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23화 (323/401)

이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야 (13)

[애도 아니고. 왜 혼자 자는 게 싫다고 찡찡거리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침대가 커도 둘이 누우면 좁을 건데.

혹시 악몽 같은 걸 꾸나? 몸이 그렇게 큰데? 그렇게 생각하면 어딘가 웃기고 귀엽다.]

[정신을 차리니 1월이 다 지나갔다.

한 달이라니... 마하는 그렇다 쳐도 내가 정말...

하지만 좋은 시간이었다.

걱정 고민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순간들이었다.

심지어 뭐 먹을까? 같은 생각도 안 했던 것 같다.

그가 다 알아서 해 주는데, 요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식탁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가 정말 친구를 넘어 연인이 됐다는 걸 알았다.

아빠가 아닌 남자 친구도 보호자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음이 놀랍다.

보기보다 그에게 많이 의지하는 내가 있는데, 한심하지 않고 나 자신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애인이 생겼다고 모든 게 채워진 건 아니지만 가슴 한구석 이유도 모른 채 느껴 왔던 공허함도 엷어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20대 들어 와 처음으로 연애를 하는 것 같다.

재훈이? 걔는 아니야. 그런 걸 연애라고 하고 싶진 않어.

인연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린 처음부터 이럴 수 있는 걸 괜한 시간을 돌아온 건 아닐까?

그럼 그 원인은 나한테 있나?

하지만, 마하도 백설 언니나 최다빈 선수 같은 인연을 만들었으니까.

그 외에도 내가 모르는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과거를 묻지 말고 돌고 돌아 서로가 제자리를 찾았다고 여기자.]

[20대의 연애와 10대의 연애는 다른 것 같다.

관계도 생각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

어떤 날은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 같다.

막 짜증 나고 싫다가도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안정되는 내가 있다.]

[정말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걸까? 마하는 뭔가를 이루고 쉬는 거지만 나는 아니잖아. 편안함에 기대다간 평생 그 아늑함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마하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애라는 걸 느끼는 저녁이다.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 둘이 장을 보러 갔는데,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얘도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고 웃어넘겼다.

늦은 시간이라 마트에 사람이 없어 다행이지 이게 만일 낮이었다면...

사람들이 나쁜 마음이라도 품고 다가오면 어떡하려고 그러지?

팬이라고 다 좋은 팬들만 있는 건 아닌데. 조금은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나?

연예인들이 왜 정신병에 걸리는지. 명성이 있는 삶이 어떤 건지 간접 경험을 통해 배워 간다.]

[오랜만에 학교 가는 길에 다녀오라는 인사를 들은 것 같다.

마하는 자주 "우리 되게 부부 같지 않어?" 란 말을 하는데, 지난 설 이후, 마윤이 오빠 결혼 소식이 뭔가 영향을 준 건 확실해 보인다.

이 사람이 너무 좋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다.]

[정말 나도 나를 모르겠어...

최근 마하한테 들었던 결혼이나 그런 스트레스와는 별개로, 오늘도 그의 품에 안겼을 때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을 느꼈다.

다만, 그것도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이는 건 있다.

마하는 언제나 나를 최고조의 단계에 올려놓고 내려오게 놔주지를 않는다.

처음은 버겁지만 한두 번 느끼다 보면 그때부턴 좋은 기분이 온몸을 지배한다.

지나고 보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어떤 의심도 없이 그의 요구를 수용해 주고 있다.

좋으면서 무섭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내가 나를 잃게 되진 않을까. 먼저 같이 또 그런 단계로 가는 건 아닐까...

아무리 20대의 연애를 해도 선은 지키고 싶은데.

마하는 욕망도 많고 에너지도 지치지를 않으니.

다른 더 좋은 것들이 있을 텐데.

함께 영화를 본다든지, 책을 보고 이야기를 한다든지.

나도 공원에 산책도 가고 싶고 놀이동산도 가고 싶지만, 사람이 사람이라 그런 평범한 일상이 너무 어렵고.

과연 내가 이 사람의 욕구를 맞출 수 있을까 점점 의문이 따라온다...]

[오늘은 연애의 밝은 면이 아닌 그림자 속을 들어갔다 온 날이었다.

주기도 점점 늦어지고, 몸도 버겁게 느껴지길래 병원을 찾아갔는데. 진단 후 선생님이 내 얼굴을 굉장히 한심스럽게 쳐다보셨다.

성남 집 근처 다니던 곳을 갈걸. 리뷰도 좋고 여자 마음 잘 알아주는 여자 선생님이라고 좋게 생각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분의 눈빛이 날 엄청 문란한 여자로 본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남자 친구가 운동하는 애라는 말을 꺼내야 했다.

말을 하고 나자 속상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왜 그런 이야길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해야 했던 걸까.

그 사람은 의사고 난 환잔데.

내가 왜 내 몸에 대한 변명 같은 걸 하고 있는지...

몸이 많이 상했다고 들었다.

당분간 마하가 요구해도 잘 달래 봐야겠다.]

[조금씩 조금씩 애가 짜증을 부리는 빈도가 늘어나는 걸 느낀다.

그래서 몸이 안 좋다고 에둘러 표현을 했는데, 자기와 같이 운동을 하잔다.

이럴 땐 얘가 운동했던 애가 맞구나 싶어진다.

운동이면 세상 모든 게 해결되는 줄 알다니. 한숨과 함께 허탈한 미소가 지어진다. 나쁜 기분은 아니다.]

[마하가 정식으로 모델이 되었다.

편견을 갖고 싶진 않지만, 역시 사람은 성공을 해야...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질투하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좋다. 멋있다. 모델 남자 친구라니 친구들 앞에 데리고 나가서 엄청 자랑하고 떠들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 사람은 그냥 패션모델이 아닌 존재니까.

남들에겐 특별한 직업도 얘한텐 명성에 따라오는 하나의 과정일 뿐.

내 말과 행동이 그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수 있음을 명심하자.

타인의 성과를 마치 내가 한 듯 자랑하지 말자.

언제나 호들갑스레 들뜨지 말자.]

[이유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돈 있는 사람들은 다 외국 옷만 입는 줄.

모델이 되고 난 이후부터 마하의 스타일이 바뀌는 것 같다.

패션 디자이너가 바로 옆에 있으니 세련되지는 건 있겠지만, 난 좀 더 수수한 게 좋다.

그렇다고 내 취향에 그를 맞출 수도 없고.

개인적으로 마하는 운동복 입고 있을 때가 가장 멋있는 것 같다.

듬직해 보여. 무표정하게 있어도 뭔가 해낼 것 같다는 의지가 생겨.

먼저 어떤 기사에서 봤던 사진이 생각난다.

운동화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커다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뒤 가만히 스타디움을 보던 사진이었다.

알고 보면 그렇게까지 진지한 애는 아닌데. 장난도 많고 이상한, 웃기지도 않은 농담도 정말 잘 하는데.

승부의 세계와 현실이 다른 거겠지.

아무튼 그 사진. 다시 생각해 봐도 뭔가 아쉽다.

저장해 둘걸... 내일이라도 찾아볼까?]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얘는 자기가 구마하라는 걸 모르나? 스스로를 너무 평범하게 생각하는 것 아닐까? 내 기분을 왜 몰라 주지?]

[학교 끝나고 오랜만에 혜선 언니를 만났다.

직장을 옮겼다고 들었다.

나 나가면서 새로 온 애들이랑 별로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그중 한 사람이 사장님이랑 바람을 폈단다.

지저분한 환경도 싫고, 괜히 오래 같이 일했다고 사모한테 전화 받는 것도 짜증났단다.

그렇게 친절하고 수더분한 사장님이... 믿기지가 않는다.

사람 속,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다더니. 정말 그렇다.

원래 내 얘기도 조금 하고 조언을 듣고 싶었는데, 언니가 가져온 주변 이야기가 너무 많다 보니 들어 주는데 시간을 다 쓰고 말았다.

일이란 관계를 벗어나니 이 언니도 그냥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싶어진다.]

[강남에서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다.

민혜, 재영이, 지선이를 봤는데, 친구들이 보자마자 "너 연애하지?!" 라고 묻길래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근데 놀랍게도 모두가 한 입으로 "그럼 마하는?" 이라고 다시 물을 땐 놀라서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이야기 중간 민혜와 슬쩍 눈빛을 나누는데, 애가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는 게 보여 덩달아 웃고 말았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민혜와 선아가 너무 고맙다. 비밀을 지켜 주는 친구라는 건 보기보다 소중한 것 같다.]

[봄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 차오르길래, 기분 전환으로 옷 한 벌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마하가 쇼핑을 가자고 해서 대충 따라나섰는데, 역시 얘는...

오늘 대체 얼마를 쓴 걸까...? 얘한텐 그것도 큰 돈은 아니겠지?

먼저 백설 언니가 두고 간 옷들을 보면서 이런 건 어디서 사나 싶었는데 그게 청담동이었구나.

천들이 질감이 다르다. 그냥 흰 티도 핏이나 스타일이 있다.

동대문 옷들은 누가 입어도 잘 어울리게 만들어진 옷인데, 이런게 대중과 소수 취향의 차이라는 건가? 역시 돈이란...

그리고 또 하나 명품 백이 생겼다. 이번엔 구두도 같이 생겼다.

물론 다 마하가 선물해 준 것들이다.

먼저 토리노 끝나고 얘가 보내 준 지갑과 가방도 아끼고 아껴쓰고 있었는데, 이런 게 두 개나 되다니.

좋지만, 좋은 티를 내자니 속물스런 여자로 비춰질까 걱정이다.

무엇보다 또 한 번 성공이 얼마나 좋은 건지를 알 수 있었다.

엄마랑 백화점을 가면, 꼭 명품 샵을 한번 들렀다 나오는 편이다.

내가 아니라 엄마가 그런 데 보는 걸 좋아하셔서. 물론 사진 않지.

그래서 그러나? 물건 하나 보려고 해도 손님이 직원한테 굽신 거리는 행동이 싫었는데. 난 애초에 그런 매장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한데, 이렇게 사람들이 친절할 수가...

공간도 넓고 천장도 높고 엄청 쾌적한 환경에서 쇼핑을 한 것 같다.

동대문이랑 비교하면 정말이지...

그런 게 바로 '고객 응대'라는 거구나.

진작 경험해 봤다면 나도 서빙할 때 클레임 받는 일이 적었을 건데...

자본, 명성, 성공. 모든 걸 이룬 마하가 부러우면서, 노력과 과정을 모르는 게 아니니까 알아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감춘다고 감췄는데 속내가 들킨 걸까? 마하가 오는 길에 사 왔다면서 커다란 쇼핑백을 내밀었다.

또 가방이었다.

깜짝 놀라 이걸 왜 샀냐고 물어보니. 먼저 청담동 갔을 때 내가 매장에서 그걸 한참 보고 있더란다.

뭉클해지고 또 그만큼 나에게 관심을 주는 건 고맙지만...

300만원 가까운 물건을 붕어빵 건네듯 쥐여 주는 애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지...?]

[어제, 친구들이 놀러 왔었다. 다들 여전했지만, 정석이가 뭔가 듬직해진 기분이다. 선아의 연애가 어떤지 얼핏 들었는데, 내가 인내심이 부족한 건 아닐까 싶어진다.

많이 웃고 떠들고 그랬던 것만 기억하고 싶지만, 김태윤이 들려준 마하 어릴 때 이야기는 곱씹어 보면 굉장히 슬픈 장면으로 다가온다.

성공과 노력. 그리고 외로움...

그의 삶은 내가 아는 예상치를 언제나 훌쩍 뛰어넘는다.]

[내가... 나는 이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오늘은 옷방에서 신발과 가방 박스들을 정리하는데, 백설 언니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언니는 얘랑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 방법을 들어보고 싶다.

최다빈 선수라도 찾아가 볼까... 근데 뭐야 그게. 너무 이상하잖아.

좋아. 사람은 좋은데. 방법을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다.

선아는 맞춰 가라고 했지만, 내가 얘한테 맞출 수 있는 게 없어.

안 그러면 몸이 아퍼.]

[병원을 다녀왔다. 의사 선생님의 오해가 풀린 것 같다.

몸이 많이 돌아왔으니 이렇게 관리를 해 주라고 하신다.]

[거리를 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 안에 뭔가 다른 게 들어오는 걸 받아들일 수는 없다.

누군가 있다. 요즘 자꾸 밖으로 나가는 게 뭔가 있는 것 같다.

설마 얘도 바람을 피는 걸까? 그땐 끝이야. 정말 다시는 그런 거 참지 않겠어.

마하가 밉다.

나도 데이트 하고 싶은데. 같이 손 잡고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가고 싶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건 내가 아닌 너 때문인데...

왜 이 마음을 모르고...]

[불지옥을 걷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내가 실수한 걸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다짐하고 생각을 고치자고 마음먹자마자 세상이 나를 버리고 돌아섰다.

그는 내 사람이 아니다.

난... 나는...]

[어떤 비난을 들어도 상관없으니, 내 얘기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정말 내 감정 기분 다 빼고 오직 벌어진 사실 그대로를 친구들에게 알려주었다.

모두가 내가 너무 심했다고 말한다.

상대가 구마하라서가 아니라, 어떤 남자애들도 그렇게까지 하면 마음이 식을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혜선이 언니한테도 물었다.

여기엔 구마하라고 말은 안 하고 그냥 남자 친구라고만 했는데, 그렇게 속 좁은 애랑은 빨리 끝내 버리란 소리를 들었다.

연인이란 말이 왜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을 의미하는지 이번에 깨달았다.

나 하나 생각하다가 마하가 속 좁은 애가 되고 말았다.

그의 행동도 마음도 알고 보면 무엇하나 나에게 나쁜 건 없었는데...

그저 내가 움츠리고 겁을 먹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일이다. 용기를 내는 거야.]

[끝났다... 모든 게 다... 마하의 눈빛이 예전과 달라져 있다.

내가... 내가 너무 멍청...]

"..."

마지막 일기는 문장을 다 마치지도 못했다.

대신 종이 위에 눈물 자국이 엄청 많았다.

보내 줘야겠다...

이렇게 착한 애를 더 이상 내가 상처 입힐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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