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25화 (325/401)

< 이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야 (15) >

우리는 소파에 기댄 상태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나쁘지 않구나.

먼저같이 감정적이지 않고 천천히 이별이란 걸 소화하니 먹먹해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것 같애.

혜정이도 부스럭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도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있다는 건 동의해."

"음."

"근데, 이건 알아주면 좋겠어. 내가 일부러 너랑 거리를 두려고 그런 건 아니라는 거."

"알아. 부담되는 상황이었다면서."

"그런 걸 떠나서..."

혜정인 고민에 빠진 얼굴로 멍하니 한 점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통해서. 나도 내가 왜 이럴까 많이 생각해 봤거든"

"괜찮아. 각자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있지.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해."

"일기장에도 못 쓴 이야기가 있어."

"음?"

"고민 끝에 답을 찾았어. 나도 너한테 상처를 줬지만, 내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나도 이번에 알았고..."

혜정인 한 템포 쉬면서 다시 말을 이어간다.

"이제는 그러지 말자고 넘어서자는 각오가 생겨."

글쎄. 뭔지 알아야 이해를 하든가 말든가 할 건데...

아무튼, 각오가 생겼다니 다행이지 뭐.

"뭔지 몰라도, 극복했으면 됐지."

"마하야... 너는 너가 다 컸다고 생각해?"

"다 컸냐라. 형은 내가 어른이라고 했지만, 난 원체 어른이라는 개념을 몰라서."

"어른은 스스로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지는 게 어른이지."

"그렇게 따짐, 난 원체 어릴 때부터 혼자 많은 걸 결정하고 살았던지라. 오히려 내 입장에선 어리다는 감각을 모르겠다."

"하긴, 너는 경제적인 활동도 하고 있으니까."

"아니, 꼭 돈이 아니라."

혜정이가 고개를 돌려 눈을 바라본다.

"난 이번에 내가 너무 어렸다는 걸 알았어. 그게 너한테 상처를 줬고."

"뭐.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해. 들어줄게."

"..."

가벼운 웃음과 말할 준비가 됐다는 듯 미소 짓는 얼굴.

그녀를 향해 나도 경청하는 자세로 고개를 돌렸다.

"얘기해 봐. 뭔데?"

"우진이랑 만났을 때 이야기야."

"누구?"

"김우진. 나 처음 만났다는 애 있잖아."

"중학교 때 그놈?"

"응. 그때 일을 아직까지 떨쳐내지 못하고 있더라고 내가."

남자 얘기를 해도 지민이 형이 나올 줄 알았다.

아니면 잠깐 사귀었었다는 대학 들어와 만난 놈이라든지.

대체 그 어린 철부지 때 무슨 일을 겪었길래 지금까지 이러는지.

미숙함을 다른 이야기로 포장하려는 건 아닐까?

이제와서 잘 알지도 못하는 놈 얘기를 내가 들어야 하나? 여러 고민이 있었지만.

"걔랑 잘 끝난 거 아니야?"

"...부끄러운 얘기야."

무엇보다 나는 김우진이란 놈이 혜정이의 처음이라는 걸 알고있다.

이번 일을 통해 얘도 엄청난 심연을 들여다 보고 왔구나.

"야. 이 마당에 무슨. 까놓고 말해서 우리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냐. 서로 엉덩이 털 난 거까지 다 봤는데."

"후후후. 하하하~! 아하하하!!"

오랜만에 웃는 모습 보니까 좋네.

한참을 배를 잡고 웃던 혜정이가 한숨을 훅 내쉬며 말했다.

"후우우... 살다살다 정말 이보다 더 끔찍한 말을 또 들을 수 있을까 싶어..."

"미안. 난 어른이 아닌 거 같다. 철이 안 들어."

"괜찮아. 덕분에 좀 가벼워졌어."

분위기가 진정된 상태에서 그녀의 추억이 시작됐다.

"나 그래도 중학교 때는 공부 꽤 했었어."

"그래? 그건 또 몰랐네."

"고등학교 와서 성적이 많이 떨어진 거니까. 그땐 진짜 반에서 1등도 하고 그랬었어."

"이야. 그럼 그때 그 성적 유지했으면 지금 대학 아니라 더 좋은 곳도 갔었겠네."

"유지가 됐으면... 그랬겠지."

"흠. 근데, 너 어릴 때 공부 잘 한 거랑 김우진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

"있지. 둘이 공부 많이 했었거든. 그게 성적에 도움을 줬고."

"범생이들이네."

"맞어. 범생이들이었어. 걔도 나쁜 애는 아니었어."

전교회장 남자친구에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여자친구.

두 사람은 여자들 보는 순정만화에 나오는 그런 커플이었다.

기억난다. 그때 혜정이는 머리를 단발로 하고 다녔었어.

예쁜 사람은 단발을 하면 더 예뻐진다는 말이 있듯, 얘는 언제나 그렇지만, 중학교 땐 진짜 모든 애들이 다 좋아하는 존재였었다.

"누가 먼저 사귀자고 한 거야?"

"걔가 먼저 고백하긴 했지만, 솔직히 나도 좀 가까워지고 싶어서 노력한 건 있어."

"흠... 넌 걜 왜 좋아했는데?"

"모르겠어. 지적인 모습이 좋았던 건지."

"역시 남자는 몸보다 머리가."

"키가 커서 좋았던 건지. 지금와서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드라마 같은 커플은 친구들 모르게 둘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로 학교 도서반에서 만났었단다.

철 지난 인문 서적과 때가 내려앉은 오래된 참고서. 그리고 커다란 책상.

학교 구석에 있는 교실은 모르는 학생들에겐 죽은 공간, 아는 이들에겐 그보다 아늑할 수 없는 아지트였다고 해준다.

역시 공부하는 애들은 연애도 지들 같은 곳에서 하는구나.

어릴 때 친했던 일진 애들은 아파트 지하 창고나 빌라 구석진 곳, 동네 오락실 이런 데서 만난다고 했는데.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계획을 짰었어."

"하하! 어떻게?"

"외고를 노려보고, 잘 안 된다면, 대학은 외국어 대학교를 가자. 둘 다 같은 전공은 피하고, 한 사람이 서양 언어를 익힌다면 한 사람은 동양 언어를 익히는 거다."

그렇게 세계여행을 나가자.

언어연수도 같이 가자.

워킹도 함께 떠나자 등등등.

중학생 커플은 아기자기한 둘 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거기야 말로 진짜 부부네 부부야."

"그땐 정말 그랬으니까... 낭만이 있는 나이잖아."

"잠깐만. 근데 이걸 내가 들어야 하나? 별로 나한테 도움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애였는데. 갑자기 이민을 가게 됐어."

"흠."

"앞으로 4년만 있음 펼쳐질 커다란 미래가 어른들의 사정으로 사라지고 말았어."

"걘 갑자기 왜 나갔데?"

"아빠가 발령을 받았었어. 우진이는 남겠다고 했는데, 그러지 말라고 했고."

"지가 남는다고 해도 남겨줄까. 어른들이."

"그러니까 걔도 형제없는 외동이었거든. 무엇보다 어렸고."

그런 어린 나이에도 마음은 진심이었다.

헤어진다는 건 두 사람의 계획에 없었던 일이란다.

가슴이 찢어지지만, 가족의 일이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소녀는 멀어지기 싫어하는 소년을 달래주다가.

"어어..."

"..."

"했구나."

"응. 그랬었어."

가끔 둘이 뽀뽀도 하고 손도 잡고 정말 큰 용기를 내서 입술을 마주친 적은 있어도 완전히 선을 넘는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그 새끼가 널 일부러 그런 거냐 조심스레 물으니, 본인도 갈등은 했지만. 이별이란 상황 앞에서 뭔가 다 내려놨던 거 같단다.

"그나마 다행이네."

"마침 그때 우리 집도 엄청 힘든 상황이라서. 나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

"또 아저씨 사업?"

"후후후. 그때가 진짜 절정이었지. 엄마 이제는 진짜 도장 찍자 뭐한다 맨날 울고계시고. 아빠는 자기도 당한 거라면서 화내고 소리치고."

"진짜 아저씨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빠 욕하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애정이 큰 상황에서 내린 당연한 결정이기에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 듯 세상의 커다란 시련에 맞서는 기분도 들었단다.

그러나.

"너무 아팠어."

"..."

"그렇게 아플 거라곤... 생각을 못 했어."

실제로 경험하는 일이란, 책에서 보던 것과 다르고, 가끔 친구들이 조심스레 들려주는 그런 이야기와도 너무나도 달랐다.

몸이 찢어지는 아픔이란 걸 알았다면 혜정인 줄리엣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해준다.

"그래도 난 내가 느낀 고통만큼. 걔가 약속을 지킬 줄 알았는데."

"그놈이 무슨 약속을 했는데...?"

3년만 기다리면. 고등학교만 마치고 대학은 반드시 한국으로 올 거니까.

원거리 연애도 하는데, 우리는 꼭 감동적으로 재회를 하게 될 거다.

그렇게 소녀는 상처를 약속으로 간직한 채 홀로 남았다.

"걔 가고 바로 여름방학이 시작됐었어."

"맞다. 2학기 때 전교회장 다시 뽑았었지. 태윤이한테 물어보니까 그 새끼 나갔다고."

"방학이라서 정말 다행이었지."

"왜?"

"그때 두 달 간 생리가 멈춰있었거든."

"허허..."

"임신은 아니지만 정말 그때의 불안이란..."

혜정이는 당시를 떠올리며 어른들 부부싸움이 오히려 안정감을 주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게 무엇인지, 만일 진짜 임신이라면 앞으로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지... 이겨내기가 너무 어려웠단다.

"맞다. 그때 오빠랑 좀 가까워졌다."

"무슨 오빠? 지민이 형?"

"아니. 너네 형. 마윤이 오빠."

"우리 형? 갑자기?? 여기서???"

불안에 치이는 어느 날. 홀로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 울고 있는데, 퇴근하던 형이 그 모습을 봤단다.

"왜 그러고 있냐고 하길래, 아무 얘기 안 하고 그냥 심부름 나왔다가 혼자 있다고 했는데. 오빠가 슈퍼 데리고 가서 과자도 사주고."

"애야? 과자 먹고 기운 차리게."

"음. 그러면서 어깨 다독여 주는데. 뭔가 마음이 진정되고 그러더라고."

어이고 구마윤 씨. 단전도 터진 양반이 뭘 그렇게 여기저기 마음을 쓰고 다니셨는지... 하여간 호인이라니까.

"형은 그렇다 치고. 그 새끼는?"

"근데 왜 아까부터 자꾸 놈에서 새끼가 되고. 말이 거칠어져?"

"새끼지. 야 지금 찾아가서 죽이지 않는 걸 다행인 줄 알어."

"흐음..."

"어쨌든 걘 뭐 어떻게 됐는데?"

처음엔 메일이 자주 왔었단다. 사진도 많이 보내고. 외롭지 않게 노력을 했단다.

하지만 그것도 세 달 정도가 지나니 뜸해지기 시작하면서.

"걔도 그쪽 학교 다니기 시작하고 이러면서 뭐 그냥..."

"끝났구나."

"음."

"욕 써서 미안한데, 존나 허무하네."

"맞어. 너무 허무했지..."

가을이 되고 날이 선선해지자 연락은 완전히 끊겼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재차 메일을 보내도 답장은 없었다.

혜정이는 상실과 아픔만 남은 추억 속에서,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을 가진 상태로.

김우진이란 놈을 좋아했다는 다른 여자애들에 의해 험담과 뒷말이 무성한 남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게 아직까지 남아있었어."

"그럼 서희진인가 뭔가 하는 년이 너 뒷담까고 그런 것도."

"야? 년은 또 뭐야!"

"아. 어쨌든."

"맞어. 그 다음에 벌어진 일들이야."

"니가 사람들 평판을 신경쓰는 게 이해가 된다..."

"딱히 이해를 받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조금만 알아달라는 거니까..."

얼굴 예뻐. 인기 좋아. 그런 애도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

하긴, 나도 세상이 볼 땐 연금 받어 광고 찍어 BMW 타고 다녀. 그런 거지 뭐...

"근데, 이번 일 겪고 나니까."

"이번 일 뭐?"

"스캔들."

"아. 어..."

"날 당사자라고 보기도 뭐하지만, 근데 이번 일과 그때를 비교해보면, 정말로 별 거 아닌 걸로 고민하고 살았구나 싶어져."

나름의 충격요법이 된 건지. 지금 와선 모든 게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도 있단다.

"다행이네. 좋은 것도 있다고 하니까."

"구마하라는 존재. 너가 어떤 사람인지를 인식하게 된 것 같애."

"...내가 뭔데?"

갑자기 혜정이의 전신에 기운이 살아난다.

표정은 슬픔을 감출 수 없지만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난 널 찬 사람이 되는 거잖아."

"...그렇지."

"너가 헤어지자고 한 말이 나한텐 강해지라는 뜻으로 들렸어."

"..."

"나약해지지 말자. 이런 일도 있다. 이런 일에 비춰보면. 너라는 사람에 비춰보면."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김우진 뭐. 그런 애 정도야. 그치?"

"그래. 맞어. 이겨내면 돼."

아무리 아프고 힘든 것들도. 고통스런 일도. 땀 한 바가지 쏟아내며 온 몸이 덜덜거리는 훈련을 거치다보면 무덤덤한 일들이 된다.

"나도 운동을 해야겠어."

"하하하~! 좋네."

"달리기부터 해볼까. 아니면 나도 뭐 하나 배워볼까?"

"멋지네. 이혜정."

"고마워. 마하야."

"에이 뭐가 고마워."

"그냥. 정말 모든 게 다."

그대로 끝냈으면, 미안하고 후회만 가득한 상황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좋게좋게 보내주자. 아프지 않게 해주자 한 것들이 돌고 돌아 그녀에게 어떤 각성을 준 것 같다.

"니가 여자들 아프지 않게 하라는 게 그런 뜻이었구나."

"...응."

"아프지 않게라... 당연한 건데, 그렇지? 어려운 일들이 있었네."

"뭐. 그렇지."

갑자기 우리가 처음 맺어진 그날이 떠올랐다.

3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지민이 형한테 완전히 박살나서 돌아오던 애를 집으로 들여 달래줬는데. 생각해보면 얘는 그때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었다.

"저기. 혜정아 이와중에 이런 거 묻기 좀 그렇긴 한데."

"뭐? 얘기해. 니 말대로 서로 엉덩이까지 다 본 사이에 무슨."

"하핫! 아니. 다른 게 아니라."

그럼. 너 나랑 처음에 한 것도 그런 이유였냐? 포기하고 그냥 내주는 듯한 그런 거였냐 물으니.

"아니지."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안 그래도 나한테 그 얘기도 해주고 싶었단다.

"우진이 그러고. 고등학교 올라오고. 뭔가 진정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지민이 오빠를 알게 됐어."

얘랑 그런 일이 있어서 그렇지, 지민이 형은 알고보면 되게 좋은 사람이다.

다만, 실제로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다보니 혜정인 그런 문제 때문에 속알이를 한 적이 꽤 많았다고 해준다.

"오빠한테 많은 위안을 얻기도 했지만, 결국 뭔가 또 흐지부지 안 좋게 끝나고 말았었는데."

"음..."

"넌 다르더라고."

"뭐 어떻게?"

성격적인 면을 떠나 지민이 형도 김우진이랑 크게 다를 건 없었단다.

두 사람을 통해 혜정이한테 섹스란 그냥 아픈 거. 하지만 남자친구들이 너무 하고 싶어하는 거. 그래서 받아줘야만 하는 거. 그런 일로 인식이 되고 있었다.

"이제와서 뭐. 아닌 척 할 수도 없는 거니까."

"..."

"처음엔 너도 그런 줄 알았었지만, 근데, 넌 그게 아니었잖아."

얘도 그냥 성욕에 미치는 건가? 남자애들은 원래 다 그런 건가?

그때도 둘이 소파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었지.

그때 혜정인 내가 느낀 외로움을 알게 됐다.

아무래도 같은 구조의 같은 아파트를 살아서도 더 그랬던 거 같단다.

자기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말도 못 하게 적적할 때가 있었는데, 부모님도 없는 나는 오죽 했겠는가.

학생이 할 수 없는 어떤 위태로운 장난이 누군가에겐 구원이 된다면.

"그래서 안아주고 싶었고."

"허허허. 어어"

"모르겠어. 다들 왜 이런 걸 하고 싶어 하지? 이게 좋나? 그렇게만 받아들여졌었는데."

나와 함께하며 혜정인 처음으로 쾌락이란 느낌을 알았다.

그래서 다음 날 다시 나를 찾아왔다.

어제, 크리스마스 이브에 느낀 그 기분이 일시적인지 아니면 진짜 뭐가 있는지 확인을 하고 싶어서.

"달랐어. 너는."

"하하..."

"정말 좋았던 거야. 나 너랑 하는 거 좋아했어. 진짜로. 내 일기장 봤다면서."

부담이 없는 기분좋은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시한 게 파트너란 관계였다.

아직은 마음을 주기가 어려우니까. 다시 상처를 받거나 하는 게 두려우니까.

"근데, 그것도 너무 빠지다 보니까. 민서때 같이 그런 일도 있고."

"너한텐 셋이 한 게 엄청 큰일이었구나."

"...그럼 넌 아니야?"

"뭐.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다 그러고 크는 거고."

"야. 말 돌리지 말고."

"아. 어쨌든!!"

처음이 누구냐. 그 사람의 처녀막을 누가 훼손했느냐 그런 관점에서 첫경험을 말하면 너무 그 가치가 저하되는 부분이 있다.

혜정이가 말했다.

모든 행위에 있어, 내가 처음은 아닐지라도. 가장 큰 사랑과 애정을 느낀 건 나라고.

"지금까지 이야기겠지..."

"그럴지도. 앞으로 너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면."

"후후. 그때 되면 구마하도 그냥 전 남친 중 하나가 되는 건가."

"...그게 대단한 거지."

구마하란 존재가 어떤 의민지, 그걸 인식하면, 앞으로 누굴 만나더라도 주늑들지 않고 움츠리지 않을 자신감이 생긴단다.

"그래서 너한테 너무 미안해."

"야. 됐어."

"미리 알았다면. 그랬으면. 내가 그 마음을 극복하고 너를 만났다면."

"...됐다고 그만 해."

"하지만 너니까 날 나아가라고, 밀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하하. 저기. 혜정아. 내가 싫거나 하진 않어?"

그녀의 다음 한 마디로 우리의 이야기가 끝났다.

"이제와선 고마워. 모든 게 다."

다빈이에 이어 수빈이. 그리고 혜정이.

연인들을 통해 조금씩이지만 나도 성장하는 것 같다.

나는 그녀를 통해 나도 사랑받을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얻었다.

아니. 이혜정 아니었으면 애초에 그렇게 사랑을 갈구하지도 않았을 거고 운동이란 꿈을 품지도 않았을 것이다.

구원을 받은 건 상대방이 아니라 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나에게 말하길, 내가 있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해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해주니.

슬프지만.

서로를 이해한 시점에서 가지말고 잘 지내보자고 하고 싶지만.

"뭘 고마워. 내가 미안하지."

나의 첫사랑이 이렇게 끝나는 것도 나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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