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야 (11)
"잘 들어, 마하야. 집에 가서 아무 소리도 하지 마."
"알았어요."
"건성으로 듣지 말고. 그냥 일하고 왔다고만 하면 돼."
"아, 알았다고요."
"모든 건 다 니가 하기 나름인 거야. 사랑도 연애도."
"저. 길수 형님. 민구 형 좀..."
"실장님. 마하 씨가 잘 하겠죠. 저랑 술이나 한잔 하러 가요."
"후우... 전화해라. 알았지?"
애정이 깊은 건지, 오지랖이 넓은 건지.
선생님이 천직인 사람을 우리가 잘못 데려온 건 아닐까?
형들과 헤어지고 심호흡을 뱉은 뒤 걸음을 옮겼다.
경비 아저씨가 어디 갔다 오냐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시는데, 일상적인 풍경에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걸까...
어떤 상황이든, 나는 외로움보단 사랑이 하고 싶다.
그런데도 다시 희망을 품자니, 그것이 너무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구나..."
현관문 앞에 섰는데 집 안에서 TV 소리가 들려온다.
사랑을...
다시 마주한다.
"왔어!"
"어. 있었네."
집안에 들어서자 혜정이가 환한 미소로 도도도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어디 약속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굉장히 꾸며 입고 있었다.
치마도 입고 화장도 했고 속눈썹도 올리고 머리도 만진 거 같다.
역시 각 잡고 꾸미면 끝판왕이 되는구나.
"너 어디 가?"
"어? 아. 그냥."
"옷이 좀 달라 보이네."
"응. 오늘은 차려입고 싶어서."
"잘 어울린다."
"이 옷 어때? 그때 너가 사 준 건데."
"괜찮네."
덜컹덜컹 트렁크를 옷방에 밀어 넣으며 짐 정리를 하자, 혜정이가 따라와 말했다.
"놔둬. 나중에 내가 하면 돼."
"내 짐을 왜 니가 정리해."
"어? 아니. 나는..."
"이런 건 원래도 내가 했는데, 갑자기 왜 그래."
"그렇긴 한데. 그냥. 너 먼저 올림픽 끝나고 짐 보냈을 때도 내가 했었고. 그러니까."
사람이 옆에 있어 가방을 놓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뭔가 할 말은 없고, 뻔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어 본다.
"집에 별일 없었지?"
"응. 너는? 일은 잘 끝났어?"
"뭐. 잘 됐어."
"어땠어? 파리에서 하는 패션쇼는 뭔가 달러?"
"뭐. 파리라고 해도 한국 디자이너가 하는데 스테이지는 그냥 그랬어."
"그리고?"
왜 이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걸까.
한편으론 너무나도 바라던 그녀의 모습이 어째서 낯설게 느껴질까...
원래 내가 일을 하고 오든 친구를 만나든, 디테일한 관심을 보여 준 적이 없던 애였다.
"그래도 잘됐네. 기사 난 거 있나? 찾아보니까 잘 안 나오던데."
"저기. 혜정아."
"응?"
"옷... 불편하지 않어? 편한 거 입어."
"으으음. 괜찮아. 치만데 뭐."
"치마 신경 쓸 거 많아서 싫다며."
"집인데 누굴 신경 써."
평상시같이 소파에 있든 식탁에서 뭔가를 정리하든. 고개 한번 돌리고 "왔어?" 한 마디면 오히려 좋았을 거 같다.
그럼 내가 옆에서 재잘재잘 뭐는 뭐고 어디는 어땠고 떠들면, 아. 알았어! 나중에 얘기해. 나 지금 이거 하잖아. 하면서 밀어 내고.
그럼 난 또 서운하다고 장난치고 괜히 옆구리 한번 찌르고 도망가고.
그런 게 우리의 일상이었는데.
"후우..."
"왜. 한숨을 쉬어?"
"그냥. 피곤해서."
뭔가 좀 그렇다.
너무 애를 쓰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같이 있는 마음이 초조해 진다.
"맞다. 배고프겠다. 뭐 좀 차려 줄까?"
"아니. 기내식 두 그릇 먹고 왔어."
"두 그릇을 줘?"
"퍼스트는 뭐. 부탁하면."
"우와~ 퍼스트. 대단하다."
왜 그래, 혜정아... 너 이런 걸로 리액션 하던 애 아니잖아...
"부자들도 보통 비즈니스 탄다고 들었는데. 좋았겠다."
"아. 원래 두 자리 예약해 놨던 거라서."
"원래?"
"처음엔 너랑 갈려고 했었잖아."
"아. 어. 음. 으음. 그... 그렇구나."
혜정이의 표정이 경직된다. 그러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이것저것 묻는다.
"근데, 두 자리 했어도 내가 타면 안 되지. 매니저 형도 있는데."
"거기는 회사가 알아서 했겠지. 출장인데."
"어... 어..."
혜정이는 다급하게 어차피 자긴 가고 싶어도 학교 때문에 갈 수 없었다느니, 작년 가을에 배낭여행 했는데 1년도 안 돼서 무슨 파리냐면서 혼자 횡설수설 이야기를 정리했다.
"아무튼, 일은 잘 끝났다는 거네. 이유이 선생님도 좋으셨겠다."
"저기, 혜정아. 근데 나 피곤한 것도 있는데."
"그래그래~ 피곤하지. 일단 쉬고."
"그리고. 너 왜 이러는 거야?"
미안해요, 형. 근데 역시 말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무엇보다 얘 행동이 안쓰러워서 어떻게든 멈춰 줘야겠어요.
"...뭐가?"
"그냥 다. 이러는 거 너 아닌 거 같애."
그 말에 혜정이의 하이 텐션이 훅 내려앉는다.
아주 조금은 내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다.
"...그러니까 뭐가?"
"헤어지자며. 끝내자고 했었잖아."
이혜정의 감정이 3단계로 나뉘어 전해진다.
너무 좋음에서 평범함. 그리고 다시 우울함으로.
감정에 맞추어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도 변했다.
"이러지 마. 너답지 않어."
"니가 말하는... 나다운 게 뭔데?"
"지금 나한테 일부러 맞추려고 하고 있잖아."
"...내가 언제는 안 맞췄어?"
"이런 건 아니지. 불편해 보여. 보는 나도 불편하고."
"마하야... 나 예쁘지 않아? 오늘 화장도 새로 했는데."
"예뻐. 예쁜데. 넌 이런 거 안 해도 원래 예쁜 애잖아."
그녀의 울대가 꿀꺽거리며 움직인다.
침을 삼키는지, 마음을 삼키는지 모르지만 일단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미안."
"뭘...?"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
조용히 말을 들었다.
혜정이는 자기가 나를 가둬 두려고 했던 거 같다면서 입을 파르르 떨며 사과를 건넸다.
"후우. 그러니까 나는..."
"내가 너를 너무 몰랐어. 넌 활발하고 에너지도 넘치는 앤데."
"..."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고. 사회성도 좋은 애를, 그런 걸 내가 너무 배려하지 못했어."
이렇게 사과를 들으면... 내가 속상하고 아팠던 감정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버리자니 감정 이 건방진 새끼들이 주인인 나한테 뱃심도 없는 놈이냐고 따질 거 같고. 붙잡고 있자니 말 그대로 좆같은 놈들 하나 도움 될 것 없어 보이고...
"앞으로는 니가 하자는 대로 잘 맞춰 보도록 할 거야. 데이트도 가고. 여행도 가고. 외식도."
"너. 나 스캔들 난 건 알고 있어?"
"..."
긴 침묵이 이어졌다.
정적인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두 눈에 붉은빛이 물든다.
그런데도 혜정이는 끝끝내 감정에 무너지지 않았다.
아픈 건 피차일반이다.
그래서 나도 그녀를 보며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 나랑 돌아다니면 진짜로 힘든 상황에 놓일 거야."
"...응. 그렇겠지."
"데이트는 어려울 거 같다."
"그... 그래..."
미치겠다. 진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아니.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사람을 갈등하게 만들어.
이렇게 고민하고 갈등할 바엔 그냥 공부하겠어. 운동이 아니라 공부를. 이런 고통을 참고 견디면 서울대가 뭐야. 하버드도 간다 내가.
"스캔들로 뭐라고 하지는 말자. 엄밀히 우린 헤어졌던 상태니까."
"응... 그래."
"짐 빼고 나갔잖아. 너 문 닫고 나가는 모습 보면서 난 나 대로 무너져서 견딜 수 없었고."
"알어. 그랬을 거 같애."
"그리고. 아니다. 됐다."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은데...
그냥 민구 형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진짜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다 좋게 지나갔을까?
아 씨발. 욕이라도 시원하게 하면 좀 낫겠는데, 대체 뭐에다 욕을 해야 되는 거야? 어디다 화를 내야 하는 거냐고.
얘? 아니면 나? 환경? 주변? 기자...?
그래. 기자다. 기자 욕을 하자.
씨발년들아!! 남의 사생활을 가져다 개지랄을 떨어!! 기사 낸 씨발 것들 다 뒤졌으면 좋겠다.
"어쨌든 난 저기, 좀 쉴게."
"..."
"이번에 시차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서. 갈 때도 그랬고 올 때도 그렇고, 잠을 거의 못 잤어."
"......"
뭐라고 하든 방으로 일어나든 그녀는 반응하지 않고, 급기야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후우."
정신 차려라, 구마하. 무너지면 안 돼. 그럼 또 그날 같은 패닉이 밀려온다.
멘탈 잡아. 감정의 문제야.
무엇보다 이게 아닌 거 같은데... 이렇게 하면 안 될 거 같은데...
마음이 왜 이렇게 방방 뜨는 거 같지?
이별의 고통이 아무리 힘들고 아프든, 내가 겪은 고통들보다 더 큰 건 아닌데.
그래. 고통으로 따지면 난 이보다 더한 순간들을 이겨 내 왔어.
무엇보다 엄밀히 천 년 전 사람이잖아.
천 살을 먹은 놈이 왜 이렇게 배포가 약해서 그러는데.
곤륜의 정신이, 히말라야의 그 높은 기상이 고작 이거밖에 안된단 말이냐?
지나간 일 욕하고 후회해 봐야 돌아오지 않는 거, 병신같은 짓좀 그만하고 나가서 달래 주자.
안아 주고 나도 미안하다고 하면 돼.
그래. 방에서 나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정이잖아.
나쁜 감정에 귀 기울이지 말고 좋은 감정을 들어 봐.
따져보면 좋은 게 얼마나 많어.
꾸민 거 봐 봐. 마침내 내가 사 준 옷을 입었잖아.
아쉬움 미움 서운함 이딴 새끼들은 무시하고 나가자.
혜정이를 안아 주자.
그러고 싶어. 진심으로.
그렇게 단단히 마음먹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랬는데.
"저기... 혜정..."
"흑. 흐윽! 흑..."
"..."
그녀는 이미 방에 들어가 혼자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참는다고 참겠지만 쟤도 어려웠겠지.
이 집의 단점을 또 하나 알았네.
집과 집 사이는 방음이 잘 돼도, 집 안에서는 소리를 감출 수가 없어.
한숨이나 벅벅 쉬며 다시 안방으로 돌아온다.
그래. 이게 현실이야. 내가 곤륜에서 자랐으면 지금 가서 쟤를 달래 줘.
근데, 난 엄밀히 한국 땅에서 자랐잖아. 난 구마하지 구마윤이 아니라고.
나한텐 히말라야의 기상은 없어.
백두산도 북한에 있고... 한라산도 바다 건너 제주도에 있잖아.
성남 남한산성은 알고 보면 그렇게 높지도 않다고...
문 하나만 열고 들어가면 되는데.
그 문 하나를 연다는 게 살면서 마주한 가장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지금 쟤를 마주하면, 내가 감정조절이 안 될 거 같다.
니가 왜 우냐고 화를 낼 거 같고, 나간 사람이 왜 돌아와서 이러냐고 따질 거 같고, 아프게 한 만큼 괴롭게 만들 거 같다.
그래서 참는다.
비겁하지만, 내 마음에 변명이나 하면서 조용히 있는다.
뭐 어쨌든, 스캔들이나 그런 거 나는 떳떳하잖아.
끝내자고 한 건 쟤야. 상처를 받은 건 나라고.
아니야? 맞잖아...? 아니. 그게 맞다고.
부담되는 게 싫다느니 뭐니. 난 몰랐어.
말을 안 했는데, 내가 지 마음을 어떻게 알어.
선아한테 했던 얘기를 나한테 했어 봐. 친구한테 할 얘기를 왜 나한테는 못 하냐고.
더 부끄러운 짓은 하면서, 더 야한 건 얼마든지 했으면서. 왜 그거 하나 말을 못 해서...
부담스런 연애가 힘들다는 것도 난 아까 차 타고 오면서 형들 때문에 알았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일이 벌어진 순서를 기준으로 했을 때. 적어도 나한테 잘못은 없어.
아니야? 그렇지 않어? 쟤도 아까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잖아.
"진짜... 나도 이러는 내가 너무 싫다..."
이러든 저러든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좀 자고, 그리고 생각을 해 봐야겠다.
공항에서 기자들한테 시달린 피로가 지금 혜정이의 감정과 어우러져 인터벌 10세트 한 것 같다.
부담이 온다. 몸과 마음이 버겁다 못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그래. 부담! 오~ 나도 부담을 느끼네.
힘들어.
너무 힘들다고...
기절하듯 자고 일어나자 혜정이는 학교를 가고 없었다.
조심히 방문을 열었더니, 그래도 짐은 빼지 않았다.
오히려 책상에 편지가 하나 놓여져 있다.
[잘 잤어? 너무 곤하게 자길래 일부러 안 깨웠어.]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지금은 대화를 할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점에는 그녀도 동의하고 있었다.
마음을 풀어 주고 싶은데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면서 편지 끝에 작은 하트를 하나 남겼다.
[비록 내가 너 같이 다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나도 너 좋아해. 사랑하고. 그 마음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사랑한다라..."
자연재해가 한번 들이닥쳤다고 보면 되려나?
그건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억울하고 분해도 치울 거 치우고 정리할 거 정리하면 다시 살 수는 있잖아.
그렇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걸까?
고민해야 된다는 핑계로 집에서 쉬었다.
예전과 다르게 출석 빠지면 제대로 학사경고지만, 리스크를 감수하고 혼자 있었다.
안 봐도 뻔하잖아. 학교 가 봐. 그 커다란 캠퍼스가 수군수군할 거라고.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내가 꿈꾸던 착한 여자 친구가 된 혜정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음...?"
책상 한쪽에 그녀의 일기장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