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32화 (332/401)

나는 스스로를 믿는다 (7)

"붕대를 이렇게 감는 거였구나."

"그렇지. 멋있지? 간지나지! 막 바람의 파이터 같고 그러잖아?

으하하하!"

아직도 왜 복싱장에 끌려와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관장님 말씀대로 선수들같이 붕대를 감는 과정은 실제로 꽤 마음에 들었다.

"손목 돌아갈까 봐 하는 건가 봐요."

"그것도 있고. 글러브 낄 때도 공간이 남지 않게 딱 잡아 주는 역할도 있고. 정권도 보호하고."

"뭔가 주먹을 쓰는데 주먹을 보호한다라. 아이러니하네요."

"원래 권투가 철학적이거든. 으하하, 아하하하!"

말의 시작과 끝 어디든 호탕한 웃음이 들어가는 최두필 관장님을 향해 옆에서 지켜보시던 정 사장님이 한마디 하신다.

"아이고. 연애해요?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어."

"어이, 정 씨. 운동 끝났으면 그만 장사하러 가야지."

"어차피 손님도 몇 없는 거, 조금 더 있다가도 돼요."

"그럼 조용히 있든가."

정 사장님이 눈빛을 나누며 웃어 주신다.

사업하는 분이라더니, 관장님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나에게 관심이 있으셨다.

"방송 보니까 형이 식당 한다면서. 용인이랬나?"

"성남이요. 용인이랑 바로 붙어 있긴 해요."

"으음, 거긴 경기가 어때요?"

"잘 되는 거 같아요."

"동생 덕을 본 건가?"

"아니요. 형네는 저 운동하기 전에도 손님 많은 편이었어요."

"하긴, 사장님이 멋지게 생기셨더만."

"하하... 고맙습니다."

정 사장님.

평범하게 대화를 할수록, 몸에서 숨길 수 없는 거대한 투기가 경이롭다.

대체 일반인이 어떻게 저런 힘을 가지게 됐을까...

"어린 나이에 시작했다더니 노하우가 다르긴 하겠지."

"저, 사장님?"

"음? 왜요?"

"운동 얼마나 하셨어요?"

"이 친구 오래됐지. 한 10년 했다 그랬나?"

"더 되죠. 창업하기 전 직장 다닐 때도 했었으니까."

그냥 어릴 때부터 권투를 좋아했고, 나이가 들어서도 자연히 취미가 되었다고 하신다.

어쩐지. 경력이...

내공이 꼭 전국 체전에서 보는 선수들 같다.

관장님은 딱 봐도 강한 인상이지만, 이 아저씨는 외형만 봐선 절대 그렇지 않은데. 진짜 이런 분이 그냥 동네 아저씨인줄 알고 덤비다간 뒤지게 처맞는 그런 어른이겠지.

"오케이. 됐다. 어때? 주먹 한번 쥐어 봐."

"확실히 뭔가 손목이 안정되게 잡아 주는 느낌이 있는 것 같네요."

"이게 대충하는 거 같아 보여도, 제대로 감아 줘야 하거든. 잘 모를 거 같으면 또 물어보고. 그럼 내가 또 해 줄 테니까."

"하이고 듣자 듣자 하니, 회원들은 신경도 안 쓰면서..."

"거, 정 사장은 왜 자꾸 옆에서 초를 치고 그래... 장사하러 안가?!"

어쨌든 손목에 붕대도 감았으니 샌드백을 때리나 했는데, 복싱의 시작은 줄넘기란다.

"아. 줄넘기."

"안 가져왔지? 보자. 마하는 키가 있어서 맞는 게 있으려나."

관장님이 사무실에서 긴 줄넘기 하나를 가져와 건네주시는데, 갑자기 땡! 하는 종소리가 체육관 전체를 가득 울렸다.

"음? 방금 뭐지?"

"마하야, 뭐해? 줄넘기 받어."

"아, 네. 고맙습니다."

뭔가 존나 단순 무식한 종소리였는데. 진짜 낯선 환경이다 보니 하나하나가 신기한 거 투성이구나.

아무튼, 줄넘기로 몸을 푼다니, 아마도 좁은 체육관의 한계가 있어 반경이 그리 넓지 않은 운동이 발달한 것 같다.

별로 해본 적은 없지만, 분명 이런 느낌으로.

탁탁탁.

휘리릭 줄을 넘기며 점프를 시작하자 관장님이 큰 소리로 호응해 주셨다.

"오~오! 잘 뛰는데?"

"아. 제발요, 관장님. 그냥 흔한 줄넘기잖아요."

"아니야. 아니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면 딱 알지."

행동거지 하나하나 리액션이 따라오니, 뭔가 우쭐한 기분이 들어 더 열심히 하게 됐다.

"크으~ 저 팔 봐라. 마하야. 잠깐만 멈춰 봐."

"네? 아. 네."

최두필 관장님의 팬심은 그냥 옆에서 칭찬해 주는 걸로 채워지지 않는가 직접 다가오셔서 몸 여기저기를 만져 보신다.

"어이고, 어깨가. 배도 그냥... 하하하! 이야~!!"

"관장님. 그건 진짜 실례죠. 마하 씨도 싫으면 그만하라고 해."

"괜찮아요. 근데 제가 요즘 운동을 안 해서, 몸이 예전 같진 않네요."

"그러니까. 한창때면 어마어마했겠어."

이런 몸은 어떻게 가지게 됐냐 물으시길래, 육상만 했을 땐 마른 체형이었고 스키를 타면서 체중을 조금 불렸고, 그리고 최근들어선.

"조금 술배가 있는 거 같기도 하네요... 하하!"

"하하하! 그렇지. 술 마시면 몸이 불지. 그래서 몇 킬로 정도 나가나?"

"100은 안 되는 거 같던데."

"이야. 100 가까운데 이런 몸이라니. 체형이 완전히 운동하라고 태어난 몸이구먼."

주물주물 너스레를 떨며 몸을 만져 보시는데, 꼭 육상 시작하기 전 한상률 감독님이 여기저기 눌러 보는 그런 기분이었다.

"관장님, 86년 대표 팀이셨다고요?"

"어. 그랬었지."

"그럼 이두희 감독님 아세요? 그분도 86 육상 대표 선수셨는데."

"알지, 그럼. 나랑 친해."

"하하하. 그러세요."

모르는 거 같은데? 진짜 국가 대표는 맞았던 건가?

나중에 집에 가서 찾아봐야지. 86 복싱 대표 최두필이라.

"아무튼, 그래그래! 다시 몸 풀자. 운동해 운동!"

"네."

근데, 줄넘기하면서 느끼는데, 이게 과연 운동이 되는 걸까? 이런 운동으로 몸에 열이 나려나?

복싱. 모를 땐 엄청 힘든 운동인 줄 알았는데, 해 보니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땡!

"..."

"오케이. 오케이. 쉬고."

"저, 관장님."

"음? 어어. 그래. 왜?"

"아까부터 계속 저 종소리는 뭔가요?"

"아. 저거?"

관장님이 벽에 붙은 원형의 종 기계를 가리키며 말씀해 주신다.

"복싱은 한 라운드가 3분으로 진행되거든. 그리고 1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고. 그거야, 그거."

"아아~ 그럼 라운드에 맞춰서."

"그렇지. 역시 하나를 아니 열을 깨우치는구만."

이제는 정 사장님을 떠나 다른 회원들까지도 관장님한테 뭐라고 하기 시작했다.

"아, 진짜 적당히 좀 해요."

"그러니까. 빠순이야, 뭐야. 뭐만 하면 다 잘한대."

"시끄러!!"

아무튼, 복싱은 종소리에 맞춰 운동 시간이 정해진단다.

주변을 보니 진짜로 다들 쉬고 있다.

훅훅 샌드백 두드리거나 개인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슬렁슬렁몸을 쉬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민구 형도 혼자 윗몸 일으키기를 하다 호흡을 고른다.

운동 시간이 정해져 있다니, 정말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구나.

이렇게 30분간 몸을 풀라고?

아니, 3분 짤막짤막 뛰는 게 그게 운동이 되나?

땡!

"됐어. 이제 뛰어."

"네."

"천천히 해. 천천히. 허허허~!"

다시 줄넘기를 뛰면서 주변을 곁눈질해 봤다.

저렇게 거울 보면서 혼자 하는 건 섀도복싱이고, 계속 같은 자세만 반복하면서 앞뒤로 움직이는 분들도 있고, 여전히 샌드백을 두드리는 정 사장님이나 나같이 줄넘기를 넘는 아저씨, 윗몸 일으키기를 끝내고 한 손으로 펀치 볼 같은 걸 때리는 민구 형.

"..."

같은 개인 종목이라지만, 육상이나 스키는 일단 준비 운동은 다 같이 하고 프로그램도 팀으로 움직이는데. 여기는 뭐 제각각이니.

나에게 복싱의 첫인상은 뭔가 체계가 없다는 식으로 다가온다.

땡!

무엇보다 이 종소리.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나 싶을 정도로 벌써 한 라운드가 끝나버리면 사람들은 멈춰 숨을 고르거나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한테는 대체 언제 어떻게 운동하라는 건지...

"마하야, 종소리가 신경 쓰여?"

"아니요. 그냥, 조금 운동 되는가 싶으면 멈추고 또 멈추고 이러니까."

"그래? 그럼 그냥 끌까?"

끈다는 소리에 관장님은 체육관 사람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아, 좀 그만 해요. 진짜."

"정말 아까부터 쪽팔리게..."

"시끄럽다고!!"

3분이란 시간이 생각보다 엄청 짧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다들 100m를 9초로 달리는 친구가 겨우 3분 가지고 그러냐고 한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육상은 9초 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하는데요."

"우리도 그래. 그러니까 할 때 바짝 집중해야 하는 거야."

"집중이라고요."

"그렇지. 봐 봐. 저 친구는 벌써 준비가 된 거 같은데."

한 아저씨가 턱 끝으로 민구 형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까지도 뽀송뽀송하던 사람이 언제 저렇게 땀을 뺐나 싶을 정도로 머리가 흠뻑 젖어 있었다.

"스파링한다면서, 진짜 할 거야?"

"네, 해야죠."

"다칠 건데?"

"괜찮아요. 뭐."

아저씨들과 1분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종소리가 울리자 관장님이 훠이훠이 주변을 치워 주신다.

"신경들 끄고 가서 자기 운동들이나 해."

"아, 진심으로 서운해서 체육관 옮기든가 해야지..."

"그러니까. 자꾸 이러니까 나도 구마하 아니라, 저 친구 응원하고 싶어지네."

주변에서 그러든 말든 관장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대신, 사람들과 비슷한 걸 물어보셨다.

"근데, 나도 등 떠밀고 이런 거 묻기 좀 그런데 말이야. 자네 싸움해 봤어?"

"네? 아니요."

"근데, 스파링이 되겠어?"

누굴 때려 본 적은 없지만, 맞는 데는 자신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자신까지 있어? 언제 누구한테 뒤지게 맞아 본 적이 있나?"

"하하하! 우리 형이요. 생긴 건 그렇게 보여도 진짜 인간이...

저 어릴 때 엄청 맞고 컸어요."

"흐음~ 그렇군. 다행이네."

"왜요?"

"뭐 어쨌든 자네 같은 사람이 우리 체육관에 와서 다쳤다고 하면 좀 걱정도 들고 하니까."

이번엔 반대로 내가 이해가 안 되어 물었다.

"저, 관장님."

"어, 그래. 왜?"

"관장님이 보시기에도 제가 민구 형한테 안 될 거 같으세요?"

"하하하... 아니. 그러니까 자네는 복싱이 처음이지만, 민구 저 친구는 우리 체육관 다닌 것만 3년인가 그런데."

"..."

"초심자가 어떻게 상대가 되나."

이쯤 되니 나도 기분이 꿈틀대기 시작하는구나.

자존심 좀 지켜야겠네.

"뭐, 어쨌든 지금 열심히 땀 빼 둬. 알았지?"

"네."

후우, 땀을 빼라고 한들...

땡.

이 종소리, 그리고 이 줄넘기. 이런 걸로 무슨 운동이 된다고...

어느 정도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따라온 것도 있었다.

운동을 시작하면 머릿속 시끄럽게 하는 소리가 잠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결과는 똑같았다.

줄넘기를 아무리 뛰어도 온갖 부정적이고 후회스러운 순간들이 잊히질 않는다.

혜정이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대체 지금 나는 뭘 하는 건지...

땡!!

그럭저럭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링에 올랐다.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민구 형과 달리 내 몸은 이마에 땀 한 방울 나지 않고 있었다.

"후유. 준비됐냐?"

"네."

"오케이. 가 보자."

긴장 별로... 단지 누굴 때리는 걸 크게 좋아하지 않을 뿐.

"민구 형."

"응?"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 하세요."

"하하하! 빨리 준비나 해."

민구 형한텐 정 사장님과 다른 회원들이 붙고, 나는 최두필 관장님이 붙어서 서포트를 해 주셨다.

땀 냄새 진하게 풍기는 헤드기어를 쓰고 꾸역꾸역 글러브를 주먹에 끼웠다.

마우스피스도 하나 입에 앙다물어 본다.

"어때? 불편하지 않지?"

"네. 그런데요, 관장님. 입은 알겠는데, 머리 이건 그냥 벗으면 안 돼요?"

"안돼. 다쳐."

"..."

손에 붕대도 감았고, 물렁물렁한 글러브도 끼고 있는데, 다친다고? 이해가 잘 안 되는데.

혼자 주먹을 움켜쥐고 있으니 관장님이 마음을 읽으시는가 등을 두드리며 말씀하신다.

"하하! 해 봐. 해 보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오케이. 가! 고고!!"

링 정중앙으로 걸어가 민구 형과 마주 보고 섰다.

"이렇게 보니까 니가 크긴 크구나."

"진짜 안 멈추실 거죠? 그럼 저도 형 때려요."

"그래. 서로 봐주는 거 없이 가자."

다음 종소리에 맞춰 시합이 시작된다.

주변에선 1라운드만 뛰라는데, 내가 괜찮다고 아마추어 룰 3라 운드를 받아들였다.

도합 겨우 9분.

9분 뛰는 게 뭐 어렵다고.

땡!

후우, 아무튼, 여기까지 온 거.

가볍게 운동 한 번 하고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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