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를 믿는다 (6)
"어디 가는데요?"
"가 보면 알어."
"고양? 우리 일산 가요?"
"그냥 가면 안다고."
"민구 형, 그러지 말고 정발산 가서 술이나 한잔해요. 거기 분위기 좋은 데 많던데."
구마윤을 만나고 서울로 돌아온 양민구.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의 가슴이 진정되질 않는다.
매니저란 직업을 택한 이상 양민구도 자신의 손으로 스타를 만들어 내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헌데 구마윤이 말하길, 동생 마하를 언급하며 여기서 더 올라갈 곳이 있단다.
아시안 게임을 빼더라도,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에서 얻어낸 금메달이 여섯 개였다. 심지어 하나는 동계 올림픽이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의 이야기다.
이놈은 이미 천재의 반열을 넘어선 스포츠 영웅인데...
그런데 더 위가 있다면...
그 세계는 대체...
"어? 자유로 가려면 저쪽으로 빠져야 하는데."
"일산 가는 거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어디 가는데요?"
"...근데, 넌 운동하러 간다는 놈이 옷이 그게 뭐냐?"
"아. 츄리닝이랑 신발이 어딨는지 몰라서..."
"뭔 소리야. 아직도 짐 정리 안 했어?"
"뭐... 그냥..."
"어이구, 이 새끼..."
더 위가 있다고? 대체 그 세계는 뭐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던 구마윤.
그것은 분명 복싱...
지금 마하를 데려가는 곳도 복싱장.
만약, 마하가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오른다면...
"..."
"노을 지는 호수 공원 보면서 맥주 한 잔 딱 하면 좋은데."
그래, 가능성은 있어.
육상도 그렇고, 스키도 그랬다.
이 녀석의 피지컬에 운동 신경이라면 당장은 몰라도 시간을 들여 훈련한다면...
상상의 날개가 바람을 타고 번져간다.
이미 세계 챔피언인 구마하가 새로운 종목에 도전자의 자격으로 링에 오른다면...
세상이 보여 줄 반응은, 그 후에 펼쳐질 결과는.
갑자기 양민구의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정신을 바로 잡았다.
"왜 그래요?"
"후우, 후우우..."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을 처먹다 못해 볶음밥을 주문하고 있어...
양민구는 재차 침을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복싱이 그렇게 쉬운 종목도 아니고...
무엇보다 사람이 어떻게...
한 종목의 최정상에 오르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미 두 종목.
그것도 육상에서 단거리와 중거리를 나누면 벌써 세 종목...
"그렇지. 사람이 무슨..."
"뭐가요?"
"아니라고."
뭐든 이놈의 정신상태를 고쳐 놓는 게 우선이다.
열심히 안 살아도 좋아. 더 위대한 스타가 되지 않아도 좋다.
적어도 내 책임 안에 있는 한, 방종한 생활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어제도 술 마셨지?"
"뭐... 조금."
"조금이라는 놈이 입만 열면 소주 냄새가 진동을 하냐."
"아이, 갑자기 왜 그래요."
"야, 인마. 진짜 왜 이러고 사는 거야. 어! 넌 인생이 아깝지도 않어?"
양민구는 형, 구마윤을 만나고 온 사실을 알려 주었다.
구마윤 이야기가 나오자 내내 시큰둥하던 마하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서린다.
"우... 우리 형이요?"
"그래."
"성남 갔다 오셨어요?"
"그래! 인마!!"
"저... 이러고 있다고 얘기 안 했죠...?"
"안 하긴 뭘 안 해! 다 했어!!"
"아, 씨..."
"아 씨? 너 지금 아 씨라고 했냐?"
"아니... 그게 아니라... 형한테 그런 얘길 왜 해요..."
"형님이 그러시더라. 한 대 줘패도 괜찮다고."
"그래서... 지금 저 때리러 가는 거예요?"
"그래, 30분 몸 풀고 바로 스파링 들어갈 거야. 각오하고 있어."
"스파링요?"
형이란 존재가 두렵긴 한가 보구나. 흐리멍덩하던 눈빛에 힘이 생기네.
역시 이놈은 아직 어려.
나도 많은 나이 아니지만, 마하는 정신적으로 미숙한 면이 있다.
단지 길을 잃었을 뿐이야.
눈앞에 과제가 생긴다면 금방 괜찮아질 거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악이 되어 줄 수 있어. 내가 생각하는 매니지먼트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아끼는 만큼 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양민구였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금방 서울을 벗어나 고양시에 접어들고.
멀지 않아 최두필 세계체육관에 닿았다.
* * *
"진짜 복싱장이네..."
"들어가서 준비해. 몸 풀고 바로 시작할 거야."
"아니, 이건 또 무슨..."
난데없이 운동을 가자더니 민구 형이 복싱장으로 데리고 왔다.
스파링이라... 형을 만났다더니 진짜 그냥 줘팰 마음으로 끌고 왔구나.
"야, 뭐해?"
"잠깐만요. 전화 좀."
"하하! 뭐야? 갑자기 쫄았냐?"
쫄긴. 아무렴, 내가 누군데.
맞는 게 겁나는 게 아니다.
몸이 있고 근력이 있다.
민구 형이 아무리 그래 봐야 나한테는 안 되지.
단지, 갑자기 이게 뭔 지랄인지... 번거로운 과정이 짜증 날 뿐이었다.
그래서 바로 형한테 전화를 걸었다.
"왜 안 받어..."
한참 저녁 장사 시간인가 통화음이 연결되지 않는다.
가게로 전화를 거니 정석이가 받길래 형 좀 바꾸라고 지랄을 했다.
"미친놈, 왜 난린데? 지금 바뻐, 새끼야."
"아 씨발!! 빨리 바꿔 보라고."
"병신. 아 맞다. 아까 니네 선배라는 사람 왔었는데."
"알았으니까 형이나 좀 바꿔 보라고!!"
시간은 걸렸지만 마침내 형과 통화가 연결됐다.
"어. 그래. 왜?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 아니라, 형! 뭐야 지금. 진짜 뭐하는 건데...?"
"이 자식 목소리에 왜 이렇게 불만이 많아. 선배님은 만났어?"
민구 형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형이 진짜로 쥐어패도 된다는 허락을 해 줬단다.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맞아야 하는데??"
"믿고 따라 그냥. 널 진심으로 위해 주는 분이시잖아."
"뭔 소리야. 그런 억지가 어딨어!"
"마하야, 그분은 지금 다른 누구보다 너한테 신의를 가지고 계셔. 뭘 하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믿고 따라가."
"내 말 안 들었어? 나 패러 왔다니까?"
"그럼 그냥 맞든가."
"후우..."
본인이 손을 못 쓰니 이제 다른 사람을 부린다?
허어... 이래서 구마윤 본성은 진짜 아는 사람만 안다니까...
"아니, 지금 저 형 완전 감정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그럼 그 감정 다 받아들여야지."
"하하. 와 진짜, 자기 일 아니라고..."
"감정은 그냥 쌓였어? 니가 한심한 행동을 했으니까 그렇게 된 거 아냐."
젠장, 차라리 벽에다 딜도를 박고 혼자 쑤시는 게 낫지. 대화가 안 돼 대화가...
"그럼 나도 때린다?"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뭐야? 내가 못 할 거 같애?"
"하하하! 마하야. 자만하지 마."
"자만이라고? 형, 나도 강해. 나도 힘이 있는 사람이야."
"그래. 그러니까 가서 맞서 보라고."
해볼 수 있는 만큼 어디 한번 해 보란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해 온 과정이 있는데. 힘이나 몸이나. 저 민구 형 하나를 못 이긴다고?
"너, 그분이 너보다 작다고 만만하게 보는 거 같은데. 여기가 무림이었으면 진짜 크게 혼나."
"저기, 형! 여긴 무림이 아니라 현대 대한민국이라니까!!"
현대든 과거든, 무림이든 경기 고양시든 형은 상관이 없단다.
진짜 강한 사람은 힘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라면서 이렇게라도 내가 방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허. 허허. 허허허. 오케이 알았어. 가 봐 한번."
자존심이 긁히는 기분이었다.
안다. 나도 인생 끝장난 놈같이 살긴 했지만, 나라고 뭐 그러고 싶어 그랬냐고.
나도 힘들어. 진짜로.
실제로 머릿속이 계속 시끄러웠다.
술을 먹든 여자를 꼬시든, 뭔가 하지 않으면 정신이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상태였다.
혜정이와의 이별. 친구들의 입대. 그리고 형의 결혼 등등.
어떻게 해도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지니 마음이 흔들리는 까닭이다.
다들 남의 속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말만...
"좋아, 씨발. 붙어 봐. 내가 싸움을 안 하지, 못 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첫발을 내디딘 세계체육관.
계단을 타고 오르는데 흐릿한 땀 냄새가 어딘가 마음속 정체되어 있던 곳을 건드리는 기분이다.
"뭐... 헬스장이고 어디고 냄새는 다 비슷하니까..."
계단을 오를수록 땀 냄새는 진해졌다.
이상하게 그게 날뛰던 감정을 진정시켜 주는 기분이다.
체육관 앞 복도. 허름한 신발장에 가죽이 다 갈라진 운동화들과 오래된 장비들이 즐비해 있다.
벽면엔 햇빛에 색이 바랜 시합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글러브를 끼고 있는 사진이 아니었다면 현상 수배 포스터와 비교해도 크게 다를 게 없을 정도로 인상들이 살벌하다.
"복싱이라..."
아무튼,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가 본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몇 명 보이는 가운데, 저 멀리 민구 형과 같이 있는 남성분들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진짜로!?"
"어어!! 정말 왔어요!! 관장님!!"
"어디어디!! 우와!!! 아니 이게 누구야!!"
먼저 들어와 민구 형이 상황을 설명한 것 같다.
땅딸막하면서 단단해 보이는 아저씨 두 분이 엄청 호들갑을 떨며 다가와 인사를 해 주셨다.
"이야~~ 하하하! 진짜잖아!!"
"아, 네. 안녕하세요..."
"우와. 내가 이런 인물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반가워! 나 여기 관장 최두필이라고 해!!"
그 바람에 운동하던 분들도 멈춰 고개를 돌리시고 다들 해맑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주신다.
뭐, 사람들은 그렇다 치지만...
근데 이 아저씨는 대체...
무슨 기가 이렇게...
진짜 일반인이 맞나...?
"관장님이시라고요?"
"그래, 그래! 엄밀히 따지면 자네는 내 후배가 되니까 편안하게 생각하라고"
설명을 듣고 보니 이 아저씨 몸에 이글거리는 기운이 조금 이해가 된다.
전직 국가 대표였다는데, 훈련 시간이 겹치지 않아 자주는 못봤지만, 태릉에 있을 때도 이렇게 작은 체구에 누구보다 강한 투기를 뿜어내던 사람들을 본 기억이 있다.
그게 복싱 선수였구나.
"어어..."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이런 데 처음 와서 그런가?"
"아니요. 저 그냥 민구 형이 끌고 와서..."
"맞다. 둘이 한 판 붙기로 했다면서?"
"어이, 민구야. 너 진짜 할 거냐?"
"물론이죠!!"
민구 형은 그새 옷을 땀복으로 갈아입고 줄넘기를 뛰며 말했다.
"준비해라. 30분이다. 봐주는 거 없어."
"..."
"뭐야? 왜 그래? 둘이 싸웠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요..."
"근데, 이런 거 해도 돼? 귀한 몸인데."
"이분은...?"
관장님 말고 다른 아저씨는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정 사장님이란다.
여기도 일반인에선 쉽게 보기 어려운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헬스장에도 아저씨들은 많았지만, 복싱이란 운동은 대체...
"훅. 그 귀한 몸 함부로 굴리길래. 혼 좀 내 주려고 하는 거니까. 두 분도 다른 말씀 하지 마세요."
민구 형 이야기에 정 사장님과 관장님이란 분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니. 근데 초보자를 상대로 다짜고짜 스파링은 조금... 관장님이 말려 보세요."
정 사장님 이야기에 최두필 관장님이 씩 웃으며 말씀하신다.
"그런 게 어딨나. 남자가 도전장을 받았는데. 안 그래?"
최 관장님이 주먹을 쥐어 어깨를 툭 치며 말씀하셨다.
"무엇보다 세계 챔피언이잖아. 여기서 피하면 부끄러운 일이지."
"..."
"왜? 아니면 진짜로 내가 말려 줘?"
뭐지? 여기는 내가 알던 운동 세계와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투쟁과 도전을 마치 오락같이 느끼는 사람들.
격투기를 하는 선수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아니요. 저도 괜찮아요."
"그렇지! 남자라면 그렇게 나와야지."
민구 형도 줄넘기를 뛰다 슥 고개를 들며 도발하듯 웃어 보인다.
"몸 안 푸냐?"
"풀어야죠."
"자식. 30분이다."
"하하하! 뭔지는 몰라도, 한번 재밌게들 해 봐! 내가 심판 봐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