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를 믿는다 (4)
"꺼져! 좆 까라 그래!! 스키가 애들 장난인가. 그 새끼는 왜 매번."
"아니, 그러니까 이건 마하가 아니라 내가 부탁하는 거라니까..."
"니가 왜 새끼야!! 그게 더 빡쳐!!"
며칠 뒤 양민구는 친구 박상택에게 전화를 걸어 구마하를 다시 스키 선수로 되돌릴 수 없는지 물었다.
박상택은 지난 올림픽 동메달에 힘입어 한구스포츠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롭게 신설된 실업 팀 선수 겸 코치를 맡고 있었다.
반응은 격렬하게 돌아온다. 마치 벌집을 쑤신 것 같다.
박상택은 구마하의 사정을 알면서도 양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가 와서 머리 숙이고 부탁해도 모자를 판국에... 왜 니가 그러는데?"
"아니, 왜 마하가 머리를 숙여?!"
"후우우. 미치겠네. 오케이. 민구야, 그래, 좋아. 마하 육상? 인정해. 우리도 그건 받아들이고 있었어."
주최국 카타르 현지 사정에 따라 작년 아시안 게임은 11월 하반기에 개최되었다. 그리고 12월 구마하는 국가 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2007년 1월에 중국 창춘이란 지역에서 제6회 동계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아..."
"이것 봐. 너도 몰랐잖아."
"아니. 중계를 안 해 주니까..."
"그러니까 더 우리는 마하 이 새끼한테 서운하지. 지가 메달을 땄으면 그렇게 육상에 열을 올리는 만큼 스키도 좀 챙겨 주면 안되는 거냐?"
"마하도 그땐 지쳤다니까."
"뭐가 됐든! 젠장! 지가 에이스면 시합은 안 뛰어도 와서 응원이라도 해 줘야 할 거 아냐. 지같이 돼 보겠다고 매달리는 후배들은 생각도 안 하냐고. 애들이 그때 얼마나 서운해했는데."
인성에는 다소 논란이 따르겠지만, 스키를 생각하는 박상택의 열정은 아무도 나무랄 수 없다.
그렇다고 마하를 뭐하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양민구는 그냥 알았다고 하면서 통화를 마쳤다.
"너도 그렇게 걔한테 매달리지 마."
"누가 매달려. 일이니까 그러지..."
"민구야, 그냥 지금이라도 학교 들어가. 선생님 해. 솔직히 니가 뭐가 아쉬워서 그 새끼 매니저를 해 주고 있는데?"
"알아서 한다고. 들어가 상택아. 다음에 전화하자..."
갈등이 깊었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스포츠를 통해, 깊은 골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마하를 인정해 준 상택이였으니 지금 말하는 서운한 감정도 이해가 된다.
"김정준 감독님도 마찬가지겠지... 그쪽은 국대 팀이니까..."
얼마 뒤 스키 대표 팀의 유럽행이 결정되어 있기에 다시 운동이라도 시키면 어떨까 싶었는데. 기대만큼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마침내 구마하 클럽 사진이 인터넷에 나돌기 시작했다.
"결국, 떴네..."
"그러게."
양민구는 동료 이길수와 함께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을 보았다.
다소 체구가 있어 보이는 흑인 아가씨와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 몸을 흔들고 있는 구마하의 사진이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있던 사람들의 후기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키스를 하고 허리를 감싸고 별짓을 다 했다는 것 같다.
"이왕 만날 거 예쁜 애로 만나지..."
"길수 너 그거 인종 차별이다."
"뭐든. 이렇게 광고 또 몇 개 날아가겠구만. 곧 재계약 있었는데."
"..."
구마하의 클럽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간다.
언론은 조용해도 여론은 비판 일색으로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일탈이지만, 사람들은 한때 그를 따뜻한 애정으로 응원해 준 만큼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이 얼마나 됐다고 바로 유학생들과 추문을 뿌리고 다닌단 말인가.
급기야 회사에서도 대책 회의가 마련되었다.
한상률도 따로 양민구를 불러 사정을 물었다.
"요즘 마하 왜 저러고 있어?"
"그게..."
"얘기해 봐. 우리 출장 갔을 때 김 부장님한테 뭔가 있는 거 같다고 했었다면서?"
회사 대표를 떠나 한상률은 구마하와 은사 관계로 묶인 관계.
양민구는 숨김없는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하가 혜정이를 만났었다고...?"
"네. 대표님도 잘 아는 친구라고 하긴 했는데."
"알지. 너무 잘 알어..."
둘도 없이 가까운 어른인 만큼, 그 아이가 마하에게 얼마나 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고 있는 한상률이었다.
애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지금 그런 개인의 상실감에 빠져 있기엔 구마하는 짊어진 것이 너무 많았다.
"먼저 빅토리아 이런 거 때문에 둘이 헤어진 거야?"
"아니요. 그 전에 뭔가 감정적으로 틀어진 거 같더라고요."
"결국, 모든 게 실연의 상처 때문이다?"
"그런 거 같습니다..."
"언제 헤어졌는데."
"가을 되기 전에..."
"아. 이놈은 먼저 이대생 만날 때도 그러더니만..."
"그래서. 상택이한테 부탁해서 스키 훈련이라도 따라가면 안되겠냐고 했는데..."
"화내지 않어?"
"네. 뭔가 쌓인 게 많은 거 같더라고요."
"어렵겠지. 실업 팀이 자선 단체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상택이나 정준이나 둘 다 서운한 게 있어."
"대표님도 잘 알고 계시네요."
"김정준 코치랑은 가끔 만나서 술 한 잔씩 하거든."
한상률도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아무튼, 뭔가 더는 내버려 둘 수 없는 상황이다. 이거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옆에 있었는데..."
"별수 있나... 매니저가 24시간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 저는 대표님이 불러서 단호하게 한 마디 해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양민구의 제안에 한상률이 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양 실장한테 양심 고백할 게 있어."
"네? 양심 고백... 요?"
"음."
그가 말하길, 구마하의 성격이 자유분방하게 된 배경에는 자신의 책임도 깔려 있다.
처음에 보는데, 애가 너무 위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열정은 보이지만, 그만한 투지가 느껴지지 않는 상황.
아마도 마하네 형님이 엄하게 키운 영향도 있고. 혼자 자란 것도 있었을 것이다.
"딴에는 자신감이나 키워 주자고 한 행동이지만. 그 속에 내가 가지고 있던 연맹이나 언론에 대한 불만도 큰 영향을 끼쳤던 거 같애."
"..."
"마하가 그렇게 된 것도 내 책임이라고 봐야겠지. 실제로 난 이놈이 여자를 만나든 뭘 하든 아무런 터치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대표님이 계셨으니까 마하도 메달을 땄겠죠."
"뭐든, 영향이 없는 건 아니잖아..."
이제 와서 한상률이 구마하에게 행실을 바로잡으라는 건 앞뒤가 어긋나기에 효과를 보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도 양민구는 아끼는 만큼 더 큰 소리로 뭐라고 하시면 되지 않겠느냐 물었다.
"그러면 정신 차리지 않겠습니까..."
"그럴까..."
"대표님..."
"음."
"아닙니다..."
"뭔데? 얘기해."
"아니요. 그냥 잠깐 뭘 좀 생각해 봤습니다..."
"사람보다 회사를 생각하라는 건가?"
속을 찌르는 반응에 양민구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고. 정확하게 그런 이야길 건네고 싶었다.
지금 한상률은 구마하 1인 매니지먼트가 아닌,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
대표면 대표답게 구마하만 챙길 게 아니라 직원들 모두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내가 잘 이야기해 볼게."
"...죄송합니다. 제가 할 일인데."
"아니야. 제자를 그렇게 가르친 내 잘못이지. 양 실장이 뭐가 죄송해."
* * *
"길수야, 너 어제 대표님이랑 마하 만나고 왔다면서?"
"어. 밥 한 끼 먹고 왔지."
"어떻게 됐냐?"
"울더라. 죄송하다고."
"그래..."
다음 날, 양민구는 동료 이길수를 만나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대화를 전해 들었다.
"외로워서 그랬다고 본인도 인정하데. 자숙한다고 하더라."
"자숙이라..."
"왜 그래? 다 끝났어. 인상 좀 펴. 마하도 이제 여자들 정리한다고 했고."
"후우..."
"야. 왜 한숨을 쉬어."
"길수야. 이게 진짜 맞는 걸까?"
"뭔 소리야."
"아니. 회사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한 사람한테 매달리는 게 맞나?"
"어떡하라고. 시스템이 그런걸. 그렇다고 돈을 안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자숙에 들어간 구마하는 당장 클럽을 끊었다.
그리곤 남은 학기를 보내며 조용하고 착실히 일상을 수행한다.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모든 일은 마무리가 된 것 같았다.
"음. 여보세요."
"민구 선배! 안녕하세요. 저 재민인데요."
"어, 그래. 재민아. 너 군대가지 않았어?"
"아. 잠깐 휴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동기들 만나고 있었는데."
그럼 그렇지...
후배에게 전화를 받아 신촌 번화가로 나갔다.
구마하가 쓰러져 있었다.
"왜 이래? 얼마나 마신 거야?"
"조금 달리긴 했는데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어? 선배님, 오셨어요."
"그래. 재민아. 뭐야? 왜 저래?"
"아. 그게. 친구들끼리 연애 얘기하다가 갑자기 혼자 급발진을 하더니만..."
"..."
"죄송합니다. 저희가 챙겨도 되는데. 이놈 집이 어딘질 몰라서..."
누구 한 사람 책임지고 데려가서 재워도 되는 상황이지만, 부모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면서 주저하는 후배들이었다.
양민구는 속으로 쓴맛을 달랜다.
그래. 이게 보통의 이십 대 초반이지... 마하가 딱히 이상한 게 아니야.
오히려 지금까지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었어...
"알았다. 너희도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죄송합니다."
"잠깐 좀 도와줄래? 어우, 무거워라..."
"네! 야. 이쪽에서 같이 들어."
양민구는 힘겹게 구마하를 부축해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헉! 헉! 마하야 정신 차려 봐."
"으음. 어음..."
"아, 이거 전기 스위치가..."
더듬더듬 벽을 만져 스위치를 올리니 방 구석구석 소주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비어있는 마음을 쾌락으로 채우지 못하니 술을 찾는구나.
갑자기 술이 약해진 게 아니었어. 그동안 혼자 마신 게 많다 보니 간이 소화 작용을 못 한 거야.
"후우..."
"어우... 미안해... 미안하다..."
"아. 망할 자식, 술 냄새..."
양민구는 구마하를 침대에 던져 놓고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감정이 무엇인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부스스하게 일어난 구마하를 마주했을 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어? 민구 형...?"
"일어났냐."
"음... 여기 어디에요?"
"니네 집."
"아. 그렇네... 뭐지? 형. 저 여기 어떻게 왔어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었다.
이 녀석도 이 녀석 나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하는 건데...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애들이 전화해서 내가 데리고 왔어."
"진짜요? 죄송해요... 계산 어떻게 됐지?"
"내가 냈어."
"새끼들, 그냥 내 지갑에서 꺼내서 긁으라니까..."
"그건 됐고. 속은 어때? 괜찮냐?"
"와... 뭐지? 왜 기억이 안 나지? 형 설마 나 취했어요?"
"보통 그런 건 필름이 끊겼다고 하는 거야."
두 사람은 아침으로 해장국을 시켜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먹어라."
"네. 맛있게 드세요..."
"마하야. 왜 이래."
"후, 후우. 아 뜨뜻하니 좋네..."
"여자는 또 만나면 되잖아. 세상에 너 좋다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형, 죄송해요... 신경 많이 써 주시고 계셨다면서요."
말하기 싫다는 듯 대화를 자르는 모습에 양민구도 더는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거 성남에 내려가 있으면 어떠냐?"
"안 돼요."
"왜?"
"우리 형 결혼해야 돼요."
"그게 무슨 소리야? 결혼하시면 되잖아."
"저 지금 이렇게 사는 거 형이 알면 분명 결혼 늦출 거에요."
"..."
"그런 성격이에요. 우리 형이."
이놈도 기댈 사람이 있으면 기댔을 것이다.
원래 행복이라는 게 모르면 영영 모르고 지나가지만, 아는 이상 그 빈자리를 다른 거로 채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나마 세계를 상대로 하는 경쟁이라도 있으면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겠지만.
"대표님한테 많이 혼났어?"
"그냥. 뭐. 감독님한테는 예전에도 많이 혼나서 별로 신경 안써요."
"마하야, 상택이랑 전화했었는데."
"상택이 형이요? 잘 지낸대요? 내 전화 안 받던데."
"...맞다. 너 그 소식 들었냐? 유진 볼트가 이번에 은메달 땄다더라."
"그래요? 뭐지? 아 ,세계 선수권 했구나."
"어. 음. 이번에 자메이카 팀이 강세였다고..."
"후우~ 아 뜨거라. 그 나라 원래 잘 했잖아요. 새삼스레 뭘."
무슨 말을 해도 시큰둥하다.
기록 보유자로서 한번 결과를 궁금해 볼 법도 한데...
"...한국 대표 팀 선수들한텐 연락해봤어?"
"걔들도 잘 했겠죠. 다 열심히 하니까."
"..."
매정? 아니다.
그럼 무관심?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마음이 안 가는 것 같다.
이놈은 지금 같이 땀 흘린 동료들한테도 관심을 주지 못할 정도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
"이러지 말고, 다시 운동을 시작해 보는 건 어떠냐."
"형. 우리 일 많이 떨어졌어요?"
"그게 무슨 뜻이야...?"
"그냥. 광고 재계약 시즌이잖아요. 일이 그렇게 많이 끊어졌나 해서요."
"..."
"우리도 봉사 활동 같은 거라도 가 볼까요? 보통 유명해지면 그런 거 많이 하던데. 아직 병원 같은 데 그렇게 가 본 적 없으니까."
"...운동은 다시 하기 싫어?"
"귀찮아요. 한다고 뭐 좋을 것도 없는 거..."
역시... 지금 이 모습이 힘들어 하는 게 아니라 참고 있는 거였어.
이대로는 안 된다...
"병원 한번 가 봐요. 아픈 애들이랑 사진 찍고 이러면 이미지 좋아지지 않을까?"
"그런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빨리 마음부터 추슬러."
"네."
이놈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대체 무엇을 해야 마하의 열정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나보다 더 성공하고, 나보다 더 많은 경험과 능력을 가진 놈을 내가 어떻게 이끌어 줄 수 있나.
상택이 말대로 지금이라도 임용을 준비할까 싶지만...
"아니야. 하나도 못 챙기는데. 어떻게 선생을..."
교생 실습을 나갔을 때 봤는데, 학교엔 구마하 같은 애들이 수십 명씩 있었다.
직업을 바꿔도 지금은 아니다.
더 이상은 부끄럽고 싶지 않다.
피하고 싶지 않다.
다만, 방법을 모를 뿐.
"후우, 뭔가 있을 건데. 마하 저놈을 어떻게 할 방법이..."
그 순간, 양민구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래. 맞다. 형님이 계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