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를 믿는다 (3)
"길수야, 이렇게 하는 거 맞지?"
"어, 잘했어. 여기서 이 업체만 아까 얘기했던 걸로 바꿔 주면 돼."
"오케이."
"고맙다, 민구야.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살게."
"됐어, 이런 걸 가지고. 다 했어."
바람이 불어도 들풀은 자란다.
스캔들이 휩쓸고 지나간 한구스포츠도 일상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양민구와 이길수, 직장에서 만난 동갑내기 청년들도 지난 만남을 계기로 교우를 맺어 서로를 돕는다.
"우리 고마우신 양 실장님, 커피 드세요."
"오우, 땡큐."
"잘하네. 어째 현장이 사무실보다 문서 능력이 나은데?"
"학생 때 과제나 발표 같은 걸 많이 했거든. 이 정도는 뭐."
"체대생도 그런 걸 하냐?"
"하하하! 야. 우리는 뭐 대학 가서도 운동장만 뛰냐!?"
"어쨌든 진짜 고맙다. 나 혼자 이걸 어떻게 끝내나 했는데."
"괜찮아. 한가한 사람이 도와야지."
"마하는 요즘 뭐하고 지내?"
"그냥... 잘 있어..."
구마하는 지난 스캔들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라, 상대적으로 양민구의 시간은 한가로운 편이다.
그가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한다.
"좋다. 이 시간에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일하는 거 같네. 뭔가 회사원 같은 느낌이 있어."
"뭔 소리야. 매니저 쪽이 더 빡세지."
"별로 그렇지도 않어."
"그래? 일 있을 땐 바쁘잖아?"
"이동할 때나 그렇지. 현장 가면 대부분 대기시간이고, 딱히 내가 할 건 없어."
"왜 없어. 마하 챙겨 줘야지."
"걔는 놔둬도 혼자 잘 해. 진짜 옆에서 해 줄 게 없어."
"진짜? 하나부터 막 세심하게 챙겨야 하는 줄 알았는데. 물 떠다 주고 기분 맞춰 주고."
"하하하! 보통 매니저는 그렇겠지만, 운동하는 애들은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니까. 마하도 그런 게 몸에 익은 거지."
"어어. 아, 또 그런 게 있구나."
"길수야."
"음?"
"...너는 이 회사 왜 들어온 거야?"
"그냥 뭐, 일 재밌을 거 같아서."
"어때? 재밌어?"
"아니. 기대랑은 다르지."
"그럼... 옮기라면 옮길 거야?"
"아직은.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대기업 아니고서야 월급도 그렇고, 딱히 차이 나는 건 없더라고."
"그렇구나..."
양민구가 한 템포 대화를 멈추며 머그컵을 입으로 옮긴다.
그를 보며 이길수가 물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냐?"
"아니 그냥. 남들은 일하는 거 어떤가 해서."
"민구 너는 마하랑 대표님이 도와달라고 해서 왔지? 스카우트받았잖아."
"아니야. 나도 딴엔 뭔가 멋진 일 해 보고 싶어서 들어온 거야."
"뭔데?"
"처음엔 마하를 액션 배우 같은 걸로 만들어 보고 싶었어. 애가 몸을 원체 잘 쓰니까."
"오오~ 뭔가 어울린다."
"근데 내가 강요할 수 있나. 그냥 옆에서 지켜봐야지."
"그렇지. 본인의 뜻이 중요하지."
이상과 현실, 사회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던 두 사람은 어느덧 업무과 관련된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 간다.
"길수 너도 일본 따라가지."
"아우. 일 때문에 가는 건데, 고생할 바엔 그냥 사무실 지키는 게 나아."
"현명하네. 먼저 파리 갔을 때 진짜 그렇긴 하더라. 나 유럽 처음 간 건데."
"그러는 넌 왜 안 갔냐? 넌 선출이잖아."
"나야말로 세계 선수권 같은 대회 뭐 아나."
"나보단 낫지. 선수 출신인데. 누가 잘 하는지 딱 보면 보이고."
"안 그래. 선수 능력은 한번 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기복이 있어서 쭉 관련된 내용을 모르면 알 수 없어."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전문가 같네."
"하하! 야, 이래 보여도 체대 졸업했다고."
"근데, 민구야. 세계 선수권이 그렇게 대단한 대회야?"
"그럼. 위상만 놓고 보면 올림픽이랑 다르지 않어."
"우와... 구마하는 그런 데서도 금메달을 땄던 거네."
"걔는 우리랑 차원이 다른 놈이고."
일본 오사카에서 2007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구스포츠는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로 스타성 있는 선수를 발굴해 회사의 저력을 키운다. 현재 한상률을 비롯한 회사 관계자들은 구마하 못지않게 영향력 있는 인물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양민구는 2년 전, 2005 핀란드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를 떠올렸다.
그때도 구마하는 올림픽에 이어 금메달을 목에 걸어 아테네의 기적이 운이 아닌 실력이라는 것을 입증하며 국민들을 열광하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토리노 동계올림픽.
그는 전설이 되었다.
양민구에게 구마하는 팬심을 넘어선 하나의 자부심과도 같았다.
대단한 놈이라고, 이런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랬던 사이가 지금은 회사 동료.
그냥 동료가 아닌, 내면의 아픔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인생이란, 사람의 인연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인 거 같다.
"유진 볼트라고 했었나?"
"어. 자메이카 국대."
"잘하나? 봅슬레이 영화 거기 아닌가?"
"자메이카를 뭐라고 해야 할까. 단거리에서 자메이카는 축구로 따지면 브라질이나 독일, 이탈리아 같은 위치라고 보면 돼. 나오면 무조건 뭐든 우승하는 애들."
"그 정도라고?"
"잘해. 심지어 미국 스프린터 선수들도 자메이카 출신들 데리고 가고 그래."
"와. 그런 나라 선수가 우리 회사를 들어와?"
"늦었지. 이미 스폰서 뭐 엄청 붙었다더만."
"난 늦은 걸 떠나서 돼도 문제라고 본다."
"왜?"
"우리가 어떻게 케어를 해?"
"왜 못해. 마하도 세계적인 선순데, 우리랑 같이 일하잖아."
"아니. 내 말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데리고 있냐고."
"안 그래도 대표님은 가능하면 미국으로 갈 생각이신 거 같던데."
"미국? 그럼 여기는?"
"여기는 여기대로 놔두고. 먼저 그러셨어. 마하도 한국에 있는 것보다 미국으로 가는 게 더 잘 될 수 있다고."
"미국이라... 넌 간다면 갈 거냐?"
"글쎄다. 외국 생활 기대는 되는데. 미국... 흠. 너는?"
"나는 갈 수 있으면 가 보고 싶어. 그건 출장이 아니라 거기 가서 사는 거니까."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업무로 돌아간다.
한참 모니터에 매달려 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며 마케팅팀 김민규 부장이 간식을 들고 나타났다.
"뭐야? 두 사람이 있네. 이 대리랑 하나는 누구야?"
"어? 부장님, 퇴근 안 하셨어요?"
"부장님, 접니다. 양 실장이요."
"어라? 양 실장이 왜 이 시간에 사무실에 있어?"
"길수가 도와달라고 해서요."
"그래? 이거 먹을 게 부족하겠는데... 흐음."
혼자 고생하는 부하 직원을 생각한 김민규 부장.
가벼운 야식거리를 사 왔지만, 두 사람이 있으니 부족한 양을 배달 족발로 채우고, 남자 셋이 모여 앉아 가볍게 반주도 곁들여진 자리가 마련되었다.
"소주 한 병이라도 술은 술인데. 졸지에 회식이 됐네..."
"하하!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부장님."
"이거 이거. 회사에서 술 마셔 버릇하면 안 되는데..."
"이런 날도 있는 거죠, 뭐."
"그럼요. 대표님만 모르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역시 젊은 친구들이라. 한 대표는 나이도 젊은데 이런 걸 이해를 못 해."
가볍게 건배를 마친 세 사람.
야식을 들며 이길수가 먼저 물었다.
"대표님 소식은 없나요?"
"안 될 거 같아..."
"정말요? 유진 볼트 반드시 영입해 오신다고 하셨는데."
"양 실장 아직 못 봤구나. 그 친구 200m 은메달 땄어."
"우와! 정말요?!"
"은메달이 왜? 민구 너 왜 그렇게 놀라냐?"
"길수야. 세계 선수권 은메달이면 대단한 거야..."
"그래? 마하는 금메달이잖아."
"하하! 이래서 문제라고, 이래서."
"양 실장이 맞아. 대표님이 사람은 제대로 봤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봐야 해. 외국인 선수를 우리가 어떻게 데리고 있어."
"저도 아까 그랬는데. 양 실장이 대표님은 미국 생각하고 계신다던데요."
"영입이 됐으면 이겠지. 여기에 집중하는 게 맞어. 안 그래도 이제라도 한국 선수들 집중해서 보시라고 말씀드렸어."
'한국 선수들'이란 말에 양민구가 아시안 게임 육상 대표 팀을 떠올린다.
구마하의 친구들이었다. 이동민과 권지성 등, 확실히 화제성은 있지만, 그들 가운데 스타성 있는 인물이 있나 싶은데. 갑자기 이 길수가 벌떡 일어나며 말한다.
"최다빈!! 부장님, 최다빈이요!"
"하하! 이 대리는 최다빈 선수가 좋나?"
"예쁘잖아요. 그 정도 미모면 충분히 대중한테 먹히지 않겠습니까?"
이길수의 주장에 김 부장이 씁쓸한 미소로 양민구를 돌아본다.
"알지?"
"아하하! 네, 잘 알죠. 당사자한테 들었습니다."
"왜? 뭔데? 뭐 있어? 뭐 있습니까?"
"양 실장이 얘기해 줘."
"길수야. 최다빈 선수는 안 돼."
"왜? 예쁘잖아."
"아무리 예뻐도 마하랑 스캔들 나잖아."
"뭐 작년에 그거? 그것도 결국 마하 팬들이 지어낸 악플 아니었어?"
"아니야. 둘이 진짜로 사귀었었어."
"진짜? 언제? 부장님은 아세요?"
"최다빈 선수는 진작부터 우리도 말씀드렸는데, 대표님이 그쪽은 어렵겠다고 미리 선 그으셨어. 포기해, 이 대리."
"아, 우와 진짜..."
안타까운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이길수에게 위로주를 건네며 김민규 부장이 정리했다.
"뭘 그리 아쉬워하나. 구마하 때문에 설립된 회사가 구마하의 이미지를 깎을 순 없는 노릇이지."
"아니요. 저는 그냥... 솔직히 부러워서..."
"길수 너 최다빈 좋아했냐?"
"귀엽잖아. 난 그 사람 보면서 왜 연예인을 안 하고 운동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가더라."
이길수의 고백에 세 사람은 건배를 나눈다.
"마하 씨는 좀 어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사한다고 들었는데, 집은 옮겼나?"
"신촌 오피스텔로 들어갔습니다."
"가까워져서 좋겠네. 양 실장도 그쪽 어디 산다고 하지 않았어?"
"네. 대학 때 자취하던 방에서 그냥 쭉 지내고 있습니다."
"근데 민구야, 이왕 이사 할 거 더 좋은 데로 가지 왜 오피스텔로 갔어?"
"아, 으음..."
"이제라도 학업에 집중하고 싶어 하나?"
"그런 건 아니고요. 어차피 내년에 서울에 입주할 집 있다고.
그때까지 잠깐 머문다 하더라고요."
"역시. 부럽네요..."
"이 대리, 우리끼리 있을 땐 몰라도, 나가서 그런 소리는 하지 마."
"그럼요. 정말 그냥 부러워서 그러죠."
"그 부러움이 그냥 생겼나. 다 노력해서 얻은 거지."
"하하! 맞습니다."
"근데, 둘이 친해? 양 실장은 그렇다 쳐도, 이 대리가 편하게 이야기를 하네?"
"지난번 파리 갔다 올 때 길수가 운전했잖습니까."
"으음. 그렇구나."
파리 출장 이야기가 나오자 양민구가 김 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어. 얘기해."
"마하요. 지금 이렇게 쉬라고 놔두는 것보다는 뭔가 활동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도 그러면 좋겠지만. 현재는 제안이 오는 게 없는데."
"저는 제안을 기다릴 게 아니라. 먼저 다가가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무슨 아이디어 있어?"
"어쨌든 마하가 체육계의 위상이 있으니까요. 고등학교 선수팀 같은 데 찾아다니면서 코치를 한다든가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거든요."
"그런 이벤트도 나쁘지 않지만, 지속해서 하기에는... 우리가 실업 팀도 아니고."
"아니면 방송 연예계 쪽으로 더 나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연예계라."
"예능은 먼저도 이야기 나왔던 거 있었잖아요."
"근데, 방송 출연은 나도 반대하는 게, 너무 이미지가 소모되면 안 되니까."
"민구야, 그때 그 방송 이미 출연자 확정되고 제작 들어갔어."
"아. 그래...? 늦었네..."
김민규 부장이 양민구의 표정을 살펴보며 묻는다.
"양 실장, 뭐 있어?"
"네?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갑자기 단호하게 말하는 게 우리가 모르는 뭐가 있는 느낌이 드는데."
"정말 아닙니다. 그냥 에너지 넘치는 놈을 언제까지 저렇게 놔둬야 하는가 싶어서요."
"왜? 뭐 말하고 싶은 거 있음 자세하게 얘기해 봐."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사생활을 일일이 떠들 수 없는 노릇.
양민구는 입을 다문다.
대신,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가까이에서 본 그의 성격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마하가 보기보다 외로움을 엄청 탑니다."
"외로움이라. 대표님도 그 말씀은 하시던데."
"야, 세상 안 외로운 사람이 어딨어? 다 외롭지."
"그렇긴 한데. 이놈은 가끔 위태롭게 느껴질 때가 있어."
"마하 씨가...?"
"마하가?"
"네. 이번에 파리 갔을 때도. 실은 좀 문제가 있었거든요..."
"무슨 문제?"
"그건 저... 사생활이라 제가 말씀드릴 순 없고요.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흠, 그렇게 말하니까 더 불안한데..."
김 부장이 눈앞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일단 알았어. 대표님한테 말씀드려 볼 테니까, 먹고들 들어가.
난 아까 말한 거 보고 갈 테니까."
"네, 부장님."
"잘 먹었습니다."
김 부장은 시계를 둘러보며 적당히 일어서고, 두 사람만 남자 이길수가 묻는다.
"뭐야? 진짜 뭐 있어? 잘 지내고 있다면서."
"잘 지내는 거 맞어. 지금은."
"그게 뭐야... '지금은'이라니...?"
"..."
"민구야. 애매하게 말고 제대로 얘기를 해 봐. 상태가 좋은 거야 아닌 거야?"
양민구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에 이길수도 덩달아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아 뭔데? 왜 한숨을 쉬어. 설마 그때 차에서 얘기한 여자 친구랑 잘 안 됐어?"
"그건 깔끔하게 끝났는데..."
"근데?"
"후우..."
"야. 빨리 얘기해. 회사 매출이 구마하 컨디션에 달려있어."
"마하 요즘 계속 클럽 다녀..."
"그래서? 그 정돈 할 수 있지."
"그리고... 새로 이사한 집은 계속 비어 있고..."
이길수가 곰곰이 그 말이 무슨 뜻인가 생각하다 다시 묻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잠은 어디서 자?"
"그걸 모르겠어. 여자들이랑 있는 거 같은데... 호텔을 드나드는지 아니면 어디 자취방에 살림을 차렸는지..."
"그럼 기자들이 또 알 거 아냐?"
"내 생각엔 이미 알고 있는 거 같애. 터트리지 않는 건 상대가 일반인들이라 화제성이 없다고 생각해서겠고."
"아니... 그건 문제가 있지. 광고 같은 게 결국 이미지로 가는 건데..."
"그러니까. 그래서 나도 먼저 한 번 불러서 잠깐 봤는데..."
쓴소리를 퍼부으려고 했었다. 독한 말로 정신 차리라고 혼쭐을 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면을 둘러싼 표정 이면에 큰 상처가 느껴져서 양민구는 구마하를 만나서도 아무런 말을 못 했다.
"그냥. 몸 잘 챙기고 다니라고. 그랬어..."
"아니. 누구는 뭐 여자 친구랑 안 헤어져 봤나? 왜 그걸 가지고."
"마하는 상황을 조금 다르게 봐야 돼."
"뭐? 왜? 유명하니까?"
"아니. 사회적 울타리가 낮으니까..."
그에겐 가족이 없었다.
형이 있지만 한 사람으론 채워지지 않는 깊은 그림자가 있다.
외로운 시간 속에 독한 마음으로 성장해 큰 성과를 이루었으나, 허전함이란 것은 그런 대외적인 인정으로 채워지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강직한 무언가일수록 원래 작은 틈이 무서운 법이다.
남들 다 겪는 이별이라 하더라도, 구마하는 적지 않은 심리적 타격을 입었다.
이것은 먼저 한수빈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곁에서 지켜본 친구 박상택도 느꼈다고 이야기를 해줬다.
"먼저 우리 회사에 잠깐 있었던 박상택 선수가 내 친구거든."
"어."
"상택이도 그러더라고. 뭔가 영혼이라도 판 놈처럼 훈련하는 데, 그래서 금메달을 딴 거 같았다고. 자기는 그렇게는 못 할 거 같다고."
"이별의 상처를 승리로 메꾸는 거구나..."
"그렇게 보면 마하가 잘 하는 게 마냥 기쁜 일은 아닌 거지..."
"...뭔가 좀 딱하네. 얼마나 외로우면 그렇게 운동을 해."
"그러니까... 그래서도 혜정 씨랑 잘 되길 바랬는데."
지금은 선수를 은퇴한 마당이라, 아픔을 열정으로 승화할 구석도 없는 상황이다.
상실감을 어떻게든 쾌락으로 채우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경험에 의하면 이별의 후폭풍은 지금이 아닌 나중에 밀려오는 법.
그것도 참고 누르는 만큼 복리가 되어 터진다.
진짜 아픈 건 지금이 아니다. 나중에 온다.
"당장은 여자라도 만나니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 행동조차 허무해진다는 것이 느껴질 때가 오면. 그땐 우리 회사도 문 닫아야겠지."
"왜...?"
"니 말대로 모든 매출이 구마하 하나에게서 나오는 구조니까."
"아..."
"후우,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일자리야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양민구는 팬심으로, 선배된 마음으로,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녀석이 이런 일로 무너지는 모습을 참기 어렵다.
무엇이든 빠르게 답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