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26화 (326/401)

나는 스스로를 믿는다 (1)

"논산 훈련소가 이런 분위기구나. 존나 크네."

"너도 처음 왔냐? 남수는?"

"난 일 때문에 못 왔지. 남수는 새벽에 성남에서 인사만 했었어."

"으음. 넌 나중에 선아랑 오겠네."

"꺼져. 뺄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든 뺄 거야."

"하하! 그러든가."

태윤이의 입영 날이었다.

남수 때는 멀리 있어 배웅을 못 했지만 오늘은 정석이와 함께 태윤이네 어머니를 모시고 충남 논산까지 내려왔다.

"얘들아, 이거 마셔라."

"고맙습니다."

"아줌마, 태윤이는요?"

"저기서 아빠랑 통화하고 있어. 마하는 사람 많은데 괜찮니?"

"네, 어머니. 오히려 이런 데 오니까 다들 저한테 관심 없고 좋네요."

정말 오랜만에 느긋한 마음으로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알아보는 시선은 더러 있었지만, 다들 입대라는 과제앞에 나 같은 놈은 큰 관심이 되질 않는다.

"나도 시간 있을 때 훈련소나 들어올까?"

"니가 왜? 너 면제잖아. 금메달이 몇 갠데."

"메달 개수랑 상관없이 나도 훈련은 받아야 된다니까?"

"새끼야, 그 정도면 면제지!!"

"아, 목소리 좀 때와 장소를 가리라고 미친놈아!"

태윤이도 아버지와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녀석은 입대를 앞두고 머리를 짧게 밀다 못해 삭발을 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었냐 물으니, 이것이야말로 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설명을 꺼내 들었다.

"아니, 락이고 자시고. 너만 지금 머리가 너무 이상하다니까?

스님 같아."

"후후후. 다들 배짱들이 없어서 그래."

"아줌마가 옆에 계시니 욕은 못 하겠고..."

"그러니까. 어머님 입장에선 우리 다 착한 애들이니..."

이렇게 넷 중 둘이 군인이 되었다.

다음에 모이면 군대 이야기만 듣겠구나. 화생방이 어쩌구 혹한 기가 어쩌구. 재민이도 먼저 휴가 나와서 그러던데...

그렇게 남들 다 가는 군대지만 부모님한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다. 태윤이네 어머니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어머니, 왜 이렇게 우세요."

"흑... 마하야... 나는 정말 너한테 너무 서운하다."

"저, 저요? 갑자기 왜요?"

"너 운동할 때 우리 태윤이 좀 데리고 다니지. 쟤는 맨날 술만 먹고... 노래한다고 시간만 버리고..."

"아! 엄마 왜 애들한테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래?!"

"맞아요, 아줌마. 먼저 저한테는 형제같이 어울려 줘서 고맙다고 하셨잖아요."

"그래도. 미리 마하가 같이 다니면서 체력 좀 키워 줬으면 이럴때 얼마나 좋니..."

"엄마, 마하 운동 따라 하는 것보다 군대가 더 쉬워..."

"아줌마. 마하 운동 따라갈 정도면... 태윤이 특수부대 들어가요."

"하하하! 걱정 마세요. 김태윤이 뭐는 못 했어요? 군대도 잘 할 거에요."

"정말 그럴까?"

어머님을 달래는데, 형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부모님들이 생각 난다.

우리 부모님은 어떤 마음으로 형과 나를 차원의 저편으로 보내셨을까...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야, 그래서? 우리 엄마 그만 두드리고 아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뭐를? 야 넌 이럴 시간에 어머니나 한 번 더 안아 드려."

"어디 죽으러 가냐? 됐다고 해. 엄마도 좀 그만해. 사람들이 보면 내가 아니라 이 새끼가 엄마 아들인 줄 알겠어."

"아이고, 이런 감성으로 무슨 노래를 한다고. 빌어먹을 자식..."

"근데, 마하야. 아줌마도 궁금하긴 해."

"뭐, 뭐가요?"

"태윤이도 그러던데. 너 그 외국인이랑 사귀는 거 아니라면서?"

"아... 어머니.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니까."

"하하하! 크하하하! 거봐 새끼야!!"

김태윤은 끝까지 정신머리 없게 사람을 몰아붙였다.

아니, 지 입대하는 장소까지 와서 그게 궁금하나?

망할 새끼... 이럴 때 보면 내가 친구를 잘 사귄 건지 못 사귄건지...

"아! 빨리! 나 시간 없다니까?"

"뭐 대충 잘 끝났어.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훈련이나 잘 받어."

"뭐가? 뭐가 잘 끝났는데?"

[장병 여러분들은 모두 앞으로 모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너 부른다. 어서 가라."

"아들, 어제 아빠가 한 말 기억하지? 시키는 것만 잘하면 돼."

"엄마 잠깐만. 그래서? 혜정이랑 끝난 거야 뭐야?"

"시계 챙겼냐? 안경 조심하고. 다치지 마라. 몸 건강하고. 편지 써."

"야? 야! 미친놈아, 하던 얘기는 끝내라고!!! 아 씨! 엄마 이따가 전화하면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줘!"

세 놈 중 가장 오래 붙어 다닌 놈이 내 곁을 떠났다.

친구들이 어른이 되는 건 반가운 소식이지만, 마냥 반갑다고 하기엔 어딘가 헛헛한 감이 없지 않다.

내가 운동하는 모습도 얘들이 볼 땐 그랬을까?

그럼 선수를 그만둔 지금의 나는 이놈들한테 허전하지 않고 꽉차 있는 느낌을 전해 주고 있을까?

* * *

태윤이네 어머니는 가까운 친척 댁으로 모셔다 드리고 정석이와 둘이 성남으로 차를 몰았다.

"더운 데 훈련받으려면 이 새끼도 고생하겠다."

"어이, 구마. 김태윤은 됐고. 이제 둘만 남았는데 좀 깔끔하게 털어놔 봐. 니넨 뭐 어떻게 된 거야?"

"뭘 털어놔. 궁금하면 니 여자 친구한테 들어."

"선아도 확실하게 알아 오라고 했다고."

"왜? 혜정이가 이제 거기도 얘기 안 해 준다냐?"

"아 이 새끼..."

"꺼져, 씨발. 넌 이번에 밑천 다 까발려졌어. 친구라는 새끼가 나를 믿어야지. 지 여자 친구 말만 듣고."

"아 병신아. 외제 차 타는 새끼가 아직도 그런 걸로 삐져 있냐?"

"차가 무슨 상관인데!!"

연애는 끝났지만, 다시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고 말해 줬다.

그러자 정석이가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은 양 인상을 구기며 되묻는다.

"그게 친구가 돼?"

"되지. 알고 지낸 시간이 몇 년인데. 우린 너네랑 달리 성숙하거든."

"지랄한다. 성숙하면 헤어지지를 말든가."

"아저씨. 사람은요,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어요."

"그러지 말고 그냥 둘이 다시 사귀라니까?"

"안돼. 그럼 또 서로 상처만 줘."

"뭔 상처를 줘. 알면 이제 상처 안 주게 잘하면 되잖아."

서로 잘하려다 아픔만 줬다는 걸 이놈한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됐어. 말하면 골치만 아퍼.

그냥 니네 잘 사귀면 돼.

헤어지지 말고 끝까지 가.

반드시 백년해로해라.

"아무튼, 이제 누구한테도 연애 얘기 안 할 거야. 까놓고 이번에 존나 제대로 서운했어."

"꺼지라고, 미친놈아. 지가 행동을 이상하게 해 놓고 왜 남들한테 뭐라고 하는데."

"아, 그게 아니라니까!"

과정이야 어쨌든 감정이야 어쨌든. 친구로 돌아가는 게 맞다.

정석이는 그러다 다시 사귀게 된다고 하는데, 절대 그럴 일은 없다.

"어떻게 단정하는데? 너랑 혜정인데?"

"왜냐면, 집을 옮길 거거든."

"어디로?"

"혜정인 대학 친구랑 살기로 했고, 나도 이사 가려고. 보고 싶어도 서로 연락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어."

"친구라면서?"

"생활 반경이 달라지잖아. 아니, 근데 이 새끼 왜 이렇게 집요하게 그러지?"

우리가 사귀다 헤어졌는데, 왜 지 놈이 난리지? 갑자기 짜증 나는데?

정색하는 얼굴로 돌아보자, 정석이가 혼자 창문을 열더니 담배를 꺼내 물기 시작했다.

"야. 내 차에서 담배 피지 마."

"꺼져. 병신아."

"너, 뭐 지금 진심이냐?"

"아 꺼지라고. 죽여 버리고 싶어지니까."

"...그럼 꽁초는 밖에다 버려."

"돈도 많은 새끼가..."

녀석이 넌지시 혼잣말을 하는데, 무슨 마음인지 이해가 된다.

"뭐냐고. 겨우 다 같이 있나 싶었는데..."

"..."

"이렇게 끝낼 거 호들갑을 떨지 말든가... 지들만 주인공이지.

주변은 병신들이고..."

"미안하다고 새끼야."

"후우..."

"아무튼, 그렇게 됐어. 그만 좀 지랄해. 나도 힘들어."

하나하나 개성 넘치고 제멋대로 구는 우리 같지만, 친구들과 나는 패밀리 같은 개념을 좋아했다.

나와 혜정이. 정석이와 선아. 그리고 태윤이에 남수까지.

두 녀석이 나중에 어떤 여자 친구를 데리고 오든 다 같이 으쌰 으쌰 하는 그런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가정을 이루어. 우리의 우정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가깝게 지내는 관계가 되기를 원했다.

큰 그림이 이번에 우리로 인해 사라졌다.

이 새끼가 서운해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아무쪼록 정석이와 선아가 이번 일을 계기로 더 끈끈하게 오래 가기를 바랄 뿐이다.

"걔는 짐 빼는 거 그렇다 치고. 넌 왜 이사하냐?"

"전세니까. 어차피 내년에 나가야 하거든. 올해 한 번 연장했고."

"아, 진짜. 그런 문서적인 걸 떠나서."

"거기서 수빈이에 혜정이까지 끝났는데 내가 혼자 있고 싶겠냐?"

"하하! 터가 안 좋다 뭐 이런 거야?"

"그렇지. 그냥 뭔가 씁쓸하잖아. 그래서 이사 가기로 했어."

"그럼 성남으로 내려와."

"학교는? 일은?"

"성남에서 왔다 갔다 해. 차도 있고, 매니저도 있다면서."

"됐어, 멀어."

"오라고 새끼야. 혼자 서울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명령질이야. 멀다고 했잖아. 방금."

"성남에서 서울이 뭐가 멀어. 분당에 연예인들은 잘만 사는데."

"됐다고. 그리고 성남 와서 어딜 가. 집도 없는데."

"니가 집이 왜 없어. 니네 집 있잖아. 사장님 계시고."

"형 결혼해. 내가 거길 어떻게 가."

"그럼 집을 장만하든가. 돈 가지고 뭐 하는데. 광고 몇억씩 받는다면서. 다 한상률이 삥땅치는 것도 아니잖아."

"하하하! 아 이 새끼 왜 이래. 정석아.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정석이가 줄담배를 태우면서 말했다.

"너 혼자서는 안 될 거 같으니까 그러지. 미친놈아."

"병신이 어울리지 않게 걱정은..."

"후우. 아, 몰라. 니 말대로 알아서 하든가. 꺼져."

"담배나 꺼 새끼야. 차에 냄새 배."

* * *

성남을 찍고 다시 서울집에 도착.

새벽부터 운전만 했더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사람 소리는 들리지만,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혜정아, 너 어딨어?"

"여기. 옷방."

"마침내 끝판왕이 시작됐구나."

우리가 헤어졌음에도 다시 친구로 돌아가야 했던 이유.

그렇다. 우리는 단순 연인이 아닌 동거 상태다 보니 헤어짐을 떠나 현실적인 뒷정리가 남아있었다.

한 사람 물건이 빠지는 게 아니라 내 이사 문제까지 겹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일시적으로 서로 손을 합치던 게 어물쩍 감정 문제까지 정리되고 말았다.

"어, 왔어?"

"응. 어이고 이걸 순서대로 해야지..."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네. 태윤이는 잘 들어갔어?"

"어. 와~ 논산 사람 진짜 많더라."

"정말? 사람들이 피곤하게 하진 않았고?"

"그닥. 대부분 자기 주변들 신경 쓰지. 여자 친구들은 우느라 정신없고. 가족들도 다들 나보단 아들들 걱정이고. 입대하는 놈들은 담배나 뻑뻑 피고."

"후유. 고생했네. 그래서 태윤이는 잘 갔다고?"

"너도 지금 정리 때문에 정신이 없구나..."

어느 집이나 비슷비슷하겠지만, 옷은 구실이지 이 방은 거의 창고로 쓰였다.

스키 장비나 운동복들, 신발, 아령, 여행 트렁크.

혜정이한테 준 선물과 그 외 기타 등등에 정말 기타 등등까지.

두 사람 짐이 빼곡하게 들어찬 방은 발 디딜 틈도 없어 대충 옆에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박스를 하나씩 들고 날랐다.

"이건 뭐야? 잡지? 야, 이건 어떻게 할 거야?"

"놔둬. 내가 집으로 보낼게."

"이건 또 뭐야? 아니. 짐 없다면서 뭐가 왜 계속 나와?"

"그러게. 난 굉장히 미니멀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미니멀은 무슨. 이보다 맥시멈이 없구만."

"어쩌라고! 이게 다 내 짐도 아니잖아!!"

"니 짐도 절반이 넘잖아."

"난 거의 2년을 혼자 있었다고!"

"왜 1년을 더 해! 나도 같이 살았는데?!"

슬퍼야 하는데, 일이 치이다 보니 이별의 아픔을 느낄 새도 없다.

"너 이 현란한 옷들이나 어떻게 해."

"둬. 가져갈 거야."

"버려. 입지도 않는 옷들을 왜 이렇게 가지고 있어."

"다 입어. 나라고 맨날 츄리닝만 입고 사냐?"

혜정이가 가만히 옷들을 정리하다 고개를 돌린다.

"이사를 꼭 가야 해?"

"그럼, 여기서 떠난 사람들 그리워하며 혼자 남을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문젠데?"

"욕실 바꾼 것도 있고. 돈 쓴 게 있는데. 본전은 뽑고 가야..."

"하하하~! 야? 뭐 그런 걸 걱정하고 있어."

사랑을 잃고 우정을 얻었으면 또이또이 치는 건가?

혜정이는 사귀기 전엔 알 수 없었던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선물들, 정말 내가 다 알아서 한다?"

"그럼. 너한테 준 건데 알아서 하세요."

"너 진짜로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그렇다니까."

그녀는 내가 아는 이상으로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작년 혼자 있을 때 쓰라고 준 100만 원 연금 카드가 있었는데.

나는 얘가 그 카드를 미안해서 안 쓰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쓸 필요가 없어서 안 쓴 거였다.

"네. 신상품 맞고요. 영수증이랑 다 있어요. 물론이죠. 보증서 있어요. 의심 가시면 안 사셔도 돼요."

원래도 꼼꼼하고 야무진 줄은 알았지만, 그런 모습조차 짠순이 같이 보일까 숨기고 있었다는 혜정이.

그녀가 내 앞에서 얼마만큼 자신을 누르고 살았는지, 숨이 막혔다는 소리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는데.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서로 잘한 선택인 것 같다.

"백화점에서 샀다고 들었어요. 종로 S 백화점 본점이요. 아, 남자 친구랑 헤어져서요."

"흠. 크흠.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정성이라는 것도 있는데."

정말 보면 볼수록 얘는 여자 친구보다 부인이 되는 게 좋은데... 이제 와서 뭐...

"됐다."

"산데?"

"응. 근데 조금 생각을 해 봐야겠어."

"왜? 산다는 사람 있으면 바로 팔어."

"아니. 뭔가 보니까 이 가방이 지금 유행인가 봐. 백화점에는 없고 전화 오는 사람 중에 웃돈을 주겠다는 얘기가 있어."

"뭘 그런 걸 따지고 있어. 그냥 정리해..."

"알아서 하랄 땐 언제고 왜 짜증?"

"야. 버젓이 사람 눈앞에 두고. '네~ 헤어져서 팔려고요.' 이러는데 기분이 좋겠냐 그럼?"

"남의 일기장이나 훔쳐 보는 주제에..."

"뭐야 그건 또! 왜 이제 와서 그래!!"

한 사람은 너무 다가오지 못했고, 한 사람은 너무 다가갔었다.

만약, 다음에 연애를 한다면 사랑하는 마음 그 이상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오히려 다음에는 나를 사랑해 줘, 나를 봐 줘, 내 옆에서 행복하게 웃어 줘 같이 매달리는 방법보단, 조용히 날 사랑해 주길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 생각을 해 본다.

"야, 혜정아."

"왜?"

"이건 뭐야? 왜 쓰지도 않는 화장품이 모여 있는데?"

"아~ 그거 내 꺼 아냐."

"이 집에 너 나 아니면 대체 누구 건데? 보니까 여자 용품인데."

"백설 언니."

"...그게 왜 아직까지 있어? 정리하라고 했잖아."

"정리했지. 근데 보니까 비싼 거 같길래 버리긴 뭐하고. 그러게, 그게 거기 있었네."

"아 좀 그냥 버려!!"

"둬!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제발 아낄 걸 아껴! 보니까 새것도 아니구만!"

"그러는 너야말로 이거!!"

"뭐?"

옷방 구석에서 혜정이가 박스 하나를 꺼내 왔는데, 먼저 인터넷으로 주문한 수갑이랑 안대랑 스타킹 같은, 여러 가지 소프트한 본디지 세트였다.

사 놓고 바쁘다고 못 챙기고 있었는데...

"아... 이게 여기 있었구나..."

"짜증 나! 이런 걸 왜 사?"

"그냥 뭐. 서로 좋자고 사 봤지."

"그리고, 왜 물건 받는 사람 이름이 니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되어있어?"

"아니... 그게 구마하로 주문할 순 없으니까..."

"왜? 니가 쓰려고 샀는데?"

"나보단 아무래도 너가 더 쓰기도 할 거고. 그리고 내 이름은 너무 특이해서 다들 아니까..."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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