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27화 (327/401)

나는 스스로를 믿는다 (2)

사랑은 어렵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큰 산을 넘은 우리는 서로에게 더욱 진실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고민과 추억 그리고 아픔. 혜정이와 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진짜로...?"

"뭐 그런 일도 있었고."

"그래서? 넌 거기서... 했어?"

"해야지 뭐. 다들 흥분하고 있는데 나 혼자 뻘쭘거리고 있음 그게 더 부끄럽잖아."

"아, 뭐야. 더러워..."

"야, 뭐가 더러워!? 세상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는 건데."

여기저기 이사 박스 널브러진 거실에서 둘이 웅크리고 앉아 맥주와 야식을 먹고 있었다.

과거사를 밝힌 만큼 혜정이는 내가 만난 사람들이나 경험한 일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물었다.

처음엔 그냥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어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호기심이 더 큰 것 같다.

"그럼 그 쟈스민이란 여자랑은 어떻게 된 거야?"

"한국 오면서 헤어졌지. 원래부터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너는 진짜..."

"나 뭐?"

"깔끔한 건지 매정한 건지."

"아니야. 처음부터 여행하면서 도와준 거고. 거기야말로 진짜 팬심으로 접근해서 딱 좋게 끝났어. 웃으면서 헤어졌어."

"여자들 만나고 다닌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야, 내가 연애를 한 건 딱 셋. 너 포함해서. 그것도 한국 사람 들밖에 없어."

"그럼 빅토리아는?"

"저기. 우리 다른 얘기 하면 안 돼? 여기서 그 이름이 또 왜 나와..."

"오케이. 알았어. 그럼 최다빈 선수는 어땠어?"

"꼭 들어야 돼?"

"그나마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그분밖에 없으니까."

"다빈이는 나도 조금 버거운 애지. 만만치 않은 사람이야."

"왜? 어떤데?"

"승부욕이 진짜 강해. 성욕도 그에 못지않고."

"거짓말. 너보다?"

"나보다. 내가 걔랑 왜 헤어졌는지 얘기 안 해 줬나?"

"말도 안 돼... 진짜로? 장난 아니고?"

"진짜로. 다빈이 근성 끝판왕이야."

가만히 향만 맡던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혜정이가 말했다.

"와, 좀 부럽다..."

"뭐가 부러워? 성욕이라면 너도 순간순간은 걔 못지않은."

퍽퍽. 몇 대 맞고 다시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여간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나 봐..."

"하하하! 아니 왜 때려. 니가 먼저 물어봤잖아. 아, 아퍼."

"그런 거 말고. 난 끈기가 없어서 한번 시작하면 끝장 보는 사람들 멋있게 생각했었단 말이야."

"다빈이는 근성이 있지만, 그 근성 때문에 문제가 많어."

"왜?"

"체구를 봐. 그 작은 몸에 7종이 말이 안 되지."

"그래도 동메달 땄잖아."

"그래서 문제라는 거야. 애가 몸을 다쳐도 멈추질 않으니까. 솔직히 난 지금도 걔 찾아가서 종목을 바꾸든가, 창 던지기나 달리기 하나로 정하라고 하고 싶어."

"오히려 그런 몸으로 그런 운동하는 게 대단한 거 아닌가?"

"혜정아, 운동이란 건 건강이 목표야. 운동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러다 부상 오면 진짜 크게 다쳐. 걘 그냥 승부욕의 화신이 들어 찬 거야."

혜정이가 가만히 보면서 묻는다.

"나도 나중에 그렇게 걱정해 줄 거야?"

"뭔 소리야?"

"그냥. 너한텐 나도 그렇게 걱정되는 한 사람이 될 수 있냐는 뜻이지."

"이혜정, 우린 친구잖아."

"응."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 주저하지 말고. 알았지?"

"후후. 친구라..."

맥주캔을 홀짝거리며 시선을 피한다.

친구에서 연인, 그리고 다시 친구로. 얘도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럼 그 언니는 어땠어?"

"또 누구? 야 나 너랑 사귀었어.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궁금해 해?"

"아니, 백설 언니."

"뭘 다 물어... 너도 대충 알잖아."

"나한테도 찾아와서 미안했었다고 했단 말이야. 그건 뭐냐고."

"뭐겠어. 그냥 지 성질 못 이겨서 뒤에서 욕하고 이런 거 미안하다 하는 거지..."

"그 정도 일로 찾아와 사과를 한다고?"

한수빈은 혜정이가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보다 잘 맞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통하는 게 많고 좋았지만, 아직도 그 행동은 좀 용서가 안 되는 감이 있다.

"둘이 잘 어울려 보였는데."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는 거지 뭐."

"흠."

진실은 어둠 깊이 묻어 두고 대충 둘러대고 넘어간다.

"보니까 너 지금 이것저것 자꾸 묻는 게, 내가 남들한테 니 이야기 어떻게 하려나 그거 시뮬레이션 돌리는 거지?"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건데."

"대범해지신다며? 움츠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라고. 왜 혼자 이상한 해석을 하고 그러지...?"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한 번쯤 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한번 해 보고 싶었는 데, 잘 됐다, 지금 해야지.

"혜정아, 그러지 말고."

"알았어. 더 안 물어볼게."

"아니, 들어 봐."

"너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닌 이야기 나는 뭐 좋아서 물어보는 줄 아냐..."

"또 이런다. 지가 물어 놓고 왜 토라지냐고?"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서둘러 본론을 꺼내 들었다.

"너도 대회 같은 걸 한번 나가 봐."

"무슨 대회?"

"그런 거. 미인 대회 같은 거."

"하하하! 야, 됐어. 내가 뭐라고."

"농담이 아니라. 그런 경쟁 같은 걸 해 보면 사람이 확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니까?"

"됐어. 니 눈에나 내가 그렇게 보이지. 막상 예쁜 사람들이랑 있으면 나도 평범해."

"허허허. 지금 그 말이 겸손이면 넌 너 자신을 너무 모르는 거고."

"...내가 날 모른다고?"

"그래. 두려워서 그런다면 넌 겁이 너무 많은 거야."

"하-? 하하-? 어이없어라. 뭐가 됐든 난 다 안 좋은 거네?"

얘도 자기 미모에 어느 정도 객관적인 자부심은 있다.

실제로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몸도 예쁘다.

허리선, 힙, 가슴 라인으로 이어지는 밸런스도 좋다.

다만, 키가 작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혜정이도 자기 키를 언급하며 미스코리아나 슈퍼 모델 같은 사람들과는 견줄 수 없다고 말했다.

"미녀 대회가 키 큰 사람만 뽑는 건 아니잖아."

"그럼 뭐가 있는데?"

"미스 춘향."

"하하하! 아하하하~!! 야, 됐어. 제발 그만 해."

"아니, 웃지만 말고,"

"이몽룡 찾냐? 내가 그런 델 왜 나가."

"야, 너 미스 춘향 무시해? 거기는 그냥 예쁜 애들만 뽑는 게 아니야."

미모가 주가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미스 춘향은 인성도 보고 성격도 보고, 잘은 몰라도 이런저런 많은 걸 본다고 들었다.

말 그대로 국가 공인 1등 신붓감이 되는 자린데, 여자라면 한번쯤 그런 타이틀에 도전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어느 정돈지 공식적으로 평가를 받아 봐라?"

"평가를 떠나서 경쟁을 통해 너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라는 거지."

꺽꺽거리고 웃던 애가 표정을 진지하게 바꿔서 물었다.

"남들한테 예쁘다고 인정받는 게 왜 자신감이 되는 거야?"

"나랑 다를 게 뭐 있어. 나도 남들한테 빠르다고 인정받아서 자신감이 생긴 거잖아."

"그거는 니가 노력해서 얻은 거고 외모는 그냥 타고나는 건데, 그걸 어떻게 비교해."

"혜정아, 너도 니 외모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잖아."

"...그런 노력은 아무 의미도 없어."

"있어. 너는 어려서부터 예쁘단 소리 듣고 자라서 미모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는 거 같은데, 니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그 외모가 누군가한텐 평생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힘이야."

"..."

"이건 타인을 짓밟고 우월감을 느끼라는 게 아니야. 그냥 나 자신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느끼다 보면 그런 기분이 든다니까."

어차피 얘는 저 미모 때문에 평생 조용히 살기 어려운 팔자였다.

내가 떠나도 다른 놈들이 달려든다.

그렇다면 차라리 외모를 가지고 공인된 타이틀을 하나 가져가라.

그럼 적어도 이것저것 날파리 같은 놈들은 안 꼬이겠지.

뭐가 됐든 혜정이는 자신감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왜? 막상 예선도 통과 못 할까 두려워?"

"가만 보면 넌 참 사람 속 긁는 재주가 있어."

"누구보다 열등감 속에 살았는데, 나도 그럴 땐 나 싸가지 없게 말하는 거 알어."

주제를 살짝 비틀어 도전에 관한 좋은 이야기를 해 줬다.

"혜정아, 무하마드 알리가 이런 말을 했어."

"나 그 사람 누군지 알아.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쏴라. 맞지?"

"맞는데, 알리는 스포츠도 스포츠지만, 사회 통념에 반발한 걸로도 유명하거든."

"그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세상이랑 싸워?"

"알리라는 이름부터가 이슬람이잖아. 미국 사회에 흑인이었고, 부딪힐 게 많지."

알리는 자신이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이유로, 나 자신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도전하길 두려워하는 바, 나는 스스로를 믿는다. 이게 알리의 신념이거든."

"믿음..."

"얼굴이든 스포츠든 상관없어. 한번 덤벼 봐. 도전 자체에 의미를 두고 질러 보라고."

무릎을 감싸고 생각에 잠기던 애가 맥주 캔을 놓고 일어섰다.

"아 몰라. 너무 어려워."

"그래. 잘 생각해 보고."

"일단 씻을래. 오늘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로 뒤집어썼어."

"그래. 나도 씻어야지."

"뭐야? 야. 우리 이제 사귀는 사이 아니야."

"하하! 뭔 소리야. 화장실 두 개잖아. 너 거실 써. 난 방으로 갈거니까."

"..."

"하하하! 왜?"

눈빛만 봐도 서로 통하는 게 뭔지를 안다.

어떻게 할까. 친구긴 하지만, 우리 사이에 섹스는 큰 문제가 아닌데.

"왜? 같이 씻고 싶어?"

"마지막이야. 약속해."

"뭐가 마지막인데. 난 진짜 샤워만 하고 잘 건데?"

"하~! 오케이. 알았어. 그렇게 해."

"하하하! 같이 씻자."

어쩌면, 아니 진짜로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섹스가 될 것이다.

훗날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 다시 만난다고 하더라도, 당분간 내가 얘를 찾거나 혜정이가 나를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으음~~"

샤워부터 시작된 스킨십을 이어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진한 키스를 나눴다.

서로가 서로를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 우리의 입맞춤은 끝날 줄을 몰랐다.

키스만 하는데도 허전한 가슴이 차오르는 걸 느낀다.

나도 타오르지만, 얘도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숙하여 서로를 아프게 할 수밖에 없던 시간들.

마치 그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둘 다 상대방을 애무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하아, 하아. 마하야."

"응?"

"너 그거 가져오고 싶으면 가져 와."

"뭐?"

"아까 그거. 옷방에서 본 거."

"...괜찮아. 그냥 해도 돼."

"정말로?"

"그럼, 그냥 장난으로 샀던 거야."

피부로 느끼고 싶다.

눈을 마주 보고 싶다.

손으로 입술로 그리고 몸으로.

그녀를 채워 주고 싶었다.

"윽, 으음. 흑."

"야, 갑자기 왜 울어?"

"미안. 그냥, 다."

"괜찮아. 혜정아, 눈 뜨고 나 봐 봐."

한참 피스톤 운동 중에 갑자기 혜정이가 눈물이 터졌다.

감정이 차오르다 못해 뭔가 복받치는 모양이다.

행동을 멈추고 그녀의 머리를 넘겨 주며 말했다.

"나랑 약속해. 이제 정말 움츠리지 않고 좋은 사랑 하기로."

"너도. 너도 약속해. 아프지 않기로."

"그럼, 물론이지."

개인적으로 타이틀을 갱신하는 날이었다.

쓰다 남은 콘돔 반 상자가 있었는데, 그걸 다 비우고도 젖은 그녀의 몸이 마를 줄 몰라 그 상태로 몇 번을 더 했는지 모르겠다.

혜정이도 나도 스태미너가 끝날 줄을 몰랐다.

아니, 끝났음에도 그 상태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게 정답일 것이다.

"하아, 하아~"

"혜정아, 키스해 줘."

"음. 으음. 흠~~"

입맞춤을 끝내며 그녀의 목을 간지럽히고, 그대로 귓가로 다가가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 줬다.

혜정이도 내 목을 끌어안은 채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사랑해. 정말로."

한편으론 지금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결국 아침이 찾아옴과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도 완전히 페이지를 덮고 말았다.

* * *

"여기야?"

"응."

"원룸촌이네. 치안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 저기 봐. CCTV 있잖아.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고.

무엇보다 친구랑 거의 같이 움직일 거니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으니까 계약 끝날 때까지 거기 있으라니까..."

"나야말로 어떻게 혼자 있냐."

친구는 먼저 살던 방을 나오고, 혜정이도 선물들 처분한 돈으로 이사 비용을 충당해 새 집을 구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서울 생활을 하겠다는데, 개인적으론 좀 더 좋은 동네에서 있기를 원했지만, 얘는 이것도 대학생 신분에선 엄청 좋은 거라면서 호의를 거절했다.

"그래. 일단 짐부터 나르자."

"응."

이삿짐을 옮겨 주고 있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혜정이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조금은 어색하고 뻘쭘하기도 했지만, 다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어 크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았다.

"저는 먼저 알바하면서 봤었어요."

"언제요?"

"그때, 강동호 결혼식에서."

"아. 그러세요? 하하. 그 일도 참..."

"언니... 그만 해..."

"뭐? 그래도. 둘이 잘 마무리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앞으로 우리 혜정이 잘 좀 부탁드릴게요."

"걱정마세요. 근데 진짜 둘이 다시 만나면 안 돼요?"

"아, 언니. 왜 그래, 진짜?"

"그냥. 뭔가 두 사람 보는데 내가 너무 아쉬워."

묵묵하게 웃으며 짐 정리를 도와주고, 밥도 사 주고, 주변의 오해도 풀고 그러고 나왔다.

"간다. 남은 거 정리하는 것도 일이겠다."

"뭐, 천천히 하면 되지."

"그래. 친구랑 잘 지내고."

"응. 너도 이사 갈 때 필요하면 나 불러. 알았지?"

"됐어. 사람들 쓰면 돼."

"훗... 그래."

"혜정아, 문제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갈게."

"응. 잘 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무쪼록 아무런 연락이 없기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녀가 행복하게 잘 지내기를 바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