"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혜정이는 어떤 사람인가?
예쁘고, 착하고.
그리고...
"동창이었어요. 같은 동네 살았고."
"우와, 소꿉친구. 낭만이네요."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요..."
혜정이는, 이혜정은...
아마도 혜정이는 형님들이 얘기한 보통의 연애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어디 가서 번잡하고 주목받는 걸 딱히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옷도 그냥 자기한테 맞고 어울리는 평범한 옷을 즐겨 입고.
과하게 꾸미거나 하지도 않어. 꾸미면 사람들이 더 쳐다보니까.
그녀는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작은 기회도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람이다.
예쁘다고 재지도 않고, 명품을 사다 줘도 그냥 그때 잠깐 고맙다고 하지 더 사달라고 징징거리거나 더 좋은 거 해달라고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
"..."
그리고 어쨌든 예쁘고.
속궁합도 나랑 잘 맞고. 그리고...
"길수 씨. 회사는 별문제 없어요?"
"스캔들 때문에 이미지 타격이 조금 있긴 했는데. 뭐 이 정도로 기업 쪽에서 광고 취소한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좋게 보는 시각도 크다 보니까."
"다행이다, 마하야."
"..."
"야?"
세상에나... 이런... 어이없는...
나는 대체 그녀를 어떻게 보고 있었던 거지?
걔가 어떤 앤지 정의하려다 보니 뭐라 해야 되는질 모르겠어.
그냥 내 눈에 예뻤어.
늘 다가가고 싶었던 애였고.
그게 전부야.
그게 다야.
그리고 옆에 있으니까 이제는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 싶었고.
관계를 맺고 나니까 그다음 단계인 결혼을 하고 싶어졌고.
난 지금까지 걔가 어떤 앤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단 말인가...
존나 너무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온다...
"..."
"야. 너 왜 그래?"
"다 왔다. 마하 씨 저기 저 아파트 맞죠?"
이러니저러니, 일단 집에 돌아왔다.
뚜껑을 열었을 때 뭐가 나올지...
제발 좋은 것이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